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사회의 정치사상>과 한국식 지성사 연구의 가능성?

Intellectual History 2025. 10. 26. 23:34

아래는 각각 10월 18일, 10월 19일 페이스북에 쓴 두 편의 포스팅을 옮긴 것이다.

<상업사회의 정치사상>은 물론, 바깥에서 지성사 연구를 이해할 때 도움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옮겨 둔다.

 


<한겨레21>에 이슈트반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서평이 실렸다. 짧은 분량에 맞춰 혼트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잘 짚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나는 해당 서평 자체보다는 서평자 유찬근 선생님이 이를 올리면서 덧붙인 (댓글을 포함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좀 더 눈길이 간다( https://www.facebook.com/yuchangeun.551584/posts/pfbid032dEwuytKatqK89Zn4YQemCmGLWuBMrzroyYePfXjcke75xfp9PBo61jLCWLgNDRkl ).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은 관계로 짧게 코멘트를 덧붙인다.

1. 인간 사회성의 불충분함에서 절대적인 주권자/군주정의 정당화로 나아가는 홉스의 논변이,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일련의 이론적 쟁점이 중요한 출발점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홉스 문제"가 혼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연구사의 맥락을 고려하면 홉스와 자연법, 헌정주의를 연결하는 큰 틀은 영어권을 기준으로 이미 1970년대 후반쯤에 제시되었고(대표적으로 리처드 턱Richard Tuck), 사회성을 둘러싼 도덕철학적 논쟁이 갖는 함의도 혼트가 강연을 준비하던 시점에는 이미 18세기 지성사가들에게는 큰 프레임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혼트 자신의 작업을 보면, 그는 당연히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상업사회라는 주제 자체에, 그리고 그것이 도덕언어, 정치경제정책, 국제정치사상, 역사서술 같은 영역들의 논의를 어떤 식으로 뒤바꾸었는지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다만 <상업사회의 정치사상>은 18세기의 도덕철학/인간학적 논의를 검토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고, 그래서 홉스를 출발점으로 골랐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기본적으로 혼트는 홉스를 대놓고 전근대적 사상가라고 평가한다).

물론 특히 내전과 이후의 정치적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조건에서 홉스의 논의에 일단 주목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상업사회의 정치사상>과 허시먼의 <정념과 이해관계>는 같이 읽으면 좋은 쌍인 것은 맞다. 하지만 두 책을 '비교'할 때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대표적인 사항이 출간년도다. 읽을만한 한국어 번역본이 근래에야 나와서 그렇지, 허시먼의 작업은 원래 1977년에 나왔고 혼트의 유작은 2009년 강연록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간단히 말해 두 책의 출간년도 사이에는 30여 년이라는 시간이, 그리고 그 사이에 축적된 무시할 수 없는 연구사가 존재한다. 만약 18세기 정치경제사상사/도덕철학사를 다루는 논문에서 허시먼의 책만을 소환한다면, 나는 해당 논문의 저자가 연구사를 전혀 업데이트하지 않은, 따라서 해당 주제에 대해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이가 아닌지 의심을 품을 것이다.

<정념과 이해관계>는 기본적으로 17-18세기 전문가는 아니지만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갖춘 학자가 (퀜틴 스키너와 도널드 윈치와 같은 케임브리지학파 지성사가들의 조력에 힘입어) 아직 본격적으로 개화하지 않고 있던 주제에 선구적으로 기여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오늘날의 전공자들은 18세기의 정념론이, 그리고 당대의 정치경제론이 허시먼이 제시한 스케치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또 다채로운 쟁점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안다. <상업사회의 정치사상>에서는 허시먼이 살짝만 언급되지만, 혼트 역시 그러한 비판적 갱신에 기여한 논자 중 한 명이다.

그럼 허시먼과 혼트는 어떻게 연결하는 게 좋을까? 여기에 대해선 내가 마침 베버-허시먼-혼트를 연결하는 서평을 준비 중이므로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

3. "서구에는 전적으로 말과 글에 의해 전개되는 자율적인 공적 영역이 존재"하는가? 위르겐 하버마스조차도 여기엔 유보적일 것 같다("부르주아 공론장"은 사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념형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제대로 훈련받은 (케임브리지 스타일의) 지성사가들 역시 저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답을 할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지성사란 지극히 관념적인 장르입니다. 극장 안을 이해하기 위해 극장 바깥을 살펴볼 필요는 없지요. 마찬가지로 지성사에선 텍스트 안을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 바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이건 그냥 연구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진술인 듯싶다.

핵심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방법론 논쟁이 한창 벌어지던 20세기 중반에 지성사가들은 (특히 퀜틴 스키너는)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가진 두 부류의 독법을 동시에 공격했다. 한 쪽은 텍스트만 읽으면 다 알 수 있다는 부류(지금도 문학이나 정치철학...등지의 학계에는 이런 독법에 기초한 논문들이 계속 나온다. 이론을 붕어빵틀로 삼아 텍스트만 바꿔 붕어빵 논문을 기계적으로 찍어내도 실적 인정을 받으니, 치열한 공부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얼마나 유혹적이란 말인가?), 반대편은 거시적인 사회경제적 맥락만 알면 텍스트도 거기에 맞춰 끼워넣을 수 있다는 부류다. 케임브리지학파 1세대가 본래 17세기 혁명기 연구의 일부로 출발했음을 고려하면 놀랍지 않지만, 이들은 한편으로 혁명기의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텍스트만 보는 연구자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혁명기의 '언어적 맥락', 즉 당시 사람들이 정치적 현실을 기술·분석하고 스스로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적 자원과 전략을 보지 않은 채 텍스트의 내용을 짓눌러버리는 '경제결정론적' 역사가들과 투쟁했다. 특히 행위자들의 인식과 입장, 이해관계 등을 고려하기 위해 당대의 정치적 정세를 파악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한 언어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텍스트, 혹은 발화수반적 힘/언어적 실천을 제대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본적으로 텍스트의 안과 바깥, "말과 글에 의해 전개되는 자율적인 공적 영역"과 그 바깥의 현실... 같은 식의 이분법적 도식은 낡은 반영론의 덫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지성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하는 게 좋다. 정확히 말해 그런 상부구조-토대와 같이 애초에 오답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전제를 되풀이하는 대신, 각각의 행위자가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맥락을 복원하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행위자가 자신이 마주한 현실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도출했는지를 재구성하며, 여기에서 언어적 실천이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 그게 지성사 연구자들이 공유하는 해석 모델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성사 연구를 읽을 때는 행위자와 맥락,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실천/전략과 같은 항들에 초점을 맞추며 보는 게 좋다. '현실이 텍스트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지?'와 같은 질문은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틀린 질문이다(그 현실은 도대체 어떤 현실인가? 텍스트는 '현실'이 아닌가? 페이스북이라는 리바이어던을 이루는 거대한 말뭉치는 현실인가, 아닌가?).

여기에 관해 좀 더 상세한 설명으로는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 3장 및 역자 해제를 참고하길 바란다.

4. a) "포콕이든 혼트든 전적으로 지식인이 생산한 텍스트 안에서만 논의를 펼쳐가지요"; b) "극단적으로 말해 적어도 책만 읽었을 때 이들에게 영향을 준 건 18세기 유럽의 정치경제적 변화라기보다는 홉스 이후 여러 지식인들의 논의들차럼 보이기도 [한다]".

a)에 관해서는 몇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애초에 연구대상이 과거에 중요했던 언어적 실천/논쟁이니 '지식인' 혹은 문인들을 다루게 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닌 듯 싶다. 물론 누군가는 사회적인 영향력이 매우 미미했으며, 문맹이며, 어떠한 구전기록도 남지 않은 대상을 지성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에 도전의식을 느낄 수 있다--이는 성공만한다면 매우 영웅적인 연구가 될텐데, 남아있는 사료가 없다는 치명적인 장벽이 있다. 블로그와 댓글, 소셜미디어의 세계가 열리는 21세기에 오면 반대로 사료의 양이 폭주하기 때문에 '선별'하는 게 훨씬 더 까다로운 작업이 되지만 말이다(이런 사료덩어리를 하나의 말뭉치로 환원해서 시각화하는 방법이 한때 사회학과에서 유행했는데, 이는 논쟁과 같은 질적인 가치를 갖는 실천이나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거의 분석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둘째, 사실 포콕과 혼트 모두 전체 연구커리어를 보면 '덜 중요한' 문인들을 연구사의 지평에 집어넣은 사례가 꽤 있다. 단지 이들의 작업이 그 자체로 필드의 표준적인 참조대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덜 중요했던' 문인들도 자연스럽게 중요한 연구대상에 포함되었고, 따라서 지금 보면 '다 중요한 사람들만 연구했네?'라는 착시가 생기는 측면이 있다. 지금보다 '가치있는' 지식인들의 범주가 훨씬 좁았던 20세기 중반의 기준을 보고 이들의 작업에 (그 출간연도를 고려하면서) 다시 눈을 돌리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b)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적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정치경제적 변화는 이를 해석하는 (숫자를 포함한) 언어적 렌즈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해석된다. '18세기 유럽의 정치경제적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반대로 홉스 이후 18세기 유럽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수많은 당대의 논의가 없다면, 당대 사람들이 그러한 정치경제적 변화를 도대체 어떻게 포착하고 그로부터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경제적 변화가 무매개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재구성한다는 거의 원초적인 수준의 유물론을 신봉할 게 아니라면, b와 같은 문제제기가 정당화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5. "과연 한국에는 지성사/사상사가 존재할까요?"
: 이 말이 엄밀한 지성사/사상사 연구가 존재하냐는 것인지, 지성사/사상사 연구가 존립할 가능성이 존재하냐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답은 "존재한다"이다. 나는 아주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단지 한국에 소개된 극히 제한된 샘플로부터 지성사 연구의 (잘못된) 이데아를 도출한 뒤 그로부터 성급히 좌절하는 대신, 지금까지 축적된 지성사 연구들을 뒤지며 그 다양한 모델들로부터 한국의 지성사적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참조지점들을 획득하는 '노동'이 필요할 따름이다.

생각난 김에 덧붙인다면, 서구 역사학 학술장, 아니 영어권 역사학 학술장에 국한한다고 해도 그 물리적 규모는 한국사 연구자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 지성사 연구도 마찬가지다.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해제에서 그렇게 다양한 역사가들을 언급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규모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몇 명의 사상가, 몇 명의 학자를 골라 그중 일부의 대표적인 논의만 읽는 것으로 '서구 사상/학계를 알았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안다. 지성사가들이 사상가-영웅전을 박살내고 여러 논자로 구성된 맥락과 논쟁의 층위를 도입했듯이, 서구 학술장에서 무언가 힌트를 얻으려는 우리 역시 그들의 맥락과 논쟁을 이해할 만큼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도 지성사/사상사가 가능할지 아닐지와 같은 물음에 너무 성급한 답변을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직전 포스팅에 붙은 유찬근 선생님의 고민/질문에 답하여 쓴 댓글을 옮긴다. 답변의 길이도 길지만, '근현대 한국 연구에서 어떤 방식의 지성사가 가능할까?'라는 물음은 다른 분들께도 흥미로운 관심사일 것 같아 별도의 포스팅으로도 올려 둔다.

쓰면서 생각한 것이지만, 유학과 같은 경로를 포함해 서구 학술장과의 접촉이 본격화된지 40년 넘는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정말 온갖 영역에서 영어권 논문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학술장에서 특정한 학파/사조가 흥망성쇠를 겪는 과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본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특히 인문분야, 역사학 분야의 경우 의외로 이런 통로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없다. 한편으로 애초에 한국의 서양사 학계 자체가 작고 더하여 민족국가 단위로 연구자 집단이 나뉘다보니 정보전달의 양적 규모가 작은 편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사 전공이 일정 규모 이상 되는 학과의 경우에도 사학사 과목이 없거나 유명무실한 수준이다.

서양사학사의 기초적인 전개조차 교육받지 않으니 대부분의 한국사 전공자들은 '근대 학문'으로서 역사학이 어떻게 성립해왔는지, 지금 내가 고민하는 사항이 언제 어떤 연원을 가진 것인지 알기 어렵고 (심지어는 모른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안다고 해봐야 '실증주의-E.H.카(?)-포스트모던-???' 같이 서구 역사학 분과의 실제 전개과정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괴상한 도식만을 접해본 경우가 십상이다. (물론 한국의 서양 연구자들이라고 딱히 다르진 않다...) 3040대의 젊은(?) 한국사학자들이 '민족주의 거대서사 이후 우리 연구의 방향은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도 사학사의 공백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서구 인문학계/역사학계 자체를 매우 촘촘하게 역사화하고 좀 더 두터운 지도를 그리는 실천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게 아닐까?

"정중하고 상세한 답변 감사히 읽었습니다.

결국 핵심은 "근현대 한국 지식인이 [...] 그렇게 세심하고 전략적으로 언어를 사용했던가 회의감이 들 때도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공론장을 지배한 언어가 너무 휙휙 바뀐다는 문제와 연결해본다면 그냥 대세에 따라 언어를 갈아치웠던 건 아닌가싶기도" 한 상황에서 "거의 10년 주기로 지식인의 관심사, 이들의 논쟁 주제, 사용하는 언어가 휙휙 바뀌었던 근현대 한국에서 어떻게 긴 호흡으로 이들의 언어를 세밀하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과제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한국 근현대 시기에 문외한인만큼 적절한 의견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세 가지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째, 이미 잘 아실 사항입니다만, 그러한 급격한 언어적 전환, 혹은 달리 말해 '수입변용'이 근현대 한국 지성사의 근본적인 조건임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지성사적 연구모델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수입원본(?)과 번역산물 사이의 차이를 정밀하게 검토하여 수입/변용 행위자의 의도나 전략을 재구성하는 기본적인 작업부터, 타 문화권에 존재하는 다양한 선택지 중에 왜/어떻게 특정한 사조가 '대세'로 선택되어 상징자본을 획득하게 되는지를--지금도 벌어지는 일이지만 서구 전공자 입장에선 '아니 왜 수많은 선택지 중 하필 저게 한국에선 대세처럼 통용되는 거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는 상황들이 있으니까요--추적하는 작업, 수입업자들 사이의 투쟁에서 더 성공하는 수입업자가 되기 위해 어떤 전략들이 고안되는지, 계속되는 수입품의 물결들 속에서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공유하는 전제나 태도 등이 있는지 등을 긴 호흡으로 살펴보는 연구 등 따져볼 수 있는 길은 많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근현대 동아시아의 조건에 부합하는 연구모델이 구축될 때 정말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영미와 서구를 부합해 언어권을 넘나들어야 하는--단순히 언어를 습득하는 것을 넘어 출발어권의 지식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춰야 하는--곤란함이 있습니다만(그래서 저는 협업 가능한 연구자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게 동아시아 지성사 연구의 진입장벽이자 전문성을 담보하는 해자라고도 할 수 있겠죠.

둘째, 공적인 정치/사회사상에만 연구를 국한하는 대신, 연구 대상 사료의 범위를 바꾸거나 확장해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포콕과 혼트의 예를 들자면, 두 학자가 필드를 혁신할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 중 하나는 좁은 의미의 정치사상만이 아니라 도덕적 언어나 역사서술과 같이 통상적으로 '정치사상 바깥'의 영역으로 취급되었던 다양한 영역을 정치사상과 연결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수의 영역을 연결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파볼 때 각 영역마다 시간적 호흡의 단위나 구획화가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가령 제가 박사논문에서 다뤘던 17세기 후반-18세기 중반 여성담론의 경우 포콕이나 혼트가 재구성한 정치/경제사상의 언어와는 상당히 다른 궤적을 보이는 것처럼요.

앞의 둘을 요약하면, 결국 역사학의 가장 큰 특징은 사료의 성격에 따라 접근법 역시 달라진다는 것이니, 근현대 한국 사상사료의 성격에 부합하는 접근전략들을 고안하거나, 사료의 범위를 넓히고 바꿔보거나... 같은 방식으로 한국의 조건에 맞는 지성사 연구의 모델/서사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셋째, 이전의 다른 댓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한국에 번역된 포콕이나 혼트의 저작은 모두 오랜 기간 수많은 연구자들이 축적해온 다양한 발견들을 전제로 해서만 나올 수 있는, '농축과 정련을 거친' 결과물입니다(<마키아벨리언 모멘트>를 내놓았을 때 포콕은 50대 초반으로 이미 단독저서, 논문집, 기타 편집본 등을 꾸준히 내놓은 중견급이었고,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원고를 강연했을 때의 혼트는 60대였습니다). 당연히 그 바탕을 파고들어가보면 문헌학적 노가다...부터 시작하는 기초/세부적인 작업들이 있고, 달리 말해 그러한 발굴&정지작업이 충분히 축적된 후에 비로소 매우 세련된 형태의 거대하고 밀도 높은 분석들이 가능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지성사 연구의 성립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순 없겠죠. 이건 학술장의 역사와 규모 자체가 다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

제 생각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케임브리지학파 1세대를 포함해 지성사 연구에서 물줄기를 뒤바꾼 영향력 있는 연구를 내놓은 학자들은 대부분 기존의 연구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던 새로운 유형의 1차 문헌과 직접 대면한 경험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문헌을 '읽는' 방식을 새롭게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보자면, 자기 선생님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에서 매끈한 논문을 빨리 많이 쓰는데 몰두하는 후속 지성사가들 사이에서 혁신적인 연구가 나오는 비율이 점점 하락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그게 꼭 지성사 연구가 아니라고 해도, 맨땅에 개고생(?)하는 일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개고생의 경험이 한 명의 숙련되고 통찰력 있는 역사가를 자라나게 하는 필수적인 비료이니까요 :)

결국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우려됩니다만, 애초에 머리로 알아도 몸으로(?) 겪어야 진짜 아는 게 되는 사항도 있는 법이니, 언젠가 올 그때로 나아가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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