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기생충>: 80년대를 기억하는 우화

Reading 2019.06.01 01:21

봉준호의 <기생충>을 보았다.

 

[당연히 영화 줄거리 언급 및 강한 주관이 들어가 있다]

 

2시간 10분 동안 지루함 없이 재밌게 볼 수 있는 매끄럽고 깔끔한 영화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마더>의 봉준호를 기대하는 감상자라면--나는 봉준호의 작업들을 고작 몇 가지 보았을 뿐이지만, <마더>를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한다--다소 다른 작품을 보게 될 것이다.

 

<기생충>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질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우연히 신분을 속이고 부유층의 가정에서 과외교사를 하게 된 김기우(최우식 분)를 시발점으로 김 씨 일가 전체가 차츰차츰 해당 가정에 침투·기생하는 과정을 담은 코미디다. 여기서 김 씨 일가는 매우 급작스럽게 무척이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의 기생 대상이 되는 부유한 박동익(이선균 분), 연교(조여정 분) 가족이 신분에 기대되는 판단력을 결여한 속 빈 강정 같은 이들로 묘사되는데, 이는 이런 장르에서 일반적인 구도다. 영화의 성격은 김 씨 일가가 저택 지하 비상대피소 및 그곳에서 자신들보다 먼저 이 집에 기생하고 있던 문광 부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바뀐다. <기생충>의 진짜 이야기 혹은 이 영화가 한국의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후반부를 뜯어볼 필요가 있다.


후반부의 <기생충>은 그 핵심에서, <설국열차><옥자>가 그러했듯이, 우화다. 겹겹이 축적된 디테일들이 서사적 골자의 단순함을 덮어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생충>이 사회적 현실을 섬세하게 파고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골자는 다음과 같다. 극복불가능한 불평등이 있고, 부자에 기생하고 또 그를 숭배하는 빈자들은 연대하는 대신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빈자들은 광기와 분노에 의해 부자들의 삶 한 가운데에서 끔찍한 파국으로 폭발하고--비슷한 모티브는 여럿 있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P. B. 셸리의 <풀려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 1820)에 나오는 데모고르곤(Demogorgon)이다--이후 그들은 서로를 애도하면서 상징적으로나마 연대감과 해방을 꿈꾼다. 간단히 말해 영화의 핵심적인 줄거리는 '민중주의적' 역사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봉준호는 (한국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여전히 '80년대의 자장' 속에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조금 심술궂게 말한다면, 80년대의 근원적인 거대서사를 반복하는 일은 어쩌면 세계적인 영화인들에게 '거장'으로 공인받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만약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세대별 분포 및 그들의 정치-미학적 감수성이 어떠한 시공간으로부터 기원하는지 정리할 수 있다면 꽤 재밌는 작업이 될 것이다; ()좌파의 마지막 보루는 영화제인가?).

 

물론 <기생충>'민중주의적 전통'과 맺는 관계는, 오로지 디테일로만 남아있긴 하지만, 조금 더 파고들어가볼 지점이 있다. 김 씨 일가 이전의 원조 기생충이라 할 수 있는 문광 부부는 처음에는 단순히 빈민처럼 묘사되다가 결국엔 80년대 운동권 이미지를 기묘하게 뒤틀어 놓은 것임이 드러난다. 급작스럽게 조선중앙TV 아나운서의 성대모사를 하는 문광이나(그의 마지막 대사는 "충성"이다), 지하 비상대피처의 서가에 법학서들을 꽂아놓고 있는, 그리고 죽음 직전 박 사장을 대면하고 기괴하게 "리스펙트"를 외치는 그 남편에서 80년대에 대한 애증어린 기억양식을 읽어낸다면--나는 87 직후의 세대, 특히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학번대 ()운동권들이 80년대를 기억하는 방식은 정말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과도한 독해일까?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장치는 물론 산수경석이다. 처음에는 성공과 출세의 의미로 소개되었던, 잠시 동안이라도 김기우를 발자크의 라스티냐크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이 소품은 폭우와 침수 속에서 자신들이 짓밟았던 같은 '기생충'들을 향한 죄의식을 담아낸다. 감상성과 도식성이 급격히 치솟는 이 전환점 이후 수석은 다시 빈자들의 광기와 분노의 파국을 촉발하는 도구가 되며, 마지막에는 (영화에서 유일한 '진짜 자연'이라 할 수 있는) 냇물 바닥으로 귀향하면서--이는 당연히 김기택(송강호 분)이 문광을 묻어준 것과 겹쳐진다--'민중적 연대'는 상징적으로 되돌아온다(이러한 연대와 계급갈등[?]의 서사에서 여성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이야기는 남자들만의 것이 된다; 이것조차도 80년대 민중주의의 전형인가?). 자연과 민중의 결합을 매개하는 이미지로서, 산수경석은 민중주의적 전통, 혹은 그것으로의 (상상적) 귀향을 거의 순수하게 드러낸다.

 

<기생충>은 사실주의적 탐구도, 블랙코미디도 아니다. 유머러스한 디테일들이 곳곳에 깔려있지만, 이 영화는 부자와 빈자의 삶이나--발자크 이래 사실주의 미학의 오랜 꿈이었던--사회의 구조를 파헤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기생충'들 속에 도사리는 암흑을 냉정한 태도로 짚어내보거나 하지도 않는다(그러기엔 어느 시점부터 영화는 김 씨 일가에 서서히 온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차라리 <기생충>, 같은 감독의 <괴물>--특히 후배를 밀고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팔뚝질을 꺼낸 전직 운동권의 모습에서--그랬던 바와 마찬가지로, 80년대와 민중주의적 전통에 대한 복잡한 기억에 가깝다. 영화는 한편으로 지하의 대피처로 잠수한 문광의 남편이나, 부와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산수경석으로 축소된 자연처럼 과거의 정치-미학적 전통들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일그러지다 못해 이제는 완전히 망각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줄거리 자체를 통해 민중주의적 서사 전통을 반복한다.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한다면, 이 영화는 기태와 기우가 문광 부부를 만나서, 다시 말해 비판적 의식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은 오늘날의 빈민들이 망각된 운동권의 일그러진 전통과 다시 만나서 그 덕성을 다시 회복하는 (어떤 면에서 대놓고 낭만주의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문광 남편이, 기택이, 기우가 세대를 건너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로서 보이스카웃의 모스 부호가 선택된 건 우연이 아니다. 물론 기택의 '해방의 날'은 오로지 기우가 '부자가 되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마지막 멘트는 아주 약간의 체념과 거리두기를 담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지점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세 가지 개인적인 코멘트를 덧붙이는 걸로 글을 마무리하는 걸 허락해주길 바란다. 첫째, <기생충>은 상당히 뚜렷하게 '영화제에서 거장으로 통용되기 위한' 영화의 전형을 되풀이한다. 좌파적 전통의 거대한 역사철학이 '촌스러운' 사실주의가 아닌 우아하고 매끈한 우화의 형태로 제시되며, 파국의 장면에서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피와 폭력을 분출하는 대목도 할애되어 있다(가끔 나는 이러한 영화가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형성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앞서 언급했듯, 민중주의가 해외영화제를 겨냥하는 유용한 전략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굉장한 아이러니가 있다. 둘째, <기생충>, 철저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천재적인 힘이 엿보이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는 김기덕의 (감독의 성폭력 혐의는 물론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피에타>에 나타나는 기계와 짓이겨지는 육신이 결합한 섬뜩한 이미지의 모티프와 같은, 혹은 봉준호 본인의 <마더>의 마지막 관광버스 신과 같은 충격은 없다. 누군가가 <기생충>의 봉준호를 거장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나는 '거장들이 영화를 찍는 법을 잘 수행했다는 점에서'만 그에 동의할 수 있다. 셋째, <기생충>은 과거를 돌아보는 특정한 세대가 자신의 기억과 소망을 다음 세대에게--곧 민중주의적 전통이 완전히 소멸한 세대에게--은근히 건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때 민중주의를 바라보는 봉준호를, 오늘날의 젊은 감상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봉준호의 시도는 마치 동학"혁명"부터 3.1."혁명"을 거쳐 2016-17년 촛불"혁명"의 일관된 정통성을 구축하려는 386들의 노력처럼 20대의 냉소와 무관심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화가 희망하는 바처럼 '모스 부호를 통해' 과거와, 이전 세대와 소통하는 자식들을 찾아낼 것인가? 나는 여기에 비관적이지만, 스스로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정도만큼은 회의주의자이다.

tags : ,
Trackbacks 0 : Comments 16
  1. ㅇㅇ 2019.06.03 16:44 Modify/Delete Reply

    잘읽었습니다.

  2. 1234 2019.06.04 12:34 Modify/Delete Reply

    제가 어려서 386세대의 문법이나 가치관을 잘 이해 못하고있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를 80년대의 우화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않아 조금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비슷한 부분이 없을수는 없을테지만,
    저는 송강호가 마지막에 폭발(혁명?)을 일으킨 후 오히려 신분이 낮아지고, 미안해하는듯한 대사도 있었다는 점에서
    기존 386 문법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요.

    • BeGray 2019.06.06 01:15 신고 Modify/Delete

      1. "80년대의 우화"는 조금 오해의 여지가 큰 표현인 거 같고요, <기생충>은 한편으로는 민중주의적 역사철학(의 변종)을 서사의 기본적인 뼈대로 차용한다는 점에서 80년대의 자장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광 부부를--대놓고 NL운동권이죠--핵심적인 예로 들 수 있는 "80년대적인 것"(의 변종)을 지하로부터 꺼내어 되돌리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그렸다는 점에서 80년대를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활용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1234님께서 생각하시는 "기존 386 문법"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물론 제 글은 <기생충>이 386의 문법을 그대로 반복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기택(송강호 분)은 살인을 저지른 후 한편으로 언젠가의 상승=해방을 기다리는 지하생활자가 되죠. 다른 한편으로 (기우 등과 함께) 문광 부부 혹은 '80년대적인 것의 변질된 유산'과 상징적으로 화해하고--기택은 문광을 묻어주고, 이어지는 기우의 상상 속에서 바로 그 자리에 충숙이 가서 나무를 다듬는 장면이 나옵니다--(문광의 남편이 사용하던) 모스 부호를 통해 아들과 소통하는 등 일종의 '계승자'가 되고요. 당연히 스스로를 2010년대의 시점에 놓는 작품이 80년대의 문법을 그대로 반복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만,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80년대에 대한 강력한 참조가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라고 봅니다.

  3. ㅇㅇ 2019.06.07 02:15 Modify/Delete Reply

    저도 뉘앙스로만 느끼고 과잉 해석인가 싶어 묻어뒀던 부분인데,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확실히 봉준호의 작품에서 특유의 세대 감각이 드러난다는 인상을 종종 받았습니다. 586의 끝물, X세대와의 경계에 있지만 결국 586의 영향 아래에 있던 세대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세대 감각이 읽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살인의 추억>도 80년대의 사회상을 그리되, 직접 겪었던 사회보다는 한 발 뒤에서 관망했던 사회에 대한 인상을 풀어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살추가 <기생충>과 흡사한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제가 소양이 부족해서 이 정도밖에 못 쓰는 게 아쉽습니다. 어쨌든 본문에 깊이 공감하며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BeGray 2019.06.07 14:53 신고 Modify/Delete

      제 독해가 설득력을 지닌다니 다행입니다 :) 봉준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텐데, 언젠가는 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ㅎㅎ

  4. 나그네 2019.06.14 13:58 Modify/Delete Reply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네요. NL은 캐치했는데 산수경석은 저는 답이 잘안나왔는데 도움이 됩니다!

    전 해석에 공감하면서도 봉감독이 이번영화를 통해서 대화의 장을 한번 열어보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순화시켜서 내용정리를 하자면 부자와 빈자로 나뉘고, 사는 공간들이 다르며 행동반경 혹은 동선조차 거의 마주치지 않는 시대, 서로 다른 생활양식과 코드(혹은 해석체계).

    한국적인 맥락에 위치시켜본다면 80년대랑 2019년을 비교해볼수 있을거 같은데 80년대나 2019년이나 온전히 부자와 빈자로만 나뉘지도 않았지만, 80년대에는 자본가-프롤레티라아라는 대립구도는 있었다면 2019년은 무색 무취의 부자와 빈자만 나오네요. 다른 차이점들을 나열하자면 80년대에는 예컨대 대공장체제아래 공장주와 육체노동자들이 같은 동네에 살고 부딪히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암묵적인 평화규칙(?)을 서로 얼마간은 습득하고 있는데다가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없었고 대화도 공통의 언어가 있었구여. 일촉즉발의 대립구도와 위기를 준비(?)하는 서사(해석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게 NL/PD같은 운동권(맑시즘)이겠네요.

    근데 2019년은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산다고 할까요? 영화전개를 위해서 과외를 빌미로 침투하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대면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주칠일도 거의 없고, 마주치는 것도 항상 서비스공급자-고객정도로 그치니까요. 이제는 대공장시절처럼 암묵적으로 서로에 대해 암묵적인 룰을 습득하는 과정도 없고, 게다가 어떤 위기나 폭력이 닥쳐도 대공장시절처럼 공장주가 적이 (선과악이 있던 시절) 되지도 않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사건이 자연을 차용하고, 자연재해처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걸 잘 보여주는거 같습니다. 선과 악이 없죠. 영화 보는 다수의 입장에서야 송강호 가족에게 감정이입이 되겠지만 사실 영화에 나오는 여느 가족이든 선도 악도 아니더군여.) 서로에 대해서 무지하고 (이선균과 송강호의 고프먼의 분석을 연상케 하는 대화들) 상황을 정의(경우에 따라서 지배하거나 적응)할려고 하며, 80년대와의 무엇보다 큰 차이는 일촉즉발 상황이 벌어질때를 대비한 서사(혹은 해석틀. 마르크스 주의 같은 것들)도 없고 (기껏 돌아온 것은 기괴한 변종...) 특히 똑같은 말을 하는데 다르게 받아들이는 코드의 차이인것 같습니다. (이선균이 자식을 위해서 이걸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송강호가 그러니까 부인을 혹은 자식을 사랑해서 이러시는거죠라고 묻는게 영화를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똑같은 의미인데 이선균의 표정이 일그러질려고 하는데서 나오듯이 서로에 대해 무지하고, 공통의 커뮤니케이션수단(한국어)이 있는것 같지만 코드(해석체계)가 다른 상태를 잘보여주는것 같습니다.

    뭐랄까요? 과감하게 현실에 끼워맞춰보자면 중간층이 줄어들고 (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도 않고) 부자와 빈자들만으로 채워진(채워지는) 사회에서 서로가 분리되어 다른 생활양식, 반경속에 동선도 겹치지 않고 평행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대면하게 될때 무슨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때 예전에는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이 상황을 대비하거나 이해하고 해석할 서사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것도 없네? (논외로 시간이 멈춘것 같아요라는 문광의 대사는 기괴한 NL변종을 통해서 공산권 몰락과 역사의 종언 테제까지 운동권의 멘탈이 나간 모습을 보여주는것 같았네요.)

    이게 봉감독이 그려본 대한민국의 오늘날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규정한다기 보다 그냥 그려내고, 만약 마주하게 되면? (what if ...?) 이런식으로 사실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느끼는 현실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면서 대화의 장을 열어본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 386 끝자락에 속한 그가 느끼는 것들을 풀어보는것도 있고 아무튼 어떤방식으로든 이야기를 한번 나누어 보고 싶었던것 같아요.

    제멋대로 비교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운동권과 관련해서 저는 좀 다른 기억의 문제를 던져보고 싶어요. (비그레이님 하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것 같지는 않은데) 1987같은 영화에서는 운동권이라는게 민주화운동의 투사라는 면모를 강조했고, 시민들도 연대하면서 이른바 대한민국 시민이라는 공통분모가 독재에 저항하고 승리하는 서사가 있었다면, 봉감독은 잊혀지거나 거의 이야기 되지 않는 운동권의 다른 모습을 (사실 이런 이야기 좀 조심스럽네요. NL과 PD같은 운동권 담론은 거기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이나 알지 일반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잘 알려져있지도 않고 아는것도 별로 없는 이야기니까요.)
    들추어 낸다고 할까요?

    좀 다르게 적자면 1987은 당시를 재조명하면서도 어느정도 완결을 시킨 역사랄까요? 뭐 어쨋든 절차적, 형식적 수준에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근데 운동권의 다른 면을 들추어내면서 나오는 기생충이라는 블랙코미디에서는 잊혀진 이 운동권의 다른 면모는 우리가 어떻게 기억해야 하지? 묻는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제 코멘트를 읽게 될 분들은 거의 다들 아시듯이 운동권의 활동이라는게 그 타겟이 독재만을 겨냥한건 아니었잖아요?

    이른바 자본주의라는건데. 1987과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종결된 이야기라면, 자본주의와 운동권은 미완의 상태이면서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제대로 조명도 되지 않는 문제라고 할까요? (기껏해야 학계에서 당시를 경험한 이제는 소장학자인 사람들이 연구나 논쟁을 통해서 에세이나 연구의 형식으로 간헐적으로 이야기 하는 정도이지, 우리 사회 전반을 놓고보면 봉인된 상자겠죠.)

    온전히 개인적인 판타리를 무기로 영화를 곡해해서 조금 더 덧붙여보자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부자와 빈자의 대립구도가 격화되는 순간에는 높은 확률로 옛날의 서사(해석틀. 경제위기가 올때마다 맑시즘이 돌아오는걸 생각해봅시다)가 다시금 돌아올텐데 (이렇게 볼때는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인터폰 씬을 들먹이고 싶네요.) 영화에서는 마치 '유령' 혹은 말장난 좀 하자면 '억압된 것의 귀환'처럼 나오지 않던가여 여러분?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만 이런틀에서 볼때는 어쩌면 봉감독이 묻고 싶었던건 다시금 옛날의 서사가 고대병기마냥 돌아올때 사실 우리는 그 사용법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을 모르고 있지 않나? 여기에 관해서도 이야기 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판타지는 뭐 이정도면 충분하고 (요즘 두문불출해서 영화 이야기 할곳이 없어서 신나서 여기에 적었는데 그러고 나서 보니 남의 가게앞에서 노점상 한거 같네요 죄송합니다ㅎㅎ) 비그레이님 글도 좋고, 이정도면 충분하니 386 아니 지금은 586이 된 형님들 이야기가 들어보고 싶네요. 영화도 같이 보고, 이런 해석도 보여주고 그리고 나서 당신들은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한번 대화해보고 싶습니다. 아니면 마침 586세대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갓들어가는 시점이기도 하니까 1987과는 다른 의미에서 부모 자식간의 대화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보고 나와서 술집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옆 테이블에 앉아 몰래 들어 보고 싶습니다 하하하.

    • BeGray 2019.06.25 23:19 신고 Modify/Delete

      답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두 가지 포인트만 짚자면,

      -나그네 님께서 80년대와 2010년대를 비교해주신 설명의 틀이 사실 (신)좌파적 전통에서 최근의 변화를 그려내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이긴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지난 30년 간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인지에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ㅎㅎ

      -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잊혀지거나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운동권의 모습들"인지는 약간 주저되는데, 왜냐하면 (저 자신이 잘 아는 전통은 아니지만) 90-2000년대에 한국문학장을 포함해서 80년대의 변질과 이탈 같은 주제는 상당히 자주 다루어진 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제 그런 이야기가 지겹게 나와서 잊혀질 때쯤에 그걸 다시 들고 써먹은 게 아닐까 싶긴 합니다 ㅎㅎ

      *저도 '세대간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질지는--그러니까 이루어지긴 한다면--꽤 궁금합니다^^

  5. BeCynical 2019.06.19 10:40 Modify/Delete Reply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말씀하셨다시피 (여러 부분에서) '주관이 강한' 추측으로 이뤄져 있고 그 추측을 토대로 일종의 '가설'을 만들어 봉준호 감독을 비판하고 계신데 추측 중 불확실한 부분만 몇 개 아니었던 것으로 판정돼도 글이 좀 헐거워지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약간'의 체념"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솔직히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중산층 정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 집을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솔직히 현생에서 가망이 완전히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만할텐데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린다고 표현한 이유 중 하나 아니었을까요.
    (봉준호 감독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을 적용하셨는진 모르겠는데 평균임금으로 계산하면 5백 수십 년이라고 주장하더군요.)

    이른바 상대적 박탈감 개념에 대해 잘 아실 만한 분이 상대적을 넘어서 절대적으로까지 보이는 격차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습니다. 실은 Begray님이 올리시는 글들을 종종 인상깊게 잘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네요..

    • BeCynical 2019.06.19 11:00 Modify/Delete

      그리고 송강호가 지하실에 갇힌 후 박 사장의 사진 앞에서 미안하다고 울부짖는 장면이 있었는데, 봉준호 감독은 그가 계속 갇혀 지내는 것이 일종의 '셀프 퍼니시먼트'인 셈이라고 스포츠한국 인터뷰에서 밝혔더군요. (경찰의 주의도 없어졌을 때 집이 비워진 틈을 타 하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도 있었을 거라며.. 제가 굳이 반박하면 현실적으로는 평생 수배자로서 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냐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남겨진 가족에게도 폐고요.) 위 댓글에서도 그가 사건 후 미안해 하고 있었다는 언급이 나왔는데, 글의 요지에 대한 한 가지 반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BeGray 2019.06.25 23:29 신고 Modify/Delete

      -음? 봉준호 감독을 비판하니 마니는 이 글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이 글의 목적은 <기생충>이란 텍스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에 있죠. 당연히 해석이 갈릴 수 있는 지점들이 여럿일텐데(이건 일단 '과학적' 분석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이걸 추측-가설-결론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하시는 게 제가 이 글에서 따르고 있는 비평적 글쓰기의 전통에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시하는 해석에서 동의할 수 없거나 납득이 안 되는 지점이 있다면 근거를 들어 지적하고 다른 해석을 제시해주면 되는 일이니까요 ㅎㅎ

      - "아주 약간의 체념"이 실제로 무엇을 어느 정도 의미하는지는 사람들마다 다르겠습니다만, 진짜로 완전하게 비관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80년대로부터의 파생형 서사 자체를 쓰지 않았을--그리고 더 완벽하게 '구원'의 여지 자체를 남겨두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BeCynical 님을 포함한 여러 시청자들이 '절대적 격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시는 것과, 제가 이 영화에서 '낭만주의적' 모멘트를 읽는 것과 양립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당연히 이 영화가 진짜로 말하는 건 기우가 돈을 모을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런 해석은 영화의 명백한 우화적 성격을 무시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주장이죠.

      -기태(송광호 분)가 박 사장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자기 형벌'을 가한다는 것이 글의 요지에 어떻게 반박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냄새'를 계급갈등의 기호로 반복적으로 차용하고 있고 그 냄새에 대한 박 사장의 거부감 표현이 기태의 살인충동을 불러온 것은, 다시 말해 계급갈등의 모티프가 영화 클라이막스의 핵심적인 논리로 쓰이는 건 매우 명확한 일이니까요. 두 가지가 양립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 BeCynical 2019.07.02 16:35 Modify/Delete

      1. 일단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감독이 인터뷰에서 문광의 이른바 '종북 개그'가 한반도 정세를 은유한 것 아니냐는 칸 현지에서의 질문에 남한에서 흔한 개그일 뿐이라고 응수한 것 등을 보며 과한 의미 부여를 지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보니 감독이 여러 곳에서 은근히 너스레를 떨곤 하는 게 눈에 띄어서 좀 재고해 봐야겠네요. 근세 부부를 NL 운동권으로 확고하게 단정 지을 수 있느냐는 것 등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 근세의 과한 '리스펙트' 운운도 그렇고 그 점은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2. 다만 아직도 생각을 달리하는 점은, 마찬가지로 일종의 우화적 성격을 띠었던 전작들인 괴물과 설국열차, 옥자에서 결말이 미적지근하게나마 일말의 희망의 여지를 남겨둔 반면, 기생충에서는 기우가 (아마도 영원히) 계속 지하실에 갇혀 있고 기택을 만나리라는 희망이 우화 속에서마저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서 수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준 점에 대한 것인데, 제가 이 영화의 명백한 우화적 성격을 무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좀 섭섭합니다. ㅎㅎ 말씀하신 대로 봉준호 감독이 80년대의 기억을 여러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계급갈등이 영화 클라이맥스의 핵심적 원리라고 하신 것 역시 당연히 동의합니다.), 그는 아마 이 '우화적'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모종의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겠지만, 저는 그가 이 영화의 결말 처리 방식을 이전의 몇몇 작품과 다르게 한 것이(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 마더는 제가 보지 못했기에 지금 제가 하는 말의 기초가 좀 허약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드네요..) 다른 많은 관객들에게 더 큰 심리적 반응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고 다름아닌 제가 그랬거든요. '아주 약간의 체념'이라고 표현하신 것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개인적으로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라 생각하고 봉준호 감독이 결말을 그렇게 처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어떤 취지로 말씀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 BeCynical 2019.07.02 16:49 Modify/Delete

      3. 굳이 사족인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이자면, - 나그네님 댓글을 읽고 생각 난 것입니다만 - 86세대의 자녀 세대로서 큰 정치적 격변들이 일어난 이후에도 어떤 문제들은 계속 잔존하고 있는 것을 보다보니(어떤 점은 도리어 악화되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도 제가 (사건 이후에 보여주는) 결말의 체념에 더 주목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제가 대표성을 띤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ㅎㅎ;

    • BeGray 2019.07.08 11:52 신고 Modify/Delete

      2, 3. 아마 물 반 잔을 놓고 "밖에 안 남았네"와 "만큼이나 남았네"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ㅎㅎㅎ 물론 <괴물>과 같은 영화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어두운 전망을 보여준다는 점에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습니다. 특히 86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공유하던 서사를 지탱해주던 중심동력 자체가 붕괴한 세계이기도 한 거니까요. (아마도 그러한 전망이 특히 2000년대 이후 많은 급진좌파이론가들이 '정치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종교에 가깝게 가버린 이유이지 않을까 합니다)

  6. 나그네 2019.06.27 11:27 Modify/Delete Reply

    첫번째 포인트에는 공감합니다. 저 역시도 유일한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아무튼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만한 이야기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20년간 나온 이야기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세계적으로 발전이 진행되고 국가들간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반면에, 국가들 안에서의 격차는 커져왔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는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저야 영화광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불평등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근래에 꽤 많이 상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Begray님 말대로 이게 (신)좌파의 전형적인 내러티브이기도 해서 그게 이 영화의 수상이나 호평에도 분명 영향을 줬을겁니다.

    두번째 포인트는 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운동권의 이면이라기 보다는 80년대를 기억할때 드러나는 비대칭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일반시민들에게 87년 6월은 민주화라는 키워드로 기억되는 반면 뒤이어 일어난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잊혀진채로 남아있습니다. 맞습니다. 운동권의 변절, 이탈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문학장에서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든 여러방식으로 다뤄진바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공교육 과정의 교과서가 요즘 어떻게 나오나 찾아보지 않아서, 그리고 미디어에서 그간 어떻게 다뤄졌는지 잘 몰라서 말하기 좀 조심스러운데) 일반시민들에게는 낮설거나 아니면 문학에서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대간의 대화라는걸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뭐 대단한건 아니구요. 당신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불평등 (분명 80년대와 19년은 다릅니다만)에 대해서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자와 빈자가 함께 살아가는 것, 소위 공존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어봤으면 하는 소망이었습니다. ㅎㅎ
    만약 1987같은 영화를 부자가 함께 봤다면, 민주화는 웃으면서 대화 할 수 있는 주제였겠지만, 이건 그런 주제도 아니고 특히나 이제 막 20대 초반의 성인이 되는 586세대의 자식들에게는 좋은 학습의 시간이 될거라는 소망(?)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빛과 어둠의 중간, 회색지대 (grey zone). 그게 성인들이 사는 세상이니까요. 1987이 빛이라면 기생충은 감히 어둠이라고 말해봅니다. 우리 역사는 둘다 보여주고, 20살 넘는 성인이라면 둘다 알아야죠. 이런게 제가 생각하는 성인식이네요.

    • BeGray 2019.07.08 11:56 신고 Modify/Delete

      2. 말씀하신 지점은 정말로 앞으로의 연구자들/기록자들에게 남겨진 책임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특정한 386 서사들이 차지하고 있던 과대대표되던 위치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는데, 아마 그게 제가 (여전히 그 시대의 감각에서 세계를 서술하는) 이 영화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이지 않을까 하네요.

      3. 아마 20대 못지않게 586에게도 다시 한번의 성인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ㅎㅎ 과거 그 시절의 도식을 그대로 갖고 지금을 제대로 이야기하기는 정말 어려우니까요.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