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반 혼트,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국역본 출간을 앞두고
Intellectual History 2025. 8. 15. 05:25

지난 두어 달 사이 몇 편의 글/책이 나왔고, 곧 9월 초에 이슈트반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루소와 스미스로 읽는 18세기 지성사> (Politics in Commercial Society, 원저 2015)이 출간될 예정이다. 번역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고, 역자 김민철 선생님과 한국어판 해제를 같이 쓴 입장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역시 오월의봄에서 나온 <지성사란 무엇인가?>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한국어판이 원서보다 더 나은 책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나온 지성사·정치사상사 학술서 중 가장 탁월하고 중요한 책이라는 것도 똑같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읽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책은 실존한다. 우리는 그런 책을 골랐고, 또 그렇게 나올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처음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한국어판을 내야겠다고 결정한 때는 2020년 초,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출간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방법론/접근법에 대한 안내서는 후자의 한 권으로 충분하니, 다음은 실제로 좋은 연구서를, 일급의 사유와 만날 수 있는 책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 후보로 혼트의 유고작을 고르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주 좋은, 문헌을 읽는 눈을 바꿔줄 수 있는 책이었고, 강의록이라 독자의 진입장벽이 높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 바쁜 김민철 선생님이 받을 수 있을만큼 짧았다(...그는 이후 4년 간 이때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번역검토서를 완성한 것은 2020년 3월 19일, <지성사란 무엇인가?> 출간으로부터 20일 정도 전이었다. 나는 원저자 소개와 예상독자층/효용을 썼고, 김민철 선생님은 나머지 전부를 맡았다. 나는 샘플번역으로 초반 몇 쪽 정도를 부탁했을 뿐인데 그는 특유의 가공할만한 집중력으로 빠르게 1장 초역을 마쳤다. 출판사 컨택은 내가 맡았다. <지성사란 무엇인가?>는 페이스북에 서론 초역을 올리고 바로 다음 날에 오월의봄에서 연락이 왔고 그래서 이번에도 출판사를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계약 직전에 논의를 취소한 곳도 있었고... 결론적으로는 몇 개월을 돌아 7월에 다시 오월의봄과 이야기를 진행하게 되었다(왓모어의 책 퀄리티에 만족스러워 했던 역자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내 손에 초역 완성본이 들어올 때까지 2년 반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역자는 2023년 초여름 출간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 하는가> 준비를 포함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고, 혼트의 때로 기괴한 문장에 고통스러워 했으며("혼트는 영어 문장을 잘 못 쓴다!" "혼트는 논리적인 사고력이 떨어진다!") 계속 후회했다("앞으로 다시는 번역 안 한다!!!" "그냥 네가 나머지 번역할래?+_+"). 그를 지옥문 안쪽으로 떠밀어 넣은 원죄를 지녔기에 나는 말없이 그 앞에서 물만 홀짝였다. 가끔은 "그래도 몇 년 지나면 까먹고 다시 번역 할 거 같은데?"라는 예측도 덧붙였다.
2023년 초에 그는 "4.1"이라는 버전이 붙은 원고 파일을 보냈다. 박사학위를 받고 한 학기가 지난 나는 여기저기 포닥 지원서를 쓰고,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첫 대학원 수업을 준비하고, 학술지 논문을 쓰고, 가족을 챙기고...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우리는 그때 먼저 초고 앞부분을 읽고 매우 섬세한 수정제안을 해준 조성경 씨에게 감사드린다). 결론적으로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원고를 제대로 읽을 수 있었고, 아주 공들여 세세하게 검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매우 유려한 문장을 쓰는 역자는 이번 책은 다소 뻣뻣할 정도의 직역투를 고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자가 처음에 상정했던 범위보다 더 넓은, 즉 지적인 훈련을 덜 받은 독자들까지도 이 책의 예상독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역자와 편집자에게 '충분한' 검수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양자는 감사하게도 내게 그만한 재량권을 부여해주었다(거기서 2년이 추가로 걸릴 줄 미리 알았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세 학기 동안은 가정사를 포함해 정신이 없었다. (역자는 가끔 "바쁘지?"라고만 묻고 채근하지 않았다. 편집자 임세현 선생님도 워커홀릭답게 이미 충분히 많은 책을 작업 중이셔서인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24년 말 <서구지성사입문> 교재 작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설 때쯤 다시 혼트 원고로 돌아왔다. 나는 망치로 돈가스 고기를 부드럽게 펴듯 아주 많은 수정사항을 제안했다. 보통 문학 전공자가 번역이론을 공부할 때는 주로 독일 사상가들의 영향이나 언문일치 운동 사례 등의 영역으로 뭔가 직역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생각을 지니기 쉽다. 나도 한때 그런 태도를 지닌 적이 있었으나 다행히 실제 번역작업을 한번 경험하면서 유연한 실용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게 됐다. 화살은 표적에 닿아야 한다. 내게는 혼트의 논리와 의도가 이해 가능한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게 중요했고, 따라서 필요하다면 문장을 구성 성분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일도 감수했다(역자는 그대로 받거나, 한번 더 고민한 다음 다른 형태로 고쳤다). 2025년 1-2월, 그리고 4월에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여유 시간을 모두 혼트에 퍼부었다. 마지막 6장까지 검수를 마쳤을 때는 5월 7일이었다. 이제부터는 그동안 엄청난 인내심으로 기다려준 역자와 편집자의 몫이었다.
이제 한국어판 해제를 쓸 차례였다. 내가 혼트의 삶과 학문적 맥락을 쓰고, 역자는 본문의 요약을 맡는 게 당초의 합의였다(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의 파트를 수정보강하고 때로는 통채로 다시 썼다). 다행히 24년 10월 혼트 문서고의 아키비스트 라세 안데르센 선생님이 잠시 한국에 올 일정이 있었고, 역자의 주선으로 강연도 한 차례 진행했다. 이후 그와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혼트의 미출간 원고들을 어느 정도 읽어볼 수 있었고 이는 특히 1978-1984년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 연구프로젝트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무슨 이야기인지는 한국어판 해제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다).
해제 마감은 8월 초, 분량은 200자 원고지 기준 최대 70매. 이것이 편집자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7월 중순까지 나는 해제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명확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혼트의 거의 모든 저술은 밀도가 매우 높아서 다시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고, 공개된 미출간 원고의 분량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제의 지향을 어떻게 놓을지 판단이 어려웠다. 돌파구를 얻은 것은 7월 15일 윤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였다. <인물로 본 근대> 녹화를 위해 방송대에 들러주신 선생님은 점심 시간을 내주셨고, 나와 선생님은 퀜틴 스키너의 신간과 케임브리지학파의 전망에 대해 다소 냉정한 평가를 같이 했다. 혼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으나, 이 대화를 통해 나는 비로소 결정했다. 케임브리지학파 내에서 스키너와 매우 다른 노선을 걸어갔던, 그리고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과 정치사상사 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집단의 리더로서 혼트를 조명하기로 말이다. 간단히 말해 케임브리지학파에서 지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집단은 스키너주의자들이 아니라 18세기와 상업사회를 연구한 학자들이었고, 이들을 이해하려면 혼트의 작업에서 출발해야 했다.
나는 한 가지 변동을 제안했다. 원서 기준 본문 앞에 붙어있던 편집자 소개글을 본문 뒤로 빼고 대신 한국어판 해제를 맨 앞에 놓자는 것이었다. 편집자 소개글은 이미 혼트와 18세기 유럽 지성사 연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이라 애초에 혼트라는 이름 자체를 처음 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다. 이 제안에 동의한 역자가 편집자를 설득했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통로를 만드는 게 해제의 역할이 되었다. 7월 말일에 완성된 해제 초고는 부록으로 붙은 혼트 저작 목록을 포함해 124매에 달했다. 원고를 수정하더라도 양을 줄이면 안 된다고 판단한 역자는 다시 편집자를 설득했다. 혼트의 지도학생이었으며 엄격한 기준으로 알려진 서울대 외교학과 안두환 선생님은 몇 가지 수정사항을 제안하면서 "매우 잘 읽히고 또 재미있"다고, "혼트를 처음 접하는 국내 독자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는 해제라는 합격점을 부여했다. 이후 2주 간 우리 세 사람은 계속 원고를 들여다보며 고쳤다("주로 새벽에 작업을 하시는군요"--편집자가 오전 7시 30분 경에 보낸 메시지 내용이다). 마침내 어제 저녁 부로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문출판시장의 대대적인 쇠락 속에서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1쇄는 오늘날 인문학술서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부수, 즉 2천 부가 나간다.
이제 남은 일은 충분히 많은 독자에게, 충분히 깊이 있게 읽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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