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사와 지성사: 한국의 연구자를 위한 읽을거리 정리
Intellectual History 2025. 4. 17. 11:24주변 선생님들을 통해 한국역사연구회에서 개념사 연구반을 다시(?) 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방향으로 운영될지는 모르지만, 해당 연구반에 참여하는 지인들을 위해 간단히 정리한 문헌 목록을 올려둔다.
한국에서도 시도된 바 있지만, 사전처럼 시공간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커버하는 작업은 여러 중견급 연구자들이 협력하는 게 아니라면 연구자의 역량 차원에서든 펀딩 차원에서든 쉽지 않다. 코젤렉 사전 항목을 봐도 고대, 중세 파트 작성자는 따로 있고, 근대 초부터 한 명이 맡는 경우가 흔하다. 그나마 아직 독일이 유럽에서 손꼽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중세 스칼라십을 보유하고 있을 때라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커리어 초기에 있는 신진 연구자가 개념사에 관심을 둔다면, 거시적인 전망을 조감하는 ‘사전’과 같은 작업물보다는 시기를 좁히고 대상을 구체화하며 + 개념사적 접근법을 여러 방법 중 하나로 활용하는 식의 연구를 살펴보는 게 더 유용할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전에 개념사로 역사학 학위논문을 쓰고 싶다는 문의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학위논문에서 개념사에 집중하는 선택이 현명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아래 항목에서도 짧게 언급하지만, 케임브리지학파 혹은 언어맥락주의자들이 개념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실제 논문을 중심으로 뜯어보는 게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더불어 코젤렉이 현역일 때만 해도 개념의 역사적 변화가 사회사적 변화와 조응한다는 전제가 비교적 큰 의문없이 받아들여졌으나—실제로 코젤렉 본인이 (카를 슈미트의 영향 하에) 18세기 계몽시대가 어떤 변곡점이라는 큰 서사를 깔고 있기도 했다—이미 그때부터 개념사와 사회사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냐는 반문은 나왔다. 예컨대 『지나간 미래』의 논의 중 일부는 그에 대한 코젤렉의 성찰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본인도 딱히 명료한 이론적 해법을 내놓았던 것 같지는 않다. 요즘의 사상사 연구에서는 1970-80년대 스타일로 개념사와 사회사 간의 조응을 전제하는 건 방법론적으로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1. 한국어로 나와 있는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개념사 관련 입문/안내서는 다음과 같다.
1) 개념사 방법의 입문서는 크게 세 권을 꼽을 수 있다.
멜빈 릭터,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 비판적 소개』 (2007)
나인호, 『개념사란 무엇인가: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 (2011)
박근갑 외, 『개념사의 지평과 전망』, 개정증보판 (2015)
그 외에 간략하게나마 코젤렉의 개념사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소개하는 작업으로는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오월의봄, 2020) 2장 일부 및 역자해제,
같은 저자의 『서양 정치사상사』(교유서가, 2024) 6장,
나의 논문 「지성사 연구의 방법들」(2021) 2장 등을 참고할 수 있다.
2) 코젤렉 본인의 작업 및 개념사 사전의 경우,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 (1998): 주로 역사방법론에 관련된 성찰적 시론들을 담고 있으며(따라서 개념사를 둘러싼 방법론 논쟁을 의식하면서 읽는 게 좋다), 번역은 괜찮은 편이라는 평가.
-코젤렉이 주도한 『역사적 근본개념』 (전8권, 총 119항목) 사전의 경우, 지금까지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총 25권(권당 항목 1-2개 수록)이 번역출간되었다. 번역의 질의 경우, 솔직하게 말해 항목별로 퀄리티 편차가 너무 심하며 기본적인 검수를 제대로 못 마치고 낸 듯한 예도 있는 게 사실이다(물론 애초에 원저작 역시 필자의 역량에 따라 항목마다 수준이 제각각이다). 항목 선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출간된 저작만으로는 알 수가 없는데, 무엇보다 코젤렉이 전체 프로젝트에 붙인 서문/서언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3) 한국에서 개념사를 실천하려는 시도의 경우, 주지하다시피 학술지 『개념과 소통』이 있고 단행본으로는 <한국개념사총서> 시리즈가 있으며 그 외에 사회과학 쪽에서 나온 개념사 저작들이 있다(나는 그중 일부를 아주 약간 읽어본 게 전부라 평가할 능력이 없다). 다만 시야를 아예 20세기 중반 이후로 국한할 게 아니라면 좋든 싫든 서양과 동아시아어권을 아우르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개념사를 잘 뽑아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건 예상할 수 있다.
(송경호, 김현 선생님이 쓰신 「근대적 기본개념으로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개념사: 19-20세기 일본에서의 번역어 성립과 사용의 일반화 과정을 중심으로」(한국정치학회보 55.2, 2021) 논문은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2. 영어권의 경우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보다 앞서 개념사에 관심을 가진 역사가들이 있었다. 한국 학계의 개념사는 주로 독일사 전공자들을 통해 들어오다보니 영어권에서 코젤렉의 작업이 어떻게 수용되었나...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영어권에 개념사/코젤렉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멜빈 릭터(Melvin Richter)를 꼽을 수 있고, 그의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 비판적 소개』(The History of Political and Social Concepts: A Critical Introduction, 1995)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사 입문서이다.
릭터의 저작 이후 코젤렉 본인의 지적 이력을 지성사적으로 살펴본 영어권의 작업으로는
Niklas Olsen, History in the Plural: An Introduction to the Work of Reinhart Koselleck (2012) 이 있다. 코젤렉 본인에 대해 관심이 있으나 독일어권 연구문헌을 파헤쳐볼 수 있지는 않은--즉 나와 같은--독자라면 가장 좋은 입문통로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2023년 코젤렉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블로그에 올라온 포스팅도 여러 자료를 소개하고 있어서 참조하기 좋다: https://www.jhiblog.org/2023/02/01/reinhart-koselleck-at-one-hundred/
영어로 집필된 글 중 코젤렉 사후 독일어권에 나온 코젤렉 관련 전기적 연구들에 대한 언급은 Kari Palonen의 2023년 북리뷰를 참조할 수 있다: https://journal-redescriptions.org/articles/10.33134/rds.416 . 팔로넌이 리뷰한 책을 쓴 슈테판-루트비히 호프만(Stefan-Ludwig Hoffmann; UC 버클리 역사학과 교수, https://history.berkeley.edu/stefan-ludwig-hoffmann)의 코젤렉 관련 논문들도 참조할 수 있다.
1) 『역사적 근본개념들』 자체는 코젤렉 본인이 집필한 서문 및 몇몇 항목을 제외하면 거의 영역되진 않았다(아마 코젤렉을 알만한 역사가라면 그냥 독일어로 읽을 것 같다...). 대신 코젤렉 본인의 저작집은 여러 권 영역되어 있다.
-코젤렉의 1959년 박사논문--하빌리타치온이 아니다--『비판과 위기』는 1988년에 특이하게도 익명(!)으로 영역되었다(Critique and Crisis: Enlightenment and the Pathologenesis of Modern Society). 당시 북리뷰를 보면 ‘읽을 수는 있는데 번역이 좋진 않다’라는 평가. 비슷한 시기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영역본이 출간되었는데, 당시 영어권 역사가들의 리뷰에서 두 저작의 관계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이는 걸 보면 영어권 역사학계에서 독일 역사학계의 맥락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코젤렉의 역사방법론적 시론집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 『지나간 미래』 (Futures Past, 2004) 외에
The Practice of Conceptual History: Timing History, Spacing Concepts (2002)
Sediments of Time: On Possible Histories (2018) 등이 번역되어 있다(나도 따로 찾아본 건 아니라서 더 있을 수도 있다).
2) 영어권 (및 인접) 역사학계/지성사학계에서 개념사를 직접 실천하려고 한 예는 상당히 풍부할 것 같다. 일단 코젤렉이 재직했던 독일 빌레펠트대학을 거점으로 작동하는 개념사그룹에서 2005년 창간한 학술지 Contributions to the History of Concepts 에서 지금까지 나온 논문들을 살펴볼 수 있다: https://www.berghahnjournals.com/view/journals/contributions/contributions-overview.xml . 해당 학술지는 현재는 연3회 발간하고 있고 한 호당 게재논문 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2024년 12월 호에서는 J. G. A. Pocock 추도문이 실렸다).
학술논문집으로는 Berghahn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유럽개념사(European Conceptual History) 총서가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총 여덟 권이 나와 있다: https://www.berghahnbooks.com/series/european-conceptual-history
3) 역시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케임브리지 지성사 학파와 코젤렉의 관계도 흥미로운 주제다. 몇 가지 예만 짚어본다.
a) 1980년대 말 케임브리지학파의 구성원들이 참여한 두 편의 학술논문집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을 의식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념의 변화를 연구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Terence Ball, James Farr, and Russell L. Hanson, eds., Political Innovation and Conceptual Change (1989); 특히 서문 및 스키너의 1장을 참조. 덧붙이면 여기 5장에 실린 "국가state" 개념의 변천에 대한 스키너의 작업은 이후 2010년대까지도 계속 확장된다.
Terence Ball & J. G. A. Pocock, eds., Conceptual Change and the Constitution (1988); 위의 책과 한 쌍을 이루는 논문집이다.
b) 케임브리지학파의 구성원들과 코젤렉이 직접 교류한 흔적도 있다:
Willem Melching & Wyger Velema, eds., Main Trends in Cultural History: Ten Essays (1994): 1991년 여름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던 학술대회 논문을 다듬어 출간한 논문집으로, 첫 다섯 편의 논문 저자 라인업--코젤렉, 퀜틴 스키너, 이슈트반 혼트, 키스 마이클 베이커, 멜빈 릭터--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개념사 연구와 케임브리지학파의 교류가 진행된 광경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구성의 책이다.
Hartmut Lehmann & Melvin Richter, eds., The Meaning of Historical Terms and Concepts: New Studies on Begriffsgeschichte, Occasional Paper, no. 15 [German Historical Institute] (1996): 1992년 『역사적 근본개념들』 완간을 기념해 열린 심포지엄 논문집으로, 멜빈 릭터가 첫 발표를 하고, 도널드 켈리 및 J. G. A. 포콕 등이 논평을, 마지막으로 코젤렉이 논평에 응답하는 구성의 짧은 책이다.
c) 스키너가 코젤렉식 개념사 작업에 다소 회의적이었다면, 이슈트반 혼트의 경우 '정치사상가'로서의 코젤렉에 상당히 깊은 흥미를 느꼈던 듯하다.
2011년 혼트와 던컨 켈리(Duncan Kelly)가 "정치사상사의 문화사"(A Cultural History of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이란 제목으로 함께 열었던 케임브리지 CRASSH 세미나의 세 번째 회차는 슈미트와 코젤렉을 함께 다루고 있으며, (St Andrews 대학 지성사 연구소 온라인 문서고에서 모든 강의노트를 열람할 수 있다)
혼트 문서고의 아키비스트인 Lasse S. Andersen이 쓴 논문 "Hont and Koselleck on the Crisis of Authority" (2023)는 혼트가 코젤렉의 『비판과 위기』를 흥미롭게 읽었고 자신의 작업에서 그에 어떻게 응답하고자 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d) 지성사와 개념사가 융합한 사례 중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다음 두 권을 꼽을 수 있다: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2023) :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나온 19세기 자유주의 사상사 연구서 중 가장 잘 정리된--비판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작업으로, 지성사가가 개념사적 접근법을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을 위해 잘 써먹은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코젤렉 개념사 항목 중 역시 국역된 『자유주의』 항목을 곁에 두고 방법론/접근법을 비교하며 읽으면 상당히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 번역도 좋다.
데이비드 아미티지, 『내전: 관념 속 역사』 (2024)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일찍 번역된 아미티지의 공저작 『역사학 선언』에서 저자는 지성사적 접근법과 장기지속적 시간성의 결합을 주창한 바 있는데, 『내전』은 그걸 실제로 시도한 작업이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케임브리지학파의 향이 살짝 가미된 코젤렉식 개념사 작업 같은 느낌이고, 냉정히 말해 읽어볼만 하지만 미묘한 책...으로 앞서 언급한 로젠블랫 책에 비하면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역사학 선언』을 재밌게 읽은 한국 독자들이 있는만큼 개념사와 같이 비교할만한 작업으로 넣어둔다. 한국어 번역도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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