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는 법: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서평)

Reading 2019.08.06 01:07

아래는 올 9월에 출간될 『학산문학』 105호(2019년 가을호)에 실릴 서평으로, 얼마 전 출간된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월의봄, 2019년 4월)을 다룬다. 서두에서 명시적으로 밝혔듯 나는 이 책이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비평계의 중요한 주제였던 '문학과 정치' 논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특히 방법론과 수사학적 전략의 차원에서 드러내고자 했다. 나는 이 문제가 다수의 독자들이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 문학비평사를--좀 더 포괄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지적 논쟁을--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꼭 나의 독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제기한 물음이 많은 독자들이 이 흥미롭고 중요한 책을 더욱 풍성하게 읽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특히나 지금 여기에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그렇게 읽히고 논의될 가치가 있다. 책과 서평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는 언제든 환영이다.


출판고는 책 출간 후 어느 정도의 시일이 지난 뒤 PDF로 첨부해 올릴 예정이다.





문학을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는 법: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월의봄, 2019년 4월)


2010년대 후반의 한국문학·문화비평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인물이 2016년 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이하 「종말」) 이래의 오혜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1) 2010년대 중반 이래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페미니즘이 한국문학장에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면, 오혜진의 「종말」은 그를 위한 선명한 강령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한국문학·비평이 기존의 ‘개저씨’다움과 결별하고 20-30대 여성독자층의 미적·정치적 감각에 부합하는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종말」이 초래한 논쟁과 충격 이후 그는 연구자·비평가로서만이 아니라 기획자·안내자로서도 한국문학·문화장에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공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2) 2013년 가을부터 2019년 초까지 출간 및 집필된 33편의 글을 수록해 출간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하 『취향』) 또한 여러 상세한 인터뷰기사에서 볼 수 있듯 지금 가장 주목받는 페미니스트 문학비평가의 평론집으로 읽히고 있다. 그리고 본 서평의 목적은 정확히 그러한 시선으로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취향』이 여성주의적 문학·문화비평을 실천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겨냥하고자 하는 지점은 어떤 저작·저자에 여성주의라는 이름표가 붙을 때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관습적인 구별 자체에 있다. 어떤 학술·담론분야에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이 성장하고 안착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거부당하고 무시되던 여성주의자들이 일단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되었을 때, 기존의 주류가 여기에 대처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성주의의 독립된 영역을 인정한 뒤 그것을 일종의 고립되고 폐쇄된 게토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토와 (보통은 기존의 주류들로 구성된) 나머지 영역은 그저 공존할 뿐 그 사이에 어떠한 간섭도 교류도 없기에, 설령 어느 한쪽에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도 다른 쪽에서 그러한 물음을 통해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이란 명칭이 특히 『취향』과 같이 다양한 논점을 건드리는 텍스트의 맥락을 보다 축소하고 제한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앞질러 차단하고 싶다. 저자 스스로가 곳곳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듯, 『취향』의 페미니스트 문학론은 ‘문학과 정치’에 관한 논의를 염두에 두고 전개되었다. 이는 이전의 문학·문화정치적 논변을 이해할 때 저자가 이를 어떠한 방향으로 갱신하고자 했는지를 더욱 잘 알게 됨을 뜻한다. 따라서 나는 본 서평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장에서 전개된 ‘문학과 정치’ 관련 논의를 거친 수준에서나마 짚어보고, 이어 그러한 맥락을 염두에 둘 때 오혜진의 이론적 입장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제시하는 페미니스트·소수자문학론이 전술한 입장을 포함해 다양한 수사적 전략을 어떻게 활용하고 또 그를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읽을 것이다.



1. 문학과 정치, 2006~2013: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시와 정치’ 논쟁까지


가라타니 고진은 2006년 번역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역, 도서출판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역으로 끊임없이 지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짐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종교·도덕에 대하여 ‘시의 옹호’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문학에 맞서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은 현대로 말하자면 정치적인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종교와 문학’이나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는 문학이 단순한 오락에서 승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에서도 문학의 옹호는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으로도 보이지만, (제도화된)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허구지만 통상의 인식을 넘어선 인식을 보여준다는 식이었습니다. [...]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나는 애당초 문학에서 무리하게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해 문학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어서, 이미 그 역할을 완전히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52-53).


요컨대 근대소설과 같은 문학장르는 “문학보다 더 큰” 윤리·정치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한에서 “근대문학”으로서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었으며, 그러한 과제를 더 이상 짊어지지 않게 된 지금 그 실질적인 의의 또한 끝났다―이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이른바 ‘근대문학 종언론’의 핵심이다. 근대문학 종언론은 가라타니가 1980년대 중반 『탐구』로부터, 그리고 2001년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해온 고유의 정치철학이라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3) 하지만 가라타니의 이론적 논의를 숙독하지 않은 독자라 할지라도 (종종 당황스러운 오독을 통해서라도) 근대문학 종언론으로부터 모종의 충격을 받기는 어렵지 않았던 듯 보인다. 가라타니의 저작은 故 김윤식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표절사건에서도 나타나듯 한국 근현대문학연구에 영향을 끼쳐왔으며, 『근대문학의 종언』이 출간된 시점에 오면 한국 문예비평에 그 핵심적인 언어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실제로 본 서평에서 언급하는 거의 모든 저자들은 직간접적으로 가라타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민족문학론을 위시한 한국의 문학정치론은 애초에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의 골격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의 문학론과 동형의 논리적 구조를 지녔기에 그의 선언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4)만약 가라타니의 주장대로 오늘날 근대문학이 더욱 커다란 정치적·윤리적 과제와 연결될 수 없게 되었다면, 리얼리즘론 등 한국 문학정치론에서 문학에 부여해온 실천적 의의 또한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문학을 사회비판적인 앎 혹은 보다 고차적인 영역으로 정당화해주는 원천과 문학 사이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선언을 한국 문학비평계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중 이후의 한국 문학계에서도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게 되는 두 저자의 논의만 간략하게 훑어보자. 『근대문학의 종언』 한국어판 출간과 같은 해 겨울 발표된 「몰락의 에티카―21세기 문학 사용법」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대응방식은 ‘문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외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가라타니의 주장에서 정치와 윤리가 문학을 정당화해준다고 할 때, 신형철은 “그[가라타니]가 말하는 윤리(도덕)는 대문자 정치에 복속된 윤리”에 가까우며, “거시 전장에서 ‘대문자 정치’와 제휴하는 윤리는 더 이상 문학의 몫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미시 전장에서 ‘마이너리티의 욕망’과 암약하는 문학은 여전히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5) 요컨대 기존 근대문학이 추구한 ‘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영역이 있다면, 이제는 거기에 있는 “진실”을 대면하는 ‘윤리적’ 태도가 문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었다. 문화사회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홍중은 2009년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에서 두 가지 논리를 통해 가라타니를 비판하고자 했다.6) 글의 III-IV절이 근대문학 자체의 구조적 부정성을 규정하는 담론들을 검토하며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IV-V절은 김홍중 본인의 핵심테제인 ‘진정성의 종언론’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이 87년 이후의 한국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진정성의 윤리 자체가 종언을 맞이한 데서 파생되는 현상 중 하나라고 말한다. 첫 번째 반론이 자신이 말하는 “근대문학”이 무엇인지 이미 규정하고 출발하는 가라타니의 주장에 대한 유효한 응답이 되기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김홍중은 사실상 가라타니의 입장과 공명하는 서사를 제출했다고 할 수 있다―“문학과 비판적 지식체계는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말이다(133).

우리는 두 저자의 ‘반론’에서 이후 10년 간 여러 문학평론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짚어야 할 점은 가라타니의 핵심테제는 사실상 반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문학이 과거와 같이 거시적인 정치에서 유의미한 위상을 보유하는 것은 적어도 새로운 세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물론 여전히 문학이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들의 입장은 시와 정치 논쟁 및 이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수 없었다).7)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곧 정반대의 주장, 문학은 이제 완전히 자율적인 미적·오락적 영역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승인으로 간 것 또한 아니었다(그러한 주장 또한 그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와 정치 논쟁에서 그다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신형철의 경우에서처럼 미시적인 정치로 작용하는 윤리의 담지자로서든, 김홍중의 경우에서처럼 “타인들과의 연대를 상상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주체와 그런 주체들이 구성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장치의 역할”로서든,8) (근대)문학의 사회적 의미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외적 준거, 혹은 문학이 사회적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는 당위는 여전히 요구되었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상기한 논의가 상당부분 프랑스철학·급진좌파사상에서 발원해 미국 영문학·문화연구·비교문학계 등을 통해 형성·유포된 ‘이론’의 언어로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미국 영문학계의 1990년대-2000년대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주체·타자·윤리·공동체 등의 개념들과 이를 핵심개념으로 삼는 ‘타자의 윤리학’과 같은 서사, 그리고 여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전거로 라캉·레비나스·데리다 등의 고유명을 활용하는 글쓰기가 한국의 문학연구·비평계에서도 하나의 표준적인 틀로―곧이어 지루하고 생기없는 클리셰로―자리 잡아가는 2000년대의 한 광경을 보게 된다.

확실한 사실은, 특히 2008년도 이래 이명박정권 하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 속에서, 문학이 ‘정치’를 다시 전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진은영의 문제제기로 출발한 ‘시와 정치’ 논쟁은 이러한 요구를 핵심적인 문제의식으로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문학 종언론이 열어놓은 자장의 맥락 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수많은 논자들이 참여한 당시의 논쟁을 개괄하는 대신 그 중심부에 있던 진은영의 요점을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9)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면, 즉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예술 혹은 미적인 활동이 단순히 기존 사회참여의 양식을 그대로 반복할 수 없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와 전적으로 무관한 자율적인 영역에 놓이는 것에서 만족할 수도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10) 대립되는 두 명제 사이에서 진은영이 제시한 돌파구는 예술 고유의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정의하는 길이었다. 그는 자크 랑시에르의 구도를 가져와 “우리가 통념적으로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은 [...] 치안의 활동”으로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행위일 뿐, 진정한 “정치는 이러한 합의 체제 안에서 권력을 점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합의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분배의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미학의 정치는 몫을 갖지 못한 자들이 감각적 영역 전체에 작동하는 기존의 분배 방식에 대하여 불일치의 견해를 제기하고 새로운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구별에 따르자면 가라타니가 제기했던 문학(혹은 예술)과 대문자 정치와의 결별은 그저 (진정한 정치가 아닌) “치안”과의 분리일 따름이기에 예술은 ‘진정한’ 정치와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정치’를 이론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을 통해 문학·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되살리자는 진은영의 제안은 그 세부사항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한국 비평계에 무척 매력적인 선택지였으며, 실제로 여러 평자들은 각자 정치의 개념을 선험적으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12) 이러한 시도의 이론적 함의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이론적 원천으로 동원된 서구 사상가들이 어떤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시와 정치 논쟁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이론가들, 대표적으로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은 모두 서유럽의 좌파 급진주의 정치철학자로 이해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퇴조 이후 좌파 급진주의자들은 대문자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으며, 그에 따라 이들의 사상적 경로는 보다 급진적이고 추상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기존의 정치적 영역을 “치안”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공식적인 정치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고 매우 추상적으로 묘사되는) ‘진정한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랑시에르의 구도는 정확히 그러한 사례에 부합한다. 민중주의적 전통의 무력화와 함께 대문자 정치와의 연관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한국의 문학정치론이 서구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궤도를 참조하게 된 것은 그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이론적 정당화 작업에 최소한 두 가지 난점이 따른다는 사실만 짚어두자. 먼저 기존의 정치와 구별되는 문학·예술 고유의 (진정한) 정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후자를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나 이를 통한 공동체의 (재)구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지나치게 모호하다.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자체는 모든 텍스트가 제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수행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는 밀도 있는 문학정치적 논변을 끌어내기 쉽지 않다. 더욱 문제적인 것으로 치안과 구별되는 ‘진정한’ 정치를 설정하고자 하는 (급진주의적 사유 특유의) 암묵적인 규범적 욕망은 반대로 정치를 지나치게 협소한 개념으로 만들어 정작 개별 텍스트에 내포된 여러 정치적 측면을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이는 역설적으로 ‘정치’를 현재의 사회·체제 바깥으로 탈출한 은거자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2009년의 어느 좌담에서 신형철이 “문학의 정치”가 도대체 어떤 정치냐고 질문했을 때, 정치 개념의 규정이 문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미 분명히 인지되고 있었으며 이 상황은 논쟁의 끝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듯 보인다.13) 시와 정치 논쟁은 문학에 고유한 정치적 범주를 만들고자 했으나, 그러한 범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또 그로부터 어떠한 비평적 모델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2. 취향, 시민, 공동체: 오혜진의 문학정치론


『취향』에 수록된 거의 모든 글에서 오혜진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사는 특정한 문학·비평담론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별화되어 있는지, 혹은 어떠한 성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지적하는 데 있다. 여전히 많은 발화자들이 스스로의 “정상성”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할 때, 즉 자신들의 담론에 특정한 방식의 관습화된 성적 위계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 자체를 성찰하지 않고 있다고 할 때, 이러한 상황을 지적하고 또 그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는 ‘맹목’을 겨냥하는 ‘비판’이라는 여성주의자들의 고전적인 수사 전략을 택한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설령 그가 퀴어·소수자 정치라는 지향점을 명확히 노정하고 있음을 덧붙인다 할지라도, 이미 페미니스트·젠더비평적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들이라면―물론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독자들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오혜진의 글에서 별다르게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관건은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때로는 그 이상으로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다. 오혜진의 글을 주의깊게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 꼽는다면, 내 생각에 이는 그가 여성주의적 읽기에 공감하는 독자들 혹은 그에 반대하는 독자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의들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모두가 자신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페미니스트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활용하는 사유의 모델과 방법에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시와 정치’ 논쟁에서 (정한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회전”을 되풀이했던 지점, 즉 (문학의) 정치를 어떻게 추상적 이념에서 머무르지 않는 구체적인 현실로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오혜진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4) 먼저 주의할 점으로, 「‘그날’ 이후의 서정시와 ‘망막적인 것’」과 같은 글에서처럼 ‘시와 정치’ 논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취향』 477), 『취향』은 해당 논쟁에 답하는 이론적인 논변을 직접적으로 수행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설정하고 있는 문학정치론을 곧바로 물을 필요가 있다.

『취향』의 서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문학적) “취향”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흥미롭게도 또는 당혹스럽게도 저자는 책 어디에서도 자신이 해당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자신의 문학적 취향이] 다른 많은 ‘문학적 취향’들과의 치열한 경합 및 각축을 통해 이루어졌고, 내 ‘취향’ 역시 다시 한 번 그 경합의 장에 놓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단어가 특정한 이론적 건축물을 염두에 둔 개념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12). 「종말」의 보다 상세한 진술을 보자.


“특정 주체에 의해 관리·통제되는 이념적 실체로서의 단일하고 동질적인 한국문학을 부정하는 것과, 한국문학의 존재방식, 즉 한국문학이 처한 물적 토대 및 공공의 사회적 담론양식으로 기능해온 역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는 ‘국민성’이라는 것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나라 국민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역사적 경험을 통해 공유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은 엄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문학/비평은 바로 그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그것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공통감각을 창출·갱신해나가는 사회담론의 한 양식이다”(『취향』 96-97).


“문학이 일종의 ‘취향공동체’로, 비평은 ‘취향의 정당화’ 문제로 수렴된 것이 벌써 오래전이다. 어쩌면 “나”와 “판이한 판단”의 주체들은 서로의 비평을 ‘주례사비평’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은 답이 없는 싸움. 이들은 오직 ‘취향’의 영역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독서 취향과 감식안, 공동체에 대한 비전인지를 겨뤄볼 수 있을 뿐이다. [...] 그러나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각자의 취향을 형성하고, 타인의 취향과 다툰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만은 아니다. ‘취향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서로의 세계관을 높은 강도로 부딪쳐야 하고, 무엇보다 ‘좋은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계몽 또는 운동으로서의 문학’과 같은 지난날의 문학관과 비평적 자원들도 모두 학습·활용해야 한다. [...] 21세기의 비평은 ‘취향’을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로 사유하고, 이곳에서 포스트-포스트모던의 문학주체들이 펼치는 문화정치와 인식 및 교양의 갱신을 면밀히 주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같은 책 99-100).


인용한 내용의 논리를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문학/비평은 한국사회의 “공통감각”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재)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과거에는 이 과정이 소수의 지도적인 문인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권위를 독점하는 주체가 없는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주체들의 “독서 취향, 감식안,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포함하는 취향 투쟁을 통해 진행된다. 이때 취향 투쟁은 한편으로 “서로의 세계관을 높은 강도로 부딪쳐야 하는” 일이자 과거의 비평적 자원들, 다른 문학주체들의 “인식 및 교양”까지도 살피고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노력을 요구하는 행위다. 비평은 이처럼 특정한 사유와 감각이 공통감각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한 행위이며 취향은 그것의 핵심적인 매체다. 그것들은 공통의 인식과 규범을 설정하는 데 관여한다는 점에서, 또 (『취향』 서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자가 목표로 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발명”하기 위해 요구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12).

내가 오혜진이 주장하는 취향의 정치론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그의 논의가 시민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사회이론적 모델을 전제한다는 데 있다. 「종말」 출간 직후의 대담에서 그는 자신의 논의가 “‘민중·국민·대중·군중’ 같은, 과도하게 이데올로기화되거나 탈정치화된 표상으로 환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시민’이라는 개념을 선택”했으며, 이때 시민은 “공통의 사회적·역사적 자원을 활용해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공동체의 비전을 형성·갱신해나가는 주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15) 여기서 그의 정치론이 의식적으로 과거 좌우파가 상정한 민중주의·국가주의 등의 논리를 피해 보다 공동체주의적·공화주의적 입장에 가까운 사회모델을 채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는 전통을 공유하는 동등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서로 다르지만 동등한 시민들은 다시 서로 간의 의사소통·논쟁을 통해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변형시켜 나간다. 시민들 간의 의사소통에 기초한 공통감각·규범의 형성이라는 면에서 문학/비평의 영역은 일종의 공론장으로 사고된다(물론 여기에 하버마스적인 합리성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1절의 마지막에서 언급했듯, 근대문학 종언론의 충격 이후 문학과 정치를 다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은 ‘시와 정치’ 논쟁에서 문학·예술을 통해 수행되는 고유한 영역의 정치 개념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유럽좌파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전유를 통해 시도되었던 ‘정치’의 개념규정은 특정한 문학적 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분석으로 나아가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협소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오혜진의 문학정치론은,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이전의 문학과 정치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돌파할 수 있다. 먼저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이미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민사회의 담론투쟁 모델에 기초한 취향 투쟁의 문학정치론은 문학·비평작업을 구성하는 담론들이 다른 담론들과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기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문학의 정치를 실제로 논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다음으로, 대문자 정치 혹은 체제유지적인 행위와 그 바깥에 있는 진정한 정치의 구별에 따라 정치를 체제 바깥의 것으로 표상하고 또 그에 규범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급진주의적 모델과 달리, 보다 가치중립적인―적어도 가치중립성을 지향하는―개념들의 채택은 정치 개념에 선험적인 규범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체제 내외부의 구별에 따르는 불필요한 곤란함을 피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오혜진의 비평모델은 역사학·사회학에서 요구되는 학문적 관점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문학의 정치를 보다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행위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한다. 이와 같은 문학정치론의 이론적 갱신이 저자 자신의 취향 투쟁을 위해 어떤 전략들을 가능하게 해주는지는 다음 절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3. 페미니스트 취향 투쟁의 수사와 서사


「‘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은 투쟁의 상대가 누구인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취향』의 첫 번째 평론으로 위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제 “천명관과 정유정에 대한 비평이 말해주는 몇 가지 것들”에서 곧바로 알 수 있듯, 글이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은 두 소설가의 작품 자체라기보다는 해당 텍스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특정한 관점 자체에 있다. 먼저 “장편소설론”(의 욕망)에 입각한 2000년대의 한국비평계가 천명관과 정유정을 “이야기꾼”으로 호명했던 정황을 지적한 뒤(28) 오혜진은 한국문학에서 “이야기꾼”을 사용해온 용법에 어떠한 문화정치적 감각이 내재해 있는가를 설명한다. “이야기꾼”은 한편으로 “근대화·산업화·신자유주의화로 치닫는 역사 진행 속에서 [...] 아직 훼손되지 않은 공동체를 상기시키는 아련한 표상”이지만, 동시에 “‘상스러운’ 말투와 유머들”을 통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어떤 구애도 받지 않은 채 여성·성소수자·장애인·저학력자·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비하, 조롱 등을 무람없이 할 수 있었던 ‘민주화 이전’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31). 덧붙여 이들에게 “1980년대 리얼리즘 미학”에 복무하라는 요구가 함께 주어졌음을 지적하면서(35) 요점은 분명해진다: 2000년대 한국비평계의 지배적인 ‘문학적 취향’은 여전히 1980년대의 (남성중심적) 민중주의 미학을 희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취향이 1990년대부터의 ‘여성적’ 문학 취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서사화하는지를 짚는다(우리는 이 책에서 ‘취향’의 탐색이 단순한 선호의 인식을 넘어 특정한 선호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역사적 서사화에 대한 검토까지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문학계에서 ‘여성적’ 가치라고 젠더화된 요소들”인 “‘내면성’과 ‘고백의 양식’ 등으로 지칭되는 ‘1990년대 문학’의 특징들을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이야기꾼’적 감각이 “지극히 평범한 전통”에 속한다는 천명관의 주장과(38), 정유정의 스토리텔링과 대비하면서 “자기고백”에 빠진 한국소설의 “결핍”, 즉 “‘여성적인 것’으로 젠더화된 ‘1990년대 문학’과 그 후예인 ‘2000년대 문학’”을 폄하하는 비평적 평가에 대한 검토를 보자(45). 이를 통해 오혜진은 1980년대적인 것을 정상규범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단순히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이후의 취향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취향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16)

1980년대적인 것과 다른, ‘2010년대적인’ 것으로서의 페미니스트 문학 취향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는가? 『취향』의 3부와 4부가 각각 여성서사와 퀴어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앞의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면, 1부의 「종말」 및 「혐오의 시대, 한국문학의 행방」은 새로운 문학적·비평적 취향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글로 이해될 수 있다. 「종말」은 신경숙 사태로 인해 다시 제기된 문학권력론이 실제로는 1980년대적인 것을 복권하려는 취향에 따라 “1990~2000년대 문학사의 젠더화와 타자화를 통해 586세대의 노스탤지어와 정통성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는 비판으로 시작한다(91). 1980년대적 취향의 귀환에 대항해 오혜진이 먼저 제시하는 수사적 전략은 “현재 상황은 [1980년대적인 문학비평이 여전히 자임하는] 계몽주의가 시대정신으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해온 과거와 그 사회적·문화적 조건이 전혀 다르다”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 과거와 현재의 시대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 즉 역사적 조건이라는 항목을 논쟁에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각각의 시대가 가진 조건 및 그에 부합하는 전략이 서로 다르기에 한 시대에 통용되었던 규범이 다른 시대에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다른 오늘날은 어떠한 시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오혜진의 답변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듯싶다. 하나, 문학장은 비평가의 권위가 대중을 계도하는 수직적 구조에서 (적어도 누군가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주장할 수는 없는) 동등한 취향들이 공존하는 수평적 구조로 바뀌었다(96-100). 둘, 고유의 “정치적·문화적 교양”을 지닌 “20~30대 여성독자들”이 문학장의 주 소비집단임이 명확해졌다(특히 109쪽의 표). 셋, 웹툰·웹소설의 대두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문학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장르들의 비중이 급격히 커졌다. 오혜진은 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를 지각하지 못한 “‘이성애자-선주민-비장애-남성-지식인’들의 문학(사)은 이제 현실에 대한 아무런 생산적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유물이거나 시대착오적 양식”으로 전락했으며, “현재 젊은 독자들이 새로운 학습과 경험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원에서 한국문학/비평을 기각한 이유”가 여전히 그러한 1980년대적인 취향이 한국문학장의 우세종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04).

바로 다음에 배치된 「혐오의 시대, 한국문학의 행방」은 「종말」의 문제의식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조건에 부합하는 문학/비평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되었던 사항 중 두 가지, 즉 20~30대 여성독자층의 중요성 및 새로운 (디지털)미디어의 확산을 짚은 뒤에 저자는 이제 한국문학이 “타자화 없이 가능한 재현의 윤리와 문법을 계발하려는 노력”을 수행해야 하며, 여기에는 “기존의 변혁적인 문학실험 전통의 리뉴얼 혹은 재활성화와 함께, 지금까지 충분히 시도되지 못한 ‘시민이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소수자’를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서사적 실험”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7). 앞서 말했듯 오혜진의 문학정치론이 시민-공동체를 핵심적인 축으로 하는 사회모델에 기반하고 있다면, 새로운 시대의 문학정치에는 기존에 ‘정상적인’ 시민=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던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에게 시민권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재구축할 책임이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17)이러한 입장은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와 소수자 정치가 공존하는 지점 어딘가에 있으며, 따라서 저자가 2부의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에서 페미니즘 문학과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비문학적인 요구로 간주하며 새로운 페미니즘 소설/비평의 문제제기를 거부하려는 ‘문학주의자’들을 비판하고자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 정치적 올바름·정체성 정치를 물신화한다는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양방향의 움직임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로 흥미로운 이유는 다름 아닌 저자 본인이 정치적 올바름과 새로운 문학의 관계에 관해 아직 충분히 명료한 입장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는 균열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공동체와 시민의 범위를 확장하고 소수자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다원주의적 문화정치에서 중요한 전술로 활용되어 왔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다원주의를 자유주의적 지배의 교묘한 속임수라고 규탄하는 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적 전통 또한 여성주의·퀴어 정치론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이 더 깊게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작 『미지의 세계』를 다룬 「“포스트-아포칼립스”를 향한 미지의 미러링: 이자혜의 <미지의 세계>(레진코믹스, 2014~2016)」와 같은 글들은 후자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텍스트 읽기를 통해 적용해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다만 나는 이 텍스트에서 “급진적 주체화 가능성”[358]을 탐색하려는 시도에는 다소 회의적이다).18) 양자 사이의 균열과 간극으로부터 저자가 어떠한 입장을 채택할 것인지, 또 어떠한 수사적 자원을 발굴해낼 것인지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다.



4. 맺음말


본 서평은 『취향』이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장 내에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두고 제기되어 온 중요한 논쟁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저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둘 때 더 풍부하고 생산적인 읽기가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페미니즘의 렌즈를 통해 기존의 한국문학을 비판/비난하고자 한다’는 식의 요약은, 설령 그 자체는 틀리지 않다고 할지라도, 『취향』이 저자 본인이 여러 차례 강조하듯 단순히 이전의 전통의 시대착오적 지점을 짚어내는 일을 넘어 과거에 제기되었던 중요한 물음들을 숙고하고 여기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는 페미니스트 독자들과 그렇지 않은 독자들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오혜진은 2000년대 중후반에 전개된 문학과 정치 논의를 문학비평의 방법과 사회·정치의 이론적 모델이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형태로 다시 벼리고자 했으며, 그러한 방법에 기초할 때 보다 정교하고 실천적인 비평적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저자 스스로가 본인이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고 소개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책 앞날개, 강조는 인용자). 책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따라서 꼼꼼한 독서를 요구하는 1부와 2부의 글들은 추상적인 ‘이론’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대신 텍스트와 담론의 움직임을 맥락화할 때 더 깊이 곱씹을만한 비평적 사유가 전개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19) 어쨌든 지난 10년 간 풍성했던 ‘이론’에 대한 요구에 반비례하듯이 ‘방법’에 대한 엄밀한 숙고는 빈약했음이 사실이기에, 나는 한국문학연구·비평계가 이 책의 교훈을 좀 더 주의 깊게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이는 『취향』의 독자들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페미니스트 독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1)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85(2016): 83-105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80-117에 재수록). 당시의 반응·논평 중 일부로는 박인성·오혜진·이우창·황현경·강동호 좌담, 「우리 세대의 비평」, 『문학과사회 하이픈』(2016년 가을): 46-101 을 참조.


2) 그러한 기획의 결과물 중 하나로는 오혜진 기획, 권보드래 등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 을 보라. 이 책에 대한 나의 논평으로는 이우창,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쓰기(들): 『대한민국 독서사』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학산문학』 102(2018): 292-317 에서 특히 3절을 보라.


3) 대표적으로 근대문학이 근대국가의 국민(nation) 형성과정이나 다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상상력처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상황은 그의 ‘교환양식론’에서 호수제=국민형성의 원리와 X=어소시에이션이즘의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까다로운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개정 정본판, 박유하 역, 도서출판b, 2010에 수록된 여러 후기들은 가라타니 본인의 이론체계가 정립되어 가면서 그가 근대문학에 부여하는 의의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4) 민족문학론의 정치사상적 논리에 관한 간략한 요약으로는 이우창,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 민족문학론에서 반민주주의론까지, 1989-2017」, 『코기토』 83(2017): 58-116, 특히 64-69 를 참고.


5)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7-18. 유사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글로 같은 책의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특히 163 을 보라. 오늘날 『몰락의 에티카』를 다시 읽어본다면,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한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급진좌파 철학이 미국을 거치며 ‘이론’이 되어 한국 비평계에 유입되고 있는 2000년대 중후반의 흥미로운 광경을 발견하게 된다.


6) 김홍중,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05-33.


7)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87년 군부독재정권의 명시적인 종말 이후 점차 거시정치를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도덕주의적 서사로 규정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이 정치를 다루어온 가장 전통적이고 강력한 문법이 도덕의 언어라면, 정치가 도덕적 언어를 통해 해석되기 어려워질수록 그러한 문법의 활용 역시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가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역설적으로 ‘근대정치’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정치로부터 도덕주의적 언어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가령 이우창, 「도덕정치의 수사 혹은 반정치적 맹목: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조기숙, 『왕따의 정치학』」, 『학산문학』 97(2017 가을): 337-54 을 보라.


8) 김홍중,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129.


9) 논쟁의 구도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로는 이찬, 「2000년대 한국문학 비평의 첨예한 성좌들: “미래파”와 “정치시”를 중심으로」, 『실천문학』 98(2010년 여름): 346-68 을 보라. 논쟁에 참여한 주요 문건의 목록으로는 정한아,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 ‘시와 정치’ 논쟁에 대한 프래그머틱한 부기(附記)」,      『상허학보』 35(2012): 177-209 중 182-84 의 각주 8과 9를 참조.


10)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6(원문은 2008년 출판).


11)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 같은 책, 75-77(원문은 2009년).


12) 앞서 언급한 정한아의 글 이외에 몇 가지 예로,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 비평』 147(2010년 봄): 369-86; 백지은, 「“문학과 정치” 담론의 행방: 2000년대 중후반의 비평 담론을 중심으로」, 『비평문학』 36(2010): 103-27 등을 보라. 백지은의 글은 명시적으로 가라타니의 문제제기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13) 심보선·서동욱·김행숙·신형철,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오늘날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동네』 58(2009 봄): 363-94, 특히 386-90.


14) 정한아가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운동’과 대비되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캠페인’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확히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


15) 박인성·오혜진·이우창·황현경·강동호 좌담, 「우리 세대의 비평」 96.


16) 『취향』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글로는 대표적으로 2부의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 신자유주의시대 이후 한국 장편 남성서사의 문법과 정치적 임계」 및 「정치적 포르노그래피와 ‘형제들’의 혁명」, 3부의 「집 떠난 뒤, ‘고독의 시간’을 지내는 방법: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동네, 2014)」 등을 보라.


17) 물론 오혜진이 추구하는 소수자 정치는 앞서 언급한 신형철의 ‘문학의 윤리’와 유사한 지향점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양자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18) 내가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에 갖는 불만 중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을 다루면서 후지이 다케시와 정희진이라는 상당히 불충분한 레퍼런스를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데 있다. 내 생각에 저자와 같이 시민, 공동체, 다원주의 문제를 더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대륙철학에 기반한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전통보다는 차라리 20세기 후반 영미권에서 자유주의를 두고 전개된 정치철학·지성사 논의가 좀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쪽 분야에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문헌으로는 비록 전혀 충분하지 않지만 나카마사 마사키, 『현대 미국 사상: 자유주의의 모험』, 송태욱 역, 을유문화사, 2012 및 이우창, 「서구 근대 자유주의의 중세 기독교적 기원?: 래리 시덴톱, 『개인의 탄생: 양심과 자유, 책임은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학산문학』 96(2017년 여름): 302-18 을 참고.


19)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내게는 김미정의 『움직이는 별자리: 잠재성·운동·사건·삶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시론』(갈무리, 2019)에서도 3부가 가장 흥미롭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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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lamm 2019.08.06 14:07 신고 Modify/Delete Reply

    (댓글이 지워져서 다시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우선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저는 한국 문학과 비평을 거의 읽지 않아 ‘퇴행의 시대와 K-비평의 종말’과 같은 오혜진 선생님의 논문의 내용을 잘 음미하지 못했었는데요, 이우창 선생님의 서평으로 오혜진 선생님의 작업이 문학사나 문학과 정치 논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평을 읽지 않았다면 오혜진 선생님의 비평 작업을 개별 작품에 대한 단순한 ‘페미니즘적’ 독해로만 환원해 오해하는 우를 범했을 수 있었을 것 같네요.)

    한편 제가 글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던 점이 있습니다. (<취향>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감안해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바로 오혜진 선생님이 앞으로의 비평은 곧 ‘취향’의 경합에 다름아닐 것이고 그래야 한다는 취지로 논의를 전개한 것에서 서평 저자이신 이우창 선생님이 (기존의 비평이 전제한 사회모델과는 차별화되는) 어떤 시민적 정치/논쟁의 모델을 읽어낸 지점입니다. 그 독해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과연 어떤 논자가 자신의 ‘취향’을 근거로 한 주장을 공동체의 공론장에 제출하고 그것을 다른 주장들과 겨루게 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취향’이라는 개념이 책에 정의되어 있지 않다고 서평이 밝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취향이라 할 때 그것은 가정이나 학교, 또래 집단, 개인의 경험 등을 거쳐 자연스레(?) 혹은 부지(不知)중에 형성되는 비교적 주관적인 것이라고들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취향을 근거로 한 주장을 가지고 우리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에 고유한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규범적 원칙에 근거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에서 언급하신 ‘하버마스적 합리성’이 문학 평론 공론장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혜진 선생님이 지향하는 “어떤 것이 더 나은” 비전인지를 겨루는 것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런데 애초에 ‘취향’이라는 것의 발생적 기원 자체가 그것이 ‘하버마스적 합리성’이 되게 하기 어렵게끔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우창 선생님께서 서평 3절에서 지적하신 대로, 오혜진 선생님이 말하는 취향이 “단순한 선호의 인식을 넘어 특정한 선호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역사적 서사화에 대한 검토까지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짚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취향’은 규범적으로 정당화가 불가능한 단순한 선호가 아니게 되겠죠. 그런데 본인의 ‘취향’의 형성 기원을 캐묻고 여러 규범적 논증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과연 그것을 ‘취향’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취향이라기보다는 바람직한 문학적 서술 방식과 앞으로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비평가의 입장이 아닌가요? 더해서, ‘취향’이라 이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인지 의문이 듭니다.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는 말처럼 취향 자체가 논쟁을 막는 도구로 왕왕 쓰이니까요. 비록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취향이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덧붙여, 서평에, 문학장에 “동등한 취향들이 공존”하고 그것이 “수평적 구조로 바뀌었다”는 서술이 있는데 흥미롭지만 또 새로운 의문을 낳는 문학장에 대한 시각입니다. 아주 범박하게 말하자면 20-30대 여성 독자들의 취향이 있을 수도 있고 50대 남성 독자들의 취향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오혜진 선생님은 비평이 “취향의 정당화”의 문제가 되었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본인의 ‘기존의 비평 담론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수반한’ 취향 판단이 때때로는 20-30대 여성 문학 소비층의 취향과 일치하지 않게 될 가능성 역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평가가 대중을 계도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렇다면 오혜진 선생님의 취향 정당화 작업은 어떤 맥락에서 필요한 것일지—다시 말해 어떤 취향층의 독자 그룹이 오혜진 선생님의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지—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취향을 경합시킨다’라는 발상 자체에서 느껴지는 어떤 으스스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부르디외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과연 공론장에서 취향을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시도’는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우창 선생님(그리고 블로그에서 글을 읽으시는 다른 독자 분들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 BeGray 2019.08.07 03:38 신고 Modify/Delete

      먼저 상세한 그리고 주의깊은 문제제기에 감사드립니다.

      질문하신 내용의 핵심은 "취향"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댓글에서 제기해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답변을 전개해나가자면,

      1) "기본적으로 취향이라 할 때 그것은 가정이나 학교, 또래 집단, 개인의 경험 등을 거쳐 자연스레(?) 혹은 부지(不知)중에 형성되는 비교적 주관적인 것"은 저나 오혜진 선생의 취향 개념을 기술하는 규정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문단에서 인용하셨듯 오혜진 선생의 (것이라고 제가 이해하는) 취향 개념은 단순한 선호와 달리 그러한 선호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다양한 논거들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는 말처럼 취향 자체가 논쟁을 막는 도구로 왕왕 쓰이"곤 한다는 비판적 지적은 사실 완전히 유효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취향의 용법 자체를 재규정하려는 것, 그것이 논쟁가능한 대상이자 하나의 담론이기도 함을 드러내는 것이 해당 저작이 전제하고 있는 목표 중 하나이니까요. 어차피 이데올로기나 일상어의 오용으로부터 무균지대에 속해 있는 언어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저는 그러한 시도가 특별히 무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2) "본인의 ‘취향’의 형성 기원을 캐묻고 여러 규범적 논증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A)이라면 그것은 취향이라기보다는 "바람직한 문학적 서술 방식과 앞으로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비평가의 입장"(B)이 아니냐는 비판의 경우, 제 생각에는 A가 곧 B로 등치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취향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과정이 곧 그러한 취향이 전체 문학장의 규범으로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당화의 수사적 장치들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떠한 비평가가 특정한 취향의 설명과 정당화(A)를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삼아 문학장의 새로운 규범을 제출하는(B) 논변을 펼치는 것은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곧 A가 B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순화된 유비를 사용하자면 망치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해서 망치가 곧 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진 않지요.

      3) 공동체의 규범이 "어떤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에 고유한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규범적 원칙에 근거해야 하지 않을까"란 문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① 그러한 반론은 "보편적인 규범적 원칙"이 존재하고 또 우리가 그것을 도출하는 게 가능하다는 전제를 요구하는데, 제 생각에 오혜진 선생의 책이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저는 우리가 보편적 규범원칙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그러한 필요가 곧 그것이 우리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② 다음으로 오혜진 선생이 문학적 취향으로부터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모색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저는 그게 꼭 문학적 취향이 공동체에 대한 비전의 독점적인 원천이 된다는 주장으로 읽혀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미적 분야에서처럼 "보편적인 규범적 원칙"이 성립한다고 주장하기 힘든 영역이라면, 취향으로부터 바람직하다고 상정되는 비전/지향/상상을 이끌어내는 데 특별히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미적/예술적 비전이 공동체 전체의 비전의 일부를 이룬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③ 앞서 1)에서 말씀드렸듯 취향 개념을 보다 복잡한 것으로 규정한다면 특정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떤 취향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경쟁이나 투쟁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취향의 승리가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겠죠. 취향이 속해 있는 사회는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바뀌니까요.

      4) "[오혜진] 본인의 ‘기존의 비평 담론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수반한’ 취향 판단이 때때로는 20-30대 여성 문학 소비층의 취향과 일치하지 않게 될 가능성 역시도 있다" -> 네, 제가 이해하는 저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순간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5) "비평가가 대중을 계도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렇다면 오혜진 선생님의 취향 정당화 작업은 어떤 맥락에서 필요한 것일지—다시 말해 어떤 취향층의 독자 그룹이 오혜진 선생님의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지"의 경우, 비평가가 고전적인 형태의 지식인처럼 전체 인민을 계도하는, 혹은 그러한 상상은 이제 지탱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취향에 관한 전문적인 역량을 쌓은 사람으로서 비평가가 공론장 내의 취향 투쟁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건 한동안은 계속해서 일상적으로 발생할 일일 것 같습니다.

      6) "취향을 경합시킨다"는 발상 / "공론장에서 취향을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시도’는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 제 생각에 이건 둘 다 일상적으로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벌어질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부르디외는 잘 모릅니다만, 취향("taste")이 18세기 유럽, 적어도 영국사회 이후에 상기한 행위와 계속해서 연루되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상당히 분명하지 않나 싶네요.


      마지막은 약간은 저의 추측입니다만, Klamm 님께서 던지시는 질문/비판이 특정한 보편적-규범적 모델에의 요구에 좀 더 다가서 있다면, 오혜진 선생은 그러한 모델이 존재하지 않으나 그래도 보다 규범적인/탁월한 무언가에 대한 요구는 존재하는 사회에서 "취향"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기술하고 그러한 조건 하에서 "비평"이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구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Klamm 님의 비판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명제 중 일부 핵심적인 요소는 처음부터 오혜진 선생의 논의에서는 애초에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필요는 존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랄까요. 그리고 그것이 저처럼 역사학적 전통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에게는 좀 더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입장처럼 보이긴 합니다.^^

    • Klamm 2019.08.07 14:21 신고 Modify/Delete

      답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서평을 읽고 관심이 생겨 평론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구해 우선 관심이 가는 몇 평론을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1)
      1)에 대해서는, 저도 이우창 선생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취향의 용법 자체를 재규정하려는 것, 그것이 논쟁가능한 대상이자 하나의 담론이기도 함을 드러내는 것이 해당 저작이 전제하고 있는 목표”라고 하신 것처럼, 물론 여러 취향은 논쟁 가능합니다. 오혜진 선생님이 비평집 <취향>의 첫머리에 실린 비평 ‘장편의 시대…’에서 시도하신 것처럼, ‘이야기꾼’이 필요하다는 주류 한국문단의 ‘취향’에 “1970~1980년대 이성애자 남성지식인 중심 문학(장)의 재림을 소망하는 586세대의 욕망”(<취향>, 38쪽)이 도사리고 있다는 식으로, ‘취향’이 근거하고 있는 혹은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무의식적?) 욕망 내지는 가치판단을 지적할 수 있지요. 그럼으로써 취향은 논쟁가능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데올로기나 일상어의 오용으로부터” 자유로운 언어는 없다는 서술에 물론 동의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떤 엄밀한 개념을 만들 때 일상어를 끌어오는 이유는 그 일상어가 언어 공동체 내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함의를 부분적으로는 이용하고자 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더군다나 오혜진 선생님이 ‘취향’에 대해 따로 정의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상적 용법과 뜻에 기댄 독자들의 해석(오해?)을 피하기 어렵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언어감각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소 다를 가능성도 있겠지만 감히 일반적 언어감각을 대변해보자면 우리가 취향이란 단어를 쓸 때 첫째로 (물론 그 자체가 신화이지만) 취향은 보통 자연적인 것이고, 둘째로 (이것이 신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꾸기 어렵다고들 느껴지는 뉘앙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둘째 뉘앙스 때문에 ‘취존’ 원칙이 설득력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취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가정이나 학교, 또래 집단, 개인의 경험 등을 거쳐 자연스레(?) 혹은 부지(不知)중에 형성되는 비교적 주관적인 것”이라는 뉘앙스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2)
      답글에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특히 인상깊었고 곱씹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비평가가 “특정한 취향의 설명과 정당화(A)를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삼아 문학장의 새로운 규범을 제출하는(B) 논변을 펼치는 것은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곧 A가 B라는 뜻은 아닙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쾌/불쾌 판단을 이루는 취향과, 그것에 기초한/그것을 이용한 규범적 논증을 무리하게 동일시한 것 같네요.

      둘째로는 “미적/예술적 비전이 공동체 전체의 비전의 일부를” 이룰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특정한 미적 취향으로만 어떤 공동체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상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다만 (마치 90년대 여성 작가들의 사소설, 내면적 소설처럼) 어느 정도 부당하게 다뤄진 ‘취향’을 복권시키고 그 취향이 가지고 있는 미적·정치적 취지를 재조명함으로써 어떤 공동체의 상 내지는 비전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을 밟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혼자 궁리해보고 특히 개별 작가들에 대한 오혜진 선생님의 비평을 참고해 봐야겠네요.)

    • BeGray 2019.08.08 02:02 신고 Modify/Delete

      (1) 제 생각에 Klamm 님께서 말씀하신 "취향"의 용법이 한국사회의 언중에게 통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혹은 유일하게 지배적인 용법인지 여부는 약간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오덕 커뮤니티를 베이스로 해서 말씀하신 "취존"의 용법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그러나 그 경우에도 "취존"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취향의 자연성을 전제하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좀 의문이 있습니다), 그에 못지 않게 "고급 취향/취미"라든가 "취향이 별로다", 특정 장르에 대한 취향의 숙성 등 취향의 (사회적) 형성 기제를 포함해 말씀하신 뉘앙스에 해당되지 않는 용법 또한 적지 않게 유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취향"이 개개인의 미적 선택/판단의 사회적 층위와 닿아있음을 함의하는 고전적인 개념이라는 것도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말이죠.

      (2) 오혜진 선생의 책은 개념 자체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전진하는 책은 아니라서 독자가 약간 알아서 읽어야 하는 면이 있는데요, 혹시 여기에 관련된 주제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역시 18세기 영국의 도덕철학 및 감성론/미학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짚어가면서 보는 게 제일 좋지 않나 싶습니다 ㅎㅎ (그러한 맥락을 충분히 연결시킨 텍스트가 한국어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ㅠㅠ)

    • Klamm 2019.08.08 15:04 신고 Modify/Delete

      (1) 물론 많은 사람들이 "취향의 (사회적) 형성 기제"를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문장을 썼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취향이라는 단어에 '자연적'이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한 것은, 그 취향이라는 것이 성별(젠더), 부모, 교육, 세대, 개인이 속한 제도, 생애 상의 우연성에 의해 '사회적'으로 형성되지만 그것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알기 어려울 때 형성되기 때문에 '자연적'이라는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취존'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는 취향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물론 '고급 취향/취미'라는 것이 있죠. 다시 말해 어떤 특정한 장에서 정당한(legitimate)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실천 양식이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엇이 정당한지', '무엇이 예술적이고 아름다운지'에 대한 감각은 많은 부분 젠더나 계급과 같은 본인이 결정하기 어려운 요소에 의해 배양됩니다. 물론 학교 교육이나 독학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급'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죠. 비평집 <취향>에서도 논해진 바 있는 <미지의 세계>의 주인공 조미지처럼요. 그런데 그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고급 취향이란 결국 한국에 잘 안 알려진 영국 포스트펑크 인디 음악과 같은 '중간 수준(middle-brow)'의 예술입니다. 만화에서 볼 때 그녀 역시 실제로 정통적이고 '고급'스러운 취향은 부잣집 딸내미인 유안미의 '자연스러운' 꾸밈 없는 티 안나는 무엇인 것을 알고 있고, 본인의 취향은 그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부르디외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취향이 비록 사회적 요소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자연화(본성화)되었다고 느껴진다는 점에서 취향을 둘러싼 투쟁이 곧 은밀하고 은폐된 계급/계층들 간의 상징 투쟁이라고 부르디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덕 커뮤니티에서 "취존"이라는 단어가 퍼지게 된 것도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일본 서브컬처 향유가 고급스럽고 정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방어로서 모든 취향이 동등하다는 그런 널리 퍼진 관념을 소환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암튼 그런 상징투쟁을 통해 '구별'(구분)이 발생하는 것이고요.

      부르디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고 취향goûts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dégoûts,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대한 공포감 또는 본능적인 짜증("구역질난다")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다.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마라"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모든 취미가 자연[본성]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 취향이 스스로를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미적 불관용은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활양식에 대한 혐오감은 각 계급을 갈라놓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다. ... 스스로 정통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정통] 취향에 따르면 서로 구분되어야 하는 예술 감식안들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신성 모독 행위일 것이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上권』, 최종철 옮김, 새물결출판사, 2006, 115-116. 번역은 Richard Nice의 영역본 참고해 일부 수정했습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취향 투쟁의 핵심에는 계급/계층 간의 적대가 숨어있는 셈입니다. 그런 취향이 자연적으로가 아닌 사회적으로 형성되지만 사실 그 사회적 기원은 개인이 어찌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오혜진 선생님의 글을 실제로 읽어본바 취향이라는 단어를 어느 정도 소박하게, 좁은 의미에서 쓰신 것 같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에 부르디외나 제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점(?) 혹은 혐의(?)가 곧이곧대로 적용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혜진 선생님이 기성 문단에서 옹호되었던 장편소설/K-문학을 적극적으로 탄핵하고자 할 때 '20-30대 여성적 취향'을 근거 중 하나로 소환한다면 이후 비평적 논의가 오도되어 흘러갈 수도 있겠다는 깨름칙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고급 취향이냐!'라는 식이나 '(리얼리즘문학을 하는 남성작가를 원하는 기성문단의 전도된 '판타지'는 다른 문제로 하더라도) 남성독자, 40-50대 독자 역시 그들의 취향이 있는 거 아니냐. 취존!'라는 식 같이요.

    • Klamm 2019.08.08 15:29 신고 Modify/Delete

      다시 말하면, 20-30대 여성의 취향을 호출해서 어떤 비판을 전개할 때 그런 것과 상반되는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의 적대감이 논리적으로 예상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현재 출판시장에서의 20-30대 여성의 선택이 '고급' 취향이라는 것인가?라는 식으로요.

      물론 그런 취향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취향의 윤리적 측면이겠죠. 예컨대 ‘이야기꾼’이 필요하다는 주류 한국문단의 ‘취향’에 “1970~1980년대 이성애자 남성지식인 중심 문학(장)의 재림을 소망하는 586세대의 욕망”(<취향>, 38쪽)이 도사리고 있다는 식으로, ‘취향’이 근거하고 있는 혹은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무의식적?) 욕망 내지는 가치판단을 지적할 수 있지요. 그리고 최근의 '윤리적 재현'을 시도하는 '여성주의적인' 문학 취향의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윤리적 재현의 필요성과 여성주의적 독법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장편소설과 리얼리즘 문학의 미학적 의의를 인정하고, 그런 것이 생산되지 않는 한국 문학 장에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편소설과 리얼리즘 문학의 유효성을 희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의식에 아저씨적 취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평집의 첫 번째 비평은 은연중에 아저씨적=장편소설=리얼리즘=민중주의적 취향과 그렇지 않은 취향의 구분을 도입한다고 읽혔습니다.

      문학사적으로 천명관 류의 이야기꾼 문학을 옹호한 입장이 사실은 90년대의 사소설, 여성 작가들을 부당히 폄하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두 쪽 다 읽지 않아 뭐라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비평적 관점에서 '장편소설'이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손을 들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여기에 대해 공론장, 문학 장에서는 다양한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고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는 식으로만 인정한다면 '취존'의 논리를 일부 수긍한 것이 되지 않나 싶어요.

    • BeGray 2019.08.15 13:29 신고 Modify/Delete

      여러 중요한 지점을 제기해주셨는데 확인&답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일단 이번의 댓글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제만 꼽자면,

      1) "취향" 개념 및 취향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부르디외의 설명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좀 더 언어맥락주의적-역사적 접근법에 익숙한 사람이다보니, "젠더", "계급"과 같이 우리가 마치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항들조차도 실제로는 무척이나 가변적인 요소들의 집합체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그 점에서는 굳이 말하자면 저는 푸코, 좀 더 역사가가 된 후기 푸코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즉 부르디외의 연구는 한편으로는 부르디외가 대상으로 설정한 사회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취향투쟁을 "은폐된 계급/계층들 간의 상징투쟁"이라고 보는 시각은 저는 방법론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맑스주의적) 경제결정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들이 있는 걸 알면서도 완전히 맑스주의적 '실천이론'을 버릴 수 없었던 그 세대 프랑스(덧붙여 영미) 지식인들의 포지션의 반영이지 않나 싶어요. 저는 그와 달리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취향투쟁은 해당 분야에 고유한 논리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블로그에서 501번 게시물이 마침 그 주제에 대한 저의 입장을 다루고 있네요.

      +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의 취향형성과정을 보면, 설령 그 사람들이 종종 자신의 취향을 '자연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여러 가지 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특히 87 이후에 엄청난 변화를 계속해서 겪고 있는 지금의 한국은 더욱 그렇고요. 더불어 취향의 정당화 과정 자체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회 혹은 제2의 자연을 고정된 핵심요소로 간주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서 저는 실제로 언어행위들을 다루는 역사가/비평가로서 사회이론에서 종종 상정되는 특정한 본질주의와의 거리를 더 강하게 느낍니다)


      2. 말씀하신 대로 기존에 지배적이었던 취향의 비판이 곧 다른 취향의 정당화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혜진 선생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취향> 자체가 그런 점에서는 어떤 특정한 취향을 정당화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을 가진다고 말해도 아주 틀린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다양한 방향에서 반론과 논쟁이 제기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 a. 문학장에서 다양한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전제
      b. 특정한 취향이 어떤 국면에서 '지배적인', 혹은 다른 취향들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현실
      c. A라는 취향이 B라는 취향보다 (어떤 기준에서 볼 때) 더 우월하다는 주장

      이 세 가지는 논리적으로 공존가능하기 때문에 a만을 근거로 b나 c를 유의미하게 반박하는 건 조금 어려워 보입니다. c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A라는 취향만이 유일하게 정당하고 지배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그리고 <취향>의 저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진 않지요). 물론 a를 발전시켜서 "그러므로 취향 간에는 어떠한 우열, 정당성/부당성도 논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지션으로 갈 수 있는데, 이러한 b의 현실주의자든 c의 규범적 스탠스에 입각한 사람에게든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규범적으로 그러한 상대주의적 진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생각보다 제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도덕철학/윤리학 연구자들이 상대주의 포지션을 피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현실의 사람들이 b에서와 같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한 취향투쟁 자체의 무가치함을 주장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만약 Klamm 님께서 유의미한 논쟁을 이끌어내고 싶으시다면, a처럼 문학장에 일반적인 메타규범을 내놓으시는 것보다는 c의 차원으로 들어가 특정한 취향의 정/부당성을 논쟁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시는 게 좀 더 정석적인 방법이기는 합니다 ㅎㅎㅎ

    • Klamm 2019.08.15 17:24 신고 Modify/Delete

      문제의식이 잘 벼려지지 않고 성긴 형태의 질문이었는데, 답변 감사드립니다. ^^ 저도 쉬는 날이라 들어와봤는데, 마침 답변이 달렸네요. 저는 인터넷 상에서 긴 글을 읽은 후 비판점 내지는 의문점을 달아 논의를 한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 생각보다 더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일이었네요.(그런 점에서 늦은 확인&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ㅎㅎ. 오히려 이런 대화에서 꼭 필요한 시간 간격, 호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제가 한국 문학을 자주 읽고 <취향>에서 다루는 텍스트에 대해 익숙하다면 좀 더 핵심적인 비판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을 듯한데, 그것은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댓글 남겨주신 것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답변 댓글이나 비평서에 대한 비판 자체는 아니고요, 제가 왜 위에 단 댓글처럼 '취향'이라는 단어로 개념을 구축하는 데에 (약간은 직관적으로) 의구심을 느꼈는지에 대한 일종의 해명입니다.

      (1)
      개념, 범주의 형성에 대해서만 코멘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제가 이우창 선생님이 연구 방법론으로 주되게 쓰시는 지성사 방법론을 알지 못해 원론적 동의 이상의 어떤 코멘트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회의 경험 연구에 입각한 부르디외의 이론이 한국에 곧바로 적용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문학 소비와 관련해 일종의 '정통(legitimate) 문화'와 '비정통 문화'를 갈라놓고자 하는 시도는 트위터에서 몇 번 목격한 것 같습니다. 10대, 20대 여성의 알라딘 문학 구매 순위 리스트와 10대, 20대 남성의 알라딘 문학 구매 순위 리스트를 대조해 놓고 후자를 조롱하는 트윗을 종종 봤는데(후자 세대의 남성들은 '라이트노벨'을 많이 읽더라고요), 이런 점에서 주류 문단문학 소비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게 적어도 라이트노벨 소비자들을 조롱할 수는 위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싶었네요. 물론 그 트윗들은 비평적 코멘트가 전혀 아니었지만요.

      적어도 한국 문학비평에서는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취향'이라는 단어가 잘 쓰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좋은 게 좋아서 이런 장르(? 혹은 일군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소설가들?)가 좋다는 식에서 비평이 출발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취향> 비평집 글들이 새로웠지만, 또 역으로 그렇다보니 혼란스러웠던 것이 있었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출판 판매순위 등으로 살펴본 20-30대 여성의 '취향'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무엇인지 해명해보는 것도 재밌는 작업일 것 같다고 생각이 드네요. 그런 '취향' 역시 출판저널리즘과 인터넷 서점의 사은품 정책, 출판사의 공격적 마케팅과 무관하지 않겠죠.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사실상 대중적 호소력을 상실하게 된 상황에서, 결국 창비 문지 문동이라는 대형 출판사를 끼고 공격적 마케팅을 등에 업어 몇 명의 스타 작가들이 출현하고 한국문학의 미래로 호명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된 것 같거든요. 이건 업계 관계자나 국문학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겠지만, 한국문학을 읽는 젊은 여성 독서대중들이 천명관, 이기호 류 입담 소설을 거부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ㅎㅎ)

      (2) 말씀하신대로 제가 한국문학에 약간 더 정통했다면 바로 핵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듯한데 아쉽네요. ^^

      여담으로, 아무도 한국문학 비평 자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다음 글에서 그 점을 통렬하게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https://begray.tistory.com/332),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최신 한국소설에 대한 비평 청탁] -> [비평 생산] -> [문예지에 단독 작품에 대한 비평 게재]"라는 구조적 사이클을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평가들의 글을 본다면 비평을 쓴다는 것의 호흡과 사이클이 너무 짧고 급하다는 인상도 좀 들었어요.

      그 비평이 그 비평 같고, 또 그 비평들이 몇몇 소설들에서 '새로운 주체', '타자의 윤리' 정도만을 찾아내는 상황은 평론/비평이 생산되는 조건과 무관하지 않겠죠?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일관된 기획 하에 굳이 최근 한국 소설을 참고하지 않아도 되는 긴 비평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면, 이우창 선생님이 글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대륙철학에 기반한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전통보다는 차라리 20세기 후반 영미권에서 자유주의를 두고 전개된 정치철학·지성사 논의"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이론적 도구를 일신하고자 하는 비평가들에게도 생기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이우창 선생님이 영미권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언급하면서 또 느낀 건데, 꼭 한국 여성 작가들에 갇히지 않아도 외국의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가진 소설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는 시도도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중들이 현재 한국문학계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로부터 동시대의 작가들을 소개받고 그들에 대한 비평을 읽을 수 있는 창구는 사실상 없죠.)

      어디선가 가라타니 고진이, 자기는 이제 문학을 잘 읽지도 않고 '문학비평'을 하지도 않지만, 칸트와 맑스를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남들은 문학비평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자신은 문학비평으로 여긴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비평이란 무엇인지, 한국 문학 장 내에서 그것은 과연 최근 생산된 한국문학을 경유해야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네요. "현재 젊은 독자들이 새로운 학습과 경험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원에서 한국문학/비평을 기각"(오혜진, <취향>)한 것은 분명한데 말입니다.
      이 글 https://begray.tistory.com/419 읽으면 비슷한 생각 하신 것 같지만요. ㅎㅎ


      댓글로 대화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대학 교육 제도에 보다 관심이 있어서 이 블로그에서 주로 사회비평 글이 아니라면 대학교육 관련 글을 읽었는데, 막상 또 처음 의견 남기는 글은 문학비평 관련 서평에 대한 글이네요 ^^
      비단 이번 서평 아니더라도 다른 글들을 읽었을 때 도움 많이 받았고, 선생님이 한국 지식장 내에서 필요하고 또 귀한 역할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서평 기대하겠습니다~

  2. ㅇㅇ 2019.08.11 17:48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Begray님.여성주의에 관한 요청이라서 여성주의가 태그된 글 중 가장 최근 올라온 것에 댓글을 답니다.페미니즘이 주요 사회 의제로 대두된 이후로 상당히 많은 "페미니즘 책"들이 시장에 출판됐는데요,그에 비해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책들"은 왠지 모르게 극히 드물어 보입니다.제가 알기로는 박가분 작가의 "포비아 페미니즘",오세라비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이덕하 작가의 "페미니스트가 매우 불편해할 진화심리학"정도가 끝이네요.이중에 오세라비의 저서는 이미 작가님이 비평문을 쓰신걸로 알고있습니다만..혹시 나머지 두 책들도 시간되실 때 리뷰해주실 수 있을까요?그것이 비판하는 글이든 옹호하는 글이든간에 개인적으로 Begray님의 견해가 정말 궁금합니다^^

    • BeGray 2019.08.15 13:04 신고 Modify/Delete

      아 정확히는 오세라비의 다른 글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단 거지 그의 출판저작에 대한 코멘트를 단 건 아니긴 합니다.

      / 저는 안티페미니즘과 그 담론에 확실히 흥미를 갖고 있긴 한데요, 말씀하신 책들이 분명 본격적인 한국 안티페미니즘 연구를 위해서는 읽어야 하는 책이긴 하는데...실제로 피터슨 등에 비하면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가 의문이라서 아직은 계획에 없긴 합니다. 해당 저자들에게 조금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한국 담론장의 친미사대주의적(?) 특징은 안티페미니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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