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근대 고전 읽기> 녹화를 마치고
Intellectual History 2026. 10. 31. 02:36올해 마지막 수업녹화를 마치고 오랜만에 포스팅한다. 고작 두 달 남은 2026년을 마무리하기까지 넘어야 할 봉우리는 아직 많으나 (11월만 놓고 생각해봐도, 당장 내일부터 발표문 한편 준비, 그게 끝나면 논문 한편 투고, 그 와중에 공역서 두 권 초벌 마치고 넘기기...) 하반기의 가장 험난한 시련을 어떻게든 버티고 넘겼다는 안도감을 찰나의 순간이나마 음미하고 있다.
1.
2026년, 내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는 대학원 과정("실천문화교양학과 대학원")을 개설했다. 공통과목인 연구론을 제외하면 교원 한 사람 당 1-2과목을 담당하면 되는데, 내 첫 번째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근대 초 서구의 고전적인 저작을 읽히는 수업이었다. 학부 문교과에서 가르치는 <서구지성사입문>이 시대별로 정치사상사의 주된 조류를 요약 정리하여 전달하는 수업이니, 대학원에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직접 고전을 읽도록 강요(?)하는 수업을 만드는 게 좋겠다는 직관적인 발상이었다. 물론 학문적인 독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맨몸으로 고전으로 떠밀어 봐야 괴롭기만할 뿐이다. 따라서 강의를 통해서 개별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짚어주면서 준비를 좀 시키고, 과제·성적 부담을 크게 느끼지는 않도록 하면 학생들도 어찌어찌 학기 끝까지 살아남아 그게 무엇이든 보람을 느끼게 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고통의 체험이 끝나면 이를 추억과 보람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인간의 흔한 습성이니까.
<서양 근대 고전 읽기> 과목의 제작에 실제로 돌입하자마자 나의 계산에 굉장히 핵심적인 요소가 누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교수자인 나 자신의 가용시간이었다. 간단히 말해 내가 목표로 하는 강의의 폭과 깊이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학부 시절 이래 대체로 바쁘게 살아오긴 했지만, 살면서 올해만큼 일이 많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학과장으로, 가족구성원으로서, 또 온갖 일정으로... 이것들 하나하나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그 모든 걸 한번에 맞이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지성사적 독서를 지향하는 수업이니 1차 문헌 하나만 붙들고 가는 편안한(?) 길은 불가능했고, 맥락을 소개하고 정리하는 것부터 품이 많이 들었다. 즉흥성이 용인되는 오프라인 강의와 달리 녹화강의 PPT는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담아야만 한다. 그걸 다 하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밤샘하다시피 하며 녹화 직전까지 PPT를 만드는 상황이 매번 반복됐다(심지어 마지막 녹화일에도 2시간만 자고 들어가서 합계 3시간 가까이 녹화를 진행했다). 지금도 일정 기록표나 메일/메시지를 들여다보지 않는 한 지난 3개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고통의 체험이 끝나면 이를 추억과 보람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인간의 흔한 습성이다--이 말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단순히 대략의 요점이나 많이 인용되는 부분을 소개하는 것 이상의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으나 분명 의미는 있었다. 복잡한 텍스트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 정리하고,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연결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이전까지의 읽기에서 감지하지 못했던 사항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내가 준비하는 모든 대학원 세미나가 그렇지만, 이번에도 수업을 거치며 독서의 진전을 이룩한 최대의 수혜자는 나 자신이 아닐까 싶다.
2.
<서양 근대 고전 읽기> 강의 목차 및 대상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1강. 강좌 소개 / 마키아벨리와 인문주의 정치사상 [<군주론>]
2강. 마키아벨리와 인문주의 정치사상 (2) [<로마사 논고>]
3강. 토머스 홉스 (1) [<리바이어던> 1권]
4강. 토머스 홉스 (2) [<리바이어던> 1-2권]
5강. 토머스 홉스 (3) [<리바이어던> 3-4권]
6강. 존 로크 (1) [<통치론 제2논고>]
7강. 존 로크 (2) [<관용에 관한 편지>]
8강 중간과제물 제출
9강. 18세기 정치사상: 도입 [프랑수아 페늘롱, <텔레마코스의 모험>; 몽테스키외,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10강. 장-자크 루소 (1) [<인간 불평등 기원론>]
11강. 장-자크 루소 (2) [<사회계약론>]
12강. 애덤 스미스 (1) [<도덕감정론>]
13강. 애덤 스미스 (2) [<법학 강의> A]
14강. 애덤 스미스 (3) [<국부론>]
15강 기말과제물 제출
근대 초 사상사 연구에 견문이 있는 사람에게는 위의 커리큘럼 대부분이 다소 진부한 선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미리 답변하자면, a) 서구 사상에 대한 기초적인 배경지식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b) 영어 또는 다른 유럽어를 전혀 하지 못해도 수강에 전혀 문제가 없는--즉 읽을만한 국역본을 구할 수 있는--수업을 만드는 게 나의 조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논박된 진부하고 낡은 독법을 되풀이하는 대신, (내가 접할 수 있는 영어권 연구를 기준으로 할 때)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해석의 틀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것이 내 과제 중 하나였다. 비영어권에서 더 깊이 논의된 저작의 경우 최근의 연구를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현재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서구 사상사·지성사 관련 수업 중에서는 가장 밀도 있는 과목이 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절대적인 강의 시간의 제약으로 당초 구상에는 포함되었던 프랑스혁명기 및 19세기의 여러 흥미로운 저작을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공부가 조금 더 쌓인 뒤에, 방송대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또 다른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한다.
3.
애써 만든 과목이니만큼 말을 덧붙이자면... 위 수업을 정식으로 수강하는 유일한 방법은 방송대 실천문화교양학과 대학원(석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이다. <서양 근대 고전 읽기> 과목 외에도 좀 더 흥미로운 (하지만 부담은 훨씬 덜한) 여러 수업이 준비되어 있다. 실천문화교양학과는 1년에 단 한번만 입학지원을 받는데, 마침 지금이 지원서 접수 기간이다(!). 접수 마감은 11월 10일까지로, 상세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실 수 있다.
입학 전형 일정/방법 안내: https://grad.knou.ac.kr/grad/2056/subview.do
실천문화교양학과 대학원 홈페이지:
https://culturegrad.knou.ac.kr/culturegrad/index.do
4.
주말부터는 다시 11월 28일 열릴 프랑스철학회 발표문을 준비해야 한다. 푸코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프랑스철학 전공자가 아닌 것은 물론 프랑스어조차도 못하는 사람이 발표자로 초대받는 것은 과분한 영광이다. 그런 만큼 푸코의 독자라면 조금은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발표를 하고 싶고, 또 그럴 수 있는 주제를 골랐다고 생각한다. 주로 다룰 텍스트 자체는 다들 익숙한 <성의 역사 1권>이지만, 내가 알기로는 아직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는 주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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