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Reading 2019. 5. 5. 23:15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대담,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상길·배세진 역, 킹콩북, 2019(원저는 2010 출판, 저본이 된 해당 대담은 1988) 을 쉬는 시간에 간략히 읽었다. 8쪽 정도의 역자 후기를 빼고 샤르티에의 서문부터 마지막 대담까지 한 손을 펼친 것보다 약간 더 큰 판형으로 130쪽이 조금 안 되는, 언제든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부르디외에 관해서는 문외한인데다가 꼼꼼히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어도 딱히 걸리는 지점 없이 무난하게 읽힌다(첫 번역을 하면서 안 걸리고 잘 읽히도록 번역하는 일이 매우 쉽지 않음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저작들 및 1980년대 프랑스 역사학계와 부르디외의 관계에 대한 간결하고 유용한 스케치를 제공하는 서문에서 암시되듯,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역사학과 사회학이라는 서로 구별되지만 인접해 있는 학문분과들에 대한 코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단, 이것이 1980년대 프랑스 지식인 사회 내에서의, 그리고 그러한 지식인 사회를 겨냥한 대화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물론 역자가 말하듯 부르디외의 이론에 관한 쉽고 유용한 안내서도 되겠지만, 상기한 점에서 이 책은 주로 다음 두 유형의 독자들에게 즐겁게 읽힐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가령 미셸 푸코의 전기나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 같이 20세기 중후반 프랑스 학술장·지식인사회 자체에 대한 의미심장하고 즐거운 스케치를 제공해주는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다. 직설적인 조롱이든, 에둘러 말하는 비판이든, 보다 진지한 코멘트든 프랑스 담론장과 (거의 '먹물귀족층'처럼 묘사되는) 학자들을 겨냥한 부르디외의 코멘트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동시대인 관찰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독자들이 그와 동시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냉소적인 유머감각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연구자 혹은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 특히 문화·지식·이데올로기의 역사적·사회적 접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부르디외와 샤르티에의 때로 미묘한 긴장관계가 느껴지는 대화는 (종종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하나 곱씹어볼만한 것이다. 물론 이는 20세기 중반부터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역사학이 사회과학적 접근을 전격적으로 흡수했던, 그래서 대표적으로 폴 벤느의 걸작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가 잘 보여주듯 역사학과 사회과학 사이에서 방법론적 논의가 매우 깊은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었던 프랑스의 지식장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내에서 배태된 것이다. 따라서 유사한 분과학문들 사이에 마찬가지의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 한국의 해당 전공자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건 무리겠으나, 특히 이른바 '덜 계량적인'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이 여기에서 중요한 고찰지점들을 끌어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두 학자의 대화에서 비판되고 질문되는 지점들은 많은 경우 여전히 유효한 숙고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의 대학원이, 특히 '인문학적' 성격을 띤 분과에서, 냉정히 말해 '이론'은 읽더라도 '방법'을 고민하도록 해주는 공간은 아닌 경우가 다수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저자들의 발화를 단어 하나하나까지 이해하고 같은 위치에서 자신의 답변을 곱씹어보는 독서가 많은 학생들에게 무척 유용할 것이라 믿는다.

1장 "사회학자의 직능"은 부르디외가 생각하는 비판적-과학적 사회학(자)의 역할과 함께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범주 자체를 역사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는--지성사 연구자라면 100% 동의할--교훈을 제공한다. 2장 "환상과 인식"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비판적 기능이 어떠한 정치적인 실천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간결명료하게 그린다(그는 초월적 지식인에 의한 거대한 사회해방프로젝트를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푸코가 '억압 가설'이라 조롱하듯 명명한 틀 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말하는 사회학자가 계몽기획의 현대적인 사도들처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1960년대 이래 프랑스 인문사회과학에서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는 3장 "구조와 개인"에서 부르디외는 그러한 갈등이 가짜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그에게 있어 비판적 학문의 목표는 사람들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관적 인식을 넘어 (특히 "위계질서들"로 지칭되는) 객관적인 틀을 보도록 한다는 데 있다는 점에서--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사회학의 존재 의의가 정당화되는데--보다 냉정한 독자라면 2장에서와 함께 부르디외의 틀이 고전적인 '이데올로기 비판과 계몽'의 연장선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부르디외가 영웅적 형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가 과거의 도식들을 조잡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사실은 과거의 지침들을 '더욱 잘'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부르디외의 개념을 언급하는 4장 "하비투스와 장", 그리고 그가 강력한 영향을 준 또 다른 분야인 예술/문학사회학에 대한 코멘트를 담고 있는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는 샤르티에의 날카로운 질문과 부르디외의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그래서 더 많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답변들, 그리고 전근대와 구별되는 시대로서의 근대에 대한--그리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대한--부르디외의 견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목이다; 특히 방법론 코멘트와 실제 분석사례에 관한 논의가 숨소리까지 들릴만한 가까운 거리에서 오가는 대목을 같이 따라가볼 수 있는 독서경험은 사람들이 얼핏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용할 수 있다. 아마도 개념의 물신화에 사로잡히지 않을만큼 현실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부르디외가 하비투스 개념을 설명하다가 결국 장(들)의 개념으로까지 갈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을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게 살펴볼 수 있겠다.

두 저자의 대화는 매우 세련된, 그러나 때로 매우 빠르고 격렬하게 진행되는 펜싱 같아서, 그것으로부터 앎을 얻어내고자 하는 독자는 의식적으로 템포를 늦추고 질문 하나하나의 함의를, 그리고 그에 대한 응수가 과연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부르디외 이론의 입문서로서 읽기보다는 그러한 공격과 응수를 세심히 따라가 보는 게 더 재미있고 유용할 수 있는 텍스트다. 더불어 역사학 혹은 역사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역사학자가 샤르티에만큼 날카로운 방법론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쯤 생각해볼 만 하다(어쨌든 나는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는 몇 번이고 꼼꼼히 읽힐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힘주어 말하고 싶다). 사실 이 책에서 진정으로 경탄할만한 것 중 하나는 샤르티에의 지성인데, 이는 사회학자의 답변만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침착한 정리와 날카로운 겨냥을 음미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나는 특히 연구자 독자들이 부르디외의 의견을 최종적인 답변으로 받아들이기는 권하고 싶지 않다(유감스럽게도 '이론'의 독서가 구체적인 연구방법론의 고민보다는 성인전의 감격스러운 영접에 좀 더 가깝기 쉬운 우리들의 필드에서는 더욱 그렇다). 억압과 해방의 도식이나 해방의 도구로서의 학문, 좀 더 전문적인 것으로는 '과학'의 요건을 포함해 이 책에서 부르디외가 개진하는 언어는 그 정치적인 지향점이든 방법론적인 함의든 20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다시 말해 많은 것들이 때로는 혼란스럽게 엉키고 충돌했던 시공간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현재의 한국과 한국 학술장은 결코 부르디외의 시공간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자신이 읽는 뛰어난 지성이 표하는 입장에 역사적인 거리를 두지 못하는--물론 이건 꼭 나이와 학위의 문제는 아니다--독자들이 텍스트를 위인전으로 읽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그러한 독서를 피할 때 이 책은 더 가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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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2019.05.06 16:35 Modify/Delete Reply

    요즘 역사학에 대한 무지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인문대 학부생인데요, 주인장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역사적 디테일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역사학도가 아닌 제게는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역사학에 입문할만한 글을 선뜻 고르는 것이 어렵습니다. 역사적 디테일보다는 역사를 다루는 방법론, 그리고 역사철학적 문제에 대한 독서를 원한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러한 방법론에 익숙해지고 싶지만, 역사학의 영역에서는 아예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다보니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일로만 느껴집니다.

    인문학의 다른 영역들, 그러니까 철학이나 문학과 같은 분야에 대해서는, 적어도 글을 읽고 쓰는 법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학 분야에서는 그런 기본기마저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을 줄곧 자각하고는 합니다. 어떻게 역사학에 입문하는 것이 좋을까요?

    한편 저는 저 스스로를 스피노자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기독교 문화를 공정하게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기독교에 대해, 철학적이고 비평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혹은 역사학적인/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저서를 몇 권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블로그에서 알게 된 마틴의 『현대 세속화 이론』 같은 저서도 읽어야 할 목록에 포함시켜두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기초적인 것들에서부터 출발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제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라, 기껏해야 성경과 가톨릭 교리서, 그리고 철학도로서 접한 약간의 중세철학 정도가 전부입니다. 역사적인/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에 접근하는 저서는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고, 굳이 그러한 접근이 아니더라도 보다 현대적인 기독교에 관한 저술 - 예를 들어 해석학, 성서비평학 등에 근거하고 있는 - 역시 거의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적인 기독교 이해를 위한 독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바쁘신 와중에 학부생의 이런 질문들에까지 답해주시는 건 수고로운 일이겠지만, 학교를 쉬고 있는 지금 질문할 곳이라곤 이 블로그밖에 없네요 ㅎㅎ...

    • BeGray 2019.05.07 01:52 신고 Modify/Delete

      1. 만든지 좀 돼서 업데이트가 필요한 목록이긴 한데요, 일단 이 포스팅에 정리한 목록을 한번 참조하시고 혹시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다소 지성사/사상사에 집중한 리스트이긴 합니다). 지금 Richard Whatmore의 _What is Intellectual History?_를 번역 중이긴 한데 당장 나오진 않을테니^^; 그외 <굿바이 E. H. 카>로 번역된 책도 번역이 조금 고르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입문이 될 것 같습니다.

      https://begray.tistory.com/422

      2. 기독교 문화/사상은 시공간마다 다르기도 하고 워낙 여러 주제와 얽혀 있어서 딱히 하나의 일괄된 정리를 하는 책을 꼽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저는 보통 "기독교는 ~~한데"라는 진술을 보면 그게 어느 시대 어디, 어느 종파의 기독교에 대한 진술이냐는 질문부터 하는 편입니다). 특정한 역사 속의 기독교 문화/사상에 관심이 있으신 건지, 아니면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에 관심이 있으신 건지(후자는 사실 제가 답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겠지만요) 등등에 따라 그나마 제게 답이 가능한 영역도 달라질 것 같고요.

      다만 후기 로마제국과 초기 기독교사를 다루는 거장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의 저작들은 한번쯤 읽어보시면 다른 시공간의 기독교를 이해할 때도 매우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한국어로는 (딱 하나를 빼고는 만족스러운 번역은 없지만) 몇 권이 옮겨져 있는데, 위 리스트에도 언급된 <기독교 세계의 등장> 및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먼저 보시는 걸로 시작하시길 권합니다(후기 로마에 대한 브라운의 개괄은 <사생활의 역사> 1권에 브라운이 쓴 챕터를 보세요). 지성사와 사회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대가라서 여러 모로 얻을 수 있는 바가 많을 겁니다 :)

    • 익명 2019.05.07 09:46 Modify/Delete

      일단 E. H. 카와 폴 벤느부터 시작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2. 익명 2019.05.19 16:47 Modify/Delete Reply

    또 다시 질문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는데, 댓글창을 계속 질문란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티스토리를 이용해본 적이 전혀 없어서 그런데, 혹시 질문을 드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D

    저는 학부 3학년 때까지 분석철학적 입장에 경도되어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비교적 최근에 프리드리히 니체와 미셸 푸코의 저작을 직접 읽으면서 일종의 '해석학적 전회' 혹은 '계보학적 전회'라는 것을 경험하고, 철학사와 역사적 접근을 보다 존중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BeGray 님의 블로그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E. H. 카의 역사철학과 케임브리지 학파의 방법론은 제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고, 특히 정치철학을 전공하거나 최소한 중요하게 다루기를 원하는 제게는 직접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지금은 일단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퀜틴 스키너의 『역사를 어떻게 읽는가』 두 권의 책을 읽어봤습니다. 폴 벤느의 저서는 절판이 되어서 아쉽게도 구하지 못했고요. 카와 스키너의 방법론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지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편입니다. 다만 여전히 몇몇 의문스러운 지점들은 남아 있고, 따라서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1) 철학사와 지성사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물질의 역사 혹은 통상적 의미의 '역사'로부터 지성사의 독립성이 보장될 수 있다면, 저는 그와 같은 논지에서 지성사로부터 철학사의 독립성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별 철학자를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철학사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기 쉽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그러한 선언이 과연 철학사와 지성사 연구 양 측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일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대 사회와 보다 밀접한 연관을 맺는 정치철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영역에서, 이러한 비판은 쉽게 수용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퀜틴 스키너가 '엄밀한 의미의 관념사'라고 부르는 영역들, 즉 (이것이 대체로 현대적인 분과이기 때문에, 여전히 시대착오의 가능성은 내재되어 있지만) 형이상학 혹은 인식론의 영역에서까지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그가 이 문제에서 예시로 드는 것 중 하나는 로크의 인식론과 버클리의 형이상학 사이의 관계인데, 물론 '로크가 버클리의 형이상학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는 서술은 오류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당연히 로크의 의도는 버클리와 같은 유심론적 형이상학의 기반을 제공하는데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보다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인간 지식의 원리론』에서는 로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여럿 있으며, 특히 제 1성질과 제 2성질의 구분(사물에 귀속되어 있는 성질과 현상으로만 드러나는 성질의 구분)이 없었다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버클리의 명제 또한 도출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크의 인식론이 버클리 형이상학의 결론을 어느 정도는 선취하고 있었다는 명제 자체가 오류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러한 관념사 보다도 더 엄밀한 관념사로 들어간다면 지성사적 접근이란 것은 거의 무의미해지는 지점마저 찾아오는 듯합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지성사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그리고 『영혼론』에 덧씌워진 스콜라철학의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도 유용한 방법론이겠지만), 반대로 『논리학』을 이해하는데는 그러한 이해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이러한 예시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비단 『논리학』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형식논리의 역사 전체가 지성사와는 거의 무관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통상적 의미의 역사와 지성사가 그러한 것처럼 철학사에도 또한 여러 해석들이 덧씌워지고 변화되어온 고유한 서사가 있으며, 그 해석의 과정 자체가 철학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철학사의 운동에 특권을 부여하는 헤겔주의적 발상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며, 오히려 철학사의 역사 그 자체를 무시한다면 철학사로부터 가치 있는 의미들을 얻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 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대 지성사적 접근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철학사적 접근 역시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2) 또 다른 시대착오의 가능성?

    또 한 가지 제가 의심스럽게 여겼던 것은, '당대 지성사적 접근'을 강조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이 사실은 현대적 해석학과 분석철학적 입장을 과거의 저작들에 대해 강요하고 있을 뿐인 것 아닌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스키너가 이러한 방법론을 옹호하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는 철학자가 콰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점은 이 의혹을 더 강화시킵니다. 일단 그들의 전제, 즉 언어에는 언제나 단순히 말해지는 것 이상의 어떤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전제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선험적(사실 '선험적'이라는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용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은 관념적 전제들로부터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면, 언어에는 언제나 말해지는 것과 의도되는 것이 있다는 언어적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스키너가 논거로 제시하는 것 중 하나인 번역불가능성 문제와 같은 경우에는, 철저하게 현대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번역불가능성 문제는 콰인이 논리학적 정리인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로부터 도출해낸 문제이며, 그 이전까지는 특별하게 문제가 되었던 적이 없는 부분이니까요.

    사실 과거의 철학자들이 해석학이나 후기 분석철학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전무할 것입니다. 반대로 철학을 영원한 이념에 대한 사랑으로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적 영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은 훨씬 높고요. 그런 점에서, 과거의 철학자들에게 '의도'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 의도가 자신의 저작이 해석학적 혹은 후기 분석철학적 방법론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플라톤주의에 대한 직접적 반대를 표명하고 있는 니체와 같은 예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저작이 '영원의 상 아래에서' 읽힐 수 있기를 바랐겠죠. 이것은 또한 철학사에는 철학사만의 독법이 필요하다는 제 의견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철학사 해석에 있어서 시대착오를 경계해야만 한다면, 스키너가 제시하고 있는 방법론 또한 그러한 경계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우리는 영원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는 식의 비판과는 다릅니다. 저도 프리드리히 니체의 계보학적 접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원한 진리란 것은 없으며 그것은 오직 역사와 시대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니체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이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는 가정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한 가정을 무시하고 당대 지성사의 관점에서만 철학사를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시대착오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저자의 의도

    설령 우리가 '말해지는 것에는 언제나 그 이상의 의도가 숨어 있다'라고 하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후기 구조주의적인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철학적 작업물에서 철학자의 의도라는 것을 명징하게 분리해내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철학자의 의도를 성급하게 추론해내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로든 저자의 의도를 함부로 읽어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요? 과거의 저작들에 대해서 그 저작 자체만을 분석하는 것 이상으로, 저자의 의도를 함부로 읽어내려는 시도 자체도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후기 구조주의를 알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보니, 이 이상의 비판을 제기하기는 조금 조심스러워지네요.


    사실 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이와 유사한 의문을 표명한 사람들은 더러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퀜틴 스키너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학파의 대답이 어떤 것이었을지 역시 궁금합니다. 물론 BeGray 님께서도 어떤 식으로든 이와 같은 의문들을 접해 왔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자 합니다.

    • BeGray 2019.05.22 02:30 신고 Modify/Delete

      (제가 블로그 댓글에 답변을 남기는 속도가 최근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비밀댓글로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그를 통해 메일을 드리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더 빠른 건 사실이니까요^^;;

      이번에 주신 질문들이 하나하나 중요하고 또 많은 숙고를 요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최대한 간략하게 답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하신 "철학사적 접근"은, 적어도 제게는, 철학에는 (개별 맥락이 중요하지 않은) 보편적인 주제들이 존재하며 그 주제들을 해석해온 문헌들을 따로 독립시켜 "철학사"라고 부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읽힙니다. 제가 여기서 드릴 수 있는 답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로 들어주신 버클리가 로크를 특정한 부분에서 참조하고 있다는 식의 서술 자체를 지성사가 배제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그것이 말씀하신 지점의 적절한 예는 아닐 듯 싶고요(스키너의 입장이 명백한 문헌적 증거가 있는 영향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둘째, 말씀하신 형태의 "철학사"를 왜 "[역]사"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왜냐하면 스키너나 케임브리지 지성사가들이 말하는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존재했던 사유들을 나열해놓은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셋째, 말씀하신 주장에 따르면 언어 행위 중 (특정한 철학에 속하는) 특수한 영역은 해당 언어행위자가 속해 있었고 또 사용했던 다른 언어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는 또다른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데요, 물론 저는 논리학의 역사 등에 무지하기 때문에 확언할 수 없습니다만 그런 전제를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우선 (우리가 지성사적 접근법을 스키너를 포함한 '케임브리지 학파'가 사용했던 언어맥락주의로 규정한다면) 이러한 입장 자체는 20세기 이전 17-18세기 텍스트에서도 나타나고요, 포콕 같은 경우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법학에서부터 이러한 태도를 읽어낸다는 점에서 반드시 "현대적 해석학과 분석철학적 입장"에만 국한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관계를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 그 자체로 돌아가면, 2번 질문은 지성사 방법론을 그 자신에게 메타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조금 잘못된 방향으로 적용한 듯 보입니다. 지성사가들은 과거의 저자들이 지성사적 방법론에 의해 해석되기를 의도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과거 저자들의 의도를 (언어적) 맥락 내에서 복원하는 것이 텍스트의 역사적 이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로서의 글쓰기가 있을 때, 그 행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즉 오늘날의 연구자가 사용하는 방법론에 대한 하나의 입장이 (케임브리지 학파 스타일의) 지성사 연구인 것이지, 과거의 저자가 그러한 지성사 연구의 전제를 받아들였냐의 여부는--포콕처럼 근대 역사기술 자체의 역사를 파고드는 경우를 제외하면--지성사 연구자의 질문에서 본질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실제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읽힐 수 있기를 바랐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릅니다만(적어도 홉스와 [<인간지성론>을 포함한] 로크의 저작들이 그에 해당하지 않는 예라는 건 상당히 분명합니다; 솔직히 저는 문헌비판이 상당히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계몽기 서유럽에 그처럼 순진한 목표를 가진 저자들이 얼마나 있을지에 회의적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다루는 문제가 영원한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어떤 견해를 가졌는가와는 별개로,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당연하지만 저는 각 저자마다 '중요한 문제'가 동일하다고 앞질러 전제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당시 논쟁의 맥락을 역사적으로 상당히 꼼꼼하게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건 여전히 중요해보입니다.

      요약하면, 2번 질문은 조금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3) "저자의 의도를 <함부로> 읽어내는 것"이 문제라는 점에는 지성사가들도 당연히 동의할 것 같습니다(물론 스키너와 다른 포지션의 지성사가들은, 대표적으로 포콕에서처럼, '의도'만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밀도 깊은 문헌학적 작업이 함께 요구되는 것이겠죠. 말씀하신 후기 구조주의의 (통속적인) 전제는 아마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에게만 귀속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어보입니다만, 지성사가들도 그 지점에서 텍스트의 수용과 재해석이 저자의 의도와 무관한 층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자가, 텍스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읽어내는 건 조금 다른 일이라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사항만으로는 지성사에 대한 효과적인 반론이 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3. 익명 2019.05.23 04:18 Modify/Delete Reply

    늘 진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ㅎㅎ

    새로운 주장들이나 방법론을 접하게 될 때마다, 그것을 성급하게 비판하기보다는 일단 올바르게 이해한 다음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를 기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이번에 질문드린 내용들에 대해서도, 성급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분명하게 있는 것 같고요. 사실 제가 역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굉장히 최근의 일이다보니, 질문을 드릴 때 역시 조금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숙고한 다음 글을 작성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 앞서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저는 스키너의 방법론 그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학사가들이 으레 저지르고는 하는 실수들, 즉 디테일한 부분들을 지나치게 뭉개놓는다거나, 자신의 입장에 바탕해서 과거의 철학자들을 평가한다거나(이러한 경향은 특히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으로 철학계가 양분되어 있는 현대에 와서 심화된 것 같습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해석을 도입한다거나 하는 실수들에 대해, 지성사적 접근은 생산적인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꼼꼼한 문헌학적 분석이라거나 당대의 지적인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여 언어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방법론은 지성사가들에게뿐만 아니라 철학사가들에게도 역시 유용한 것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다만 제가 의문스럽게 여겼던 것은 스키너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학파의 학자들이 지성사와 철학사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철학사 역시 당연하게도 지성사의 일부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시에 어느 정도의 고유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철학사를 그리스철학적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법, 법칙, 존재, 윤리, 인식과 지성 등에 대한 담론의 역사로 정의한다면, (이것이 상당히 고전적인 정의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러한 역사가 설령 개별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단순한 사상들의 나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그러한 보편적 개념들에 대해 논의해온 역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오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현대인이 자연 법칙에 대해 말할 때와, 고대 그리스인이 자연 법칙에 대해 말할 때, 그것들이 서로 같은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보편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도 현대인과 옛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인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옛 철학자들이 현대적인 철학의 분과에 맞추어서 철학을 했을 것이라는 전제는 철학사가들이 범하기 쉬운 시대착오적 오류의 극단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문제 때문에 스키너는 번역(통약)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당대 지성사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와 같은 담론의 역사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최소한 제가 중세철학자들이나 근대철학자들의 저작을 직접 읽었을 때, 그러한 담론의 역사에 대한 고려가 없다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철학자들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철학사적 전통을 고려하는 것은 중요한 독법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지식도 완전할 수 없다는 믿음에 동의한다면, 마찬가지로 철학사 또한 완전할 수 없다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분명 철학사에는 개선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좀 더 엄격한 문헌학적 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언어적 맥락을 고려해서 철학사를 다시 쓰는 것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각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지적 배경을 관념적 수준에서 다루는데 그치는 것 이상이 가능할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철학사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라는 선언까지 가능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저는 철학사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떤 철학적 텍스트를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스럽고, 스키너가 '철학자 중심의 철학사'에 반대하고 있는 것 또한, 철학사를 폐제해야 한다는 식의 독단적인 주장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주장은 철학사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도 지성사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주장인 것 같은데, 이러한 이해가 온당하다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편 논리학사의 문제 같은 경우는, 이 주제의 논점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해하거나 현대적 기호논리학을 이해하는데 지성사적 접근이 크게 중요할 것 같지는 않다는 의미로 드린 말씀입니다만, 사실 논리학사를 통상적인 의미의 철학사와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뿐더러, 이러한 지엽적인 비판이 그다지 건설적인 비판이 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2) 일단은 저는 퀜틴 스키너의 저작만을 읽었고, 그의 저작에서 주로 거론되는 논거가 현대적 해석학과 후기 분석철학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번역(통약)불가능성 문제가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후기 분석철학을 주로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적 해석학과 후기 분석철학이 있기 전에도,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맥락을 고려해서 읽는 독법이 제시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요.

    이 질문이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지적은 옳습니다. 저 스스로도 방법론 자체의 메타적 적용이 조금 엇나간 비판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런 점에서 이것은 꽤 성급한 비판이 된 듯합니다. 여기서 보다 합당하게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은, 화행이론이나 언어게임이론, 번역(통약)불가능성과 같이 스키너가 수용하고 있는 입장들을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인 것 같습니다. (화행이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지만) 언어게임이론, 번역(통약)불가능성 문제와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용어들이며 철학사적 맥락 하에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입장들 역시 충분하게 검토되어야만 하는 것이라 보는데, 아마 이것들을 검토하고 방법론을 보다 적절하게 수정해나가는 것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일테니, 썩 의미 있는 반론이 되지는 못하겠군요.

    한편, 이 역시 돌이켜보면 논점에서 일탈한 문제제기였던 것 같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국경험론자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을 제외한다면, 최소한 근대까지의 철학자들에게 있어 영원이라는 개념은 꽤 중요한 주제였던 듯합니다. (제가 아직 직접 읽어보지 못한 홉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로크, 버클리, 흄의 저작에서 영원성이란 주제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흄 같은 경우는 사실상 과학적 구성주의에 가까운 주장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데카르트는 꽤 빈번히 영원진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영원성이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합니다. 『신학정치론』이나 『에티카』, 『지성교정론』 등에서 읽어낼 수 있는 바에 따르자면, 스피노자는 단순한 상상과는 구별되는 인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은 세계를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즉 '영원에 상 아래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17세기가 자연이라는 책으로부터 영원한 진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 제법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시절 유럽에서 영원한 지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순진한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과거의 철학자들이 실제로 영원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논점은 아닌 것 같군요.


    3) 어떤 작품이 저자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이 속해 있는 맥락에 의해서만 온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말씀하셨다시피 다소 통속적인 이해긴 하지만)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사실 저자의 의도라는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일 뿐인 것 같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것이 그다지 효과적인 반론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덧붙임) 2)에서 언어게임이론이나 번역(통약)불가능성 문제가 그 자체로 검토가 필요한 것들이라고 한 부분에서,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덧붙입니다.

    우선 언어게임이론 같은 경우에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로부터 오는 개념인데, 이에 대한 논쟁은 꽤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분석철학 내부에서만 보더라도, 솔 크립키와 같은 양상형이상학자들은 양상논리를 도입함으로써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명왕성이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이 아닌 세계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사실 명왕성은 이미 행성에서 퇴출되었긴 합니다만-, 9가 홀수가 아닌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어떤 단어들의 의미가 변화해온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는 반론, 즉 본질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실제로 언어가 변화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반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언어에는 어떤 본질적인 의미도 없다'고 간단히 선언해버릴 수는 없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번역(통약)불가능성 문제 같은 경우에는 언어게임이론보다도 논란이 더 많은 부분인 듯합니다. 이는 콰인이 메타논리학적 정리, 즉 하나의 해석(형식논리에서 1차 술어논리의 진리값을 결정하기 위해 도입하는 것)에 대해 그와 논리적으로 동등하면서 서로 의미하는 바는 다른 부해석이 도입될 수 있다는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로부터, 우리가 정합적으로 완전히 동등하지만 서로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른 해석을 도입할 수 있기에 원론적으로 번역이라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미결정성 문제(과학적 이론 T에 대해 그와 논리적으로 동등하지만 의미는 다른 이론 T'이 제시될 수 있으며, 이중 어느 것을 옳은 것으로 결정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역시 이와 같은 논거를 두고 있고요. 하지만 번역(통약)불가능성 문제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서로 완전히 동등하지만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른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도 다른 해석인지 아니면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 동등한 해석이고, 사실은 같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언어철학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뜻/지시체 구분이 얼마나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고요. 이와 같은 사항들 때문에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 BeGray 2019.05.25 00:56 신고 Modify/Delete

      아, 이전의 질문을 나무라거나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ㅎㅎ 저는 특히 학부에 계시는 분이 방법론과 같은 중요하지만 한국에서 좀처럼 교육되지는 않는 주제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고민하신다는 게 무척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블로그가 그러한 지적 여정에 아주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건 무척 기쁜 일이고요.

      1) 제 생각에 익명 님의 관심사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스키너 본인보다는 케임브리지 학파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철학사적 연구물을 직접 읽어보시는 게 훨씬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한국어 번역에 문제가 여럿 있긴 하지만, 그리고 20년 정도가 지나서 여러 지점에서 낡았지만 제롬 슈니윈드의 <자율의 발명>도 17-18세기 도덕철학사가 지성사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쓰여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될 것 같고요(제가 거의 3개월도 전에 북리뷰를 써놓고도 계속 올리는 걸 잊는군요!), 영어 논문들을 읽는데 큰 문제가 없으시면 Knud Haakonssen이 편집한 _The Cambridge History of Eighteenth-Century Philosophy_(2006), Aaron Garrett이 편집한 _The Routledge Companion to Eighteenth Century Philosophy_ (2014), James Harris 가 편집한 _The Oxford Handbook of British Philosophy in the Eighteenth Century_ (2013) 에 수록된 여러 논문들을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세 책 모두 편집자들이 지성사가거나 지성사 방법론을 받아들인 철학 연구자들입니다). 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St Andrews에 있는 James Harris가 쓴 _Hume: An Intellectual Biography_(2015)를 철학과 지성사 모두를 오가는 저자가 쓴 대표적인 전기로 참고하실 수 있겠습니다. 해리스는 글에서든 영어에서든 무척 친절하게 아주 많은 것들을 그것도 명료하게 알려주는 저자입니다.


      2) 17-18세기의 자연 및 '올바른 지식'의 문제는 언젠가 좀 더 심도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는데요(다만 저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이 당시 교권과 지식의 타당성 문제를 둘러싸고 프로테스탄트 세계에서 벌어졌던 광범위한 신학정치적 논의들의 맥락 하에서 쓰여진, 그리고 그 맥락 내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일종의 논쟁적 팸플릿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짚어둡니다), 애초에 17세기 이래의 자연법적 논의가 왜, 어떤 맥락에서 중요하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왜 그것들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한국의 철학과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겠지만 사무엘 푸펜도르프의 The Whole Duty of Man, According to the Law of Nature (2002년에 Libertyfund에서 17세기 영역본이 재출간 되었고 온라인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같은 책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다시 방법론 자체의 논의로 돌아와서, 저는 거기까지 읽어보진 않았지만 가령 Mark Bevir 의 _The Logic of the History of Ideas_(1999) 를 포함한 논의들은 후기분석철학의 관심사를 지성사 방법론의 문제로 더 깊게 끌어들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러한 저작들을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비버와 Rhodes가 편집한 _Routledge Handbook of Interpretive Political Science_에 실린 여러 개설적인 논문들도 흥미삼아 보실 수 있을 듯 하네요. 스키너 본인이 던진 철학적인 쟁점에 대한 논쟁들은 저는 따라가보지 않았는데, 1980년대 초반까지의 논쟁들은 위의 비버 책 말고도 Peter L. Janssen이 쓴 "Political Thought as Traditionary Action: The Critical Response to Skinner and Pocock" (1985)나 스키너의 <근대정치사상의 토대> 25주년 기념작업으로 나온 _Rethinking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_(2006) 에 실린 관련 논문들도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스키너에 그에 대해 철학적으로 얼마나 정교화된 논의를 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그러한 논의들을 가져와서 (철학적 텍스트들을 포함한) 역사적 연구의 도구로 쓰고자 했다고 보는 게 더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ㅎㅎ


      3) 후기 구조주의자들, 정확히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논의를 먼저 받아들이고 확산시킨 사람들은 주로 문학분과에 있는 연구자들이었고, 문헌학과 결부된 지성사적 관심사를 가진 연구자들에게는 후기 구조주의 이전에 스키너와 포콕, 던 등의 방법론적 강령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활용에서 차이가 나는 지점도 있을 것 같네요. John Dunn 이 1960년대 말에 쓴 "The Identity of the History of Ideas" 같은 글이나, 포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쓴 방법론에 대한 글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스키너의 논의를 비롯한 지성사 방법론은 어디까지나 실제 역사적 접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가를 염두에 둔 작업이기 때문에, 방법론적 논의들에서 제시된 강령들과 실제 연구 사이에 어떠한 차이 혹은 개선점이 존재하는지를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실제로 어떻게 역사적 연구들이 이뤄지는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지성사가들의 방법론이 왜 어떠한 철학적 개념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활용하는데 집중하는지, 그 이상의 깊은 철학적 논의에 좀처럼 뛰어들지 않는지를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성사 연구를 "올바르게 이해한 다음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실제로 (좋은) 지성사 연구저작들이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를 보는 일이 아닌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 BeGray 2019.05.25 01:01 신고 Modify/Delete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지성사 연구가 갖는 가장 강력한 비판적 기능 중 하나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연구자들이 받아들이는 여러 학문적 개념/연구서사/접근법 등이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도구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바뀔 때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학문적 도구들 자체도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말을 우리의 대화에 적용한다면, 익명 님께서 '철학사'의 주제라고 생각하시는 여러 주제들이 언제,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그러한 위치에 등극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위치가 앞으로도 문제없이 지속될 것인지 등을 한번쯤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지요^^

  4. 익명 2019.05.25 03:12 Modify/Delete Reply

    답변 감사드립니다 :D

    말씀해주신 저서와 논문들 중 일단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 걸 먼저 읽어봐야겠네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성사 연구와 그에 관한 방법론은 제 주된 관심사인 정치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인 것 같아서, BeGray님의 블로그를 페미니즘 이슈에 관해 검색하다 우연히 찾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 BeGray 2019.05.28 01:30 신고 Modify/Delete

      ㅎㅎ 사실 케임브리지 지성사/정치사상사의 시작은 1960-70년대 마르크스주의 및 미국의 정치철학과의 대결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스키너, 포콕, 던의 초기 저작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지성사 연구 중에 신뢰할만한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매우 적습니다. 바로 영어 책을 읽기 어렵다고 해도, 영어 논문 중에는 10쪽 조금 넘기는 분량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니만큼 조금씩 도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

  5. 익명 2019.05.25 03:39 Modify/Delete Reply

    아, 그리고 사실 제가 계속해서 '철학사'에 대한 일종의 집착(?)을 보이는 까닭도, 분석철학을 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은 경우 철학사를 그다지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출발한 면이 있습니다. 니체를 읽고 지식의 역사성과 계보학에 대해 생각하면서, 철학적 개념들이 변화해온 역사를 무시하고 그러한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 철학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졌기도 했고요. 사실 후기 분석철학 이후로는 철학사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석철학쪽 선생님들의 입장에는 어딘가 오만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사라는 것이 독립적인 역사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그저 지성사의 특수한 한 흐름에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고, 그 자체로 역사라고 할 수는 없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하는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에 대해서 역시 역사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문제의식과, 케임브리지 학파 스타일의 지성사 연구 방법론 사이에 그렇게까지 큰 간극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철학적 개념의 의미는 언제나 달라져왔고, 설령 철학사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물음들조차 사실은 역사적인 맥락 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철학사가 중요한 것 같다고 계속 말씀드린 이유는, 실천의 차원에서 우리가 철학적 텍스트를 읽을 때 철학사에 대한 이해 없이는 갈피조차 잡기 힘든 경우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고요. 어쨌든 계속 이와 관련한 텍스트들을 읽어나가다보면 철학사와 지성사라는 두 관점 사이에서 상당한 지적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 BeGray 2019.05.28 01:32 신고 Modify/Delete

      ㅎㅎ 저는 당연히 '철학사'가 사라져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고요, 그저 지성사의 입장에서는 지성사적 방법론에 입각해 과거 전통적인 철학사의 여러 지점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본다는--즉 철학사가 역사적으로 좀 더 엄밀한 형태로 쓰여져야 한다는--사실을 이야기할 뿐이랍니다. 그런 점에서 굳이 철학사와 지성사의 대립을 설정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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