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바울 평전> 한국어판: 역사가로서의 저자를 이해하기

Reading 2020. 6. 28. 18:11
주말이라 잠시 쉬는 김에 톰 라이트, <바울 평전>, 박규태 역, 비아토르, 2020(원저 서지사항은 N. T. Wright, _Paul: A Biography_, HarperOne, 2018) 를 읽기 시작했다. 책은 기독교인이자 고대 기독교 역사가인 저자가 현대 서구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대중 독자를 염두에 두고 집필되었지만, 나처럼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독자가 읽어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웬만한 한국인 저자가 쓴 책들보다 훨씬 잘 읽히는 한국어라 100쪽 가까이 읽는데 막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책 번역을 해보면서 그런 문장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작게나마 체감했기에 그 탁월함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찾아보니 역자는 신학 연구 번역에서 매우 명망이 높은 분이었다).

나는 고대사 전공자도, 신학 전공자도, 또 바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에 관해 특별한 언급을 붙일 것은 없다. 오히려 <바울 평전>이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역사가로서의 저자가 어떤 종류의 글쓰기와 논증, 질문을 제시하느냐에 있다. 의도적으로 학술연구 관련 인용주석을 배제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역사서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겠으나, 라이트는 자신이 (대부분의 대상독자들이 익숙하지 않은) 기원후 1세기 유대인들이 살았던 세계와 그들의 사고·의식을 소개하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낯선,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제한된 (그럼에도 결코 적지 않은) 문헌근거만이 남아있는 세계를 소개할 때, 그것도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특정한 개인의 사고과정을 복원하여 보여주려 할 때 역사가는 어떠한 글쓰기와 논증을 전개해야 할까? <바울 평전>은 그 점에서 (특히 지성사·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예시들을 보여준다.

1.

먼저 저자는 자신이 어떠한 문제의식에서 어떠한 목표를 갖고 있는지 분명하게 서술한다. 들어가는 글(Introduction)의 몇 대목을 꽤 길게 인용하고 싶다--역사서술과 글쓰기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대목들이다. "[*]"는 내가 인용하면서 붙인 내용이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 정신을 생각해 보려고 애쓰는 일이다. 특히 고대사는 우리를 16세기 및 20세기의 사고방식과 사뭇 다른 몇몇 사고방식으로 이끈다"(27-27).

"지금 그때[저자가 30대까지의 시기에]를 돌아보면, 나는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_중세가 내놓았던 질문들_에 성경이 제시하는 정답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첫 그리스도인들이 던졌던 질문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친구들과 나는 자신들의 '영혼'이 현재 머물고 있는 물질세계를 뒤로하고 '천국으로 가길' 소망하던 사람들을 찾아 1세기를 부지런히 뒤져 보면 바울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플루타르코스 같은 플라톤주의자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천국과 지옥'이라는 틀이 중세 성기의 구성물임을 깨닫지 못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구성물에 중요하고도 새로운 변화를 제시했으나, 이것도 기껏해야 1세기의 시각을 왜곡한 것이었다. [...]

우리가 일단 이것을 분명히 알고 나면 '역사적' 시각을 얻는데, 이때 이 시각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우리는 1세기 사람 바울이 사실은 후대 신학자와 설교자가 그가 말했다고 추측해 온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음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일이 중요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 정신을 생각해 봄을 뜻한다. [...]

둘째, '바울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바울 자신이 이야기하는 '역사'가 공간과 시간과 물질로 구성된 세게인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임을 발견한다. 바울은 첫 창조가 선함을 믿고 당신께서 지으신 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시려는 창조주의 의도를 믿는 유대인이었다. 그가 전한 '구원'의 복음은 시편에 있는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온 세상을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것이었다. [...]

셋째, 따라서 바울을 다룰 때도 바울 자신이 살았던 '역사적' 맥락과 배경이 중요했다. 바울이 살았던 세계는 복음이 밀려들어 왔던 세계요, 복음이 도전을 던지던 세계였으며, 복음이 바꿔 놓을 세계였다. 그가 활동했던 더 넓은 무대는 여러 나라의 문화, 신화와 이야기, 제국과 인공물, 철학과 신탁, 왕과 포주, 소망과 두려움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덩어리였다. 이 현실 세계는 원리상 누구든지 어떤 문화에서나 선포할 수 있는 '시간을 초월한' 메시지에 우연히 배경이 되었던 세계가 아니었다. 누가는 아테네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상가들과 설전을 벌이는 바울을 묘사하는데, 여기서 바울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암시하는 내용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즉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울은 _상황_ 신학자contextual theologian였다. [...]

그렇다면 바울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가 몸담았던 정황--아니, 정황들이라고 복수로 써야 옳겠다--을 이해하는 힘든 작업을 해야 한다[*역자는 원문의 "context"를 "정황"으로 옮겼는데, 역사학과 역사연구 방법론에 좀 더 익숙한 이라면 "맥락"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했을 것이며 나 또한 그러하다]. 그가 살았던 유대 세계, 그리고 다면성을 지닌 채 정치, '종교', 철학,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유대 세계에 갖가지 영향을 미쳤던 그리스-로마 세계는 단순히 우리가 바울의 초상을 그려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한 '틀'에 불과한 세계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은 틀을 지닌 복잡한 세계다. 사실, 화랑의 기획 책임자라면 다 알듯이, 초상화의 액자는 선택사항인 테두리 장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가의 의도를 잘 전달하여 보는 이의 이해를 촉진할 수도 있고, 화가의 의도를 망가뜨려 보는 이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시선을 빗나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역사적 인물에게 있어서 주위의 문화는 그런 틀이 아니다. 오히려 초상의 일부다. 이런 주위 문화의 형체와 핵심 특징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첫 번째 큰 질문, 곧 바울을 움직였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한 일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바울이 몸담았던 유대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두 번째 질문, 곧 바울이 예수 따름이들을 열렬히 핍박하던 자에서 그 자신이 열렬한 예수 따름이로 바뀌었던 사건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28-32).

"이 모든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의 의미와 사뭇 다르다. 내가 종종 종교라는 단어에 인용부호를 붙여, 다소[*Tarsus]의 사울이 어릴 때나 장성한 사도였을 때에 현대인이 말하는 의미의 '종교를 가르쳤다'고 상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암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날 대다수 서구인이 생각하는 '종교'는 삶의 어느 한 고유(다른 영역과 별개인) 영역, 정의상(몇몇 나라에서는 법으로 그렇게 규율한다) 정치와 공공생활, 과학과 기술과 별개인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사사로이 즐기는 일종의 취미를 가리킨다. 바울 시대에 '종교'는 방금 말한 것과 거의 정반대의 것을 뜻했다. 라틴어 religio는 여러 가지 것을 함께 '묶음'과 관련이 있다. 예배, 기도, 희생 제사, 그리고 다른 공공 제의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거주자들(신들 그리고 어쩌면 도시 주민들의 조상들)과 눈에 보이는 거주자들, 곧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함께 묶어 줌으로써 일상생활뿐 아니라 사업과 혼인과 여행과 가정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틀을 제공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공인받고 그 권위를 인정받은 religio와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어쩌면 반역 행위로까지 간주되었을 superstitio가 구분되었다.)" (50-51)

역시 들어가는 글에서 역사가인 저자는 심지어 바울이 직접 남긴 문헌조차도 (당연하게도) 사료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사울 시대의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는 대부분 훨씬 후대에 나왔다. 기원 후 3세기와 4세기의 랍비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바리새인을 그들의 영적 조상으로 보고, 그들 자신이 가진 의문과 사물을 보는 방식을 [*과거의] 바리새인에게 투사하곤 했다. [...]

바울이 남긴 증거는 분명 액면 그대로 믿지 말고 걸러 들어야 한다. 그가 새로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일부 유대인은 바울이 정말 바리새인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1세기에 바리새인을 다룬 또 다른 위대한 자료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작도 바울의 글과 같이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실 요세푸스는 당시 바리새파 운동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말하는 모든 내용에 그 자신의 입장을 덧칠해 놓았다. 로마-유대 전쟁이 터졌을 때만 해도 유대의 장군이었던 요세푸스는 나중에 로마인으로 변신했으며, 나아가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도 같은 일을 하셨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분명 하나님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대로 만들어 낸 놀라운 사례였다. 따라서 모든 증거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35-36).

간단히 말해 <바울 평전>의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자신이 어떠한 문제의식을 갖고 어떠한 대상("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 정신을 생각해 봄")을 다루는지, 그리고 그 대상을 역사학적으로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론적 자세가 필요한지를 평이하지만 명료하게 설명한다. 과거인과 그의 문헌은 당시의 저자가 속해 있던 맥락과 세계(그리고 과거인이 생각했던 문제들)와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그 맥락과 세계는 후대인들--그것이 중세인이든, 종교개혁기의 주석가들이든, 현대의 목회자들이든--이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고유한 세계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러한 전제로부터 결국 우리가 특정한 과거인과 그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언어를 과거의 그 자신이 이해하고 사용했던 의미에서 파악해야만 한다는, 적어도 그러한 과정이 전부는 아닐지언정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라이트가 설명하는 이와 같은 내용들은 오늘날의 역사가들, 특히 (다른 누구보다도 지성사가들을 포함해) 우리와 다른 시대에 속한 사람들의 언어, 사유, 의식, 문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상식적인 방법론적 태도의 표명이기도 하다.


2.

그렇다면 위와 같은 방법론적 태도를 천명한 저자는 본문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이 제시한 과제를 실천하는가? 전체의 1/6 정도밖에 읽지 않은 시점에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성급한 일이지만, <라이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란 적어도 이런 장르의 역사서술에 친숙한 독자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고대사는, 특히나 고대의 언어와 사상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부한 문헌적 근거를 참고할 수 있는 다른 시기의 연구에 비해 다양한 형태의 정황증거와 추론적 테크닉, 좁은 의미의 사상사에 국한되지 않는 다른 역사학적·고고학적 성과들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초기 근대 시기의 법제사나 고전/성경문헌학, 동방학을 연구하던 유럽인들에게서부터도 찾아볼 수 있는 오랜 태도다. 역사학적 탐구의 역사에 낯선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은 근거없는 어림짐작으로서의 헛된 상상과, 얼마 남아있지 않은 근거로부터 과거 사태의 전개를 최대한 정교하게 재구성해보는 역사적 탐구기법으로서의 '추론'을 거의 구별하지 못할 수 있겠으나, 양자를 구별하고 합리적이고 신뢰성 높은 추론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은 최소한 초기 근대 이래 서구의 역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다.

라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예컨대 바울이 어린 시절 정확히 무엇을 읽고 배웠는지 보여주는 문헌 근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저자는 해당 시기 유대인 가정에서 어떠한 교육이 행해졌는지를 먼저 제시하고 이로부터 바울의 교육이 어떠했을 것인지를 추론해나가는 사례에서처럼, 저자는 특정한 시기 바울의 행적, 사고, 동기가 어떠했을지 곧바로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유사한, 적어도 비교해볼 수 있는 인접한 성과들을 가져오고, 그에 대어볼 때 바울이 어떠했을지 혹은 어떻게 달랐을지를 그려본다. 물론 이는 언젠가 그에 부합하지 않는 근거가 나오게 된다면 언제든 반박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가 언제 발굴될지, 과연 존재하기나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역사가는 과거를 복원하고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어떤 면에서 사회경제사나 인류학의 등장/발전과정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한 정합적인 추론/해석을 제시하려는 역사학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바울 평전> 2장의 시작대목이다. 도대체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던 길에 바울은 어떠한 경험을 했는가? 좀 더 정확하게는, 열렬한 유대교인에서 예수의 신봉자로의 회심은 어떠한 동기와 서사에 기초하고 있는가?

기존의 정신분석학·역사심리학적 해석의 무용함을 강력하게 지적하면서("어쨌든 역사 심리학은 탁상공론을 즐기는 사람에게야 흥미로운 놀이이지만, 실제 역사 탐구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81), 라이트는 전자와 구별되는 유의미한 역사학적 분석이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한다:

"역사가와 전기 작가는 _현재_ 밝혀낼 수 있는 여러 차원의 동기를 연구할 수 있고, 그런 동기를 연구할 수 있으면 연구해야 하며, 특별히 한 문화를 관통하거나 한 정치 지도자 혹은 고립된 개인의 생각을 관통하는 내재된 내러티브를 연구해야 한다.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이들의 동맹군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기 전에 그와 같은 일을 시도했다. 탐구심이 강한 미국 작가 두 사람이 20세기에 미국 대통령을 지낸 이들이 (영화와 TV쇼 그리고 연재만화 속에 등장한) 대중문화 예술인 가운데 좋아하는 이로 꼽은 이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만들어 냈다. 대통령들은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캡틴 아메리카, 론 레인저,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인물들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주인공이 어려움에 빠진 공동체에 평화를 되찾아 주고자 법의 경계를 넘어 활동을 펼친다. 이런 내러티브는 걱정을 자아낼 정도로 비슷해 보였다. 그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라 동기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원칙상 사람들이 특정한 행동을 하게끔 몰아붙이는 내재된 내러티브를 면밀히 조사하면 된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보면, 1차 대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들도 그런 일을 했다. 우리는 역사가이기 때문에 독일, 러시아, 폴란드, 세르비아, 프랑스, 그리고 다른 관련 국가 지도자들 혹은 심지어 무뚝뚝하고 오만했던 당시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의 정신을 분석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의 정신을 분석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역사가는 원칙상 이런 사람들이 한 말과 행동이 목적의식, 자기 국가의 정체와 의무에 관한 이해, 바로잡아야 할 과거의 잘못을 담은 _내러티브_, 그리고 몇몇 경우에 해당하지만 역사에서 반드시 붙잡아야 할 중요한 순간이 도래했다는 의식을 어떤 식으로 표명했는지 자세하게 조사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왜 아주 많은 나라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모두, 거의 같은 때에 유럽에는 한바탕 활기를 불러일으킬 전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는지 연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심리학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어떻게 하다 그런 선택을 했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역사를 연구하는 일이다. 역사는 그저 사건만 다루지 않고, 동기까지 다룬다. 물론 동기는 빙산처럼 떠다니며,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다. 그러나 종종 강한 암시를 담은 내러티브를 포함하여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이 아주 많을 때도 있다. 그런 부분은 우리가 연구할 수 있다"(82-84).

이것이 엄밀한 역사가의 방법론적 모델과 과거 인물의 '심리'를 몇 가지 이론적 틀에 근거하여 설명해보려는 (주로 정신분석 혹은 그와 유사한 계열의) "심리학적" 시도의 차이다. 이러한 서술에서 드러나듯 라이트는 상당히 여러 대목에서 자신이 역사가로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을 할 수 없는지를 의식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바울 평전>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는 한 가지 방법이 그와 같은 역사가로서의 저자가 매 순간 고민하고 채택하는 서술전략을 주시하는 데 있다고도 생각한다. (특히, 지성사 관련 설명을 들으면서 '참 맞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제가 하는 분야에는 그만큼 자료가 풍부하지 않아서 적용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라고 고민하는 연구자들에게 말이다.)


3.

심지어 책을 매우 부분적으로만 읽은 상황에서 이렇게 긴 포스팅을 남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나 자신이 언어와 수사, 글쓰기 전략을 다루고 분석하는 문학연구자로서(물론 지성사 방법론을 매우 깊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바울 평전>에서 '역사가로서의 저자'가 보여주는 매 순간의 행보가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어쨌는데"만이 중요한 독자에게는 이런 지점들이 무의미한 변죽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역사학, 그중에서도 인간의 사고와 사상·언어를 다루는 분야의 오랜 방법론적 논의들이 축적된 전문가들의 섬세하고 세련된 동작을 보여주는 그 자체로 깊이 음미할 수 있는 글쓰기다. 물론 우리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글쓰기의 음미'가 감각적인 문장이나 강렬한 정념의 토로를 맛보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 공론장에 속해 있지만, 그렇다고 오랜 전통 위에 서 있는 뛰어난 저자들의 고도로 발전된, 그러면서도 (특히나 대중독자들에게도 부담없이 읽히고픈) 부드럽게 연마된 동작과 제스쳐들의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물론 역자와 번역물에 대한 나의 존경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탁월한 역자 본인이 <바울 평전>의 이러한 측면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간략한 옮긴이 글(688-91)은 그렇다 치고, 나는 어딘가에서 역자가 이 책을 (제임스 조이스를 언급하며) "의식의 흐름"에 입각한 문학적인 저작으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제시한 것을 보면서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모더니즘 전공자가 아니지만, 애초에 특정한 문학적 테크닉으로서의 "의식의 흐름"은 라이트가 수행하는 '바울의 사고를 역사적으로 복원하는 작업'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더불어 앞서 인용한 저자의 명시적인 방법론적 진술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역사학적 탐구를 포기하기는커녕 자신이 어떠한 형태의 역사학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진술한다.

물론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대목이 많이 남아있는 만큼, 저자가 자신이 천명한 입장을 제대로 준수하는 데 실패하거나 중간에 목적을 포기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를 '역사학적인 (적어도 그를 의도한) 저술'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규정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역사학적 탐구/방법의 전통 및 그에 기초한 특정한 선택이 갖는 의미를 과도하게 무시한 게 아닌가 싶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역사가의 저작으로 읽지 않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이 텍스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저자에게 공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독서경험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좋은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 못지 않게 그것을 어떤 지적인 전제와 맥락 하에서 읽는지 또한 독서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역자가 왜 그러한 오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바울 평전>은 앞서 언급했듯 기존의 학술문헌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에 이는 저자가 실제로 기존의 학술문헌을 무시하거나 비학술적인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기보다는--그렇기에는 많은 경우 책의 각 문단은 두터운 스칼라십이 전제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최대한 대중독자에게 맞추기 위해 학술장의 문헌들을 배제한 선택인듯 보인다(개인적인 선호와 별개로 이런 저작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른 (우리에게) 유감스러운 결과는 같은 분야의 학술장에 속해 있으면서 라이트가 전제하는 것들이 어떠한 논의를 배경으로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면 각각의 서술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바꿔말하면 이러한 선택은 보통 해당 분야에서 대가급으로 신뢰받는 저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앞서 암시했듯, 꼭 역자(의 주변)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서장 자체에 학술적 글쓰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인지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소수라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한 학기 동안 예기치 못하게 역사학과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그들도 문학전공 대학원생에게 이런저런 논평을 들으며 한 학기를 보내게 될 거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조차도 학문적인 글쓰기가 어떤 전제들 위에서 이루어지는지, 학자들의 글이 어떠한 전략과 움직임을 보여주는지 세세하게 읽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역자의 오판만이 유별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히 공정하지 못한 일일 터이다.


<바울 평전> 한국어판은 매우 매력적이고 지적으로 흥미로운 저작이다. 나는 짬짬이 쉬는 시간에 남은 대목들을 읽어나갈텐데, 다른 독자들--특히 나와 마찬가지로 종교나 신앙심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지적으로 뛰어난 저작을 음미하는 걸 삶의 중요한 즐거움으로 삼는--에게도 그 여정에 동참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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