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Reading 2019. 5. 5. 23:15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대담,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상길·배세진 역, 킹콩북, 2019(원저는 2010 출판, 저본이 된 해당 대담은 1988) 을 쉬는 시간에 간략히 읽었다. 8쪽 정도의 역자 후기를 빼고 샤르티에의 서문부터 마지막 대담까지 한 손을 펼친 것보다 약간 더 큰 판형으로 130쪽이 조금 안 되는, 언제든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부르디외에 관해서는 문외한인데다가 꼼꼼히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어도 딱히 걸리는 지점 없이 무난하게 읽힌다(첫 번역을 하면서 안 걸리고 잘 읽히도록 번역하는 일이 매우 쉽지 않음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저작들 및 1980년대 프랑스 역사학계와 부르디외의 관계에 대한 간결하고 유용한 스케치를 제공하는 서문에서 암시되듯,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역사학과 사회학이라는 서로 구별되지만 인접해 있는 학문분과들에 대한 코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단, 이것이 1980년대 프랑스 지식인 사회 내에서의, 그리고 그러한 지식인 사회를 겨냥한 대화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물론 역자가 말하듯 부르디외의 이론에 관한 쉽고 유용한 안내서도 되겠지만, 상기한 점에서 이 책은 주로 다음 두 유형의 독자들에게 즐겁게 읽힐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가령 미셸 푸코의 전기나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 같이 20세기 중후반 프랑스 학술장·지식인사회 자체에 대한 의미심장하고 즐거운 스케치를 제공해주는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다. 직설적인 조롱이든, 에둘러 말하는 비판이든, 보다 진지한 코멘트든 프랑스 담론장과 (거의 '먹물귀족층'처럼 묘사되는) 학자들을 겨냥한 부르디외의 코멘트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동시대인 관찰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독자들이 그와 동시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냉소적인 유머감각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연구자 혹은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 특히 문화·지식·이데올로기의 역사적·사회적 접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부르디외와 샤르티에의 때로 미묘한 긴장관계가 느껴지는 대화는 (종종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하나 곱씹어볼만한 것이다. 물론 이는 20세기 중반부터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역사학이 사회과학적 접근을 전격적으로 흡수했던, 그래서 대표적으로 폴 벤느의 걸작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가 잘 보여주듯 역사학과 사회과학 사이에서 방법론적 논의가 매우 깊은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었던 프랑스의 지식장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내에서 배태된 것이다. 따라서 유사한 분과학문들 사이에 마찬가지의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 한국의 해당 전공자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건 무리겠으나, 특히 이른바 '덜 계량적인'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이 여기에서 중요한 고찰지점들을 끌어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두 학자의 대화에서 비판되고 질문되는 지점들은 많은 경우 여전히 유효한 숙고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의 대학원이, 특히 '인문학적' 성격을 띤 분과에서, 냉정히 말해 '이론'은 읽더라도 '방법'을 고민하도록 해주는 공간은 아닌 경우가 다수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저자들의 발화를 단어 하나하나까지 이해하고 같은 위치에서 자신의 답변을 곱씹어보는 독서가 많은 학생들에게 무척 유용할 것이라 믿는다.

1장 "사회학자의 직능"은 부르디외가 생각하는 비판적-과학적 사회학(자)의 역할과 함께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범주 자체를 역사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는--지성사 연구자라면 100% 동의할--교훈을 제공한다. 2장 "환상과 인식"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비판적 기능이 어떠한 정치적인 실천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간결명료하게 그린다(그는 초월적 지식인에 의한 거대한 사회해방프로젝트를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푸코가 '억압 가설'이라 조롱하듯 명명한 틀 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말하는 사회학자가 계몽기획의 현대적인 사도들처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1960년대 이래 프랑스 인문사회과학에서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는 3장 "구조와 개인"에서 부르디외는 그러한 갈등이 가짜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그에게 있어 비판적 학문의 목표는 사람들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관적 인식을 넘어 (특히 "위계질서들"로 지칭되는) 객관적인 틀을 보도록 한다는 데 있다는 점에서--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사회학의 존재 의의가 정당화되는데--보다 냉정한 독자라면 2장에서와 함께 부르디외의 틀이 고전적인 '이데올로기 비판과 계몽'의 연장선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부르디외가 영웅적 형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가 과거의 도식들을 조잡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사실은 과거의 지침들을 '더욱 잘'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부르디외의 개념을 언급하는 4장 "하비투스와 장", 그리고 그가 강력한 영향을 준 또 다른 분야인 예술/문학사회학에 대한 코멘트를 담고 있는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는 샤르티에의 날카로운 질문과 부르디외의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그래서 더 많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답변들, 그리고 전근대와 구별되는 시대로서의 근대에 대한--그리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대한--부르디외의 견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목이다; 특히 방법론 코멘트와 실제 분석사례에 관한 논의가 숨소리까지 들릴만한 가까운 거리에서 오가는 대목을 같이 따라가볼 수 있는 독서경험은 사람들이 얼핏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용할 수 있다. 아마도 개념의 물신화에 사로잡히지 않을만큼 현실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부르디외가 하비투스 개념을 설명하다가 결국 장(들)의 개념으로까지 갈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을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게 살펴볼 수 있겠다.

두 저자의 대화는 매우 세련된, 그러나 때로 매우 빠르고 격렬하게 진행되는 펜싱 같아서, 그것으로부터 앎을 얻어내고자 하는 독자는 의식적으로 템포를 늦추고 질문 하나하나의 함의를, 그리고 그에 대한 응수가 과연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부르디외 이론의 입문서로서 읽기보다는 그러한 공격과 응수를 세심히 따라가 보는 게 더 재미있고 유용할 수 있는 텍스트다. 더불어 역사학 혹은 역사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역사학자가 샤르티에만큼 날카로운 방법론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쯤 생각해볼 만 하다(어쨌든 나는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는 몇 번이고 꼼꼼히 읽힐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힘주어 말하고 싶다). 사실 이 책에서 진정으로 경탄할만한 것 중 하나는 샤르티에의 지성인데, 이는 사회학자의 답변만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침착한 정리와 날카로운 겨냥을 음미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나는 특히 연구자 독자들이 부르디외의 의견을 최종적인 답변으로 받아들이기는 권하고 싶지 않다(유감스럽게도 '이론'의 독서가 구체적인 연구방법론의 고민보다는 성인전의 감격스러운 영접에 좀 더 가깝기 쉬운 우리들의 필드에서는 더욱 그렇다). 억압과 해방의 도식이나 해방의 도구로서의 학문, 좀 더 전문적인 것으로는 '과학'의 요건을 포함해 이 책에서 부르디외가 개진하는 언어는 그 정치적인 지향점이든 방법론적인 함의든 20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다시 말해 많은 것들이 때로는 혼란스럽게 엉키고 충돌했던 시공간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현재의 한국과 한국 학술장은 결코 부르디외의 시공간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자신이 읽는 뛰어난 지성이 표하는 입장에 역사적인 거리를 두지 못하는--물론 이건 꼭 나이와 학위의 문제는 아니다--독자들이 텍스트를 위인전으로 읽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그러한 독서를 피할 때 이 책은 더 가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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