2023년 마지막 분기 결산2, 서책사: 『인덱스』, 『18세기의 세책사』

Reading 2024. 1. 2. 01:12

2023년 4/4분기 결산 두 번째 분야는 책과 출판, 장르의 역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직접적인 작업물이 아닌, 추천사 및 토론으로 마주한 두 권의 책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다.

 

1. 데니스 덩컨, 『인덱스: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색인의 역사』 (배동근 역, 아르테, 2023) [원저는 Dennis Duncan, Index, A History of the: A Bookish Adventure from Medieval Manuscripts to the Digital Age,  W. W. Norton & Company, 2022].

 

나는 『인덱스』에 이렇게 추천사를 썼다: "『인덱스』는 깊이와 박식함, 재치를 아울러 갖춘 책이다. 저자는 고대 로마에서 오늘날 구글 검색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헌과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색인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하고 정교화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색인을 둘러싼 흥미롭고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을 읽어 가면서 독자들은 대량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지식의 연구자들은 물론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교양 독자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추천사에서 요약하고 있듯, 이 책은 우리가 보통 "찾아보기", "색인"으로 부르는 출판 장치 혹은 글쓰기 장르의 역사를 훑어본다. 색인의 탄생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대중독자와 연구자 모두 읽을 수 있을만큼) 재밌게 풀어가는 여정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이것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의 역사는 인간 사회가 생산하는 정보의 양이 인간(들)의 시간으로 감당할 수 없을만큼 폭증하는 과정이었으며, 색인은 이러한 난점에 대응하는 일종의 2차적 정보였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성찰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대신 실제로 색인을 작성하는 이들이 어떤 문제와 마주쳤고 어떤 해법을 모색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좀 더 진지한 독자들에게도 잠시 멈추어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보통 한국에서 독서와 출판의 역사에 관심있는 이들이 먼저 살펴보는 책은 로제 샤르티에와 굴리엘모 카발로가 엮은 『읽는다는 것의 역사』겠지만(만약 18세기 유럽 전공자라면 로버트 단턴의 책이나, 『사생활의 역사』 3권의 3장을 포함해 '사생활의 발견 테제'를 따르는 여러 논문들도 볼 수 있겠다), 최근 한국에도 그와 조금 다른 '영국적인' 방향에서 출판과 도서-장치의 역사를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는 성과물들이 점차 번역되고 있다. 아쉽게도 현재 절판되었지만 앤서니 그래프턴의 『각주의 역사』 (김지혜 역, 테오리아, 2016)는 사학사나 학술사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한번쯤은 꼭 읽을 가치가 있다(그래프턴이 대니얼 로젠버그와 공저로 참여한 『시간 지도의 탄생: 고대에서 현대까지 연표의 진화와 역사』도 매우 공들여 번역된 작업인데 소수의 독자만을 만난 것 같아 아쉽다).

 

개인적으로 2022년에 번역출간된 가장 흥미로운 책 중 한 권으로 꼽는--번역 제목 때문에 외면받는 것 같으나 번역 퀄리티도 좋은--앤드루 페티그리의 『루터, 브랜드가 되다: 역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의 글쓰기, 인쇄, 출판 전략』 (김선영 역, 이른비, 2022)은 꼭 루터와 종교개혁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해도 흥미롭게 읽어볼 구석이 많다. 초기 근대 서책사 연구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 쓴 책답게, 인쇄와 출판의 세부과정을 (그리고 이를 루터가 어떤 식으로 전략적으로 활용했는지를) 자연스럽게 들여다본다. 책 표지 장식의 혁신까지 다루는 대목은 출판 편집자들도 찬찬히 살펴볼만한 부분이다. 『인덱스』가 이런 책들과 함께 더 읽히길 바란다.

 

 

2. 이민희, 『18세기의 세책사: 소설 읽기의 시작과 유행』 (문학동네, 2023).

 

다른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듯, 규장각한국학 워크숍 저작집담회에서 이 책의 토론을 맡았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거의 대중독자 입문용에 가깝게 쓰여졌다는 인상이었는데(기본적으로는 18세기 다양한 국가에서 서책대여문화가 성행하고 이후 공공도서관 등에 의해 밀려나는 과정을 훑고 있다), 실제로 이민희 선생님의 발표를 들어보니 오랜 시간에 걸쳐 막대한 자료를 직접 수집해오신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본래 원고는 현재 출판된 책의 다섯 배 가까운 분량이었다고 하니, 출판사에서는 세일즈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연구자 입장에서는 처음 원고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언젠가 온전한 원고가 연구서의 형태로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아래는 당시 발표한 토론문이다. 말미에 저자 이민희 선생님께 제기했던 몇 가지 비판적 질문은 발표-토론의 맥락에서 유의미한 것이므로 여기에 싣지 않았다.


 

먼저 이민희 선생님의 『18세기의 세책사: 소설 읽기의 시작과 유행』에 토론자로 참여할 수 있어 영광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오늘 발표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18세기의 세책사』는 소설텍스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떤 사람들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었는지를 파고든 저자의 오랜 관심사를 압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하여 기존 한국 학계에 비견될 작업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넓은 지리적인 시야를 자랑하는 책입니다. 이러한 서책사(book history)의 경우, 근래 한국문학계에서 주목할만한 작업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만, 연구자의 노력이 많이 드는 데 비해 유의미한 성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비교적 오래 걸리다보니 아직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의 함의가 교양독자층은 물론 학계에서도 충분히 널리 퍼졌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의 또 다른 가치 하나를 언급하고 싶은데요, 바로 비전문가 독자도 어려움 없이 읽어나갈 수 있도록 서술의 밀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열악한 인문출판시장에서 이처럼 전공자와 비전공자 모두를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책이 지니는 의미는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다른 분들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처음 토론 요청을 받았을 때 고민이 됐습니다. 먼저 제가 어떤 공부를 했는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18세기 영국의 지성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고, 작년 여름 18세기 영국의 초기 여성주의 담론과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즉 저는 스스로를 영문학과 지성사 연구 두 영역에 걸쳐 공부한 연구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또 부분적으로는 새뮤얼 리처드슨 본인이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인쇄공 장인(master printer)으로서 당대 출판시장의 중요한 행위자이기도 했던 만큼, 자연스럽게 서책사 연구를 어느 정도 참조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책사에 대한 저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2·3차 문헌에 기대는 수준이고, 더욱이 18세기 조선에는 아예 문외한이니만큼 제가 이민희 선생님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는 아주 적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차피 저를 섭외하신 어떤 선생님께서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셨겠죠. 따라서 지금의 토론에서 저는 크게 두 가지 사항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논의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18세기 영소설사 연구의 맥락을 조금 더 풀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8세기의 세책사』의 시간적 지평 너머에 있는 시공간, 즉 현대 한국의 세책문화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경험입니다.

 

먼저 20세기 후반까지 18세기 책의 역사, 소설사, 문화사 연구자들이 암암리에 공유해온 몇 가지 큰 키워드를 나열해보겠습니다.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세속화과정, 상업사회의 도래, 대중독자 및 중간계급의 대두, 개인과 사생활의 등장, 여성의 등장 등등. 서양사나 영소설사에 어느 정도 익숙하신 분이라면 여기서 곧바로 로제 샤르티에나 이언 와트 같은 이름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의 지평을 조금 더 길게 잡는다면, 18세기를 이렇게 규정하는 관점은 최소한 19세기 중후반부터 유럽에서 구축되어 온 지배적인 근대사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근대화는 본질적으로 상업과 부르주아계급, 개인주의 등의 대두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소설을 중간계급의 상승과 연결하는 오랜 관점이 기본적으로 19세기적 근대사관의 파생물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루카치의 1916년 작 『소설의 이론』이나 와트의 1957년 작 『소설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같은 전제를 공유하는 셈입니다(실제로 와트는 직접적으로 루카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샤르티에의 “음독에서 묵독으로” 테제를 비롯해 18세기에서 “사생활의 발명”을 읽어낸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 이래 독서공중과 문학제도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맑스주의 문화사가들, 그리고 와트 테제를 비판하면서도 사실상 소설 장르와 “근대적 개인”의 연결이라는 전제는 그대로 계승했던 20세기 후반까지의 영소설 연구자들 또한 유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저는 “근대적 개인의 등장” 테제나, 18세기 영국에서 부르주아계급이 대두했다는 식의―오늘날 영국사가들은 더는 그대로 믿지 않는―관점에 상당히 회의적이긴 하지만, 위와 같은 거대서사에 어느 정도 설명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무엇보다 책과 독서, 출판, 장르의 역사를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데서 그 기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2000년대 이후 조금 더 역사적인 접근에 입각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그림이 다소 복잡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예컨대 독서 행태의 변화는 결코 단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경우, 한편으로 물론 묵독의 실천이 퍼지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애비게일 윌리엄스Abigail Williams의 논지를 따르자면[Abigail Williams, The Social Life of Books: Reading Together in the Eighteenth-Century Home (New Haven: Yale UP, 2017)]) 반대로 사회적 교류의 확산과 함께 낭독의 문화 또한 새롭게 유행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18세기 중반의 스케치를 하나 예로 들어봅시다.

 

 

 

토론문에 실린 그림은 1750년대 조셉 하이모어(Joseph Highmore)의 작품으로, “리처드슨 씨가 1751년 찰스 그랜디슨 경의 수고본을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있다. 장소는 노스 엔드에 있는 그의 저택의 Grotto이며, 이 그림은 현장에서 하이모어 양이 그린 드로잉에 기초하여 제작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초상화를 보신 적이 있다면 눈치채시겠지만, 왼편에 터번 비슷한 걸 쓰고 있는 사람이 바로 『파멜라』와 『클라리사』의 저자로 알려진 바로 그 새뮤얼 리처드슨입니다. 즉 그 리처드슨이 자신의 마지막 출간소설 『찰스 그랜디슨 경』의 출간 전 원고를 친구들을 모아놓고 낭송하고 있는 광경을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이 그려놓은 광경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 18세기는 사적인 공간에 들어간 개인의 묵독 못지않게 가족, 친구, 지인이 함께 모여 소리내어 글을 읽으며 즐기는, 사회적인 낭독 또한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순환도서관(circulating library), 혹은 이민희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세책점과 소설의 관계도 조금 더 복잡하게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많은 순환도서관이 대중적인 소설 장르를 주요하게 취급했고, 또 그러한 경로를 통해 많은 독자가 경제적 부담을 덜 느끼며 소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업체마다 취급하는 도서종목이 다르기도 했다는 점이나, 순환도서관 외에 북클럽과 같이 도서와 독자를 연결하는 다른 경로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순환도서관과 소설의 관계는 당대 출판-독서문화의 좀 더 넓은 그림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소설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소설이 근대적 개인의 장르라는 주장은, 여전히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지만, 좀 더 신중하게 또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들은 쉽게 꺼내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18세기에 소설 장르가 정확히 무엇인지 규명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 좀 더 과거의 장르인 로맨스(romance)에서 근대적 장르인 소설(novel)로 서사장르가 이행했다는 식의 낡은 통념과 달리, 리처드슨의 경우에도 novel과 romance를 명확하게 구별해서 쓰지 않고 있습니다. 디포와 리처드슨을 비롯해 종종 근대소설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작가의 경우에도, 당대에 유통된 여러 장르의 맥락에서 이들 작품을 분석해보면 이들이 고유한 장르를 새롭게 만든다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한 여러 장르를 뒤섞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사실에 부합합니다. 물론 리처드슨이 의식적으로 소설을 일종의 고급 장르로 새롭게 구축하고자 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은 상당 부분 당대의 종교-도덕적 담론 및 장르를 차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세속화나 개인의 내면 같은 테제는 적어도 리처드슨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리처드슨은 당대 잉글랜드국교회의 입장을 따라 일관되게 무신론이나 이신론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세속화의 반대편이라고 보는 게 더 맞는 이야기일 겁니다.

 

‘소설을 읽는 여성’에 대한 비판론도, 과거의 통념에서는 여성과 지식/문자문화의 연결을 비판하는 보수적인 목소리인양 이해되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로맨스의 해악에 대한 비판은 18세기 순환도서관의 유행 이전부터, 최소한 17세기 후반부터 여성교육 담론에서 일상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심지어 리처드슨도 본인 소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성의 교육을 강조하는, 당대로서는 여성의 지적 개발에 훨씬 더 호의적인 저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저작에서 로맨스나 소설의 해악을 지적하는 부분만 떼어볼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이야기인지, 또 그런 저자들이 반대로 여성에게 추천하는 책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소설 담론에 대한 논의도 한층 더 복잡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특히 1990-2000년대 도서대여점을 꽤 많이 이용한 청소년이었던 입장에서, 19세기 이후 세책문화의 지속과 변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분들은 제각기 기억이 있으시겠지만, 20세기 중후반 만화방과 대본소의 시절 이후 1990년대부터 도서대여점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심지어 출판업계에서 대여점 때문에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할 정도죠. 『18세기의 세책사』는 19세기에 들어와 공공도서관의 보급과 구매력의 상승으로 세책산업이 종말을 맞았다는 지적으로 끝을 맺습니다만, 적어도 20세기 한국에서는 꽤 다른 그림이 지속된 셈입니다. 도서대여점이 쇠퇴기에 접어든 뒤에도 2000년대 인터넷문화와 함께 퍼진 불법스캔본이나, 각종 웹소설 플랫폼, 그리고 오늘날 리디북스나 밀리의 서재 같은 전자 구독모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대여문화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도서대여점의 주력상품은 당대의 통속적인 판타지·무협소설이나 만화책이었습니다. 공공 도서관에서는 잘 들여놓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구매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독서의 수요 자체는 높은 장르죠. 바꿔말해 이런 장르 영역이 존재하는 동안, 도서대여 문화는 어느 정도 지속이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 오늘 자리에 와주신 여러 분들이 흥미로운 경험을 공유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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