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역사와 위기에 대한 두 권의 책: 『외줄산책』과 『대학과 권력』

Reading 2018. 10. 27. 03:12

본문의 글은 『학산문학』 100호(2018년 여름)에 게재된 서평 원고를 옮긴 것이다. 원래 수개월 전에 업로드해야할 글이었으나, 여러 사정상 지금에야 올리게 되었다. 대학과 고등교육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정작 한국에서 제대로 된 논의나 자료는 찾기 힘들며, 누군가가 무언가 나중의 씨앗이 될만한 걸 이야기한다 해도 이를 적절하게 받아 응답해줄 상대방 또한 드물다. 이 서평은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응답을 위해 쓰여졌고, 이 응답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의 재응답을 받기를 희망한다.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우창, 「대학의 역사와 위기에 대한 두 권의 책: 『외줄산책』과 『대학과 권력』」, 『학산문학』 100(2018 여름): 296-315.


출판된 원고는 다음 파일을 참고하라.

이우창_대학의 역사와 위기에 대한 두 권의 책[서평](2018).pdf




대학의 역사와 위기에 대한 두 권의 책: 『외줄산책』과 『대학과 권력』


이재임 외. 『외줄산책: 탈대학』. 외줄산책 편집부, 2017년 10월.

김정인. 『대학과 권력: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8년 2월.


모두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정도로 자주 발화되는 일상적 현실이 되었으나, 정작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고투하는 만족할만한 지적 작업은 찾기 어려운 말 중 하나가 ‘대학의 위기’다. 일견 상충하는 듯한 두 현실은 실제로는 후자의 상황이 다시금 전자의 조건이 되고 전자가 다시 후자의 빈곤한 상황을 납득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기묘한 상호공생관계에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 사이에 발간된 두 개의 텍스트는 이 악순환을 넘어서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나는 그 시도의 성패와 무관하게 이러한 작업들이 존중되어야 하며, 나아가 단순한 존중에 그치는 대신 주의 깊은 검토를 요구한다고 믿는다―정확히 후자의 대응이야말로 진지한 실천적 고민에 유일하게 값하는 예의의 형식인 것이다. 본 서평은 그러한 마음의 표현이다.1)


1. 이재임 외. 『외줄산책: 탈대학』. 외줄산책 편집부, 2017년 10월.


나는 (대학연구네트워크 연재취지문[http://renetuniv.tistory.com/19]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 딱 200부만이 존재하는 아주 작은 독립출판물” 『외줄산책: 탈대학』을, 그러니까 이백권 중 한 권을 직접 받아 읽은 소수의 독자들 중 한 명이다. 나의 행운은 곧 그러한 행운을 공유하지 못한 다른 독자들과 나의 독서경험이 다를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업로드된 블로그 연재를 접한 독자들이 『외줄산책』을 여덟 편의 독립적인 글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면, 내게 『외줄산책』은 무엇보다도 그 물질적인 면모에서 한 권의 책이었다. 본 서평은 독서경험에 개입한 이처럼 우연적인 물질성을 붙들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즉 나는 여덟 편의 분리된 글로서라기보다는 나름의 완결성을 갖춘 한 권의 책으로 『외줄산책』을 읽고 싶다.


1) 『외줄산책』은 무엇을 왜 말하고자 하는가? 편집장의 머리말은 “대학의 기능과 위치와 역할을 다시 사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다(5). 우리는 이 언뜻 분명한 말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압축된 언어는 마치 딱딱하게 굳은 빵이 뜨거운 수프 속에서 다시 부드럽게 원기를 얻듯 전체를 돌아본 다음 또 한 번 읽을 때에야 그 생동감을 되살릴 수 있다. 박규민의 첫 글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훌륭한 입구가 된다. 일종의 문학적 초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필자의 친구 K에게 대학 선배들에게 들은 대학생활의 지침들은 “결국은 다 쓸모없는 소리들”이었으며(10), 그는 “대학이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11). 대학이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의미들이 손끝만 닿아도 바스러지는 재처럼 퇴색하여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무언가로만 남은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오직 그것들이 K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 뿐이다. 그는 대학에 의미와 기능을 부여하고자 하는 갖가지 시도들을 향해 “왜 꼭 대학에서 그런 걸 해야 되냐”고 반문한다(11). 독자는 다시 묻게 된다. 그럼 대학에서 해야 하는 게 무엇인가?

이어지는 이재임·심기용·권영민·이시훈의 글은 위의 질문에 대해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려는 노력들로 읽힌다. 비록 “좋아서 했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라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이재임이 그리는 자신의 교지활동기록은 ‘대학에서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규범적인 상을 함축하고 있다(17). “대학 언론이 기성 언론이나 학생 커뮤니티 사이트, SNS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대학언론의 시대적 역할은 무엇인가?”(17)라는 물음에 뒤이어 “학내언론이야말로 공론장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곳”,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문제의식이 희박한 사회에서, 대학교의 주권을 가지는 학생으로서의 주인의식”을 생성하고 “그런 학생들을 기르는 현장의 공간이자, 그 지점들을 학생들에게 일깨워줄 수 있는 담론의 장”과 같은 규정들이 줄기차게 등장한다(18-19). 그러나 필자는 곧바로 이러한 규정들이 더 이상 실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한다. 교지는 변화하는 시대의 고삐를 그러쥐는 데 실패했고,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거센 시간의 풍압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허물어지고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글에서 교지의 실패가 어느새 대학의 실패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지의 사명은 “사회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와 무기로서의 학문,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사명과 이어져 있고 따라서 교지의 실패는 대학의 실패이기도 하다(19). “교지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대학 내부에서의 사유의 실종과 파편화된 학생 사회 내 정치적 주체임을 자각하지 못한 개인들의 사이에서 허물어져 가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20).

현재를 “탈대학의 시대”로 규정하는 심기용의 글은 유사한 위기의식을 공유하면서도 대학의 성격을 재규정하는 과정을 통해 좀 더 분명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학은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 발전을 이끄는 기관”이어야 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탈대학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25). “인문학의 위기”, “탈정치”의 문제, “현장”의 강조로 이어지는 이 글의 논리적 흐름은 대학의 본령을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다소 거리를 두고 받아들일) 인문학적 학문과 정치적 실천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연구·담론형성을 수행하는―적어도 그런 역량을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대학인들”이 현장에서 담론을 발전·재생산하고, 발전된 담론·분석이 다시 현장의 실천에 기여하는 선순환의 고리를 복원하는 것이 대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대안으로 제시된다(29). 이 책 전체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띤 권영민의 글 또한 “대학에서의 글쓰기, 수업 방식, 입시, 서열화, 계급과 직업의 배분 관계 전체를 변형”시키는, 즉 대학 내에서의 “탈―구축 de-construction”으로서 “비판으로서의 교양교육”을 말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39).

책 후반부에 위치한 두 편의 작업, 즉 이시훈과 김현진의 작업은 다른 글들에서 상대적으로 비가시적으로 남아 있던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격차·서열화를 좀 더 전면에 위치시킨다. 김현진의 만화가 이 문제를 ‘지방 대학생’으로서의 정체성·자존심과 (수도권 대학생들에게만 그 실현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인정욕망 사이의 해소불가능한 간극을 통해 드러낸다면, 아마도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정념을 응축하고 있을 이시훈의 글은 여기에 혁명적 주체론의 논리를 접목시키면서 상당히 흥미로운 전도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한 번 더 주목을 요한다. 첫 번째로 “해방구이자 자유와 민주의 요람, 혁명의 산파였던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에서 [...] 욕망과 생존의 문법에 포획당했다”는 ‘대학의 몰락’ 서사가 있고(43), 두 번째로는 “서울과 지방의 제국-식민지 구조”에 의해 지방의 대학(생)들을 열등한 약탈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공간적 서열화에 대한 지적이 있으며(45-50), 마지막으로 (다소 김홍중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지방 대학생 주체의 유형론을 통해 혁명적 주체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선언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다. 요컨대 “경계를 오가고,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에게서만 자랄 수 있는 그 마음, 그 감각, 그 시선”에서부터 혁명적 주체가 자라나는 것이라 한다면, ‘우월한’ 서울의 대학생들이 아닌 “지잡대생”이야말로 사회모순을 누구보다 강렬하게 직면하기 때문에 진정한 “변화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해진다(56-57).



2) 각자의 미세한 인식·지향의 차이를 접어둔다면 우리는 필자들이 다음과 같은 서사를 공통의 뼈대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학의 진정한 소명은 사회를 지적·정신적으로 지도·계몽·변혁하는 데 있으며, 오늘날 대학의 죽음은 자신의 소명을 상실하고 더 이상 시대적 사명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재구축·부활은 이러한 소명을 다시 일깨우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서 나의 관심사는 이러한 논리구조 자체를 자세히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데 있지 않다.2) 내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이와 같은 ‘대학의 몰락’의 서사가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조건 하에서 배태된 대학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학론에 따르면 대학(생)은 사회변혁운동의 중요한 주체이며,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이야말로 대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된다. 직접적으로는 1960년대 이래의 학생운동, 보다 멀게는 ‘청년지식인’에게 역사발전의 주체라는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했던 개화기의 근대화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논리는 오로지 다음의 두 가지 특수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만 현실적인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민족국가의 근대화 또는 독재정권의 타도와 같이 전체 대학생 집단을 포괄적으로 호명·동원할 수 있는 전(全) 사회적 목표가 존재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대학생집단에게 사회 전체를 지도할 수 있는 특권적 위상이 부여되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두 조건은 1987년 이후 철저히 붕괴되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함께 포용할 수 있었던 민중주의는 민주화와 함께 다양한 운동들로의 분화가 개시되면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포괄적인 기표로 기능할 수 없었다. 더불어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이 1985년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의 36.4%에서 2000년대 이래 70%를 넘을 정도로 증가하면서 대학생은 더 이상 미래의 엘리트·사회지도층으로 여겨질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회 제반 영역의 독립분화 및 전문화 정도가 급격히 상승했고, 2000년대 이후로 대학생이 사회의 주요한 문제에 지적인 권위를 보유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당사자인 대학생들에게조차도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이제 대학생은 사회변혁·계몽의 주체라기보다는 전공지식, 그것도 기껏해야 전문적인 지식으로 가는 문턱 정도로 취급되는 ‘학부전공수준’의 지식을 교육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1990년대 말 이후 학부졸업생 구직자가 흘러넘치는 상황은 대학생의 시장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 또한 빠르게 하강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제공했다. 한편으로는 구직자 개개인들이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외 시장경쟁에서 한국의 기업들이 더 높은 경쟁률을 갖출 수 있도록 대학생들은 더 유용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으며 이전까지 충분히 만족스러운 교육을 제공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던 한국의 대학들 또한 더 엄격한 교육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제껏 사실상 방치되었던 연구자들 또한 지금부터는 강제로라도 연구를 해서 실적으로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정책적 관리의 대상에 포함되게 된다.

대학과 대학생의 위상, 양자를 둘러싼 조건이 급격히 변화해온 지난 30년간 학생운동과 운동의 대학론은 그 존재근거를 상실했다. 이것들은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서사를 유지할 수 없었다. 권영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학 외부에서 주어진] ‘필요를 위한 앎’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대학(39), 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 스스로의 역할을 규정하는 또 다른 대학론의 서사는 오늘날 마침내 오랜 경쟁자를 굴복시키고 변두리로 추방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후자의 승리는 결코 단순히 “신자유주의”의―이 말은 종종 사태에 대한 몰인식을 덮어주는 용도로 쓰이곤 한다―대두 혹은 경제위기의 결과가 아니며, 전자가 더 이상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서사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된 사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같이 도덕적 지상명령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던 사회적 목표는 오늘날 부재하며, 이제 자기 자신들에게조차도 그 능력을 신뢰받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집단적 사명을 부여받은 특권적 주체로 호명되기란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신자유주의나 속물화 같은 추상적인 외부요인에 의해 ‘대학의 몰락’이 초래되었으니 그것들만 극복하면―그러나 그것들이 그토록 초월적인 힘을 지녔다고 상정해 버린 뒤에 그걸 극복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과거의 대학이 되돌아오리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추상으로의 도피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현재 우리 대학의 역할을 규정하는 서사, 즉 한편으로 학생들이 졸업 후 더 좋은 경제적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기업의 산업경쟁력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생산하는 것이 대학의 유일한 역할이라는 이야기가 필연적이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로지 협소한 의미의 경제적인 활동으로 한정하기엔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한 측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등교육이 그러한 영역들을―예컨대 정치적 삶을―무시해도 상관없다는 믿음은 그로 인한 대가를 고려하지 않은 순진함의 표시다. 실제로 학교본부의 독단적 운영이 학생사회의 더 큰 반발을 초래한 지난 수 년 간의 사례들은 우리가 대학 자체의 보다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조차 경제적인 측면 이상의 요소들을 고려해야 함을 보여준다. 현재의 지배적인 대학론은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하며, 우리는 이를 위해서 현재의 대학론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대학론의 서사를 발명해야 한다. 그러나 새롭고 강력한 대안적 서사의 발명은 그저 과거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데서 시작될 수 없다. 대안적 대학론이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모델에 부합하는 ‘대학의 역할’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필요로 하며,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대학론은, 심기용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대학을 자신의 현장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외줄산책』은 정말로 과거와 미래의 경계선 상에 놓인 텍스트이며, 나는 여기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미래로의 첫 걸음이 뻗어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2. 김정인. 『대학과 권력: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8년 2월.


1)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를 다루려는 야심찬 시도인 『대학과 권력』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시대별로 나뉜 4부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는 다시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타율의 긴 그림자, 대학의 탄생”은 19세기 후반 개화기부터 전후(戰後) 1950년대 미국 원조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고등교육기구가 자리 잡는 과정을 그린다. 해방 전 식민지기 고등교육을 소개하는 1부 1장 “식민권력이 만든 관학, 경성제국대학”은 제목이 지시하듯 식민지기 일본 정부에 의한 경성제국대학 설치·운영과정을 중심으로 하되 그 외의 사립전문학교 운영 및 (결국 해방 후에나 성사될) 사립대학 설치시도를 아울러 다룬다. 저자는 경성제국대학은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전쟁동원기구처럼 운영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인 학생의 수보다 일본인 학생의 수가 더 많았기에 조선인들조차 거리감을 느끼는 “환영받지 못한 타자”였다고 설명한다(45).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의 통제 하에 놓인 제국대학 외에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대학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는 대학보다 낮은 위상의 전문학교만을 허가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로막혔고, 사립대학의 본격적인 등장은 해방 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2장 “대학 재건과 개조의 권력, 미국”은 해방 후 미군정기에서 1950년대까지 한국에서 대학교육의 기본적인 토대가 들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2장의 초점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미군정에 의해 각 지방마다 국립대학이 설치되고 또 그 이상으로 많은 사립대학이 인가를 받는 과정 및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파동 등 그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갈등·문제를 조명하는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가 그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미네소타 계획을 포함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로부터의 원조가 전후 한국대학교육에 어떻게 투입되었는가에 있다. 후자는 고등교육분야를 담당하는 인적 자원을 육성할 필요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던 미국 유학생의 증가 및 그로 인한 유학파의 형성·영향을 포함한다. 미군정은 점차 현실화되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체제경쟁을 염두에 두면서 남한에 ‘민주주의적’ 교육 체제를 심고자 했다. 이는 한편으로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식 모델이 아닌 미국 주립대학 모델을 염두에 둔 국립 종합대학, 즉 서울대학교를 설치하고 그에 대해 최대한의 자원을 투여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여러 사립대학의 설립을 (비교적 덜 엄격한 기준 하에) 인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저자가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나, 2장은 전후 세계에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해 가던 미국인들의 전략적 고려, 그리고 그것을 수월하게 실현하기에 무엇보다 물적·인적 자원의 부족을 포함해 여러 가지 제약이 존재했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해방 후의 한국 대학교육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대학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대목은 해방 후부터 4.19까지, 즉 이승만 정권기에 초점을 맞춘 2부 “사학 주도 대학권력의 형성”이다. 아마도 1부 1장이 ‘관학의 타율성’을 비판했음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2부 1·2장의 제목이 각각 “국가의 방관 속에 성장한 사립대학”과 “사학 중심 대학권력의 탄생”임을 보면서 이제 저자의 비판점이 정부가 충분히 개입하지 않아 사립대학이 난립하게 된 정황으로 옮겨감을 알 수 있다. 세부적인 논의와 별개로 2부 전체의 기본적인 틀은 다음과 같다. 해방 후 한국사회의 매우 높은 교육열은 고등교육, 그러니까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열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더불어 국가를 재건하고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고등교육을 수학한 인적 자원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적어도 정부의 정책결정권자들에겐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에 대학을 사회의 수요에 부합하는 만큼 설치하고 운영할만한 자원과 역량 혹은 그를 투입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었다. 대신 정부는 직접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여러 사적 주체들에게 관대한 인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를 다소 낮은 질을 감수하더라도 민간 차원에서 충족시키고자 했고, 이는 책임감 있는 고등교육의 실천보다는 등록금 수입의 확보에 열을 올리는 수준 이하의 사립대학들이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정상적인 고등교육환경을 위해 요구되는 학생 정원수를 훌쩍 뛰어넘어 입학생을 받는 문제를 포함해 사립대학의 개혁 필요성을 외치는 요구가 커진 것은 당연했다. 1950년대 동안 정부의 대학통제시도에서는 최소한의 교육적 기준을 설정하고 대학들이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이를 강요할 현실적인 역량은 부재했을 뿐더러, 동시에 규제로 인해 사립대학이 고사(枯死) 또는 과도하게 반발하는 결과는 피하고자 하는 복잡한 태도가 드러난다. 요컨대 규제가 설정한 목표와 그에 턱없이 못 미치는 현실 사이의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을 어떻게 적절한 범위 내에서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한국 행정가들에게 매우 익숙한 문제는 고등교육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부는 사립대학의 주요 지도자들의 친일-반공 문제에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지만, 이 책이 기본적으로 정책사로서의 대학사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저 행정의 딜레마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3부 “국가 주도 대학교육 시대의 개막”은 1960-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대학정책을 살펴본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정권의 가장 중요한 기치 중 하나가 “조국 근대화”였다면, 이는 교육정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대학에는 산업화, 공업화를 이끌 고급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강도 높은 근대화가 요구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이를 위해 1950년대식 대학 방임정책에서 벗어나 대학에 대한 확고한 관리 체제를 마련하고자 했”다(169-70). 정부는 “대학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재정 지원을 통해 대학의 발전경로를 지정할 수 있었고 대학은 재정 지원 앞에서 “국가 차원의 요구에 부응하거나 끌려가는 타율적 근대화”에 별 거부감 없이 복무했다(175). 저자는 1960년대 동안 “사학이 이끄는 대학권력은 국가 관리 체제 안으로 끌려 들어”가 결국 “대학 근대화의 방향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정부와 대학 모두 이공계 중심의 인력 개발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아졌다”고 설명한다(169-70). 물론 이 과정은 이어서 서술되듯 그다지 매끄럽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군사정권 초기의 ‘대학 정비’ 주요구상 및 그 사유는 이전까지 대학교육에 제기되었던 여러 비판을 수용한 것이었으나 1년 여 만에 여러 반발에 직면해 후퇴했다(178-79). 이후 1960년대 말까지 국가의 대학운영관리는 점차 체계화되어, 사립대학 정원 초과를 단속하면서도 이공계 증원정책을 추진했으며, 대학 입학·등록·졸업과 같은 주요 사항의 자격기준을 직접 관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 쪽을 조이고 다른 쪽을 푸는 보다 진일보한 대학관리기술의 핵심은 사립대학 정원을 통제하되 국가에 의한 대학 재정지원 사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대학이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이 시기에 국가-대학-산업개발 간의 연계가 확립되었다. 2장 “국가 주도형 대학 개혁, 실험대학”은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1970년대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국가가 본격적으로 개혁에 착수하는 과정을 살핀다. 개혁안의 핵심은 “실험대학정책, 대학 특성화정책, 장기적 정책 연구”로 요약될 수 있었고(211), 저자는 그중에서도 일부 우수한 대학을 선별하여 미국·서구 대학의 제도를 적용하는 실험대학정책에 주목한다. 졸업필수 학점의 조정, 복수전공·부전공제, 계절학기제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여러 제도들을 도입한 실험대학은 당시의 평가는 높지 않았으나 재정지원체계를 통해 사립대학을 좀 더 정부에 종속시켰으며 그 기본적인 틀은 대표적으로 대학평가제도의 예에서처럼 이후의 대학교육정책에도 이어졌다.

4부 “시장권력에 포섭된 대학”은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등장부터 오늘날 2010년대 중반까지 40년이 조금 못 되는 기간을 다룬다. 1장 “대학교육의 대중화와 대학 민주화”는 대학교육이 점차 대중화되는 상황에서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어떤 대학정책을 취했나를 살핀다. 저자는 우선 대학교육개혁, 대학원교육과정의 증대, 대학평가제도를 주요한 키워드로 제시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추진했던 대학교육정책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장에서 저자가 보다 주의를 기울이는 지점은 국가와 대학의 관계가 또 다시 변화한 것이다. 박정희 사후 다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는 많은 이의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대학의 학생·교수집단은 민주화와 자주화를 기치로 삼고 집단적 행동을 개시했다. 1987년 문교부는 결국 총장직선제와 사립대학 등록금책정의 자율화를 골자로 대학 자율화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기에 이르러 1990년 “사학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사학에 대한 행정 감독권을 축소해 재단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졸속으로 통과되면서 국가의 직접적인 대학교육 개입이 축소된 대신 사립대학의 재단 이사장에게 막강한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269-70). 저자는 이 과정을 사학 재단과 노태우 정권이 협력하여 “학원 안정화”의 기치 하에 대학 내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구도로 설명한다. 정권의 묵인 하에 대학구성원을 좌지우지하면서 누구에게도 견제 받지 않는 위치에 놓인 사학 재단은 갖가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4부 2장부터 에필로그까지는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의 대학교육을 서술하는데, 2장의 제목 “대학교육 보편화와 시장주의적 대학 개혁”이 제시하는 두 키워드 중에서 저자가 집중하는 것은 단연 후자다. ‘시장주의적 대학 개혁’은 다시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김영삼 정권에서부터 채택된 “정부 규제를 줄이고 사회적 조절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이며(292) 다른 하나는 대학이 시장논리·기업권력에 종속되었다는 ‘타락’의 서사다. 저자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시장에 포획되었”으며 “대학은 시장권력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 그 지배를 받아들였다”는 (다소 단순화된) 인식을 지난 30년 간 대학교육에 나타난 변화의 핵심으로 규정한다(306). 1995년 김영삼 정권의 5·31 교육개혁안은 이제 시장기능에 대학교육의 향방을 맡긴다는 관점 하에 “새로운 공급자의 시장 진입을 허용한다는 대학설립준칙주의와 기존 공급자의 공급량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실시한 대학 정원 자율화정책”을 채택했다(307). 이로 인해 대학과 대학생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대학 간의 경쟁이 강화되면서 대기업이 대학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삼성의 성균관대학교 인수, 두산의 중앙대 인수가 보여주듯 대기업이 직접 대학을 운영하는 경우 외에도 대기업이 산합협동을 통해 대학에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아예 정부를 통해 대학 정책에 기업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학이 고유의 학적인 목표를 잃고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을 양성하는 훈련소”로 전락했으며(310) 나아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기업적 운영방침을 따르는 경우가 일상화되었다고 비판한다. 에필로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학 구조 조정을 계기로 하는) “대학의 공공성 회복”, “대학 양극화 문제”의 해결, 연구중심대학·교육중심대학의 구별과 같은 “대학 특성화”의 구현, 대학 자율성의 회복 등의 해법을 제시한다.



2) 역사학이 근대학문으로서 가진 특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독자라면, 역사학이 단순히 사료를 실증적으로 쌓아놓은 것으로 갈음될 수 없으며 모든 역사기술은 역사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기보다는 저자의 관심사와 서사적 기법에 따라 대상의 특정한 면모를 재구성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이는 차라리 역사기술 또한 그 일부에 속하는 글쓰기 일반의 조건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학과 권력』이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역사서인지 질문하게 된다. 위의 요약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이 책은 대학교육의 여러 영역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대학사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대학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기술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중에서도 저자의 가장 깊은 관심은 대학의 운영과 개혁을 둘러싸고 정부의 통제방식이 어떤 방식으로 변해왔는가에 있다. 나는 ‘국가의 역할’을 중심으로 대학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폄하되어서는 안 되며, 이 책이 최근에야 국가·정부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 질문할 필요성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 음미할 지점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내가 불만을 느끼는 지점은 『대학과 권력』이 그러한 시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잘 수행했느냐에 있다. 구체적으로 나는 크게 네 가지 지점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첫째, 책 전체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로 제시되는 “자율(성)”의 개념과 용법이다. 앞서 설명하였듯 『대학과 권력』은 누가 대학 운영·개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를 중심질문으로 채택한다. 대학 운영의 주체를 국가·(사립)대학재단·시장의 세 가지 선택지로 단순화하는 뭉툭한 구도가 얼마나 유효한지도 의문이지만, 좀 더 심각한 서술상의 약점은 종종 자율 대 타율이라는 (특정한 가치체계가 강력하게 반영된) 구도에 따른 가치판단에 있다. 저자는 국가·기업·재단의 대학정책·운영을 모두 대학의 타율적 운영이라고 비판하며 대학 자율성의 회복을 궁극적인 지향점 중 하나로 제시한다. 문제는 정확히 무엇이 대학의 자율인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대학의 자율이 왜 최선의 가치인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대학재단과 이사회는 자신들의 대학운영권 보장이 곧 진정한 자율성의 실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교수협의회는 교수들의 대학지배를, 직원·학생사회는 다시 자신들의 대학운영 참여가 보장되는 상황이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적인 대학 자율성의 보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사립대학의 대학(원)생 인권문제를 들여다본다면 그중에서는 교육부가 개입해서 재단·교수진의 전횡을 통제할 때만 학생의 자율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즉 그 자체로 매우 상이한 대학 통치모델을 아울러 지칭할 수 있는 “대학의 자율”은 지금보다 정밀한 이론적 검토 없이는 한갓 관념적인 구호로 그칠 위험이 있다. 더불어 자율성의 이념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율성을 행사하는 행위자의 역량·책임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저자 자신이 인정하듯 한국 대학사의 여러 국면에서 대학 및 구성원들에게 그러한 역량·책임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순간에 국가의 대학개혁을 (그 부작용을 분명히 인정한다고 해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는 서술인지는 의문이 든다.

둘째, 마찬가지로 책 전체의 서술에서 기둥과 같은 위치를 점하는 “권력”의 개념과 용법 또한 충분한 고민 끝에 선택되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중 상대적으로 그나마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국가권력조차도 특수한 역사적 시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정부·의회·비정부 행위자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버린다는 점에서 역사적 현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될 위험이 있다. 대학권력과 시장권력 또한 서로 상이한 목적·이해관계·영향력을 가진 다수의 행위자들을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특정한 도덕-정치적 구호로는 효용성이 있지만 오늘날의 역사적 연구에 적합한 방법론적 선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저자는 (한국에 저작 다수가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은) 미셸 푸코의 텍스트들을 포함해 ‘권력’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고민하는 현대적인 연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의 학술장에서는 ‘이론적 고민’이란 말이 역사학자가 푸닥거리를 해서라도 쫓아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받는 일이 흔하지만, 연구자가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범주·논리의 엄밀함을 기하지 않으면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반지성주의적 태도일 뿐이다.

셋째, 좋든 싫든 현대의 대학들이 서구,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영미 대학의 모델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오늘날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에도 이 책은 영어권 대학교육 연구를 놀라울 정도로 인용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목록은 소수의 일본어 문헌을 제외하고 전부 한국어 문헌만을 인용하고 있는데, 비록 영어권 연구서 일부가 국역본으로 참고되기는 하지만, 영어권 대학사 연구가 한국어 학술장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영어로 된 연구문헌을 전혀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다루는 연구서로서 심각한 약점일 수밖에 없다.3) 한국문학·한국사학과 전공자들이 발표하는 한국 근현대에 대한 연구 상당수는 여전히 영어권 1·2차 문헌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학과 권력』도 이 문제에서 예외는 아니다. 저자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전제하는 대학의 규범적 가치 중 상당수는 서구 대학사에서조차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들이며, 거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없는 한 이러한 연구는 그 자신이 비판하는 ‘지식의 식민주의적 조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넷째, 상기한 약점들이 맞물려 특히 1987년 이후의 여러 가지 변화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해방 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약 30년 동안에 책 절반이 할애되는데 비해 1987년 이후의 대학사는 약 본문의 1/8 정도만이 배정되며, 그나마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시장논리의 침투·대학의 기업화 등에 서술이 집중되는 상황이 이 시기 한국의 대학이 맞이한 커다란 변화를 충분히 설명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저자가 대학정책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박정희 정권 이후 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설명을 고려할 때 『대학과 권력』이 모든 내용을 다 담아야 했다고 지적할 수는 없다.4) 그러나 책 전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필로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저자의 목표 중 하나가 한국 대학사의 고찰을 통해 오늘날 대학의 위기를 돌파하는 데 있다면, 이처럼 단순화된 설명을 토대로 오늘날 대학이 직면한 여러 어려움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교양교육부터 대학원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교육모델에 대한 고민부터 부재한 오늘날의 대학 현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 연구자라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들이 2010년대 말에도 설득력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또는 낡았다고 느낄 것이다.5)

지금까지 한국에서 대학교육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놀라울 정도로 빈약했음을 고려할 때, 『대학과 권력』이 대학사 연구를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은 드문 저작 중 하나임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저작의 가치는 이 책 혹은 저자가 제시하는 관점이 대학사 연구의 본격적인 틀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책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수많은 영역들에 대한 조명이 이제부터 비추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정되는 것이 맞다. 가령 우리는 여성학생수의 증가에 따라 대학학생집단의 문화와 성격이 어떻게 변했는지, 교육과정과 커리큘럼이 어떤 식으로 바뀌어왔는지, 대학 내 행정조직의 역사나 교육·연구·재정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또 어떻게 움직여왔는지 등 『대학과 권력』이 다루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중요성에 있어 결코 덜하지 않은 여러 주제들에 대한 연구가 과제로 남아있음을 알고 있다. 위기에 대한 답변은 바로 그러한 연구들이 우리 곁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1) 초고를 읽어준 이송희 님, 그리고 이 주제를 글로 쓸 계기를 마련해준 대학연구네트워크 구성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2) 나는 「헬조선 담론의 기원: 발전론적 서사와 역사의 주체 연구, 1987-2016」에서 이러한 작업을 다소 포괄적으로나마 시도했다. 이 논문은 <https://sphil.jams.or.kr/po/volisse/sjPubsArtiPopView.kci?soceId=INS000000424&artiId=SJ0000000312&sereId=SER000000001&submCnt=2&indexNo=2>에서 무료로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3) 나 자신 또한 이 분야를 연구한 적이 없으나 몇 가지 참고할 만한 텍스트를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Altbach, Philip G, Robert O. Berdahl, and Patricia J. Gumport eds. American Higher Educa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Challenges. 4th ed.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6; Geiger, Roger L. The History of American Higher Education: Learning and Culture from the Founding to World War II.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Walter Ruegg ed. A History of the University in Europe. 4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2011 은 중세부터 1992년까지 유럽대학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다.


4) 김지훈, 「한국 대학, 그 오욕과 회한의 100년사」, 『한겨레』 2018년 2월 9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31525.html>에서 하단의 상자 참조.


5) 최근의 중요한 문건으로 2018년도 서울대학교 총장선출과정에서 총장예비후보들의 정책을 평가·검토하기 위해 학부·대학원 총학생회가 작성한 (“총장입학자격시험”이란 별명이 붙은) 질문지를 보라(https://www.facebook.com/snugsc/posts/1893870757330790 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이 질문지는 폭과 깊이 모두에서 현재 대학생들이 대학에 바라보는 관점이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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