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과 현능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

Reading 2018.02.06 03:09

아래는 『학산문학』 98호(2017년 겨울, 링크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5243081 )에 게재된 나의 서평을 옮긴 것이다. 계간 『학산문학』에 서평을 벌써 세 차례나 실으면서--유감스럽게도 2018년 봄호는 논자시 일정상 원고를 드리기 어렵다고 전했고, 학산문학 측에 의향이 있다면 올해 여름호부터 다시 서평을 기고할 수 있을 것이다--다음 두 가지 사항을 생각한다.


첫째, 최대 80매라는 분량을 제외하면 매우 자유로운 지면을 받게 되면서 나는 인상평에 기초해 단순히 그때그때의 신간을 소개하는 수준이 아닌 그 자체로도 읽을 가치가 있는,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다시 찾아볼만한 서평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일급 필자들이 쓰는 (비)학술적 서평을 읽다가 한국인 필자가 한국어로 쓴 서평들을 돌아보게 되면, 일부 예외적인 분들도 있으나 우리가 대체로 이 장르를 너무나 가벼이 대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쓰는 사람도 대강이면 읽는 사람도 기대를 낮출 수밖에 없다. 그런 되먹임이 몇 차례 순환되다보면 어느새 서평은 그저 추천 혹은 비난의 의사표시 정도에 머물거나 잘 해봐야 내용요약에 그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적어도 공들여 쓰는 글의 경우 그만한 질적 가치를 담아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공적으로는 서평이라는 글쓰기 장르가 그 자체로 풍성한 지적 대화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더 많은 필자·독자들에게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랐다. 전자의 바람은 비록 계획했던 바보다 더 큰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긴 했으나 대체로 이루어진 것 같다. 후자의 성패는 오로지 독자들만이 알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둘째, 지난 1년 간의 글들을 되돌아보면서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로, 세 편의 서평은 모두 우리 사회의 정치적 논쟁점 한 가운데에 있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첫 글은 강력한 도전과 마주한 자유주의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으며(http://begray.tistory.com/426), 두 번째 글은 "시민참여민주주의"와 도덕정치적 수사의 접합이 대중정치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활용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http://begray.tistory.com/439). 그리고 세 번째 글은 포퓰리즘과 현능주의라는 두 극단에서 공격받는 대의/대표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룬다. 비록 서평의뢰가 "비문학" 텍스트를 대상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세 편이 모두 이러한 주제에 집중된 결과는 나 자신도 특별히 예상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는 '서구적인 것'으로 명명되어 왔지만 현대 한국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 근대사회의 주요한 정치 언어들이 도전과 위기에 직면함에 따라 그러한 언어·사상의 논리와 역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게 된 상황이 우연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연구자들이 암묵적으로 말하는 "역사"·"정치"가 매우 특수한 맥락에서만 통용되는, 잘 해봐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기 힘든 용법에 국한된 게 아닐까 하는 자기의심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서평들을 포함해 지난 3-4년간 내 공부가 역사와 정치라는 영역을 보다 직접적으로 파고들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번 서평은 나 스스로가 원한만큼 충실하게 쓰여지지 못했다. 모종의 실수로 나는 마감기한을 매우 늦게 알게 되었고, 다른 일정을 감안할 때 도서 선정에서 원고 송부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최초에 고려하던 다른 선택지들을 포기하는 대신 이전에 염두에 두었던 보다 다양한 책들 및 그것들이 얽힌 보다 큰 맥락을 가볍게 조명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이번 서평은 지난 두 편과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의 작업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갖고 읽는 독자들이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블로그 게재를 허락해 준 학산문학 측의 관대함에 감사드린다.


출판된 버전을 읽으실 분은 다음 링크( https://goo.gl/2oKFsp )를 참조하실 수 있으며, 이 텍스트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우창. 「포퓰리즘과 현능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 『학산문학』 98(2017 겨울): 342-59.





포퓰리즘과 현능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


대니얼 A. 벨, 『차이나 모델: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왜 유능한가』, 김기협 역, 서해문집, 2017년 6월 30일. 원저는 Daniel A. Bell, The China Model: Political Meritocracy and the Limits of Democracy, 2015.

얀 베르너 뮐러,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그가 말하는 ‘국민’ 안에 내가 들어갈까』, 노시내 역, 마티, 2017년 5월 10일. 원저는 Jan-Werner Mueller, What is Populism?, 2016.

존 주디스, 『포퓰리즘의 세계화』, 오공훈 역, 메디치미디어, 2017년 7월 20일. 원저는 John B. Judis, The Populist Explosion, 2016.

폴 태가트, 『포퓰리즘: 기원과 사례,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의 관계』, 백영민 역, 한울, 2017년 9월 20일. 원저는 Paul Taggart, Populism, 2000.


1. 


2017년 중반기에는 포퓰리즘(populism) 관련 번역서들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폴 태가트의 『포퓰리즘』, 존 주디스의 『포퓰리즘의 세계화』,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가 그것이다. 해당 단어가 한국의 공론장에서 특히 보수적 논자들에 의해 활용된 시일이 짧지 않음에 비해 정작 한국 출판시장에서 포퓰리즘을 연구대상으로서 다룬 저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1) 이번에 포퓰리즘을 정면으로 다룬 책들이 연달아 소개된 것이, 비록 그 모두가 본격적인 학술서라기보다는 그와 대중서 사이에 있는 짧고 읽기 쉬운 저술이라는 사실이 다소 아쉬울 수 있겠으나,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일임은 분명하다. 본 서평에서는 먼저 세 권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 뒤 오늘날의 포퓰리즘 현상이 가리키는 좀 더 넓은 맥락, 즉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고자 한다.

본래 2000년에 출간된 폴 태가트의 책은 일차적으로 포퓰리즘 현상을 개념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사회과학적 탐색의 성격을 띤다. 저자 자신이 1장에서 말하듯 “포퓰리즘의 본질은 모호함이며, 개념적 불확실성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때(16), 현상으로부터 이른바 사회과학적 이념형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곤란함을 겪을 수밖에 없다.2) 난항을 타개하기 위해 태가트는 다음의 여섯 가지 명제를 통해 포퓰리즘의 이념형을 구성하고자 한다: “포퓰리스트는 대의민주주의 정치에 적대적이다”, “포퓰리스트는 공동체 내부에서 이상화된 관념으로 받아들여지는 마음속 이상향heartland을 불러들인다”, “포퓰리즘은 핵심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다”, “포퓰리즘은 극단적 위기 상황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포퓰리즘은 자기제약적self-limiting 속성이라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포퓰리즘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다”(18-19). 물론 여섯 명제 모두가 충분히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으며, 이중에서 유의미한 요소들은 대의민주주의와의 관계, 이상주의적·도덕주의적 성격, 제도적 실천에서 발생하는 딜레마 정도로 보인다.

『포퓰리즘』은 이처럼 1장에서 이념형을 규정하고, 2장에서 기존의 연구사를 검토한 뒤, 3장부터 7장까지의 1부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1990년대 로스 페로까지의 미국, 19세기 후반 나로드니키 운동부터 볼셰비키 혁명까지의 러시아, 페론주의가 대두했던 20세기 중후반의 라틴 아메리카, 1930년대 캐나다의 사회신용당, 그리고 20세기 후반 서유럽과 영미권의 신포퓰리즘을 차례대로 다룬다. 2부는 1부의 사례들로부터 다시금 포퓰리즘의 일반화된 특성을 도출해낸다. 8장은 포퓰리스트들이 “절대 구분될 수 없는 단일하고 통합된 연대감을 가진 집단”으로 규정된 ‘국민 다수’를 자신들이 대표한다는 정치적 수사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159). 이처럼 다원성이나 다양성이 소거된 ‘국민’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기반으로” 구축된 “마음속 이상향”과 결부되어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간주된 집단을 추방하는 배타적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9장은 포퓰리즘 정당의 행위로부터 포퓰리스트들이 처음에는 기존의 정당들을 비판하며 나타나지만 결국 대의정치체제 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의 정당정치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갖는다고 지적하며, 이를 (겉으로나마) 돌파하기 위해 “카리스마 넘치고 권위적인” “올바른 지도자”에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한다(172). 가장 중요한 이론적 함의를 제시하는 대목은 포퓰리즘과 자유주의-대의정치의 관계에 주목하는 10장으로, 여기서 태가트는 근대사회의 복잡성을 처리하기 위한 대의 민주주의 통치모델이 필연적으로 피치자 대중과 통치행위의 간극을 초래함을 지적한다.3) 이러한 상황 전체를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하고 “소박한 국민의 지혜를 구현해야 하므로 단순하고 직접적인 형태”의 정치를 그 대안으로 내세우는(190) 포퓰리즘은 결국 복잡성에 기초한 “세속적 정치를 거부하고 도덕적 근본주의와 준종교적인 정치로 쉽게 변”할 수 있다(192). 11장 결론에서 저자는 포퓰리즘이 자유주의-대의정치의 작동상태를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라고 정리하면서 오늘날 자유주의와 국민국가가 맞이한 변화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이 계속해서 등장하리라는 전망을 내린다.

2016년 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직전 집필된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보다 저널리즘적인 저술에 가깝다. 저자 존 주디스는 논의를 공간적으로는 미국과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에, 시간적으로는 1980-90년대부터 현재까지에 중점을 두고 전개한다. 책은 서문과 결론을 제외하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장부터 3장까지는 19세기 후반부터 2016년, 다시 말해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미국 포퓰리즘의 역사를 다룬다. 비록 1장이 1970년대 초까지 미국 포퓰리즘 운동의 계보를 다루긴 하지만 주디스의 서사에서 좀 더 중요한 계기는 2장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신자유주의”에 있다. 1970-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의 대두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대 정당을 모두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로 수렴시켰고, 결과적으로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200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 정책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발로 2010년대에 우파들로부터는 티파티 운동, 좌파들로부터는 월가 “점령”(Occupy) 운동과 같은 포퓰리즘 운동이 나타났으며 이것이 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4장부터 6장까지는 1970-80년대부터 현재까지 유럽 포퓰리즘의 여러 조류를 소개한다. 핵심은 4장으로, 특히 신자유주의·이민증가·유럽연합에 대한 반발이 유럽 좌우파 포퓰리즘을 확장시킨 주요 의제로 지목된다. 즉 20세기 중반의 경제적 대호황이 끝나고 침체기가 이어지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해) 신자유주의 수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감과, 이전에 저렴한 노동력으로 각광받았던 이민자 및 1980년대에 들어 급증한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의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가시화되면서 민족주의와 복지국가지향을 결합, 유럽연합의 통치를 거부하는 포퓰리즘 정당들이 약진한다. 5장은 남부 그리스·스페인의 좌파 포퓰리즘의 대두와 실패를, 6장은 북·서유럽의 영국·프랑스·덴마크·오스트리아의 우파 포퓰리즘의 성장을 다루는데, 저자는 이러한 포퓰리즘들이 전통적인 사회당을 대체하거나 그 의제를 흡수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에 주목한다. 요컨대 『포퓰리즘의 세계화』의 뼈대에는 포퓰리즘이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한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및 그것이 초래한 여러 부작용으로 인한 반발이라는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치이론·정치사상 연구자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는 수사적·사상적 언어에 주목하면서 포퓰리즘과 대의민주주의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앞서 다룬 태가트의 『포퓰리즘』과 일정 부분 겹쳐 보인다. 다만 태가트의 2000년 저술이 포퓰리즘 사례들로부터 포퓰리즘의 이념형을 도출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면, 뮐러의 2016년 책은 포퓰리즘에 대한 사례연구에 직접 초점을 맞추는 대신 몇 가지 질문들을―포퓰리즘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포퓰리스트들이 집권하면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포퓰리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통해 16년 전보다도 더욱 확산되어 넓게 사용되는 “포퓰리스트”라는 말을 좀 더 구체화하고자 한다.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정치적 맥락을 자유롭게 오가는 이 텍스트에서 뮐러가 특히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은 “정치에 관한 특정한 도덕적 상상”으로서의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정치 세계를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이―나는 이것을 궁극적으로 허구라고 주장한다―부패하거나 도덕성을 결여한 엘리트에 대항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엘리트 비판은 포퓰리스트가 되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 포퓰리스트라면 엘리트에 반대하는 동시에 항상 다원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들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자신들이 야당일 때는 다른 정치적 경쟁자들을 부도덕하고 부패한 엘리트의 일부로 몰고, 일단 집권하고 나면 정당한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포퓰리스트의 핵심 주장 속에는 포퓰리즘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자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국민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3, 강조는 원문)

요점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핵심교리가 국민들의 다원성·비단일성이라고 할 때 포퓰리즘은 바로 그것을 부인한다는 데 있다: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의 그림자다”(34). 국민들의 다원성은 국민 전원이 공유하는 공동선(common good)을 실체적으로 도출하는 게 매우 지난한 과업임을 상기시킨다.4)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국민 전체의 공동선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대변하고 실현시킬 유일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39). “대표성이란 한시적이고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반대 의견의 존재는 정당하다는 점, 한 사회가 누구 하나 빠짐없이 통째로 대표될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하나의 정당이나 일부 정치가가 민주 절차와 형식을 무시한 채 “진정한 국민”을 영구히 대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면(57), 포퓰리스트들은 바로 그 핵심을 거부한다. 따라서 2장에서 소개되는 헝가리·폴란드의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보여주듯 포퓰리스트의 집권이 헌법 개정 등을 통해 국가를 독점적으로 점령하고 반대파를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그토록 반대하던 기득권층의 행태인 배제와 국가 찬탈”을 단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70). 즉 태가트의 주장과 달리 뮐러는 동유럽의 사례들이 보여주듯 포퓰리스트의 집권이 곧바로 자멸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제도를 장악하고 통치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민주주의적 통치를 그 내부에서 위협하는 포퓰리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뮐러가 여기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 3장은 실제로는 오늘날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포퓰리즘이 부흥하게 된 원인들에 대한 분석처럼 보인다. 그는 먼저 국민 전체가 스스로를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약속이 더 이상 지켜질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당과 정당제도가 모두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오늘날의 상황이 자신들이야말로 그러한 꿈을 실현해줄 수 있는 세력이라 주장하는 포퓰리스트들에게 취약하다고 지적한다(105). 이어 뮐러는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포퓰리즘을 비판해온 방식이 충분히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포퓰리즘이 겨냥해온 소외된 집단을 기존 체제 속으로 다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포퓰리즘이 대두하게 된 조건이 나열되는데, 미국의 경우 전세계적 교역망에 참여하면서 국가적 정책과 국내 여러 집단의 경제적 이해가 일치하지 않게 된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으며, 유럽의 경우 기술관료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유럽연합의 통치방식이 “하나의 정책적 해결책, 하나의 진정한 국민의 의지를 고집하면서 이견의 여지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포퓰리즘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이것이 포퓰리즘의 득세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라고 지목한다(127). 이처럼 3장은 해결책을 선명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기존의 정치세력들이 포퓰리즘을 닮아가지 않으면서도 포퓰리스트들의 도전을 막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쪽에 가깝다.



2.


지금까지 언급한 포퓰리즘에 대한 저술들이 모두 포퓰리즘의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시작한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포퓰리즘, 좀 더 정확히는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며, 본 서평에서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란 어렵다. 대신 여기서는 포퓰리즘 현상 혹은 그에 대한 논의들이 좀 더 넓은 정치적·담론적 흐름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해 불과 20-30여 년 사이에 폭증하여 오늘날엔 거의 클리셰에 가까울 만큼 흔해진 민주주의 위기론이라는 맥락에서 말이다. 물론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모두 정리하는 것은 본 서평이 감당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에, 나는 그중 눈에 띄는 주제 두 가지를 간략히 짚으면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저술들을 일부 소개하는 걸로 만족하겠다.

첫 번째로 눈여겨볼 만한 흐름은 20세기 민주주의 확산의 선두에 섰던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 혹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저술들이다. 로버트 달의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원저 2001)는 18세기에 만들어진 미국 헌법·헌정체제가 오늘날의 조건에서 충분한 정치적 평등·민주적 정치를 보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불평등함을 지탱하고 있다고 비판한다.5) 그는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 개진 및 현재 헌정체제 내에서의 가능한 노력을 주장하면서도 당분간 헌법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정되기는 어려울 거라는 비관적 인식을 보여준다(246-49). 벤저민 긴스버그·매튜 A. 크렌슨의 통찰력 있는 저작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20세기 후반부터 미국 정치체제의 운영이 시민참여 증진을 명분으로 점차 중산층 이상의 엘리트들에 의해 잠식되고 있으며 대중동원을 통한 정당정치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이 쇠퇴하여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의 토대가 흔들리게 되었다고 우려한다.6) 2008년 출간된 셸던 월린의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는 대통령이 지휘하는 행정부의 막강한 권력이 의회의 견제를 거의 받지 않고 운영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미디어·정치·기업 엘리트들의 결탁을 통해 시민들이 통치로부터 소외되어 소비자·구경꾼으로 전락한 상황을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ism)라 명명, 특히 9·11 테러 및 이라크 전쟁과 함께 부시 정권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여 미국 민주주의를 심각한 위험에 빠트렸다고 비판한다.7) 이러한 저작들은 현대 미국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치적 불평등성, 특히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을 독점하는 엘리트들과 평범한 시민들 사이의 간극이 심각할 정도로 커졌음을 비판하면서 양자의 간극을 좁히고 시민들의 참여를 다시금 되돌릴 필요가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8)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흐름은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근접한 이들로, 이들은 서유럽과 북미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쇠락하는 주요 원인으로 특히 신자유주의의 악영향을 지목한다. 샹탈 무페의 고전적인 저작 『민주주의의 역설』은 사회민주주의자·좌파 정당들을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중도적인 합의”론자들을 비판하면서 평등을 추구하고 체제에 저항하는 노력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내에 서로 ‘합리적으로’ 수렴될 수 없는 다양한 입장들의 적대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21).9)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민주주의』는 좀 더 비관적인 인식으로 나아간다.10)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전통적인 좌파 및 정부의 힘이 축소되면서 민주주의가 점차 특권층 및 기업자본의 지배에 가까운 것으로 변모했으며 민주주의 정치 또한 무의미한 스펙터클의 향연으로 타락, 시민들에게는 소극적인 역할만 주어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오로지 시민들에게 적극적인 정치참여의 문을 다시금 개방하는 것만이 기업지배와 포퓰리즘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최근 대의제를 비판하는 인터뷰가 한국에도 소개되었던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또한 기본적인 구도는 유사하다.11) 랑시에르는 프랑스의 민주주의 비판론자들을 반비판하면서 대의제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과두제의 한 형태라고 지적하면서(119) 오늘날의 정치가 “국가 차원의 과두제와 경제 차원의 과두제의 결탁에 의해 공공영역이 장악되고 있는 것”이며(156)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그 역사 이래 전례없이 지배라고 하는 단일법칙 속에 빠져 있는 과두권력과 금권이 야기하는 혼란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하는 동력”이라고 주장한다(195).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초래한 자본의 지배·민주주의의 질식에 맞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숙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서구 급진 좌파철학자들의 논평을 담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에서도 반복된다.12)

두 가지 조류에 속한 저작들은 서로 다른 지적 전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들은 오늘날 북미·유럽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고, 이 과정의 핵심에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든 아니든) 정치가 시민대중과 괴리되어 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양상이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의 쇠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시민대중들의 정치참여를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우에 따라 대의제를 수정·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를 더하거나 아예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입장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앞서 1절에서 살펴보았던 저술들이 포퓰리즘의 대두를 바로 이러한 서사 내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정치적 의사결정이 소수에 의해 독점될 때 인민 다수의 정치적 입장이 대표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며, 포퓰리스트들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해 부패한 엘리트들이 아닌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한 다수’를 대표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권력의 점유를 꾀한다는 것이다. 물론 포퓰리즘 비판자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들의 집권은 다수의 정치적 의사를 현실화하기보다는―애초에 그럴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조차 불분명한데―자신들의 권력 독점으로 나아가기 쉽다. 이와 같은 국면이 전개될 때, 혹은 그러한 위험이 계속해서 제기될 때 인민의 뜻을 실현하겠다는 세력 및 그 지지자들이 민주적 정치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역설적인 구도가 발생한다. 현능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위협을 겨냥하여 포퓰리스트들의 정 반대편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을 제기한다.



3.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으로 시작하여 서구권의 주요한 중국 정치철학 연구자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대니얼 A. 벨의 『차이나 모델』은 그 논지가 비교적 명백하다.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적 의사결정은 정치적 판단력을 신뢰할 수 없는 대중들의 투표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언제든 심각하게 잘못된 결정에 도달할 위험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유능하고 합리적이며 경쟁력 있고 도덕적인 통치 엘리트들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국가의 통치를 전적으로 맡기는―다시 말해 인민의 의지에 구애받지 않는―“정치적 현능주의”(political meritocracy)가 더 낫다는 것이다. 벨에 따르면 현능주의 체제의 통치 엘리트들은 일차적으로 시험과 ‘생물학적 고려’를 포함한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친 후 치열한 내부경쟁 및 선임자들의 평가를 통해 능력을 검증하며 유학 등의 도덕교육을 통해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선거에서 당선된 정치가들 혹은 인민대중의 압력 혹은 갈등에 종속되기 쉬운 관료들보다도 더 뛰어난 통치를 할 가능성이 높다. 간단히 말해 벨이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현재 중국의 체제와 유사한) 관료독재체제다.13) 관료들의 능력과 도덕성만 보장된다면 그들에게 내부 견제기구를 제외한 다른 누구의 견제를 받지 않는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어리석고 타락하기 쉬운 인민들의 의사에 정치체의 명운을 맡기는 선택보다 훨씬 타당하지 않겠는가?

『차이나 모델』의 논지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전제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대니얼 A. 벨의 논리는 인간을 두 가지 계층으로 나누어 분류한다. 정치에 참가할 수 있을만한 지성과 도덕성을 잠재적으로라도 갖춘 소수의 인간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인간이다.14) 전자는 시험·경쟁·도덕교육을 통해 능력과 도덕성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후자에겐 처음부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적 참여의 자격을 갖출 가능성 자체가 없다. 즉 『차이나 모델』은 선택받은 소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과―단지 경쟁과 유학교육으로 관료들의 청렴함이 보장될 수 있었다면 관료제에 입각했던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는 상당히 바뀌었을 것이다―선택받지 못한 다수에 대한 무관심·비관주의가 공존하며, 따라서 그가 1장에서 선거·유권자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마치 자신이 현실주의자인 양 취하는 제스처는 실제로는 보수주의적 순진함의 발로에 불과하다. 둘째, 『차이나 모델』의 관료독재체제론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할 유일한 합리성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는 다시 말해 정치에서 완벽한 일치가 불가능한 다원적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부인하는 논리다. 저자의 논리적 토대는 단순한 민주주의 비판론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적·정치적 이해관계의 다원성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요컨대 하나의 목표, 하나의 합리성이 있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선택받은 집단이 있으니 그들에게 통치권을 일임하고 선택받지 못한, 무능한 나머지들은 영원히 피통치자로 살아가는 게 옳다는 논리가 되겠다.

저자의 현능주의에 깊게 공감하는 한국어판 역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대니얼 A. 벨이나 그와 유사한 입장을 공유하는 제이슨 브레넌의 ‘정치철학’은 이미 30여 년 전 로버트 달의 “후견주의”(guardianship, “수호자주의”로도 번역) 비판에서 철저하게 논파된 입장을 재탕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실천적 함의를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할 이유는 아직까지는 없어 보인다.15) 내 생각에 좀 더 중요한 문제는 현능주의와 같은 논의의 가치 자체라기보다는 이러한 논리가 다시금 그럴싸한 입장인양 회자되는 상황 자체에 있다. 즉 얼마 전까지 가장 성공적인 정치체제인 것처럼 칭송받아온 자유민주주의와 대의제의 결합은 물론, 인민주권·인민의 의지와 같은 표현을 다시금 정치의 전면에 소환한 포퓰리즘도, 양자의 대안으로 ‘더욱 민주적인’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내세운 갖가지 개선책들조차도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풀어내기 위한 확실한 해결책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많은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는, 보다 정확히는 정답이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이런 시기일수록 다양한 오답들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 본 서평은 그런 오류들의 목록을 훑어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글을 마치기 전에 조금 더 파고 들어가고 싶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에의 굴복이든 아니면 전세계적 무역교류의 일부가 되는 것이든, 오늘날 북미와 유럽, 혹은 동아시아의 여러 사회가 놀라운 번영에서 장기간의 불안정·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상황이 단지 ‘인민의 의지’로―그것이 무엇을 뜻하든―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숱한 거버넌스 연구를 통해 이미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효율적인 통치가 불가능해졌음이 명백해진 관료적 국가기구를 다시금 확장하는 게 정말로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인가?16) 일상의 시민참여 증진이 가질 수 있는 명백한 장점과 별개로, 과연 세계무역 속의 국가경제운영이라는 큰 틀 내에서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이 좁혀져 있는 정책결정권자들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올바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시민참여에 보장되어 있는가? 각각의 입장이 제기해온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과 별개로, 나는 우리가 단순히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를 채택할 것인가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도움이 되지 않는 바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혹은 ‘반민주주의’와 같은 단어에 그것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하중을 부과하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이는 우리가 현재의 정치제도가 가진 문제점들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별도로 현재의 정치제도를 근본부터 뒤엎겠다는 입장들에 과도한 기대를 부여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인민과 진심으로 소통한다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외침이든, 어리석은 인민들 위에서 모두를 보살피는 현명한 통치자의 손짓이든 말이다. 포퓰리즘과 현능주의가 공유하는 반(反) 근대적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두 입장 모두 어떤 인격적 덕목에 정치적 난국을 해결할 실마리가 있다는 과거의 믿음을 다시금 끌어온다는 데 있다. “근대의 정치”는 바로 그러한 믿음이 더 이상 실체를 갖지 못한다는 인식에 의거한다.17) 물론 이른바 근대 민주주의가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고 있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기된 오답들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어쩌면 당분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오답으로 뛰어들지 않는 지적인 인내심일지도 모른다.


1) 이전에 출간된 포퓰리즘 연구서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병훈의 『포퓰리즘: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선택』(책세상, 2008)이 있다. 포퓰리즘 관련 연구들을 소개하고 있는 최근의 한국어 논문으로는 백영민, 「커뮤니케이션 관점으로 본 포퓰리즘의 등장과 대의 민주주의 위기」(『커뮤니케이션 이론』 12.4: 2016, 5-57) 참고.

2) 이러한 불확실성은 부분적으로 포퓰리즘이 토대를 두는 ‘인민’(people)의 정치적 용법이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마거릿 캐노번, 『인민』(김만권 역, 그린비, 2015) 참조.

3) 태가트에게 “자유주의 정치는 대의정치적 실천·절차·구조를 통해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대의정치는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196).

4) 공동선 개념의 도출에 이르는 난점을 비판적으로 파고드는 논의로는 로버트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조기제 역, 문학과지성사, 1999) 20장, 21장 및 이언 샤피로, 『정치의 도덕적 기초』(노승영 역, 문학동네, 2017) 222-45쪽을 보라. 뮐러와 같이 포퓰리즘과 다원성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는 시선 자체를 역사적·비판적으로 보는 연구로는 Anton Jäger, "The Semantic Drift: Images of Populism in Post-war American Historiography and their Relevance for (European) Political Science"(Constellations 24(2017): 310-23)을 보라(이 연구를 알려주신 최영찬 님께 감사드린다).

5) 로버트 달,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박상훈·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4. 그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시민들의 참여·자발적 심의에 기초한 보다 민주적인 정치모델을 구상하려는 시도로는 케빈 올리어리, 『민주주의 구하기: 미국에서 날아온 하나의 혁신적 개혁 모델』(이지문 역, 글항아리, 2014. 원저는 2006년 출간)을 참고.

6) 벤저민 긴스버그·매튜 A. 크렌슨,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서복경 역, 후마니타스, 2013[원저는 2004년 출간]

7) 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우석영 역, 후마니타스, 2013.

8) 한국의 헌법재판소·대법원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judicial review)의 역할에 대한 논쟁 또한 시민 혹은 인민들의 민주적 권리 침해 문제를 주 쟁점으로 두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연방대법원의 행보에 대한 좋은 대중적 소개로는 제프리 투빈의 『더 나인』(강건우 역, 한국물가정보, 2010, 원저는 2008년 출간)을, 사법심사가 입법적 역할까지 수행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한 예로는 Jeremy Waldron, "The Core of the Case against Judicial Review", Political Political Theory, Cambridge(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195-245 을 보라.

9) 샹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이행 역, 인간사랑, 2006[원저는 2000년 출간].

10)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이한 역, 미지북스, 2008[원저는 2005년 출간].

11)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허경 역, 인간사랑, 2011[원저는 2005년 출간]. 인터뷰 기사는 에릭 에쉬만,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대의제를 목도하다”」, 오정은 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7년 3월 31일,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125 참고.

12) 알랭 바디우·슬라보예 지젝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김상운·양창령·홍철기 역, 난장, 2010[원저는 2009년 출간].

13) 벨과 같은 중화주의적 주장이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나의 논문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 : 민족문학론에서 반민주주의론까지, 1989-2017」(『코기토』 83[2017]: 58-116)를 참고하라.

14) 이는 『차이나 모델』이 근거로 삼는 저자이자 최근 한국 공론장에서도 조금씩 언급되고 있는 제이슨 브레넌(Jason Brennan)의 최근 저작 『민주주의에 대항하다』(Against Democrac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에서도 마찬가지로 제시되는 구도다. 그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유권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Hobbits), 정치적 진영논리에 휘둘려 합리적인 판단이 안 되는 열광주의자(Hooligans), 현명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되는 소수의 지성인들(Vulcans)의 셋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무관심한 사람은 정치에 참여를 시키고 관심을 갖게 해봐야 열광주의자가 되는 게 십상이니 애초에 무관심층과 열광주의자들을 가능한 배제할 수 있도록 시험을 쳐서 (저자 본인처럼) 합리적인 이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게 맞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지적인 사람들의 지배’(epistocracy)라고 명명한다. 브레넌의 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로는 Roslyn Fuller, "“Against Democracy” and “Against Elections”: Where Do We Go From Here?"(Los Angeles Review of Books Oct. 31, 2016,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democracy-elections-go/)를 참고.

15)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4장 및 5장 및 이언 샤피로의 책 7장 참고.

16) 거버넌스 연구 및 통치모델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선 Mark Bevir, A Theory of Governance(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참고. 마크 비버의 논의를 좀 더 쉽게 요약한 것으로는  Governanc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Oxford UP, 2012)를 보라.

17) ‘근대의 민주주의’에 관해선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로버트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5부; 이언 샤피로의 책, 특히 7장과 8장; 존 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강철웅·문지영 역, 후마니타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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