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으로서의 이슈트반 혼트"
Intellectual History 2025. 8. 22. 00:07이슈트반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루소와 스미스로 읽는 18세기 지성사』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 리처드 왓모어의 추도문 "스승으로서의 이슈트반 혼트"를 번역해 올린다(원문은 Richard Whatmore, "Istvan Hont as Teacher"). 『상업사회의 정치사상』해제가 주로 역사가로서의 혼트를 소개했다면, 유머와 그리움이 함께하는 왓모어의 글은 카리스마 넘치는 스승으로서의 혼트를 추억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승'과 '어른'을 잃어버린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상상하지조차 못하면서도 여전히 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곤 한다. 그들을 위해 이 글을 올린다.
*이슈트반 혼트의 유고 강연록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한국어판은 다음 링크를 통해 주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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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서의 이슈트반 혼트
리처드 왓모어 / 이우창 옮김
이슈트반 혼트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는지 설명하려면, 내가 지성사가로서 교육받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독자에게 이런 시시콜콜한 회상을 늘어놓는 일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지만, 이슈트반이 자신의 학생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젊은 시절 나는 영어권에서 가장 저명한 지성사 연구자들로부터 배우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 학부생 시절, 나는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을 강의한 던컨 포브스의 마지막 수업을 들었고, 로크에서 마키아벨리까지 국가에 대한 사상을 다루었던 퀜틴 스키너의 지적 자극으로 가득한 강의도 수강했다. 당시 나의 지도교수였던 브렌던 브래드쇼는 종교개혁을 본질적으로 개신교적인 주제가 아닌 가톨릭 개혁의 장구한 역사 속에 위치한 하나의 운동으로 보도록 가르쳤다. 내게 존 포콕의 『마키아벨리언 모먼트』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말해주었으며, 지성사가들에게 이 책은 사회사가들에게 E. 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중요한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확신한 것도 브래드쇼였다. 그가 옳았다. 학부 마지막 해에 나는 리처드 턱으로부터 근대 정치철학을, 피터 클라크로부터 케인스와 국가의 역할을,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로부터는 사회주의를 배웠다. 지금도 나는 지성사와 근대 정치·경제사상의 기초를 배우기에 이보다 더 나은 튜터들, 혹은 교육환경은 없다고 생각한다. 졸업 후 나는 하버드에서 1년을 보내면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주디스 슈클라에게, 또 당시 루소 및 칸트와 구석구석까지 씨름하면서 『정의론』을 수정하고 있던 존 롤스에게 배웠다. (가장 잘 알려진 이들만 언급하자면) 로버트 노직, 마이클 샌델, 아마르티아 센, 버나드 베일린 등 역사·지성사·정치사상·경제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강연과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당시 나의 계획은 옥스퍼드로 가서 이언 맥린의 지도 하에 콩도르세의 경제사상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경제사회연구위원회(ESRC)의 지원도 확보했다. 이처럼 탄탄했던 계획은 맥린이 북미로 안식년을 떠난다는 소식으로 좌절되었다. 어느 이른 아침, 당시 학과장이던 제리 코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현재 옥스퍼드에는 내 연구주제를 맡을 전문가가 부재하므로 입학과 지원금이 취소될 것이라는 나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금 들으면 가혹한 이야기지만 그는 정중했으며 나 또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막막해진 나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가고자 결심했고, 19세기 초 애덤 스미스 사상의 수용사를 연구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입학은 허가되었으나 ESRC 지원금은 받을 수 없었으니, 이전까지 케임브리지가 정해진 기간 내 박사 배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여 해당 기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지도를 받으리라 짐작했지만, 곧 내 지원서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있다가 새로 부임한 이슈트반 혼트라는 낯선 인물에게 넘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보낸 편지에서 혼트는 “내 공부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지적했다. 달리 말해 그는 내가 제출한 연구계획이 전혀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고, 일단 내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뒤에 무엇을 할지 함께 논의하자고 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가 위대한 학자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슈클라에게 조언을 구하니, 그녀는 내가 스키너 또는 턱, 스테드먼 존스 등에게 지도를 받아야만 하며 혼트는 피하라고 충고해주었다. 그녀가 그런 견해를 지니게 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으며, 이 주제로 그녀와 더 깊이 얘기할 기회도 없었다.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이 혼트는 늘 그들의 연구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곤 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는 그의 성격에서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몇 달 뒤 처음으로 혼트를 만났을 때 나는 곧바로 슈클라의 조언이 완전히 틀렸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혼트는 내게 애덤 스미스에 대한 작업보다는 장-바티스트 세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순종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던 나는 다시 두어 달 정도의 여정을 거친 뒤 이제 세에 관한 기존의 연구문헌 및 방법론을 검토하는 보다 일반적인 글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사과정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알려주는 수업에서 처음 단계로는 방법론에 관한 장을 써보는 게 유용하다고 배웠던 것이다. 내가 제출한 글들을 읽고 혼트는 이것들이 너무 형편없으니 향후 2년 동안은 박사논문에 조금이라도 포함될 만한 글은 단 하나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신 프랑스혁명기 1차 사료를, 보다 일반적으로는 세의 저작들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이 주제를 파악하고, 이후 논지를 점차적으로 형성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세 달에 한 번씩 혼트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혁명 연구, 18세기 경제사상, 장기 18세기의 정치사상에 관한 기존의 연구 문헌을 철저히 허물어버린 뒤, 흄에서 시에예스에 이르는 철학자와 논평가들이 직면했던 문제를 두고 무슨 질문들이 나왔으며 어떠한 답변들이 제시되었는지 재구성해주고는 했다.
면담은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어떤 해석을 제안한다. 혼트는 나의 해석이 무슨 2차 문헌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이어서 그는 그것이 왜 잘못되었으며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그 사이 나는 허겁지겁 혼트의 생각을 받아적고는 했다. 교수자로서 혼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묘사할 때 건축업계의 비유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과거 사상을 다루는 논변이 건축물과 같다면, 그는 이를 가차 없이 해체하는 철거업자였다. 혼트와의 논쟁을 겪어본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탱크에 짓밟히는 상황에 견주곤 했다―적어도 영국인 희생자들에게는 판처 탱크처럼 느껴졌음이 분명하다. 혼트가 단순히 만사를 싹 밀어버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우리를 가장 높은 건물 최상층으로 데려가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그는 ‘혼트식 도시계획’이 실현된 이후 18세기가 어떤 형태로 드러날지를 장황한 때로는 두서없는 말로 그려내곤 했다. 이러한 면담은 거의 황홀할 정도였는데, 우리는 그저 논문 지도(supervision)를 받은 게 아니라 위대한 통찰(super-vision) 혹은 위대한 선지자(super-visionary)의 작업을 마주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혼트는 무시무시한 비평가였다. 그의 말은 영원히 내 귓가에 맴돌 것이다(“리처드, 네 연구는 쓰레기야shit[그는 “시래기sheet”라 발음했다]”). 많은 학생이 낙오했다. 나는 분명 최약체 중 하나였지만, 2년쯤 지난 뒤 혼트는 마침내 내 글 한 장(章)을 좀 더 발전시켜볼 수 있겠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완전히 갈아엎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독자들은 혼트의 방식이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학생이든 원하는 만큼 시간을 쏟아주었고, 무엇보다도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가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지성이 진보한다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며, 근대인들, 즉 20세기 저자들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라 멍청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트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건전한 회의주의를 갖추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과거를 계몽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자의 지적인 여정에서 명백한 진보를 경험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혼트는 타인의 연구만큼이나 자신의 작업에도 비판적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더 가혹했다. 말인즉슨 그에게 자신이 말로 묘사할 수 있는 풍경을 글로 옮기기란 지난한 일이었으니, 모든 요소를 검증하고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건축학적 비유가 도움이 되겠다. 혼트는 글을 쓸 때 일단 구조물을 세운 뒤 그것을 일부러 무너뜨려 검증하고, 두 번째는 기초부터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썼다. 그 결과물은 늘 연구 주제에 대해 베일 이면의 진실을 밝혀내는 깊이 있는 이해를, 그리고 역사를 덜 집요하게 탐구했던 이전의 연구자들이 간과한 숨은 의미와 연결고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담아내는 것이었다. 때때로 이른바 케임브리지 지성사학파로 호명되는 연구자들의 저작을 읽다 보면, 고대에서 근대 초 혹은 근대로의 이행 과정을 사유하면서 양자 사이에 상당한 연속성이 존재하며, 스토아학파·에피쿠로스학파·플라톤주의자·아리스토텔레스학파 등의 철학자들이 표명했던 자유나 국가 개념을 고찰하면 과거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공통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혼트는 이러한 주장을 두 가지 방식으로 철저히 박살냈다. 첫째, 그는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국가이성이 국외 공동체의 시장과 상업을 겨냥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키케로가 말해줄 수 있는 바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때때로 상황은 변화하며, 이때는 앞선 시대의 저자들이 그와 연관된 사상을 어떻게 검토했냐 아니냐가 아닌, 그러한 변화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는 과업이 필요했다. 둘째, 개념 자체의 연구란 무의미했으니, 개념은 시대와 장소마다 전혀 다른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떤 개념이든 다른 개념과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유에 관한 사상은 국내 정치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경제에도 중요한 것이었다. 정치경제학에 관한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은 정치와 경제의 관계가 팽창하고 수축했던 17세기 이후의 사람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간신히 엿보는 게 고작이었다.
혼트는 언제나 방법론적 논의에는 회의적이었다. 그에게는 논증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행복했다. 18세기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갖춘, 상업사회와 정치에 대한 18세기의 논쟁과 오늘날의 논쟁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인식할 수 있는 학자들이 결집했기 때문이다. 혼트가 과거 시대의 상을 그 스스로가 바라보았던 만큼은 충분히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고 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문하자면, 거기에 성공한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지성사를 하나의 학문분과로 정당화하고, 지성사 연구자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전범을 제시하며, 다른 이들이 지성사 연구의 길에 뛰어들도록 이끈 논문들을 집필한 것, 이것이 혼트가 했던 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그의 작업이 무의미하거나 경박하다고 생각하며 떠나간 이는 없었다. 많은 이는 인문학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중요한 작업은 없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혼트는 역사적 탐구에서는 매우 드물게만 찾아볼 수 있는 정열과 심오함을 가지고 근세와 근대 사이의 정치사상을 만들어낸 질문들을 명료하게 포착한 인물이었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그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다.
리처드 왓모어, 2014년 1월, 세인트앤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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