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읽기: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공화주의와 노동의 덕성

Reading 2020. 12. 12. 02:17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20(Michael Sandel,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능력의 폭정: 공공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_, 2020).


1.


마이클 샌델의 화제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이하 <능력주의>)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샌델의 관련 TED 강연(https://www.ted.com/talks/michael_sandel_the_tyranny_of_merit/up-next?language=ko)에서도 그렇듯이, 대체적으로 매우 수월하게 잘 읽히는 책으로 한국어판 번역도 가끔 자잘한 실수나 잘 안 읽히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빠른 출간일정을 고려하면 큰 불만없이 읽을 수 있다. 깊이 생각해볼 만한 여러 중요한 주제를 얕지 않게 다루면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자연스럽게 활용하면서 다루는 솜씨가 무척 빼어나서,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과 철학적·사상적 욕구를 가진 독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특히 후자의 독자들에게는 쉽고 구체적인 케이스를 많이 포함시키고 있기에 '덜 철학적'으로 보이는 외관에 속지 말고 샌델의 여러 논변을 천천히 꼼꼼히 검토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를 권한다.


작년 미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명문대 입시 비리 스캔들에서 시작하여 능력주의와 엘리트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서론 이후, 1장은 트럼프 포퓰리즘의 대두와 미국의 불평등 위기, 능력주의와 기술관료적 통치의 난점을 연결하는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2장부터 5장까지는 능력주의적 도덕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한다. 2장이 기독교 섭리론의 맥락에서 현대 미국의 자기정당화논리로까지 오는 간략한 사상사적 스케치라면, 현대 미국 주류의 능력주의적 도덕언어를 검토하는 3장과 4장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꼽아가며 지난 40년 간 사회적 상승·성공을 거둔 이들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수사학이 확산되었고(3장), 오바마 시대에 이르면 고학력 엘리트 리버럴들 사이에 자신들의 상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저학력 집단을 경멸하는 '학력주의credentialism' 문화가 (기술관료적 통치관과 결합하여) 확산되었고 이것이 포퓰리즘의 원동력이 된 비엘리트들의 불만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책에서 7장과 함께 가장 '철학적' 논변을 펼치고 있는 5장은 능력주의 도덕원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한 두 개의 자유주의, 즉 하이에크로 대변되는 자유시장 자유주의(free-market liberalism)과 롤스로 대변되는 복지국가 자유주의(welfare state liberalism, 혹은 이를 이어간 1980-90년대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ism")가 각각 능력주의적 도덕이론의 약점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능력주의의 논리를 승인해주게 되었다고 주장한다--철저히 자유주의자들의 예만 참고해서 능력주의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비판이 왜 온전할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샌델의 전략은 지적인 독자들이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5장과 7장만 함께 읽어보면 샌델이 '능력주의'라는 문제를 자유주의 전통이 해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공공선을 핵심으로 하는 공화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고전적인 서사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도 한국인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하게 들어올 6장은 미국 고등교육, 특히 명문대에서 20세기 중반 능력주의의 논리가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신분제적 사고'에 대항하여 어떻게 등장하고 확산되었는지, 그것이 어째서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학생들에게 과도한 압박을 주게 되었는지, 그에 대해 어떠한 방식의 교정책을 생각해볼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6장이 엘리트 인재 선별기구로서의 대학을 어떻게 재편성할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면, (샌델의) 정치사상에서 볼 때 좀 더 중요한 것은 7장, "일/노동을 인정하기"(Recognizing Work, 한국어판에서 부제로 선정한 "일의 존엄성"은 책 전체의 중요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는 키워드이긴 한데, 원문의 '인정'이 갖는 함의를--당연히 악셀 호네트가 인용되는데--포기한 것은 조금 아쉽다)이다. 7장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고학력 엘리트집단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비대졸자 노동자(workers)·노동자계급(working class)이 파괴적인 포퓰리즘의 유혹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활동 외에 어떠한 공동체적 도덕 언어가 필요할까? 샌델의 답변은 일·노동 개념을 시민으로서의 삶의 핵심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샌델의 "공화주의적"(republican, 샌델은 이 책에서 "공동체주의적"communitarian이란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정치이론의 핵심이 건강한 공동체-정치체에 필수적인 공공선 및 시민성이 어떠한 덕성(virtue)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규정하는 데 있다면, 7장은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가치를 갖는 적절한 노동 행위에 다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그에 대한 해법이라 주장한다. 대학을 나오든 나오지 않았든, 노동하는 인간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그의 학력과 별개로) 존중받아야만 하며, 그의 노동행위=시민됨의 존엄성(dignity) 또한 존중해야 한다. 나아가 지금의 미국과 같이 공적인 영역이 소수의 고학력 엘리트 '기술관료'에 의해 장악된 상황 대신 노동자-시민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공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2.


내가 <능력주의>에 대한 지금의 리뷰를 쓰게 된 일차적인 동기는, 책 자체의 흥미로움과 별개로, 대부분의 소개·리뷰글이 '능력주의'와 '공정성', 대학입시의 차원에만 집중해서 이 책을 조명하는 데 대한 불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물론 그러한 주제가 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전체적인 요약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샌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 과정에서 가속화된 극심한 불평등과 고학력 엘리트들의 정치 영역 독점에서 비롯된 다수의 중산층-노동자 배제를 비판하고 이를 대체하는 공동체 원리가 될 수 있는 공화주의적 정치-도덕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물론 샌델의 작업에서, 그리고 현대의 여러 공동체주의·공화주의적 정치이론에서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저작의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에 예민한 독자라면 꼭 7장에서만이 아니라도 책 전체에서 '노동' '노동자'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출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텐데, 노동 개념을 매개로 삼아 자신의 문제의식과 다수의 중산층-노동자-시민을 접합하는 시도를 수행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계급·집단에 주목하는 시선이 샌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러스트벨트의 패배와 함께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좌파나 리버럴 중에서, 그리고 트럼프에 동의하지 않는, 혹은 "포스트-트럼프 시대"를 준비하는 우파들 또한 한편으로 포퓰리즘과 리버럴의 두 선택지 및 양자가 초래한 정치적 분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 전략을 탐색해왔다. 그러한 요구의 일환으로 등장한 흐름이 노동자집단을 어떻게 다시 대표할 것이며, 이들을 고려한 정치언어와 의제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의식이다. 노동자계급과 노동조합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이 다름아닌 미국에서, 그리고 좌파에서만이 아니라 우파에서도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통념에 비추어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미국에 관해 최소한의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국 노동조합의 역사나 정치적 영향력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주로 남성) 노동자집단을 중심으로 사회를 통합하고 정부-기업-노조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강조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의 흐름이 (국제주의적) 리버럴과 포퓰리즘 양자를 넘어서고자 하는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나, 이러한 형태의 정치언어가 새로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오렌 캐스Oren Cass에 대한 호의적인 인용에서 나타나듯(332-34), 이러한 '코포라티즘'적인 경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나는 <능력주의>가 한국에서의 공정-능력주의 논쟁에 사용되는 뻔한 도덕적 상투어로 소모되는 데 그치는 대신, 트럼프 이후 아주 많은 것들이 재편성되고 있는 미국 정치담론의 변화를 엿보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 https://americanaffairsjournal.org/2020/02/corporatism-for-the-twenty-first-century/; https://nymag.com/intelligencer/2020/08/hawley-cotton-rubio-brooks-working-class-conservatism-unions.html 등을 보라)



3.


몇 가지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


첫째, 나는 서구 엘리트 지식인의 논의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어리석은 일이 <능력주의>의 이해와 수용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샌델의 신간은 현대 미국이라는 컨텍스트에 매우 밀착되어 있는 작업이다. 바꿔 말해, 책의 핵심적인 논의, 예컨대 대졸자의 비중과 위상(한국의 대졸자 비중은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며, 한국의 학벌주의는 대졸자 대 비대졸자보다는 대졸자들 사이의 '학벌' 차별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더불어 한국의 대학이 미국의 명문대처럼 강력한 엘리트집단을 생산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노동 및 노동조합의 의의(샌델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다수의 중산층 노동자계층'이 정규직-비정규직-자영업자 사이의 긴장으로 가득한 한국에 그대로 들어맞지도 않을 뿐더러, 한국에는 '노동의 존엄성'과 같은 개념을 정당화해줄 도덕적 전통이 충분히 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지는 않다) 모두에서 한국과 미국은 너무나 이질적인 세계다. '능력주의'에 기반해 사회적 성공을 정당화하고 적극적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에 반발하는 논리가 최근 한국에서 급격히 대두하는 건 사실이지만, 샌델의 논의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상투적인 도덕적 훈계 이상이 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둘째, 당연하지만 샌델의 탁월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회이론이 현대 정치경제의 주요 쟁점을 포괄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가 주적으로 삼고 비판하는 세계화-금융화-전문기술관료-국제주의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리버럴의 지배가 여러 가지 도덕적·사회적 부작용을 낳는 건 사실이겠으나, 노동자집단을 중심으로 사회통합을 이룩하려는 샌델의 과녁이 과연 세계무역체제 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는지는 의문이다(샌델이 참조하는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는 피케티고, 따라서 경제에 대한 샌델의 관심사도 주로 불평등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날의 경제적 번영과 국제무역에의 참여가, 그리고 세계화 사이의 연결고리가 분리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한국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수십 년 간, 혹은 19세기 후반부터 '리버럴'의 한계를 지적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어왔음에도 왜 그것들이 (특히 대학 강의실 바깥에서) 새로운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실패했는가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 상업과 교역이 정치와 사회, 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성찰은 이슈트반 혼트(Istvan Hont)의 저작이 보여주듯 18세기에서부터 이미 정교한 수준에서 행해져 왔고, 그 의미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정치·도덕이론의 한계는 명백하다.


셋째, 나는 샌델의 독자들, 그중에서도 지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독자들이 이와 같은 저술이 등장하게 되는 지적인 맥락까지도 이해하고 소개하는 작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복잡하고 역동적인 맥락을 최대한 촘촘히 이해할 때 텍스트를 구성하는 여러 논의의 층위를 더 잘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텍스트와 저자를 물신화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 나는 미국에 대한 접촉의 폭과 깊이 모두 매우 확장된 한국사회에서 동시대 미국에서 벌어지는 여러 정치적 논쟁을 복잡한 맥락을 따져가며,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특정한 학파나 언론사의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맥락화해서 볼 수 있는 전문가들이 부족한 상황이 무척 유감스럽다. 단순한 개요 소개 수준의 미국학, 혹은 단순히 미국 정치사상의 고전을 비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정치이론 연구자가 아니라 실제로 지금 어떤 저널들에서 무슨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저널·언론지의 수와 영향력, 퀄리티 모두에서 미국 담론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저널과 매거진을 따라가지 않고 책만 통해서 미국 내부의 논쟁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건 매우 어렵다), 우리가 '완제품'처럼 접하게 되는 책이 실제로 어떤 논쟁들 사이에서 태어나는지를 세밀하게 포착할 수 있는 '미국 정치담론/사상사 전문가' 집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미국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넷째, 셋째 항목의 연장선에서, 샌델을 읽으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생각 중 하나는, 과연 현재 한국의 인문학자·정치철학자·정치사상가 중에서 이런 식의 작업, 즉 사회에서 작동하는 정치적·도덕적 언어의 쟁점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동시에 여러 사회과학적 데이터를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참고할 수 있으며, 정책적인 시도와도 연결될 수 있는 사회비평적 개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였다. 90년대, 혹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과학'이나 몇 가지 투박한 거시사적, '이론적' 모델에 입각한 기계적인 도식에 도덕주의적 감상주의를 적당히 치장하여 붕어빵 찍어내듯이 반복하는 '사회비평'이란 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기를 지났고, 이제 독자들은, 동료시민들은 (처음부터 그런 붕어빵 맛에 길들여진 분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진지한 분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담론장의 기준이 높아지는 속도에 비해 인문계열 전공자/비평가들이 생산하는 담론분석의 퀄리티는 그만큼 좋아지지 못했다고 해도 부인하기 힘들다. 


내 생각에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 조금, 너무 협소하게, 누군가가 정해놓은 분과학문의 범위 내에서만 공부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각각의 부분에 동의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지적인 흥미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논쟁을 접하고, 그러한 논쟁과 결부된 최신 문헌을 폭넓게 읽어 자신의 논의에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미국 학술장의 엘리트들이 개별 분과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이 정말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들'이라 믿는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 구축해놓은 촘촘한 담론의 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자면, 한국 인문학계의 사회비평이란 것이 80-90년대 스타일의 진부함을 반복하거나, 많은 시간을 독방에서 보내어 혼자만 이해하는 기괴한 결과물을 내놓거나, 또는 그때그때 해외에서 유행하는 것을 들여와 소모하고 넘어가는 경로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이든 전문연구자든 자신의 분과,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지적 네트워크 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분과를 넘나들며 각자 분야에 최전선에 있는 주제를 공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널리즘과 사상사연구, 철학적 논변, 정치적 개입이 얽혀있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구조물로서의 <능력주의>를 읽으며, 우리가 우리를 위해 이런 저술을 자연스럽게 생산할 수 있는 지적인 생태계는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P. S. 읽으면서 눈에 걸린 몇 가지 자잘한 오류를 (2쇄에 수정반영될 수 있기를 바라며) 적는다. 


71쪽 하단의 "15세기 영국 수도승 펠라기우스"에서 "15세기"는 "5세기"로 바뀌어야 하며(여기서 샌델은 초기 기독교 교부사에서 가장 처절한 논쟁 중 하나였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파 사이의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 116쪽의 "야스차 뭉크"는, 적어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뭉크의 강연에서 그가 소개될 때 불리는 이름을 참조한다면, "야샤 뭉크Yascha Mounk"로 옮기는 게 맞아보인다(같은 역자, 같은 출판사가 2년 전 뭉크의 가장 잘 알려진 책 중 하나인 <위험한 민주주의The People VS. Democracy>를 출간했는데, 여기에도 "야스차"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234쪽 역주로 붙은 "구빈법"에 대한 설명은 빈민수용보다는 '구빈법의 보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빈자와 그렇지 않은 빈자를 구별하는' (후기 스콜라주의 자연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논리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게 적절해보이고, 369쪽 미주 20의 "3장"은 "5장"으로 수정되어야 하며(이는 애초에 원서의 실수다), 372쪽 미주 37은 한국어 번역이 안 되어 있다.


더불어 한국어판에 명백히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원저에 있는 찾아보기index가 통째로 누락되었다는 황당한 결정과 함께, 앞부분에 책의 핵심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추천사·해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지인이 철학과와 윤리교육과를 비교하면서 후자에서 철학적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종종 갈라파고스적인 기묘한 관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해준 기억이 생각나는데, 한국어판 4-16쪽은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백색 인테리어에 체리색 몰딩과 강렬한 원색의 거대한 꽃무늬 벽지를 붙여놓은 것 같은 지적인-미적인 촌스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샌델의 신작 정도라면 좀 더 지적으로 담백한 형태를 취했어도 충분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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