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근대 철학사: 경험론-합리론 도식 비판, 그리고 '실험철학'

Intellectual History 2024. 8. 16. 23:20

언젠가 시간이 생기면 별도로 옮기겠지만, 지난 3주 가까이 의도하지 않게 유럽 초기 근대 철학사 연구의 동향에 관해 철학 전공자들과 논쟁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논쟁 종료 후 이른바 서양근대철학의 표준적 설명, 즉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의 대립을 칸트(혹은 독일관념론)가 극복한다'는 서사 (축구는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다 독일이 우승하는 놀이다, 같은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자체에 대해 영어권 철학사 연구자들이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아래 포스팅은 그에 따라 초보적이고 선별적인 독서를 진행한 후 거친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철학사 연구자가 아니며 나의 정리 역시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부 및 대학원 과정에서 철학'사'를--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한층 전문화된 역사학의 기준을 충족시킬만큼--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이런 기록을 따로 남기는 의미가 없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글에서 수정해야 할 지점의 지적은 물론, 학계의 지도를 보강하거나 함께 읽어볼 만한 문헌을 공유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댓글을 통해 자유롭게 의사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다.

 


 

초기 근대 철학사를 합리론 대 경험론의 대립구도로 설명하는 표준적 도식에 대한 철학(사) 연구자들의 비판은 이미 그 자체로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1.

예컨대 지금도 종종 인용되는 고전적인 비평으로는 데이비드 페이트 노튼의 「'영국 경험론'의 신화」를 꼽을 수 있다(David Fate Norton, "The Myth of 'British Empiricism'", History of European Ideas 1.4 [1981]: 331-44). 흄 도덕철학의 전문가였으며 오늘날의 젊은 연구자들에겐 주로 흄의 『인간 지성에 대한 논고』 (A Treatise of Human Nature) 클래런던 판 편집인으로 낯익을 노튼의 글은 합리론 대 경험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독일 관념론이 해결했다는 통상적인 서사에 대한 인상적인 패러디로 시작한다. 특히 로크-버클리-흄을 한데 묶는 '영국 경험론'의 범주를 구축한 이들로 토머스 리드와 토머스 그린을 지목하면서, 노튼은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범주 자체는 부정하지 않되 영국 초기 근대 철학을 이렇게 아울러 묶는 방식이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근대 경험론'이라는 범주를 인정한다면 그 출발점은 영국인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피에르 가상디가 적합하며(여기서 노튼은 리처드 팝킨Richard Popkin의 1967년 글에 기댄다; 팝킨의 철학사 연구까지 꼽는다면 초기 근대 유럽 철학사 연구의 갱신 과정은 좀 더 긴 시간표를 통해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버클리는 로크보다는 말브랑슈와 데카르트 등 유럽의 철학자들에 더 가까운 면이 있다.

노튼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하는 철학자는 역시 흄이다. 흄이 버클리를 실제로 읽었는지 여부를 둘러싼 20세기 중후반의 논쟁을 언급하면서, 노튼은 흄이 편지에서 버클리를 추천하기는 한다고 지적한다--단 말브랑슈, 피에르 벨, 데카르트와 함께 말이다. 섀프츠베리, 허치슨 등 경험론 전통에 묶이지 않는 철학자들이 흄에게 끼친 막대한 영향을 볼 때, 흄을 '영국 경험론'의 범주 내에서만 읽는 건 설득력이 없다(반대로, 노튼은 본인이 이렇게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고 쓰지만, 흄과 칸트의 연속성을 읽어내는 해석도 가능하다).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노튼은 자신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영국인들은 경험론을 발견(discover)하지 않았고, 로크, 버클리, 흄은 유럽대륙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부분을 빚지고 있으며, 버클리에게 로크의 책, 흄에게 버클리의 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흄은 경험론의 초기 비판자 중 한 명이었다. 요컨대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이라는 꼬리표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자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2.

이처럼 초기 근대 철학자들의 여러 저작을 폭넓게 읽고 검토한 전문 연구자들은 오래 전부터 철학사의 표준적 서사 및 그 주요 범주의 부적절함을 포착했다. 20세기 중후반은 케임브리지 지성사/정치사상사 학파의 초기 저작들이 17-18세기 사상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들을 구축하고 확산시킨 시기이기도 했다--그중 한국어로는 포콕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1975),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978) 정도가 번역되었지만, 무엇보다 '근대 자연법/자연권 연구'를 혁신한 리처드 턱Richard Tuck의 <자연권 이론들: 기원과 발전> (Natural Rights Theories: Their Origin and Development, 1978), 케임브리지학파 내에서 스코틀랜드 계몽 연구의 초석을 놓은 던컨 포브스Duncan Forbes의 <흄의 철학적 정치학> (Hume's Philosophical Politics, 1975)도 함께 언급될 필요가 있다. 지성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닌 한 낯선 이야기겠지만, 이들의 작업은 거의 출간 시점부터 영어권의 다른 사상사 연구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경제사상사의 경우, (유감스럽게도 한국어판 역자해제/주에는 스키너와 허시먼의 관계가 언급되지 않지만) 앨버트 허시먼Albert Hirschman의 고전 <정념과 이해관계>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1977), 도널드 윈치Donald Winch의 <애덤 스미스의 정치학> (Adam Smith's Politics, 1978), 그리고 이후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포닥을 거쳐 동 대학 역사학과에 합류할 이슈테반 혼트Istvan Hont의 강렬한 작업물을 꼽을 수 있다.

우리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맥락주의자들의 연구가 서사의 측면에서든--공화주의, 자연법, 사회성sociability 논쟁 등--연구방식의 측면에서든 18세기 도덕철학·정치철학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자극을 주었으며, 이것이 경험론 대 합리론 도식 및 그에 기초한 인식론 중심의 철학사 패러다임을 상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저작만 꼽는다면, 크누드 하콘센Knud Haakonssen의 <입법자의 과학: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의 자연법학> (The Science of a Legislator: The Natural Jurisprudence of David Hume and Adam Smith, 1981), 스티븐 다월Stephen Darwall의 <영국 도덕가들과 내적 ‘의무’: 1640~1740> (The British Moralists and the Internal ‘Ought’: 1640~1740, 1995), 하콘센의 <자연법과 도덕철학: 그로티우스에서 스코틀랜드 계몽까지> (Natural Law and Moral Philosophy: from Grotius to the Scottish Enlightenment, 1996), 그리고 한국어로도 번역된 제롬 슈니윈드(J. B. Schneewind)의 대작 <자율의 발명: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The Invention of Autonomy: A History of Modern Moral Philosophy, 1998) 등이 17-18세기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의 풍성함을 드러내고 또 이를 이해하는 갱신된 서사를 제출했다.

2006년 출간된 <케임브리지 18세기 철학사> (The Cambridge History of Eighteenth-Century Philosophy)는 그 구성과 편집인 서문--즉 하콘센의 「18세기 철학사: 역사인가, 철학인가?」 (The History of Eighteenth-Century Philosophy: History or Philosophy?)--모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하콘센은 17-18세기 철학사를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이 경쟁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통념을 확산시킨 이들로 19세기 초 토머스 리드 및 칸트 추종자들을 지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론 중심의 철학사관은 도덕, 정치, 법학, 예술과 같이 당대의 철학자들이 실제로 진지하게 논의했던 여러 핵심 영역을 거의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초기 근대 철학사를 아우르는 지배적인 해석틀로는 부적절하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18세기 철학사> 및 이후의 굵직한 해당 시기 철학사 개설논문집의 구성을 살펴보면, 도덕·정치철학 및 미학 관련 논의가 최소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며 그 정보값의 밀도도 낮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컬럼비아 철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크리스티아 머서는 1980-90년대를 기점으로 영어권의 초기 근대 철학사 학계에서 이전의 (역사적 정합성을 덜 중요시하는) 합리적 재구성주의를 맥락주의적 접근법이 대체하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Christia Mercer, "The Contextual Revolution in Early Modern Philosophy", Journal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57.3 [2019]: 529-48). 맥락주의의 위상에 대한 머서의 주장을 유보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정치·도덕철학사 외의 철학사 연구에서도 과거의 철학적 맥락/논변을 더욱 정교하게 분석하기 위해 지성사적 접근법을 활용하는 풍경이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지성사 대 철학사라는 의미도 쓸모도 없는 낡은 대립구도는 치워버리자; 접근법/방법론은 도구고, 연구자들은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 어떤 도구든 사용할 수 있다. 철학자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지성사라는 도구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주제에서도 이를 거부한다면, 그건 그냥 바보짓이다). 머서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영어권의 철학사 연구가 경험론과 합리론의 범주를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간 것은 곳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예를 들어 2019년에 출간된 840쪽 분량의 <옥스퍼드 핸드북 데카르트 및 데카르트주의 편> (The Oxford Handbook of Descartes and Cartesianism, ed. by Steven Nadler, Tad M. Schmaltz, and Delphine Antoine-Mahut)에서 "합리론"(rationalism) 및 "합리론자"(rationalist)로 찾아보면 (서지사항 등을 제외하고) 매우 적은 용례만이 등장하며, 그중에서 데카르트를 합리론/자로 지칭하는 예는 거리를 두거나 유보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2000년대 이후의 철학사 연구에서 주목할 점 하나는 단순히 합리론/경험론 도식을 비판하거나 상대화하는 것을 넘어, 이를 대체하는 철학사적 범주를 제시하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터 앤스티(Peter R. Anstey)의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 개념이 대표적인 예다. 2005년 자신의 영향력 있는 논문 「실험적 자연철학 대 사변적 자연철학」에서 앤스티는 17-18세기 자연철학에서 실험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며, 어떤 용법으로 사용되었고, 얼마나 널리 사용되었는지를 포함한 넓은 그림을 제시했다(Peter R. Anstey, "Experimental versus Speculative Natural Philosophy", in The Science of Nature in the Seventeenth Century, ed. by Peter R. Anstey and John A. Schuster, 2005). 이후 앤스티는 여러 저작 및 공동작업을 통해 자신의 범주가 17-18세기 철학사의 더 많은 사례에 적용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그의 테제는 알베르토 반조와 공저한 논문편집본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실험, 사변, 그리고 종교> (Experiment, Speculation And Religion In Early Modern Philosophy, ed. by Alberto Vanzo and Peter R. Anstey, 2019)에서처럼 17세기 철학사 연구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 지성사 연구 총서 Ideas in Context에서 출간된 반조와의 공저작 <실험철학과 경험론의 기원들> (Experimental Philosophy and the Origins of Empiricism, 2023)은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즉 실험철학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맞이하고 마침내 경험론-합리론 도식의 등장으로 잊혀지기에 이르는 과정을 일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수행해 온 연구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맥락에서 앤스티의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자신이 초기부터 명시적으로 밝혀왔듯, 실험철학이 경험론을 대체하는 좀 더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는 범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실험철학과 경험론의 기원들>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를 요약해보자. 앤스티는 자연철학/자연사적 지식의 습득에서 실험과 관찰을 강조하는 "실험철학"의 방법론 및 이를 바탕으로 자연철학을 갱신하려는 학술운동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17세기 중반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주로 왕립학술원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의 철학자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의 경우 흄, 허치슨, 조지 턴불 등의 도덕철학적 작업에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나마) 영향을 끼쳤다.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경험론 대 합리론 도식에서 암시되는 바와 달리, 실험철학의 유행 과정에서 스스로가 사변철학 진영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거의 없었다는 지적이다. 즉 실제로 실험철학과 사변철학의 두 진영이 경합했다기보다는, 실험철학적 입장 혹은 수사를 받아들인 이들이 자신의 비판대상을 '사변적'이라고 공격하면서 당대에 '실험철학 대 사변철학'이라는 인식적 틀이 구축되었다는--그리고 이것이 경험론 대 합리론이라는 구도보다 초기 근대 철학사를 좀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는--것이 앤스티와 반조의 입장이다.

 


4.

물론 모두가 앤스티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실험철학과 경험론의 기원들> 결론 챕터에서 저자들은 여전히 경험론의 범주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비판자들에 대해 재반론을 제출한다. 해당 논쟁을 짚어보는 것은 나의 관심범위를 넘어서는 일이기에, 여기서는 책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 즉 '그렇다면 어떻게 경험론-합리론 대립이 실험철학의 범주를 밀어내고 초기 근대 철학사의 표준적인 설명도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로 초점을 옮기자. 여기에 관해서는 (반조가 주로 기여한) 책 3부 및 반조의 논문 「19세기 철학사 서술들에서 경험론과 합리론」 (Alberto Vanzo, "Empiricism and Rationalism in Nineteenth-Century Histories of Philosophy",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77.2 [2016]: 253-82) 등을 참고할 수 있다. 책 3부 8장은 칸트의 철학사적 도식을 면밀하게 재구성하고, 9장 및 반조의 2016년 논문은 이후 합리론-경험론(-독일관념론)의 틀이 표준적인 철학사 서술 프레임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근대 철학사 서술의 성립 과정에는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책 8장, 9장, 결론 및 반조의 2016년 논문을 한번쯤 꼼꼼히 읽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주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마찬가지로 (크리스티안 볼프를 포함해) 실험철학의 물결에 영향 받고 있던 독일에서 새로운 도식을 구축하고 확산시킨 일차적인 역할은 역시나 임마누엘 칸트의 몫이었다.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을 초기 근대 철학사의 핵심으로 놓았고, 후자를 좀 더 옹호하는 위치에 섰다(책 8장; 다만 앤스티와 반조는 칸트 본인의 입장이 '표준적 설명'의 틀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직접 철학사 저작을 출간하지는 않았던 칸트를 대신해 경험론-합리론 도식, 그리고 나아가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을 칸트가 넘어선다는 도식을 구축하고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칸트주의자로 전환한 이들의 몫이었다. 앤스티와 반조는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Karl Leonhard Reinhold, 그리고 라인홀트를 통해 칸트주의자로 개종했으나 전자와 달리 끝까지 칸트주의자로 남은 빌헬름 고틀립 텐네만Wilhelm Gottlieb Tennemann 등의 저작을 검토하며 이들의 손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질 17-18세기 철학사 서술의 규정과 대립구도, 정전의 범위 등이 상당 부분 빚어졌음을 보여준다(책 9장; 특히 276-78쪽에 실린 세 개의 도표는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사가 중 한 명인 요한 야콥 브루커의 철학사와 19세기 초에 출간된 텐네만의 철학사 도식이 얼마나 상이한지를 드러낸다).

물론 이것이 곧 그러한 서술이 곧바로 표준화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조의 2016년 논문은 19세기 영어권의 철학입문서 및 철학사 교과서를 검토하면서 '표준적 서사'의 지위가 굳혀지기까지는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더 걸렸음을 보여준다. 실험철학에 초점을 맞춘 철학사는 19세기 초에 일찌감치 밀려났으며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구도 자체는 (특히 텐네만의 철학사가 영어 및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읽히면서) 점차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양자 뿐만이 아니라 여러 진영을 추가한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의 철학사도 19세기 중반까지 유통되었으며, 무엇보다 알베르트 슈베글러Albert Schwegler의 잘 정리된 저작의 인기에 힘입어 헤겔주의적 철학사 서술이 19세기 말까지도 강력한 경쟁자로 군림했다. 반조는 20세기 초에 들어서 헤겔주의적 철학사가 인기를 잃고, 영어권 저자들이 프랑스·독일 철학사/입문서 번역서에 만족하는 대신 직접 철학사 저작을--영국경험론과 대륙합리론의 대립 구도를 받아들여--쓰면서, 그리고 그런 저작들이 대학교 철학 수업의 교재로 채택되면서 오늘날의 표준적 도식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따라서 반조는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 노튼 등이 제기한 주장, 즉 토머스 리드나 토머스 힐 그린 등에 의해 표준적 설명이 퍼지게 되었다는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 도식은 헤겔주의자를 포함해 (버트란드 러셀처럼) 칸트주의자가 아닌 철학연구자들조차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간편하고 범용적이라는 강력한 장점이 있었다.


5.

여전히 한국에서 서양철학(사)에 입문하는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이는 코플스턴을, 러셀을, 힐쉬베르거를 ... 등을 읽으며 그것이 정말로 서양철학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포스팅에서 언급한 연구들은 이미 적어도 40-50년 전부터 경험론 대 합리론이라는 표준적 도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당대의 복잡한 맥락을 되살리려는, 그리하여 과거의 철학적 논변이 현대와는 다른 관점에서 풍부하고 정밀하게 읽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경향이 철학사 연구의 지형을 바꾸었으며, 이제는 경험론이라는 범주 자체를 대신하고자 하는 철학사적 범주/서사가 제기되고, 나아가 표준적 도식 자체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탐색하는, 즉 그러한 도식 자체를 역사화하는 작업까지도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연구성과 전부가 대중적인 교양서에, 또 서양근대철학 입문 수업에 곧바로 받아들여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또 철학입문자들을 가르치는 철학전공자들이 그럴 필요를 느낀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가 이제는 (적어도 전문연구자들에겐)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서사에 가려져 있던 여러 면모가 드러나면서 과거 철학의 독서와 연구가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보다 더 널리 공유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특히 '감히 알고자 하라'Sapere Aude라는 말에 여전히 두근거림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나의 짧은 탐색이 적어도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하지만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라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인식의 지도를 갱신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철학사에 더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춘 전공자들이 그러한 지도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희망한다--어쨌거나 우리의 인문학계에서 거의 끊어진 거나 다름 없는 분과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가교는 인식의 지도를, 또 독서의 결과물을 서로 공유하는 데서 비로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Anstey & Vanzo 의 책 Experimental Philosophy and the Origins of Empricism 등을 읽어보니까 문외한의 입장이지만 정말 재밌더라고요. 철학 전공자들 중에 관심 있는 분들이 나서서 한국어로로 옮겨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미리 말해두자면 전 철학개념어를 잘 모르고, 무엇보다 2년 뒤까지 번역서 계약 3종이 쌓여 있어서 한동안 더 못 받습니다 ㅠㅠ). 책 중후반부만 대충 훑어보긴 했는데 그래도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를 설명하는 나름의 완결된 내러티브가 있고, 문장도 대체로 명쾌합니다(스티븐 고크로저가 까는 북리뷰를 쓰긴 했는데 그게 얼마나 정당한지 저는 평가할 능력이 없네요). 무리할 거 같은 부분은 함부로 선을 넘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세심함도 있고요. 저자 커리어야 이미 탄탄하고요. 50쪽 짜리 참고문헌 목록 빼고 나면 순수 본문은 300쪽 정도라 짧은 건 아니지만 못할 분량도 아닙니다. 살짝 욕심을 더 내면 앤스티와 반조의 다른 저작 몇 개를 더 보고 관련 논쟁 구도 정리해서 역자해제 붙이면 완벽할 거 같네요.

17-18세기 철학사 연구는 번역도 잘 안 되고, 된다고 해도 원저 출간 후 한참 후에나 번역된 슈니윈드의 책처럼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곤 하는데요, 20년 정도 필드를 개척한 중요한 학자가 자기 얘기를 정리한 따끈따끈한 성과물을 소개하는 게 꼭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서양권 연구자로서 매일 실감하는 건, 유학파도 많고 영어 잘하는 사람도 많지만 영어권 학술 성과의 최전선이나 큰 흐름을 제대로, 많이 소화해서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한 연구자는 여전히 너무 부족하더라고요. 결국 한국어로 된 공통의 레퍼런스가 없다면 서로 이야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고, 그래서 이렇게 논쟁을 이끌면서도 시대를 정리하는 책이 들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들도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학생들도 '오 여기가 이렇게 재밌는 변화가 많이 생기는 필드구나?'하고 일단 흥미를 가질 수 있겠죠.

혹시라도 이미 번역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매우 좋은 일이고, 아니라면 이 참에 좋은 출판사와 역자가 나서주면 좋겠다, 혹시라도 정 필요하면 제가 추천사도 저렴하게 써드리고 홍보 포스팅도 올리겠다... 이런 정도의 서포트도 물론 가능합니다 :)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번역하고 체감한 것인데, 답답해서 직접 우물을 파보니 뭐가 정말 바뀌기는 합니다. 이번 논쟁을 재밌게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위의 책을 직접 읽어보고 판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참고: 앤스티의 저작 중 일부 목록

 

Peter Anstey, "Experimental versus Speculative Natural Philosophy", in The Science of Nature in the Seventeenth Century (ed. by Peter Anstey & John A. Schuster, 2005) : 17세기 잉글랜드 자연철학의 구도는 경험론 대 합리론이 아닌 실험철학 대 사변철학으로 봐야 하며, 실험철학이 가설hypothesis 방법의 사용을 두고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고, 그럼에도 사변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수사는 다양한 입장 및 영역에서 공통되었음을 주장한 중요한 논문(여기서 데카르트/데카르트주의는 사변철학적 입장으로 공격받았음이 지적됨).

 

Peter Anstey, John Locke and Natural Philosophy (2011): Anstey 가 자신이 발굴한 지적 맥락을 바탕으로 로크와 자연철학의 관계를 다시 읽으려는 논문집 [2011년 Journal of the History of Philosophy에서 "서양철학사 분야 최고의 출간도서"(Best Book on 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로 수상].

 

Peter Anstey & Alberto Vanzo, eds., Experiment, Speculation and Religion in Early Modern Philosophy (2019) : 여기서 마지막에 실린 Dmitri Levitin, "Early Modern Experimental Philosophy: A Non-Anglocentric Overview"은 Anstey 의 테제를 16세기 이래 유럽 인문주의의 맥락으로 연결시키고자 함.

Peter Anstey, "Locke and French Enlightenment Histories of Philosophy", Studi Lockiani (2022) : 로크가 18세기 중후반 프랑스 계몽에서, 특히 볼테르, 달랑베르, 콩도르세의 철학사 서술에서 어떻게 기술되었는지를 살펴본 논문.

Peter Anstey & Alberto Vanzo, Experimental Philosophy and the Origins of Empiricism (2023): 실험철학적 개념의 등장에서 그것이 18세기의 마무리와 함께 어떻게 경험론-합리론 도식으로 흡수되는지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자 한 책. 케임브리지 지성사 총서인 Ideas in Context 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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