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지성사입문> 교재: 머리말 및 유럽 계몽사상 초고

Intellectual History 2024. 10. 1. 22:56

작년 9월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부임을 알리는 포스팅에서 나는 최우선 과제로 "학부 수준에서 서구 지성사, 특히 정치사상사 연구의 성과를 개괄할 수 있는 과목을 만들고, 특히 방송대만이 아닌 전국의 역사학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과서를 제작하는 것"을 제시한 바 있다. 핵심부터 말하면 내년도 1학기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2학년 전공 수업으로 <서구지성사입문> 과목이 개설될 예정이며, 해당 과목을 위한 교재 제작도 계획된 일정에서 큰 벗어남 없이 진행하고 있다. 어제(9월 30일)부로 모든 필자로부터 전체 15개 장의 초고를 수합해 방송대 출판문화원에 제출했고,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내년 초에는 출판문화원을 통해 교재 구입이 가능할 것 같다. 몇 주 간의 마감레이스를 넘긴 기쁨과--물론 곧바로 다른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다^^--앞으로 나올 <서구지성사입문> 교재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요청할 겸, 내가 집필한 부분, 즉 머리말 및 제6장 유럽 계몽사상 챕터의 초고를 공개한다.

 

직장으로서 방송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대체로 사적인 것들이지만, '학문후속세대를 기르지 않는 학교' 혹은 '노력하면 자잘한 수입원이 많은 직장'(학생이 최전성기 대비 절반 이하로 줄면서 지금은 그런 거 없다는 게 현직자들의 중론이다 ㅠㅠ)을 오가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특히 이번 <서구지성사입문> 교재를 준비하면서 이해한 바인데, 방송대 교수직의 진정한 가치 중 하나는 제도적으로 계속해서 "교재"를 만들어야 하고 만들 수 있는 지위라는 데 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방송대 교수직을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학계의 인적 자원을 끌어모아 수백 수천명을 위한 교재와 강의를 제작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들)의 상임 책임자가 된다는 것과 같다(내 유일한 불만은 필진/강연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고료와 출연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ㅠㅠ). 이는 이 '포지션'의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내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교재 구성을 가능한 적절하게 설계하는 기획·구성력, 그리고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학문적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서구지성사입문>을 기획·제작하면서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심플하다. 머리말에 명시한 바와 같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서구 지성사·[정치]사상사 개설서 중 가장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다. 거대한 목표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의외로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한국어로 된 통사 성격의 기존 개설서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그러니까 큰 욕심 없이 멀쩡히만 만들어도 최고가 될 수 있다(!). 핵심은 단순하다. 가능한 최고의 필진을 꾸리고 각 필자에게 명확한 역할과 허들을 제시하면 된다. 최종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속단하기 이르겠으나, 현 단계에서 나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다(생각 이상으로 분량이 길어졌다는 것이 걱정이긴 하다). 물론 함께 하지 못했으나 결코 현 필진보다 못하지 않은 뛰어난 필자도 여럿이고, 머리말 끄트머리에서 토로하듯 이번엔 포함시키지 못한 주제도 있다. 큰 문제는 아니다. 수 년 뒤 나올 개정판에서 보충할 수 있고, 앞으로 다른 교재도 하나씩 차곡차곡 만들어가면 된다. 공동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태도가 단 한 명,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싣는 대신 과업을 적절히 분배하는 데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런 태도를 지향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처음 지성사 연구를 접하고 공부하던 때, 나는 한국의 모두가 지성사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더 많은 사람이 지성사적 접근법이 가진 힘을, 그리고 지성사가들이 축적해온 연구성과를 이해하게 되는 편이 한국 사회에 더 유익할 거라 판단했다(2016년 「헬조선 담론의 기원」을 쓰던 시절이다).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번역하고, 강연과 수업을 열고, 블로그에 정보를 올리고, 필요하다면 논쟁도 주고 받고 ... 이 모든 노력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학술장과 지적 생태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여정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여정의 필수적인 단계 중 하나가 바로 학부 저학년생 정도면 어떻게든 혼자 읽을 수 있는, 그리고 전국의 역사학 교실에서 수업(부)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이다. 그 결과물이 생각보다 빨리,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퀄리티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다.

 

첫 시도인만큼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다음에 더 잘 하면 된다).

하지만, 겨우 초고 작업이 끝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기대하셔도 좋다고 감히 말씀드리고자 한다.

 

 

 


머리말

 

이우창

 

 

본 교재는 서구의 지성사(知性史, intellectual history) 전통을 특히 정치사상의 역사를 중심으로 조망하는 시선을 제공하고자 한다. 직접적인 독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서구지성사입문> 과목 수강생이지만, 해당 강좌를 수강하지 않는 학생·독자 역시 비교적 수월하게 서구 지성사의 기본적인 골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좋은 입문서를 쓰기란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운 과제이며 본 교재 역시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서구 지성사·사상사 개설서 중 가장 좋은 결과물을 제출하는 것, 그것이 집필진의 소박하면서도 야심 찬 목적이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 유전적 요인에서부터 거시적인 생태적 변화까지 매우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지성사를 탐구하는 역사학자들은 그중에서도 말과 글, 사상이 지닌 힘에 주목한다. 명시적인 물리적 위협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으며, 일정 이상의 규모와 복잡성을 갖춘 집단이, 나아가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을 설득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노골적으로 추앙받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족적·국가적 이념을 위해 명백한 손실을 감수하는 사람의 수는 적지 않다. 애초에 경제적 손익 자체의 계산방식을 포함해 인간 사회의 복잡하고 중요한 의사결정과정에서 언어와 사상이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었다.

 

과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문헌과 사상을 탐구한 역사가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이 역사학계 내에서 하나의 고유한 분과로 성립한 시점은, 그 자체로 오랜 역사를 지닌 고전문헌학 등의 예를 제외하면, 20세기 중후반부라 할 수 있다.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요인 또는 고정된 ‘역사적 법칙’을 통해 사회의 모든 요소를 설명할 수 있다는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각지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역사학에 한정한다고 해도, 이 시기에 독일의 개념사(Begriffsgeschichte), 프랑스 아날학파의 심성사(histoire des mentalités),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담론·통치 연구, “계급의식”과 “문화”를 조명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회문화사, 인류학적 접근을 참조한 영미의 문화사를 포함해 다양한 접근법이 등장했다. 구체적인 전제나 방법은 다를지언정, 이들은 서구 인문학계에 담론·사상·문화 등의 인간 사회의 비물질적인 영역을 고유한 역사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전제가 통용되는 데 방향을 같이 했다.

 

지성사 연구의 확립과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역사학자들은 이른바 “케임브리지학파”로 잘 알려진 언어맥락주의자(linguistic-contextualist)들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역사학과를 중심으로 연결된 언어맥락주의자들은 J. G. A. 포콕(Pocock, 1924-2023),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1940-), 존 던(John Dunn, 1940-), 이슈트반 혼트(István Hont, 1947-2013), 리처드 턱(Richard Tuck, 1949-)을 비롯해 17-18세기 영국·유럽 정치사상사 해석의 지형을 바꾼 걸출한 역사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이들은 철저한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과거의 사상적·언어적 맥락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이전의 지배적인 역사적 통념 상당수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지성사 연구를 딱딱하고 지루한 영역이 아닌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분야로 뒤바꾸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다른 역사가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쉽게 차용할 수 있을만큼 직관적이고 간결하다는 점에 힘입어, 언어맥락주의적 접근법은 지금도 다양한 시대·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지성사 연구의 혁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분야로는 정치사상을 꼽을 수 있다. 지난 세기까지 정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국가의 이해관계 또는 규범적 원리를 탐구하거나, 정치적 대표자나 고전적인 철학자와 같은 “주요 인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케임브리지학파를 포함한 역사가들은 다양한 정치 행위자들이 어떠한 지적 맥락에 놓여있었는지, 또 이들이 그러한 맥락 위에서 무슨 전략을 고안했는지를 탐구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범위를 훨씬 넓혀놓았다. 우리는 이제 정치적 의사결정과 그 실행 과정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수단을 통해 개입한다는 사실을, 정치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종교·자연과학·역사서술 같은 분야들이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정치적 자원임을 안다. 이러한 변화의 여파는 좁은 의미의 정치사상사 연구에 머물지 않았다. 이제 역사가들은 과거의 인물과 사상을 섣불리 재단하는 대신, 과거인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문제를 고민했는지, 그때 그곳에서 통용되는 지식과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먼저 질문한다. 요컨대 정치사상사 혹은 지성사 연구는 역사학이 과거 세계, 특히 서구의 지적 전통·혁신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를 변화시켰으며, 고대에서 근현대까지의 여정을 단순한 발전 혹은 퇴보가 아닌 좀 더 복잡한 이야기로 풀어내도록 자극하고 있다.

 

본 교재는 한편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서구 지성사의 주요 주제를 시대별로 일괄하고, 동시에 각 시대·주제에 따라 최근의 연구성과를 알기 쉽게 녹여내고자 한다. 교재 1장과 2장은 각각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의 주요 주제를 개괄한다. 이어 근대 초(early modern) 시기로 시선을 옮겨 르네상스 인문주의(3장), 종교개혁과 종교전쟁(4장)을 살펴보고, 이 시기 유럽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흐름으로 떠오른 공화주의와 자연법 전통의 요점을 짚어본다(5장). 유럽 계몽사상을 개괄하는 6장부터는 18세기에 초점을 맞춰 상업사회의 정치사상과 정치경제학(7장), 국제정치사상의 전개(8장)를 공부한 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기에 민주주의 이해에 어떠한 전환이 나타났는가를 들여다본다(9장). 프랑스대혁명이 초래한 거대한 충격으로 유럽의 사상적 지형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0장은 그중 19세기를 대표하는, 그러나 결코 손쉽게 요약할 수 없는 자유주의 전통을 짚어보고, 11장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강력한 맞수로 떠오른 유럽 사회주의의 여러 면모를 둘러본다. 20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는 12장은 세계대전과 새로운 국제질서의 성립 과정을, 13장은 세계대전 이후 지구적 질서의 재편을 주도한 “미국의 시대”를 탐구한다. 14장은 20세기의 북미 정치사상의 핵심에 있던 냉전 자유주의와 존 롤스의 자유주의 철학을 보고, 마지막 15장은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그에 대한 환멸 이후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새로운 조류들을 짚어본다.

 

한편으로 총 15장이라는 구성상의 제약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 주어진 일정에 맞게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의 한계로 인해 교재의 시선 역시 여러 중요한 주제를 빠트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민족주의, 인권의 정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젠더와 여성, 생태·환경·과학기술·생명정치 등의 주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간접적으로만 등장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 본 교재 편집진 또한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의식한다. 젠더와 여성, 생태·환경·과학기술은 수년 내로 별도의 교재를 통해 좀 더 깊이 있게 다뤄질 예정이며, 그 외의 중요한 주제는 앞으로 교재 개편 과정에서 우리가 초대할 수 있는 최선의 필진을 통해 보충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때 더 많은 수의 독자·학생이 새롭게 포함된 주제들에 진지하게 귀 기울일 준비가 되도록 돕는 것이 최초의 『서구지성사입문』에 주어진 소중한 역할이다.

 

 

오늘날 인문학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분야 중 하나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제6장 18세기 유럽 계몽사상

 

 

1. 계몽이란 무엇이었나?

 

계몽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계몽”(啓蒙)이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간단해 보이는 규정은 겉보기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계몽”은 세상에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혹은 과거의 잘못된 지식에 속박된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한다. 누군가가 적절한 지식과 판단력을 심어준다면 이들은 지금보다 나은 상태, 즉 “계몽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된 존재와 계몽되지 않은 존재 사이의, 또 타인을 계몽하고 인도하는 존재와 인도받는 존재 사이의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기에, 계몽은 시민 간의 동등함을 중시하는 현대에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동시에 그에 담긴 정신, 즉 인간이 지적인 노력을 통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오늘날 점차 희박해지고 있는) 근대의 신념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지금도 논쟁적이면서도 중요한 계몽의 개념은 언제, 어디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18세기 전후 유럽의 중요한 사상적 운동이라 할 수 있는 계몽사상·계몽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번 6강에서는 계몽사상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며 서구 근대 사상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유럽의 계몽이란 무엇이었는가? 통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18세기 계몽사상이란 기독교 교회와 구체제의 지배에 맞서 자유로운 이성의 발달을 강조한 철학적·과학적 운동으로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칸트와 같은 프랑스와 독일의 철학자들로 대표된다.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이러한 관점은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나, 이후의 지성사 연구는 계몽사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와 독일만이 아닌, 스코틀랜드, 나폴리, 제네바, 잉글랜드 등을 포함한 유럽 각지의 지식인들이 계몽사상을 공유했으며, 그 강조점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역사가들은 이를 하나의 계몽사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지역 및 종파 등에 따라 여러 형태의 계몽주의‘들’이 존재했다고 봐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하기도 한다). 계몽사상이 철학과 과학에만 국한된 흐름이 아니었으며, 정치사상이나 정치경제학, 역사서술 등 다양한 지적 영역에서 전개된 논의 역시 계몽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또한 오늘날 당연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17-18세기 유럽 종교사의 연구가 축적되면서 계몽사상가들과 기독교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는 데 동의하는 역사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이하 4절의 내용 참조).

 

유럽에서 계몽 혹은 계몽사상을 지칭하는 말로는 영어 “Enlightenment”, 프랑스어 “Lumières”, 독일어 “Aufklärung” 등이 각각 사용된다. 세 가지 단어는 공통적으로 ‘빛’ 혹은 ‘밝음’을 뜻하는 어근을 포함한다. 이는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밝게 만들고자’ 하는 계몽의 핵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빛과 어둠의 이미지 자체는 어느 시대든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계몽사상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18세기 유럽의 문인들은 무엇이 ‘어둠’, 즉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해악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런 어둠을 극복하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종교개혁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교재 4장 참조). 마르틴 루터와 카톨릭 교회의 충돌은 단순히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둘러싼 논쟁으로 멈추지 않았다. 유럽 기독교인 다수는 국가와 사회, 개인이 따라야 할 규범의 궁극적인 원천이 신에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종교개혁이 초래한 문제는 그러한 신의 뜻을 누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게는 예배 절차나 교회의 장식물을 정하는 문제에서, 크게는 어느 한 영토의 공식적인 교리를 결정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서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졌다. 국가 간에, 국가 내의 여러 교회 간에, 심지어 가족 간에 무엇이 옳으며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격렬한 투쟁은 전쟁과 탄압을 낳았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1572)을 비롯해 16-17세기 프랑스에서는 카톨릭과 신교도 사이의 긴 내전이 치러졌다. 국왕이 단일한 국가교회의 수장이 되어 종파 간 대립을 통제하고자 했던 잉글랜드 또한 17세기 중후반에 두 차례의 내전 혹은 혁명을 겪으며 오랜 기간 이어질 반목과 갈등의 상처를 품게 되었다. 무엇보다 유럽의 각 세력이 충돌한 30년 전쟁(1618-1648)은 전쟁터가 된 독일 지역 인구가 30% 가까이 감소하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전쟁의 참화가 멈추지 않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각국의 잘못된 정치적 야심이었다(교재 8장 참조).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전 유럽을 호령하는 군주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일으켰으며, 프랑스 내에 종파 간 평화를 가져왔던 낭트 칙령을 1685년 폐지하면서 다시금 종교전쟁의 위기를 고조시켰다. 루이 14세의 사망 후에도 왕가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혹은 국가의 이익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소모하는 전쟁은 지속되었다.

 

17세기의 풍파를 겨우 헤쳐나온 유럽인의 눈으로 볼 때, 끊임없는 전쟁과 극한 대립, 그리고 이를 초래한 종교적 갈등과 야심, 야만적인 폭력은 더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어둠이라 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부터 계몽의 행보에 뛰어든 문인들은 바로 그러한 어둠을 극복하고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들은 인간과 사회의 어떠한 면모가 잘못과 어리석음을 초래했는지를 분석하고, 인간과 사회가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만 하는 새로운 발전단계가 무엇인지, 또 그러한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개혁이 필요한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계몽의 사상가들은 수많은 개혁안을 구상하고 또 그러한 구상을 장려했으며, 이는 잉글랜드의 셸번 경(William Petty Fitzmaurice, the 2nd Earl of Shelburne, 1737-1805)이나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II, 재위 1762-1796)와 같이 국가와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던 유력인사의 지지에 힘입어 때로 실질적인 정책의 추진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 새로운 학문, 새로운 역사관

 

계몽사상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배경에는 근대 초 유럽에 유통된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있다.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상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과정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관점의 대두가 그것이다. 16세기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하기 시작한 이러한 주장이 본격적인 학문방법론으로 전파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바로 잉글랜드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다. 법률가·정치인이자 유럽의 지적 조류를 고국에 소개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문주의자였던 베이컨은 자신의 학문론을 담은 저작 『신기관』(Novum Organum, 1620)에서 자연의 역사를 제대로 탐구하려면 실험과 관찰에 바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17세기 중반 설립되어 잉글랜드 자연과학의 발전을 이끈 잉글랜드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의 구성원들은 베이컨의 주장을 바탕으로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의 유행을 이끌었다. 그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추상적인 원리나 가설과 같은 사변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으며, 설령 이론적 성찰을 사용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충분한 경험적 관찰이 선행해야만 했다.

 

16-17세기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 외에도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진공 상태를 증명한 자연철학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 수학적 원리를 통해 신의 우주적 섭리를 해명하고자 했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 등 자연학적 탐구가 한층 진일보하던 시기였다. 오늘날 “과학혁명”이라 불릴만큼 연달아 쏟아진 엄청난 성과에 힘입어 실험철학적 태도 역시 18세기 동안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으며,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처럼 자연과학적 대상 외에 인간의 도덕과 심리의 탐구에 유사한 접근법을 적용하려는 예도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흐름에 속한 이들이 스스로의 지적 활동을 ‘새로운 학문’, 곧 이제까지의 아리스토텔레스적·스콜라주의적 지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규정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다만 ‘새로운 학문’과 기존의 전통이 실제로 얼마나 명확히 구별되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자연학적 성과와 그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학문론,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 지적 네트워크의 확장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프랑스 및 영국에서 시작된 “고대인과 근대인 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신구논쟁”이라 옮기기도 한다)은 유럽인들의 달라진 자기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고대 로마제국의 붕괴 이래 유럽인들에게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성과 문화는 언제나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상적인 모범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기에 이견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고대에 탁월한 저자들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특히 자연학이나 의학 등에서) 근대인들이 점차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의 논쟁에서, 고대인들에 비하면 근대의 지적 수준은 난쟁이와 같다는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628-1699)의 시론에 국교회 성직자이자 왕립학술원 회원이었던 윌리엄 워튼(William Wotton, 1666-1727)은 근대 학문의 업적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러한 자신감은 스스로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발전단계에 접어들었다는 18세기 유럽인들의 새로운 역사 인식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그저 자기중심적 사고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15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저작의 문헌학적 연구 방법을 진전시킨 이래, 유럽의 학자들에게는 과거의 세계가 어떠했으며 또 과거인들이 어떠한 맥락에 놓여있었는지를 엄밀하게 역사적으로 탐구하려는 태도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문헌비평에 기초한 역사적 탐구방법이 확산되고 또 정밀해진 정치적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종교개혁 이후 종파 간의 논쟁에서 역사적 문헌 비평이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교재 4장 참조). 프로테스탄트의 다양한 종파와 카톨릭의 성직자·신학자들은 서로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뒤흔들고자 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역사비평 방법의 유행을 가져왔다. 둘째로, 인문주의 법학의 발달에 힘입어, 17-18세기 각국의 정치적 갈등에서 왕, 귀족, 평민은 서로의 법적 권리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예컨대 잉글랜드의 혁명파들은 잉글랜드의 고대법에서부터 평민의 권리가 보장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왕당파들은 해당 법령이 중세의 외부 침략자들이 제정한 ‘봉건적인’ 제도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과거의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근대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는 대신 과거 자체의 고유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널리 공유되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시대적인 범주가 바로 중세다. 고대와 근대가 경쟁한다는 구도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듯, 18세기까지 많은 유럽인에게 “근대”란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었다(심지어 19세기 후반 옥스포드대학교에서 “근대사” 분과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학생들은 여전히 ‘로마제국 붕괴 이후’의 역사를 교육받았다). 그러나 적어도 17세기부터는 고대-근대라는 이분법 대신 고대-중세-근대의 삼분법적 도식에 기초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저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저자들은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를 한편으로는 (로마를 멸망시킨) 이민족들이 유럽 각지에 봉건국가를 수립하여 폭력과 전쟁을 반복하는 야만의 세계로, 다른 한편으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성장하면서 성직자들이 또 다른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는 세계로 묘사했다. “근대”의 유럽인들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서야 마침내 이러한 단계를 벗어나 고대의 수준에 다시 합류하고 나아가 고대를 추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도식에서 보자면,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이 “야만과 종교”로 요약한 중세는 정말로 고대와 근대라는 영광스러운 두 시대 한 가운데에 낀 열등한 ‘중간 시대’였다.

 

따라서 근대 유럽에서 ‘무엇이 근대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중세의 악덕과 근대의 탁월함을 대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18세기 근대 옹호자들은 종종 중세를 폭력적이고 무례한, 아직 충분히 문명화되지 않은 인간들이 싸움을 일삼고,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이 미신을 통해 그런 무지한 자들을 조종하는 시대로 그리곤 했다. 중세인의 모습을 뒤집으면 근대인들의 자격요건이 무엇인지 곧바로 드러난다. 예의범절과 사교성, 관용적인 태도를 갖추어 평화를 향유하는 문명화된 존재, 설령 성직자를 존중한다고 해도 이성과 학식을 습득하여 맹목적인 복종이 아닌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계몽된 근대인의 초상이었다. 종교적인 열광을 피하고 서로의 신앙 차이를 관용적으로 대하는 근대인들이 함께 협력하여 문명의 발전을 이끄는 사회, 그것이 곧 어둠을 극복한 계몽된 근대의 한 가지 이상이었다.

 

중세에 대한 관심이 폄하로만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특히 18세기부터 높아진 중세 열풍은 다양한 열망의 산물이었다.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중세는 무엇보다 근대 유럽 국가들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예컨대 자연법학자이자 역사가 자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endorf, 1632-1694)의 『주요 유럽 왕국과 국가의 역사에 대한 개설』(Einleitung zu der Historie der vornehmsten Reiche und Staaten, so itziger Zeit in Europa sich befinden, 1682)은 로마제국 멸망 이후 등장한 유럽 각지의 국가들로부터 근대 유럽 정치 체제의 기원을 찾았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옛 건축물을 관찰하거나 유물을 수집하는 등 중세에 대한 탐구 역시 인기 있는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왕·귀족 등의 상류층 수집가들은 과거의 유물·예술품이나 자연사적 표본 등을 방대한 규모로 모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18세기에는 유럽 최초의 박물관·미술관이 등장했다.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중세는 한편으로 미개하고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순수함과 용맹함을 간직한 사람들의 시대라는 점에서 매력적인 양면성을 지닌 시공간으로 상상되었다. “고트 풍(風) 소설”(Gothic romance), “고트적 정치체제”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이민족 중 하나인 고트족의 이름은 중세적인 이미지 자체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오늘날 한국어에 들어와 있는 “고딕”, “고스”와 같은 단어의 기원이 이것이다).

 

계몽사상가들이 역사의 진보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또 다른 핵심적인 개념으로는 ‘문명의 발전단계’가 있었다. 이는 인간 문명의 역사를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서 가장 발전한 단계로까지의 여정으로 규정하고, 각 단계의 특징이 무엇이며 단계별 발전 혹은 퇴행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려는 논리였다. 도덕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가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초판 1776)에서 제시한 4단계론이 그 대표적인 예다. 스미스는 인류의 역사를 물자의 획득 방식에 따라 수렵·채집, 목축, 농업, 상업의 네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역사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등장하면서 각자의 소유권이 보장되고, 이것이 기술발전을 포함한 여러 요소와 맞물리면서 마침내 다수의 사람이 풍요로운 생산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과정이었다. 물론 스미스는 상업·농업 단계에 도달한 국가가 목축 세력에 의해 멸망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으며, 자신이 가장 발달한 선진국으로 평가한 영국이 ‘중상주의적’ 세력에 의해 부패할 가능성이 낮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및 유사한 문명발전단계론을 공유한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상업적 단계를 근대의 발전으로 바람직하게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18세기 유럽에서 문명단계론이 유행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무엇보다 초기 근대부터 유럽 바깥에 대한 지식이 급속히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은 유럽 강대국의 지구적 식민지화·수탈과 함께 유럽 외부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6세기부터 중국 및 일본 등지로 선교를 시도한 예수회의 조사보고서를 포함해 여행기·박물지가 꾸준히 출판되어 인기를 누렸다.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이나 중국의 청 제국처럼 이미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룩한 지역들의 정보는 유럽인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상대화하는 렌즈로 사용될 수 있었으며,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 1689-1755)의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Lettres persanes, 1721)가 그 대표적인 예다. 동시에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처럼 (유럽인들이 보기에) 아직 문명 발달을 본격적으로 체험하지 않은 지역의 기록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었던 영역, 즉 인간의 원시 상태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근거자료가 되었다. 요컨대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문명들의 정보가 폭넓게 수집되면서 (적어도 유럽인들이 보기에) 모든 상태의 문명을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역사관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문명단계론의 힘이었다.

 

고대-중세-근대의 삼분법적 역사관은 제국의 멸망과 종교개혁·르네상스처럼 유럽의 경험에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사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설명력만을 지녔다. 그러나 계몽 시대의 문명단계론은 유럽 바깥을 포함해 모든 시공간에 적용될 수 있는 역사의 보편법칙처럼 받아들여졌다(이후 19세기에는 맑스주의 역사관 등 두 도식을 혼합한 역사관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또 대안을 내놓고자 했던 계몽사상가들의 작업에 문명단계론은 필수적인 도구였다. 문명단계론은 각 국가·사회가 어떤 상태인지, 무슨 문제와 직면할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개혁과 전략이 필요한지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 그리고 스미스·흄을 포함한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들의 저작은 법과 제도만이 아니라 기후와 토양, 문화와 풍속 등의 다양한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정교하고 거대한 ‘과학적’ 모델을 제시하여 전 유럽의 개혁가 및 계몽사상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인간, 사회, 국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의 책 이름에서처럼, 오늘날의 대중적인 인식에서 계몽의 시대는 곧 “이성의 시대”인양 기억되고는 한다. 하지만 후대의 비판자들이 관습적으로 공격하듯 계몽사상가들이 이성만을 중시하고 그 외의 요소를 배격했다거나,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만 보았다거나 하는 단순한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짚어보자. 첫째, 인간이 이성을 통해 잘못된 정념을 다스려야 한다는 믿음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계속해서 이어진 상식이며 특별히 계몽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둘째, 16세기 후반부터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탐구하는 사상가들은 점차 정념(passion)이나 본성(nature)을 통해 현실의 인간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 1649)은 인간 정신·신체 작용의 근원으로 다양한 정념을 지목했으며,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은 그에 더하여 이기적이고 상호 적대적인 인간 본성을 강조했다. 데카르트와 홉스에게 가해진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념·감정·감각과 인간 본성의 주제는 18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데카르트와 홉스는 정념이 인간의 심신에 작용하는 과정을 톱니바퀴의 작동과 같은 기계론적 모델로 설명했다. 근대 사상을 ‘기계론적 합리주의’와 동일시하는 대중적인 편견과 달리, 이들의 기계론은 근대 유럽의 인간학에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념과 감각이 인간에게 물리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인간의 정신 혹은 영혼이 ‘어떻게’ 정념과 자극을 포착하고 수용하는가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정념의 작용을 설명하는 새로운 모델의 핵심은 “감성”(sensibility, “감수성”으로 옮기기도 한다)이라는 의학적·심리학적 개념이었다. 여기서 감성은 일차적으로 그러한 감각을 수용하는 신경의 민감도를 의미했다. 즉 높은 감성을 갖춘 사람은 더욱 작고 섬세한 사항까지 포착할 수 있으며, 감성이 낮을수록 둔감하고 무딘 사람이 되기 쉽다. 18세기 유럽의 도시에서는 살롱과 커피하우스, 클럽이 유행했다. 그에 따라 사회적인 교류 및 원만한 의사소통을 위한 세련된 매너·예의범절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런 변화에 맞춰 감성은 의학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미적인 차원에서도 필수적으로 계발해야 하는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처럼 공감할 수 있는 “도덕감정”(moral sentiment)이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라 보았다. 시민의 감성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일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제로서 공적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예민한 감성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소설·드라마에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하거나 격한 감정을 느낄 때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부인의 인물 유형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지나치게 예민한 감성은 곧 외부의 자극에 압도당하여 정신의 주도권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약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쨌든 여성은 애초에 부드럽고 예민한 신경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었던만큼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남성에게 있어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은 언제든 남성적 미덕의 박탈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 1689-1761)의 소설 주인공 찰스 그랜디슨 경처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흘리는 눈물이 미덕의 증거로 여겨지는 예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지나치게 풍부한 감수성에서 비롯된 눈물은 ‘여성화된’ 행태로 조롱받았다(따라서 찰스 그랜디슨은 수차례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한다). 섬세한 감성과 세련된 예의범절(politeness)의 습득은 사교적 성품을 지닌 교화된 시민을 길러내는 데 필수적이었으나, 반대로 남성-시민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유지해야 할 남성적인 힘을 유약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념과 감각의 부각을 이해할 때 종교개혁 이후 도덕신학 논쟁의 전개 또한 빠트릴 수 없는 맥락이다. 후대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05)에서 제시한 ‘금욕적인 청교도’의 표상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오늘날 초기 근대 교회사 연구자들은 좀 더 복잡한 그림을 선호한다. 앞서 4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두가 칼뱅주의적 예정설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급진적 장로파에 의해 폐교의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잉글랜드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엄격한 예정설과는 다른 기독교 도덕신학론을 탐색했다. 일부는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 1592-1655)에 의해 다시 조명받게 된 에피쿠로스주의에 주목했다. 인간이 미덕과 선행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며, 나아가 그러한 기쁨을 통해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은 일반 대중을 기독교 도덕으로 이끌고자 하는 목적에 더 부합했다. 이러한 기독교적 쾌락주의의 도덕신학론을 공유한 저작 중에는 인간이 쾌와 고통의 보상체계를 통해 도덕규범을 습득할 수 있다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과 같은 영향력 있는 책이 포함되었다. 앞서 언급한 “도덕감정” 개념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기쁨이 인간을 유덕하고 신실한 삶으로 이끈다는 말은 특별히 낯선 주장이 아니게 된다. 정념과 감각은 억눌러야 할 위험 요소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하는 핵심 요인으로, 나아가 바람직한 삶의 지침으로까지 승격되었다.

 

초기 근대 및 계몽 시대의 사상가들이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인간 본성을 냉정하고 현실주의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견해가 점차 유통되었다. 홉스는 이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상가로 악명을 떨쳤다. 『시민론』(De Cive, 1642) 및 『리바이어던』에서 그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 즉 인간은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과 영예를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반(反)사회적인 본성을 지닌 동물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그러한 이기적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 체제를 탐색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나, 대중적으로 홉스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승인한 인물로 공격받았다. 많은 기독교 도덕론자, 그리고 (역시나 기독교인들의 비난을 받은) 섀프츠베리(Anthony Ashley Cooper, 3rd Earl of Shaftesbury, 1671-1713) 등은 홉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인간에게는 덕을 행하고 타인을 위하는 선한 본성이 있다고 반론했다. 인간 본성이 악하고 이기적인지, 아니면 선하고 이타적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18세기 도덕·정치사상의 주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되었으며, 현대의 사회·경제이론에서도 종종 되풀이되고 있다.

 

계몽사상의 인간 본성 논쟁에서 적어도 두 가지 사항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홉스가 얻은 악명과 별개로, 후대의 여러 사상가는 점차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이러한 견해는 새로운 논쟁거리를 위한 출발점으로 활용되었다. 인간이 그처럼 이기적인 성향을 타고났다면, 인간이 선행을 하고자 하고 또 그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일상적인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18세기의 뛰어난 사상가들은 인간에게 이기심이 전부라는 것은 이타심이 전부라는 관점만큼이나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믿음이라 생각했다.)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 흄, 스미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등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도덕적 면모를 함께 성찰한 이들은 여론과 평판, 교육 및 관습과 같은 사회적 압력의 작용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한편으로 사회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도덕과 선행을 장려하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즉각적인 이해관계 외에도 타인의 평가로부터 기쁨과 고통을 받는다. 즉 인간은 타인의 칭송을 받기 위해 선하게 행동하고,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선행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도덕적 경향을 ‘제2의 본성’으로 습득한다. 스미스의 “도덕감정” 개념은 이러한 논리를 집약하는 사례였다. 평판에 좌우되는 인간의 성향이 꼭 바람직하게만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근대의 악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루소가 지적했듯, 특히 상업사회에서 그러한 성향은 자유와 독립성을 박탈하여 인간을 여론과 사치의 노예로 만드는 독소로 작용했다(그러한 성향은 서구의 전통적인 도덕 언어에서 “허영심”으로 규정되곤 했다; 교재 7장도 참조).

 

둘째, 인간 본성 논쟁은 당대 정치사상의 중요한 쟁점이기도 했다. 앞서 5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 본성의 개념은 초기 근대 자연법사상에서 자연 상태 및 국가 기원을 설명하는 데 꼭 필요했다. 극심한 종교갈등을 극복하고자 했던 자연법 사상가들은 자연 상태, 즉 어떠한 종파도, 심지어 종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인류의 (상상된)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를 통해 그들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보편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론느 (주로 “사회계약”으로 요약되는) 국가의 탄생 과정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신민은 각자의 종교에 상관없이 국가에 충성해야만 함을 설득하고, 주권자·정부는 신민에게 어떠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가를 규명하는 게 그 실질적 함의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최초의 설정값, 즉 인간 본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바람직한 정부의 모습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서 출발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보자. 그는 자연 상태를 사실상의 ‘전쟁 상태’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제압하고 사회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주권자가 필요하며, 반대로 모든 사회구성원은 주권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특히 주권자가 교회까지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다른 왕당파들조차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로크의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이나 섀프츠베리의 저작은 인간에게 사회성, 즉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본성이 있으며, 따라서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런 점에서 흔히 홉스, 로크, 루소와 동일시되는 “사회계약론”의 요체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정부 또는 인민의 의무와 권리를 도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잘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계몽기 정치사상의 가장 정교한 결과물들은 위와 같은 ‘기원적 계약’의 논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흄과 스미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계약론에 기대어 정부의 권위 혹은 인민의 저항권을 설명하는 논리에 비판적이었다. 애초에 ‘최초의 계약’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근거는 없으며, 설령 그런 게 있다 한들 오늘날의 사람들이 지금과는 모든 조건이 너무나 다른 과거 세계의 결정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비상식적이다. 계약론적 논리에 기대지 않는다면, 정부의 권한과 역할을 어떻게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대안은 앞서 언급한 새로운 역사적 설명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762-63년 글래스고 대학에서 가르친 강의에서 스미스는 정부의 권한과 역할을 문명사의 맥락에 위치시켰다(『법학 강의』[Lectures on Jurisprudence, 1978]). 문명 발달 단계에 따라 생산성, 기술적 성취, 교역 형태, 풍속·습속과 도덕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달라졌으며, 이는 다시 재산권의 보장 수준을 비롯한 정부의 법과 제도 역시 변화했음을 의미했다. 즉 스미스의 설명에서 정부는 문명 및 사회라는 더욱 커다란 구성체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였으며, 전자의 역할과 기능 역시 후자의 조건에 따라 달라져야만 했다.

 

계몽사상의 걸작 중 하나인 『국부론』에서 드러나듯, 스미스는 정부의 잘잘못을 판가름할 때 자연법 혹은 사회계약에 근거한 의무의 준수 여부만을 보는 대신 그것이 국가 혹은 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사회계약론이 주로 ‘정부가 얼마나 올바른가’에 초점을 둔다면, 스미스는 ‘정부가 전체 사회의 효용을 얼마나 증진시키는가’ 또한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들이 다소간 공유하는 것이었다. 1707년의 합병 이후 많은 스코틀랜드인은 당시 유럽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와 같은 낙후된 후발국을 개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국제적인 교역체계에서 각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 나아가 근대 상업사회로의 문명사적 진보과정 및 그에 따르는 난점에 대한 성찰로까지 이어졌다. 상업사회와 정치경제학, 국제정치사상과 같은 쟁점은 그러한 논의의 핵심적인 주제였다(교재 7장 및 8장 참조).

 

국가와 사회의 발전·개혁을 둘러싼 계몽 시대의 논의는 단순히 몇몇 지식인의 고민 이상이었다. 적어도 17세기 이래 유럽 각지의 관료·문인들은 국가를 한층 더 강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며, 이는 종종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실제로 이 시기는 정부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갖가지 “기획”(project)이 끊임없이 제출되었다. 예컨대, 비록 성과는 제한적이었지만, 여성의 교육과 자립을 가능케하는 공동체의 설립안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18세기 후반 벤담과 체자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 1738-1794) 등이 주창한 형법·감옥 개혁론은 많은 유럽인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인구 증감을 둘러싼 논쟁은 (상대적으로 덜 기억되지만) 개혁 담론의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18세기 말 과잉인구로 인한 빈곤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전까지 인구는 국가의 강함을 나타나는 척도로 여겨졌다. 사망률 및 기대수명과 같은 다양한 항목이 새롭게 조사대상이 되었으며, 유럽 각국 정부도 인구를 늘리기 위해 여러 방책을 고민했다. 난점은 식민지 등의 소규모 공동체를 제외하면 인구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던 상황에서 인구의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고대의 국가와 근대의 국가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인구를 보유하는가를 두고 벌어진 18세기의 논쟁은 이제 사회현상과 정책의 토론에서 수량의 측정이 점차 핵심적인 과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갖가지 기획과 개혁안의 쇄도로부터 우리는 계몽 시대의 여러 정치적·정책적 담론이 공유하는 ‘낙관적’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많은 사상가는 추론 및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원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렇게 파악한 원리에 기초하여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공유했다. 심지어 존 브라운(John Brown, 1715-1766)의 『시대의 습속과 원리에 대한 평가』(An Estimate of the Manners and Principles of the Times, 1757)처럼 자국의 부패와 쇠락을 경고하는 책이라 할지라도 저 두 가지 측면에서는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근대 상업사회의 폐해에 누구보다 비관적이었던 루소 또한 적어도 코르시카공화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땅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계몽사상가들과 ‘구체제’의 관계가 반드시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수많은 “기획” 구상이 제출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당시 대부분의 문인은 기존의 정부를 활용하여 세상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 현 체제 자체를 전복하는 급진적인 구상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물론, 세기말의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하는 프랑스에서도 정부와 학술기관, 계몽사상가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어둠’과 혼란을 반복하고 싶은 사람은 드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존 톨런드(John Toland, 1670-1722)와 같은 급진적인 자유사상가들은 계속해서 나타났으나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이들 중 상당수는 효율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이 가능하려면 절대적인 왕권의 힘이 필요하다 믿었다. 실제로 이러한 기대를 담은 “계몽 전제정”은 18세기 정치사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 중 하나였다. 기존의 정부를 뒤엎고 새로운 체제, 좀 더 공화적이고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열망은 주로 18세기 후반, 특히 서유럽 바깥에서 계몽사상을 접한 이들에게서 나타났다.

 

 

4. 계몽과 종교

 

유럽의 계몽을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 즉 기독교적 세계관을 종식시키고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상적 운동으로 규정하는 통념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그와 같은 입장을 지닌 계몽사상가가 없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계몽과 종교의 관계는 어느 한 가지 면모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이는 부분적으로 18세기 종교론의 상당 부분이 앞선 시대의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17세기와 18세기의 주요한 종교적 쟁점을 함께 짚어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근대 유럽인들은 극렬한 종교갈등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목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종파 간 갈등의 해소를 시대적인 과제로 만들었다. 서방 기독교 세계가 다시금 하나의 교회로 통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설득력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사상가들은 이제 복수의 종파들이 어떤 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종파 간 차이가 극단적인 적대로 격화하는 전개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에는 “관용”(toleration), 즉 교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내 혹은 인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관용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종파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과제의 시급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17세기 이래 유럽인들은 관용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고안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및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유럽에 공인된 해결책은 바로 세속의 통치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영역의 종교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각지의 정치적 권력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종파 간의 대립이 정치적·군사적 갈등으로 번지는 위험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예컨대 홉스는 종교적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주권자가 교리 및 예배 의식 결정권, 성직자 임면권을 포함해 공식적인 종교 생활에 관한 모든 권한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방식은 소수 종파가 주권자의 변덕 혹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박해받을 수 있는 위험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다.

 

세속의 통치자가 과도한 권한을 보유하는 상황을 우려한 사상가들은 반대로 개인의 영역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논리의 핵심에 있는 것이 “양심”(conscience)으로, 많은 관용론자는 설령 주권자라 할지라도 개개인이 지닌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때 양심의 자유란 단순히 각자의 자유로운 생각이나 견해가 보장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양심이란 종교적·도덕적 판단과 연결되어 있는, 예컨대 죄책감과 같은, 강력한 감정을 촉발하는 기능을 의미했다. 관용론을 주장한 사상가들은 양심이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나 그 자신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임을 주목했다. 요컨대 절대적인 권력자나 가족은 물론, 심지어 본인이라 해도 잘못된 교리·신앙에서 비롯되는 양심의 고통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종교적 영역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선택하도록 두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관용에 관한 서한』(Epistola de Tolerantia, 1689)에서 로크는 세속적 통치자의 권한을 존중하면서도 교파나 예배 방식과 같은 쟁점은 구원을 위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관한 각자의 믿음에 따른 영역이니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권자의 권한 혹은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관용론의 전부는 아니었다. 교리의 차이를 정치적 영역으로 끌고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성직자·학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많이 기댄 논리는 기독교에서 본질적인 요소와 “비본질적인 것”(adiaphora)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믿음은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교회의 의자를 어떤 나무로 만들어야 하는가를 놓고 목숨을 걸고 다툴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나 로크와 같은 사상가들은 “비본질적인 것”의 논리를 발전시켜 기독교의 교리를 최소주의적으로, 즉 매우 느슨하게 규정하고, 그 외의 교리들은 대체로 비본질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즉 기독교의 핵심에만 집중하면 나머지는 각자의 아무래도 좋은 문제니 굳이 다툴 이유가 없는 셈이었다. 다만 이러한 전략에는 명백한 한계지점이 존재했는데, ‘본질적인 요소’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할 경우, 로크의 『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처럼, 기독교 자체를 포기하는 이신론자 혹은 불신앙자로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다.

 

품행과 예의범절, 문화의 차원에서 관용론자들은 “열광”(enthusiasm) 및 “광신”(fanaticism)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근대 초 기독교 정치에서 열광·광신은 일차적으로 자신만이 신의 뜻 혹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그리고 그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비타협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가리켰다. 열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지닌 이들과의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할 경우 그러한 차이에 대해 강압과 폭력을 거리낌 없이 행사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특히 인간의 사교성·예의범절이 문명 발전의 척도로 여겨지는 18세기에 이르면 광신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교화된 단계에 이르지 못한 난폭하고 야만적인 이들로 조롱받게 되었다.

 

관용론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교회의 공존을 추구하는 방안이었다면, 아예 종교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사상가들도 등장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정치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신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할 때, 그러한 신의 의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는 일이 바로 성직자들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신학정치적 구도에 비판적인 이들은 종종 성직자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컨대 “사제들의 술책”(priestcraft)과 같이 당대에 자주 사용되던 표현은 성직자들이 “미신”(superstition)을 퍼트려 무지한 인민을 기만·조종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협잡꾼과 다름없다는 비난을 담고 있었다. 비판론자 중에는, 대표적으로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처럼, 기독교 성서 자체의 진실성을 문제삼는 단계까지 나아간 이들도 있었다. 그는 당대의 문헌비판 기법을 차용하여 성서가 정말로 신의 뜻을 담았다기보다는 과거의 성직자·지배계층이 인민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헌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성서를, 나아가 종교 자체를 역사적·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접근법이 계몽사상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종교를 개인의 신앙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오늘날과 달리, 근대 초까지 대부분의 유럽인에게 기독교는 세계를 설명하는 렌즈와 같았다. 여러 성직자·학자는 한편으로 성서에 기초하여 세계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및 교회 자체의 역사를 탐구하고자 했다. 기독교의 역사적 탐구는 특히 15-16세기 이래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를 통해 인문주의 문헌학의 기법이 발전하면서 교회사 연구에서도 더욱 치밀한 문헌학적·역사적 접근을 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역사적 접근법은, 종교개혁 이후 분열된 종파들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각 교회가 반대파의 입장을 논박하고 반대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작업에 꼭 필요한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17세기 후반부에 이르면 유럽 곳곳의 대학 신학부에서 문헌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인 교수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며, 제네바 출신 신학자 장 르클레르크(Jean Le Clerc, 1657-1736)의 『비평의 기술』(Ars Critica, 1696)처럼 역사적 비평을 통해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는 예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래, 유럽인들은 동방(오리엔트)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여행기·보고서를 포함해 근동·아랍 세계에 대한 지식을 수집했으며, 비잔틴 학자·지식인들의 망명 이주는 유럽의 학자들이 고전 그리스어 문헌을 포함한 새로운 자료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리적 시야의 확장은, 특히 성서를 문헌학적으로 탐구하려는 흐름과 맞물려, 유대교·히브리어·아랍어·아람어(“칼데아어”라고도 한다) 등에 대한 관심사로도 이어졌다. 이전까지 카톨릭 교회는 5세기 초 교부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c. 342-47 – 420))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서를 정본으로 규정했으나, 이제 불가타 성서 역시 하나의 ‘번역본’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대두했다. 학자들은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 히브리어 성서, 그리스어 70인역성서를 포함해 다양한 언어로 된 판본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16-17세기에 많은 학자의 협력으로 여러 언어로 된 판본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다국어 성서(polyglot)들이 출간되었으며, 대학에는 히브리어 및 아랍어 교수직이 설치되었다. 옥스포드대학의 아랍어 교육을 이끌었으며 동시대 유럽은 물론 후대에도 존경받은 에드워드 포콕(Edward Pococke, 1604-1691)은 17세기 아랍 연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성서와 교부 문헌의 역사적 해석은 그것들의 위상 자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17세기 후반에는 이미 많은 신학자가 성서 각 대목의 집필 과정 및 성서 저자‘들’의 의도를 역사적으로 다시 재구성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역사적·문헌학적 논쟁이 지속되면서 성서는, 적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신학적 지식을 갖춘 이들에게는,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 많은 이가 성서의 일부 대목이 과거의 상황을 기술한 ‘역사서’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예수 처형 후에 발생한 현상을 비롯해 기적을 기록한 서술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계시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비유거나, 아예 허구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더 나아가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들도 등장했다. 기독교라는 유일신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리스·로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대사회가 다신교 사회였다는 지적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다신교의 지배에서 기독교가 급작스럽게 출현하여 로마제국의 국교, 나아가 유럽의 종교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로부터 기독교와 교회를 상대화하는, 즉 종교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나타났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남긴 종교에 대한 저술은 많은 경우 이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다. 프랑스 계몽의 종교 비판을 대표하는 볼테르(Voltaire, 1695-1778)는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자신의 무신론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최초의 스코틀랜드인 중 한 명인 흄의 『종교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 1757)는 이전의 종교사 저작들을 여럿 참조하여 쓴 작품이었다. 이전 세대의 기독교사·교회사 연구가 대체로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담론의 영역 내에 있었으며 그 저자들도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다면, 볼테르와 흄은 종교와 그 해악을 겨냥한 비판을 한층 더 대중적인 필치로 전개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이 계몽사상 전체를 대표한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다수의 사상가는 여전히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그게 무엇이든 간에, 고수했다. 심지어 계시와 같은 초자연적 요소를 부정하면서도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로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잉글랜드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와 기번 같은 사례는 좀 더 까다롭다. 이들은 과연 기독교의 교리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진리인지에는 다소 회의적이었으나, 기독교와 교회가 문명의 주요한 동력으로 작동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는 더 낫다고 믿었다. 이처럼 기독교를 일종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로 간주하고 옹호하는 입장은 교회의 질서라는 거대한 관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택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계몽사상와 종교의 미묘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 계몽 이후

 

계몽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는 계몽과 프랑스대혁명의 관계다. 예컨대 오늘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의 연구자들은 프랑스대혁명이 계몽사상에 사실상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혁명이 공포정치 및 전 유럽을 둘러싼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평화롭게 세계를 개혁하려는 계몽의 기획을 허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 환영했던 영국의 개혁세력은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혁명에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결국 프랑스 혁명정부가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한 뒤 탄압과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유럽 각국에 대한 정복 전쟁을 전개할 때쯤엔 비관적이고 보수적인 목소리가 대세가 되었다. 토머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은 분위기의 전환을 잘 보여준다. 인간이 완벽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급진적 계몽사상가들의 믿음을 비판하면서 맬서스는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식량 생산량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빈민을 구제해봐야 더 큰 기근을 가져올 뿐이며 구빈법의 포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라는 게 그의 씁쓸한 결론이었다.

 

반대로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자도 있다. 영국과 독일처럼 혁명과 적대했던 지역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혁명기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들여다본다면 평가는 조금 달라진다. 실제로 프랑스의 일부 계몽사상가들은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혁명가들 스스로가 명확히 계몽사상의 언어를 통해 정세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했다. 혁명기 의회에서는 루소와 볼테르, 몽테스키외와 스미스가 수시로 인용되었으며 이러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다소간의 변형을 거칠지언정 혁명기에, 또 19세기에 여전히 활용되었다(교재 9장 참조). 버크처럼 개혁 자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극단적’ 보수인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을 포함해 빈곤과 같은 사회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개혁가들은 계속해서 등장했다. 계몽사상의 고전적인 저작들은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서유럽 일부 국가만이 계몽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계몽사상과 혁명의 연결은 더욱 뚜렷해진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남북 아메리카를 포함해 유럽문화가 닿은 곳곳에서 혁명이 발발했으며, 이때 계몽사상은 혁명적 지식인들의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분명한 점은 19세기 이래 계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서구 근대를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근대의 ‘진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계몽사상은 근대인들이 중세적 구속에서 벗어나 지적으로 도약하는 (동시에 19세기 이후 서구인들이 행한 여러 악덕의 책임으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운) 위대한 이정표다. 반대편 입장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가 쓴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7)이 대표적인데, 계몽을 인간 이성 혹은 근대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끔찍한 범죄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유사한 시각에서 현대의 기독교 사상가 중 일부는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세속적인 합리성으로 자신을 고립시킨 원인을 계몽사상에 묻고, 반대로 (대중적인) 과학 담론은 정확히 그러한 이유에서 계몽을 찬양한다. 이처럼 17-18세기 유럽인들의 삶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깊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몽사상은 서구 근대성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더 읽어보기

 

김민철,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 『역사비평』 131 (2020): 445-72.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 계몽의 시인, 관용의 투사』, 김민철 역 (후마니타스, 2020).

니콜라스 필립슨,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아버지, 신화가 된 사상가』, 배지혜 역 (한국경제신문, 2023).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이준호 역, 전3권 (서광사, 1994-2008).

---, 『종교의 자연사』, 이태하 역 (아카넷, 2004).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황태연 역 (비홍, 2013).

볼테르, 『관용론』, 송기형·임미경 역 (한길사, 2016).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이자호 역 (문학과지성사, 2022).

---, 『법의 정신』, 전3권, 진인혜 역 (나남, 2023).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김광수 역 (한길사, 2016).

---, 『법학강의』, 전2권, 서진수 역 (자유기업원, 2002).

---, 『국부론』, 전2권, 김수행 역 (비봉, 2007).

앤서니 그래프턴, 『각주의 역사』, 김지혜 역 (테오리아, 2016).

---,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서성철 역 (일빛,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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