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리나 포레스터,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Intellectual History 2025. 5. 16. 02:32마침내 카트리나 포레스터의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전후 자유주의와 정치철학의 재탄생> 국역본(오석주·공민우·박광훈 공역, 후마니타스, 2025)이 나온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분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20세기 미국 정치사상사/지성사 연구서 중에 이 책을 넘는 책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 나는 한국어판 추천사를 썼다. 전문을 옮겨둔다.
"내가 지성사 공부에 막 입문했을 때 카트리나 포레스터는 갓 박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케임브리지학파에서 기대와 주목을 받는 학자였다. 물론 포레스터 본인의 영민함이 한 몫을 했겠지만, 그의 작업이 다른 누구도 아닌 존 롤스를 지성사적으로 다룬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이 있었다. 정치철학·정치사상 연구의 비역사적인 경향에 대한 비판이 케임브리지학파의 주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고 할 때, 롤스는 그 대척점에 있는 분석적이고 규범적인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였다. 정치사상사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과제와의 정면 승부에 뛰어든 포레스터의 작업이 기대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다.
2019년 마침내 출간된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는 학계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야심찬 작업이었다. 포레스터는 단순히 롤스를 역사적으로 충실하게 탐구하는 정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롤스의 철학적 토대를 형성했던, 동시에 롤스의 철학을 통해 근본적으로 재편성된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상적 세계를 재구성하는 더욱 거대한 작업에 뛰어든다. 학부 시절의 원고부터 다른 학자들과 주고받은 서신까지 롤스가 남긴 문헌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바탕으로 책은 그가 당대의 수많은 정치적·사회적 쟁점과 대면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계속해서 다듬어 간 족적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현대 영미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이 구축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한다. 그와 함께 저자는 현대 영미 정치철학이 롤스의 근본 전제가 형성되었던 1940-50년대의 산물임을 지적하며, 그것이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얼마나 유효할지 묻는다. 이런 점에서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는 연구 대상에 대한 사려깊은 존중과 날카로운 비판을 함께 선보이는 일급의 지성사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가 역자들의 오랜 고민과 노고에 힘입어 매끄러움과 사유의 힘을 아울러 간직한 뛰어난 국역본으로 한국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단순히 개별 철학자에 대한 판에 박힌 해석을 넘어 영미의 정치철학자들이 어떠한 논쟁의 맥락에서 무슨 입장과 전략을 취했는지에 대한 사상적 지도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독자, 현대 영미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원하는 독자는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높은 관심에 비해 정작 미국을 그 내면에서부터 깊이 있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문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포레스터의 책은 현대 미국의 사상에 접근하고자 하는 독자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파편적으로만 주어져 있는 정치적·법적·정책적 의사결정의 논리를, 좀 더 근본적으로 현대 정치의 언어를 그 토대에서부터 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저작이 될 것이다."
: 처음에는 책 뒷표지에 들어갈 추천사를 요청받았는데, 보통 이런 경우 필자의 글에서 적절히 취사선택이 이루어지는 점을 감안하여 조금 넉넉하게 써서 보냈다. 오늘 전자서점의 미리보기를 클릭한 뒤에야 추천사 원고 전문이 책 앞 쪽에 그대로 실렸음을 알게 되었다(!). 영예로운 일이라 감사한 마음이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상세히 썼을텐데, 하는 마음도 살짝은 있다.
2.
고백하자면...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한국어판 출간 과정을 이야기하려면 약 5년 전, 202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출간을 막 앞두고 있던 나는 한국에 지성사 연구를 보급하기 위해 내딛어야 하는 다음 수가 무엇인지 자문했다. 방법론/접근법을 안내하는 책은 이것 하나로 충분하고, 다음은 실제로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지적인 영감과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연구서가 번역 소개될 필요가 있었다. 동료들과 여러 후보를 상의한 끝에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가용한 역자' 풀의 한계를 고려하여) 두 권을 골랐다. 하나는 올해 9월에 번역출간될 예정인 이슈트반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Politics in Commercial Society [2015])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카트리나 포레스터의 이 책이었다.
포레스터의 책을 고른 이유는, 위의 추천사에 이미 언급한 사항을 제외하고,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책이 2010년대 케임브리지학파에서 배출한 박사논문 기반 연구서 중 가장 주목받은 작업이었기 때문이다('가장 뛰어난' 작업이 무엇인가에는 물론 전공별로 판단이 엇갈릴텐데, 내 취향은 몇 번 언급한 Dmitri Levitin의 Ancient Wisdom in the Age of the New Science Histories of Philosophy in England, c. 1640–1700 [2015]다. 다만 이 책을 옮길 용자가 쉽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ㅠㅠ). 나는 케임브리지학파 혹은 지성사 연구자들의 작업을 안내할 때 고전적인 저작--포콕이나 혼트 등--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동시대 젊은 박사급들이 내놓은 좋은 작업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책들이 최근의 지적 흐름을 잘 보여주는 면이 있고, 동시에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이 정도면 나도 어떻게 비슷한 작업을 시도해볼 수 있겠다'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포콕의 Barbarism and Religion 같은 책을 보면서 신진 연구자가 그렇게 생각하긴 쉽지 않다!). 포레스터의 책은 이러한 요구에 상당히 부합하는 선택지였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인들이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사상에 대해 빌어먹을 정도로 무지한 상태인 게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1950년 이후 미국이 한국사회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인 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언어와 가치관에 미국의 그것들이 깊이 들어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모두가 미국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미국의 '정신'을 똑바로 보며 이해하려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드물다. 솔직히 말해 한국 사회에는 크게 두 가지 미국관이 존재한다. 하나는 '미국에는 사상과 정신 따위가 없다', '자유주의의 폐해' 운운하며 눈 앞의 거대하고 복잡한 실체를 외면하는 저급한 비판론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몇 년 간 트럼프의 기괴한 선택들로 인해 그 위세가 흔들리고 있지만) 뭐가 됐든 '천조국이 하는 건 다 뛰어나다'라며 그 말단만을 물신숭배하는 더욱 저급한 추종자들의 태도다--자신의 좁은 시야라는 침대에 맞추어 미국의 사지를 잘라내는 환원론자라는 점에서는, 그리고 스스로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점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그러한 무지의 '고기파티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미국 사상의 중핵에 있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적 지도 하나 없는 현실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래도 읽을만한 책이 조금씩 들어오기는 하는 상황인데(다니엘 스테드먼 존스, <우주의 거장들>; 게리 거스틀, <뉴딜과 신자유주의> 등; 퀸 슬로보디언의 Globalists가 수 년 내로 국역되리라 믿는다)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이를 둘러싼 논쟁은 철학 전공자들의 (대체로 맥락의 재구성에 별 관심없는) 전문적인 연구나 실용적인 소개 일부를 제외하면 추천할 만한 책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에게는 미국 정치철학에 의해 주조된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도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시선은, 몇 가지 상투적인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빼면, 부재했다. 그리고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는 이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3.
세 번째 이유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었는데, 당시 컬럼비아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막 진학한--지금 한창 박사논문에 매진하고 있는--오석주 선생님이라는 좋은 역자 후보가 감사하게도 번역을 맡기로 수락한 덕분이었다(돌이켜보면 우리 모두 번역 출간이 여기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공역자를 끼고도 5년 걸린다고 했으면 아마 역자 본인도 안 받았겠지...). 그렇게 2020년 3월 오석주 선생님이 쓴 번역검토서를 받아들고 그때부터 출판사 후보를 찾기 시작했다. 김영욱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후마니타스 편집부는 다행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역시 출간까지 5년 걸릴 줄 알았으면 좀 망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자와 출판사를 연결한 것으로 내 역할은 마무리되었다.
공역자 두 분이 합류한 뒤, 2023년 여름쯤에 초역 원고가 나왔다. 원래의 약속에 따르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코멘트를 전달했어야 했으나 여러 현실적인 상황 상 불가능했다. 대신 나보다 그 과제를 더욱 잘 해줄 수 있는, 동시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각도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전 독자를 찾아 역자들과 연결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귀한 시간을 할애해준 정준영, 이지완 두 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후 한동안 잊고 있던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번역 원고는 올해 초 추천사 요청과 함께 훨씬 좋은 퀄리티의 글이 되어 돌아왔다. 제일 기뻤던 것은 추천사를 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필요 없을 정도로 번역문이 좋아졌다는 사실이었다(읽으면서 독자의 편의를 고려한 몇 가지 수정 의견을 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책이 나온다.
다음 주도 여전히 겹겹이 쌓인 일정에 치일 예정이지만, 책 실물을 받아보는 순간만큼은 잠시 분주함을 잊고 순수한 기쁨을 느낄 생각이다.
4.
이제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성사에 관심 있는 분들, 특히 대학원생·신진연구자들은 하나의 '박사논문 기반 연구서'로서 이 책의 접근법과 서술구조를 찬찬히 뜯어볼 가치가 있다. 포레스터의 책은 케임브리지학파의 정석적인 접근법을 아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더 깊게 이해하고 싶은 분들은, 그러니까 넘쳐나는 대중서 수준의 논의에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은, 당연히 이 책을 대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중후반의 미국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적어도 그 결정적인 모멘트 중 일부는 이 책에서 롤스와 동료/경쟁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미국 정치사상'의 핵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안내로는 말할 나위 없다.
정치에, 그리고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정치철학 전공자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지도가 될 거고,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자 하는 분들이 이 책을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집중하며 완독할 시간을 확보하기를 바란다. 아마도 포레스터가 의도한 방향은 아니겠지만, 책에서 재구성하는 여러 논쟁들을 경유하면서 현실의 정치제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정치제도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당연해보이는 요소들이 각각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기원한 것인지 숙고해볼 기회를 얻을 것이다.
지금껏 나는 다른 면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많은 정치 행위자들이 정작 자신이 속해 있는 제도와 자신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많이, 너무나 많이 봐왔다.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한국어판이 그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그럴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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