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지성사 논문지도, 『다르장송의 "군주제적 민주정"과 18세기 프랑스의 정치개혁론』

Intellectual History 2024. 5. 16. 00:37

5개월여 만의 근황 포스팅.

 

1.

 

계속 바빴다. 지난 한 달 반은 2-3일에 하나씩은 무언가 마감이 있었고, 그와 비슷한 빈도로 "늦어져서 죄송합니다만"이라는 문구를 달고 살았다. 다행히 그제 부로 첫 강의녹화와 기말시험 출제를 마치고 하루 저녁이나마 숨을 골랐다(주말까지 논문수정, 다음 주 특강, 그 주말 학회토론이 있는데, 이젠 이 정도면 할만하다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3-4년 정도는 매 학기 강의녹화가 이어질 예정이고, 가정사에 이것저것 받아놓은 일(+ 세미나)을 합치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 입버릇이 되었다.

 

지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학부 강의를 준비하면 얕은 수준에서나마 시야가 넓어지기는 한다. 일만 하다가 하루가 끝나면 억울하므로 출퇴근 시간에는 그래도 뭘 읽으려고 한다(읽고 따로 기록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게 문제다). 정신의 개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활동이 하나 있다면, 이 글을 읽는 분들께는 다소 의외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의 학술적인 글을 검토하고 수정하거나 조언하는 일이다. 유의미한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더 읽고 머리를 써야 한다.

 

아직까지 한국의 인문학술장에서 동료·선후배와 진행 중인 작업물을 공유하고 수정논평을 주고 받는 문화는 거의 정착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영어권 학술장에서 나오는 빼어난 작업물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감사의 말(acknowledgement)에 동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한국은 공동체주의가 너무 강하고, 영미는 개인주의적'이라는 통념이 유통되지만, 실제 지식생산과정을 살펴보면 영미학술장이 훨씬 집단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반대로 한국 학술장의 많은 이는 (심지어 어린 학생들조차도) 아직도 학적인 글쓰기를 개인적·사적인 무언가로 이해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나는 좁게는 각자 작업물의, 넓게는 학술적 지식생산의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한국 학술장의 이러한 관습이 깨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동료의 글을 읽고 가급적 상세하게 수정의견을 제시하는 시간이 내 지적인 삶의 중요한 일부인 이유다.

 

 

2.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는 그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경험이 있었다. 성균관대 사학과 김민철 선생님의 초빙에 따라 처음으로 석사학위논문 심사과정에 참여한 것이다. 대학원 논문 심사과정에서 외부심사위원은 보통 중후반부 결과물을 보고 '외부자'의 입장에서 논평하는, 비교적 소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자리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번 심사의 주문은 조금 달랐다--'마치 나 자신의 지도학생인 것처럼' 사실상의 공동지도를 맡아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발주자의 요청사항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다.

 

6월 초 예심원고를 처음 받고 A4 3.5쪽 정도 심사서를 썼다. 본격적인 지도는 초고가 나온 9월 초부터 시작됐다. 본심까지 3개월 밖에 남지 않았기에 구조 자체를 손볼 순 없었지만, 작성자의 능력을 감안할 때 전체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비슷한 분량의 수정의견문을 썼다. 이후 학생은 약 2주마다 원고를 보내고 내 코멘트를 받아갔다(18세기 프랑스는 결코 익숙한 시공간이라 할 수 없지만, 지도교수가 18세기-혁명기 유럽 정치사상사 연구로는 세계 어디에 가든 밀릴 게 없는 연구자이니 알아서 걸러줄 거라 믿고 솔직하게 내 생각을 썼다). 돌이켜보면 사실 짧은 시간에 반영하기 쉽지 않은 지시가 적지 않았는데, 작성자는 지적받은 것 이상의 완성도로 고쳐오는 드문 학생이었다. 12월 초 본심을 호평 속에 통과한 뒤에도 수정은 계속되었고, 파일 제출을 앞두고 연말에는 아예 하루 날을 잡아 대여섯 시간 동안 문장을 같이 다듬었다.

 

학생은 졸업과 함께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올해 3월 성균관대 사학과 동문회에서 그 해 최우수 석사논문에 수여하는 김태훈·최태성 장학금(상금 천 만원)을 받았다(세계 어느 대학을 가도 인문학 석사논문에 천 만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곳은 성균관대 사학과 외에는 없지 않을까?). 한국사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학과에서 쟁쟁한 한국사 졸업논문과의 경쟁을 뚫고 얻어낸 놀라운 결과였다. 하지만 내게 정말로 의미있는 지점은 조금 다르다. 9월 초 본심 때만해도 본인이 정말 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학생이 논문을 마치면서 이 공부가 재미있고 이쪽으로 계속 가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 그게 내가 이 지도과정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점이다.

 

 

3.

 

해당 학위논문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양하림, 『다르장송의 "군주제적 민주정"과 18세기 프랑스의 정치개혁론』,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4) [ https://www.riss.kr/link?id=T16973744 에서 원문 열람 가능].

 

2016년 이화여대 학생시위에서 학생들이 교수들의 석사논문을 낭독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데서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석사논문은 부끄러운 습작 정도로 치부되고는 한다(나는 내 석사논문을 딱히 부끄럽게 여기진 않지만, 내가 썼던 내용 상당수는 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서지사항과 링크를 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잘 쓴 논문임은 물론이고, 앞으로 18세기 유럽 정치사상사를 공부하려는 학생들, 그리고 지성사 논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써야하는지 고민하는 연구자들이 하나의 좋은 참조모델로 삼을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다르장송 후작(René-Louis de Voyer, marquis d’Argenson, 1694-1757)은 민주주의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민주정" 개념이 대체로 경계와 폄하의 대상이었던 18세기 유럽에서 다르장송은 이를 대안적 정치체제로 제시한 몇 안 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특히 그가 『프랑스 정부의 역사에 대한 고찰』(1738)에서 "인민이 선출한 대표"를 통한 통치야말로 "진짜 민주정"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만큼(양하림, 3), 피에르 로장발롱이나 제임스 클로펜버그 같은 거물들을 포함한 기존의 연구는 다르장송을 대의민주주의의 선구자로 주목해왔다.

 

양하림 씨의 학위논문은 이러한 통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다르장송의 사상을 좀 더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저자가 활용하는 방법은 지성사적, 구체적으로 언어맥락주의적 접근법이다. 지성사적 연구방법에 관심을 가진 독자의 수는 요 근래 제법 늘어났으나, 그러한 연구를 실제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감을 잡고 있는 학생은 아직 많지는 않다. 논문 2, 3, 4장에서 저자는 다르장송이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세 가지 맥락을 소환하고, 각 맥락 내에서 그가 무슨 문제의식을 어떠한 개념·논리들을 통해 전개하고 있었는가를 재구성한다. 이 세 장을 통해 구축된 세부 맥락들을 바탕으로 5장은 다르장송의 사상을 좀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독법을 제시한다. 요컨대 이 논문은 맥락들의 재구성을 바탕으로 사상을 역사적으로 '읽는' 길을 보여주는 지성사 연구의 정통적인 구성을 능숙하게 전개하고 있다.

 

비교적 '정통적인' 역사학에 가장 가까운 2장은 루이 14세 및 섭정기 이후 다양한 국가개혁론이 폭발하는 1720-30년대의 상황을 스케치한 후 거기에서 다르장송이 어떠한 문제의식을 지녔는지 짚어본다. 3장은 다르장송이 직접적으로 참전했던 당대의 '귀족권주의 대 군주권주의 논쟁'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그의 反귀족적·親군주적 입장만이 아니라 그러한 입장을 전개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연장선에서 4장은 다르장송이 (그리고 그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다른 견해를 지녔던 생-피에르 신부가) 스스로의 방법이라고 선언한 "정치학"이 어떠한 지적 조류에서 나왔으며, 그들의 정치학이 각각 어떠한 개념과 논리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를 추적한다. 다르장송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자기애")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러한 본성 혹은 "자연적인 동력"이 전체 국가의 "공공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배치방식을 고민했다. 그는 당대에 (심지어 오늘날에도)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는 '평등'을 주장했으나, 그것은 평등 자체의 미덕을 찬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정치학적 문제의식의 귀결이었다. (여기서 정치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2장, 구체적인 논쟁 맥락을 재구성하는 3장, 다르장송이 논쟁에 뛰어들면서 채택한 '방법'을 파고드는 4장의 순서가 밑바탕부터 한 층씩 쌓으며 표적을 좁히는 건축적인 것임을 짚어두자.)

 

제5장은 다르장송의 (당대든 오늘날에든 형용모순처럼 보일) "군주제적 민주정" 자체로 돌입한다. 먼저 1절은 "군주제적 민주정" 개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당대 정부형태론 논의를 배경으로 보여주고, 이어지는 2절은 이제까지의 다르장송 해석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온 부분, 즉 '대표의 선출'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여기서 다르장송의 입장과 의도를 한층 더 세밀하게 해석하기 위해 생-피에르와의 비교를 적절하게 활용한다(실제로 이 논문은 곳곳에서 불랭빌리에, 몽테스키외, 생-피에르와 같은 당대의 주요 논자에 대해서도 읽을 가치가 있는 코멘트를 제시한다). 상대적으로 엘리트 집단의 정치적 판단력을 더 신봉한 생-피에르의 "귀족-군주정"와 달리, 다르장송은 공공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개별 이해관계의 정치적 구현, 즉 지방관리("인민관리")의 선출과정에 평민이 참여하는 방식이 필수적인 장치라 믿었다--이때 군주정의 역할은 단순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든지 위태로워지기 쉬운 신민 간의 평등과 자유를 확보하고 인민관리의 실책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생-피에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델을 "군주정 내의 진정한 민주정"이라 불렀다. 얼핏 그것이 대의민주주의 모델과 흡사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기능하고 있는 전체의 맥락 속에서 볼 때 다르장송의 '민주정'은 매우 다른 것이었다. 제6장 결론에서 저자는 이와 같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몇 가지 좁은 도식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음을 주장하며 글을 끝맺는다.

 

그 자체로 길지 않은 석사논문을 상세히 요약한 이유는 18세기 유럽 혹은 프랑스 정치사상이 낯설게 느껴질 독자라도 이 논문을 깊이 있게 읽고 자신의 공부에 참조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히 지성사로 처음 논문을 준비하면서 막막함을 느끼는 학생이라면, 논문 본문과 요약을 몇 차례 번갈아 읽으면서 자신의 논문구조/접근법을 형성하는 데 참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양하림 씨의 논문을 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글이 한국에서 소위 "케임브리지학파"의 영향권에 있는 역사학자의 지도를 받은 학생이 본격적인 지성사 연구로 학위논문을 쓴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김민철 선생님의 부임 이후 성균관대 사학과가 언젠가 한국의 지성사 연구를 주도하는 전진기지가 되리라 희미하게나마 바란 것은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에 공동지도 과정에--그리고 다음 학기 내가 맡게 될 대학원 수업 한 과목을 포함하여 몇몇 과목 설계 논의에--참여하면서, 물론 이 정도로 뛰어난 학생은 앞으로도 드물겠지만, 그러한 기대가 내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음을 느꼈다.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어떤 연구자를 배출할지, 그들이 학계를 어떻게 새로 만들어나갈지는 앞으로 오랜 시간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곳이 지금 한국에서 서구 근대 지성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임은 분명한 사실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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