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근황: <폭주하는 남성성> 북토크, <역사비평> 서평 (2025년 9월 4일)
Reading 2025. 9. 4. 10:171.
오늘 9월 4일 저녁 알라딘빌딩 강연장에서 『폭주하는 남성성』3차(?) 북토크에 참여한다. 알라딘 북토크 자체를 하나의 구매가능한 아이템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도, 별도의 강연용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93034). 대략의 키워드를 받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지는 현장의 분위기나 질문, 다른 참여자들과의 합을 보며 판단하게 될 것 같다. 오늘 이것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분배가 관건인데, 일단은 지금까지 써 왔던 글을 다시 훑어보면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하고 들어가는 정도가 최선이지 않을까 한다. 50명 자리가 너무 빨리 매진돼서 아쉽다는 지인들의 메시지가 몇 건 온 걸 보면 청중들의 관심도도 상당할 가능성이 높은데, 시원한 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도록 하고 싶다.
'이대남' 문제는 2017년 경부터 점차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해 작년 말부터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는 주제가 되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아직 전문연구자 집단이 제대로 파고들지는 않은 영역이고, 그래서 나처럼 (이 주제에 관해) 비평가와 연구자 사이의 포지션에 있는 사람이 여전히 '전문가'로 호명되는 터일 것이다. 지금 관련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필드에 나오게 되면 훨씬 정교하고 풍부한 논의들이 가능해질텐데, 그때까지 그런 분석들이 충분히 소화되고 또 연결될 수 있도록 논쟁영역을 최대한 넓게 펼쳐두는 게 현재의 스피커들이 해야 할 역할 중 하나라는 마음도 있다. (예컨대 '이것도_사실_신자유주의_때문이지롱!' 같은 이야기가 전부라면 지적으로 얼마나 괴롭고 지루한 일인가?)
2.
과거 포스팅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지만, 『폭주하는 남성성』 출간 과정은 단순하게 요약할 수 있다. 올해 2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내가 2021년에 『시민과 세계』에 썼던 시론 「안티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를 업데이트된 버전으로 싣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고 → 처음에는 '일 너무 많은데 원고 고치는 시늉만 하고 고료 날먹하자!'란 마음으로 받았고 → 막상 업데이트하고 수정요청을 다 반영하다보니 40% 정도 분량이 늘어난 무언가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다. 덕분에 계획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잡아 먹어 올 상반기를 수난의 여정으로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물론 올해 상반기가 계엄-탄핵-대선을 거치면서 청년 남성 문제를, 그리고 여성주의가 청년 남성과 맺는 관계를 여러 각도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음을 고려하면, 어쨌든 이런 계기가 있어야 생각을 더 정리하고 다듬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정세의 한 가운데서 쓰고 고친 글이니만큼 특히 후반부를 작업하면서 나는 사유의 완결성을 보강하기보다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골치아픈 주제들을 좀 더 포함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페미니스트 연구웹진 Fwd의 서평에서 내 글에 던진 질문들은 어느 정도는 이런 선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https://fwdfeminist.com/2025/08/06/review-18/ ) 여튼 한번의 고민으로 끝낼 수 있는 주제도 아니고--스스로는 나의 이야기가 2016년의 논문 「헬조선 담론의 기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실제로 최근으로 올 수록 상황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서 한동안은 확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추적관찰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판매지수 1만을 넘는 책은 처음인데, 출간된지 2개월 밖에 안 된 책이긴 하지만 정밀한 리뷰는 잘 없다. 이 책에 국한된 건 아니고, 지난 10년 간 페미니즘/젠더 분야 출판종 수의 급증에 비해 그에 비견할만한 서평/비평 문화는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3.
계간 『역사비평』 152호(2025 가을)에 기고한 서평이 나왔다: 이우창, 「한계인가, 단계인가?: 『동아시아사 연구와 근대중심주의 비판』 (배항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5)」, 『역사비평』 152 (2025년 가을): 449-56.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1257498 )
내게 한국사 분야의 서평을 쓸 기회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2017년 냈던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에서 저자의 작업을 가볍게 비판적으로 언급했던 게 인연이 되어 글을 맡게 되었다(서평대상도서의 각주 하나에 내 논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저자가 나의 논평에 직접적으로 응답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 신경은 쓰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고민을 좀 했는데 일단은 처음 진입하는 학계이기도 해서--사실 한국사 학술지에는 2023년에 지성사 방법론으로 논문을 쓴 적이 있긴 하다--굉장히 정석적인 전개를 택했다. 서평이 좀 심심해서 아쉬움을 표명하신 분도 있으시지만, 일단 크게 해야할 말은 대체로 한 서평이라 생각한다.
초고의 마지막 대목만 옮겨둔다:
"『동아시아사 연구와 근대중심주의 비판』을 읽다보면 우리 역사학계의 한계를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머리글에 따르면) 30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이 책에 수록된 논의에 한정하더라도 15년이 넘게 학술장에 유통되었다. 하지만, 역사학계의 여러 논의에 저자가 상세한 논평으로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에는 저자의 논변을 놓고 생산적인 논쟁이 전개된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한국사 분야의 사정에 어두운 서평자의 과문함 때문인가 싶어 주변의 한국사 연구자에게 조용히 물어보니 쓴웃음과 함께 ‘한국사 학계에는 원래 이런 논쟁이 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치열한 논쟁이 부재하는 환경에서 논변의 정교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서양사 학술장도 책임이 없지는 않다. 저자의 서구 사학 관련 참조문헌이 일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시야 문제가 아니다. 서양사와 한국사 전공자들 사이에 진지한 학문적 대화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아가 (애초에 한국사에 비해 훨씬 규모가 약소한) 서양사학계에서 아직 사학사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가 시도되지 않은 것도 맞다.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도전은 사학사를 구성하는 여러 에피소드 중 극히 일부일 뿐이며(당연하지만 ‘이론’은 ‘방법’과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영어권 역사학계에서는 “역사서술의 역사”(history of historiography)에 대한 연구가 점차 축적되면서 연구자들은 역사학·역사서술이 얼마나 풍요롭고 복잡한 장르였는지 점차 깨닫고 있다. 비록 이러한 논의가 한국어로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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