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사상과 정치 신학: 브뤼노 라투르의 『가이아 대면하기』

Reading 2024. 10. 29. 02:33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주요 참조대상이자 논쟁 상대방 중 하나였던, 한국에는 과학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20여년 전에 번역출간된) 『과학혁명』 그리고 (언젠가는 번역출간될) 『리바이어던과 공기펌프』의 저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스티븐 섀핀Steven Shapin이 JHI 블로그에 짧은 글을 기고했다. 와인 이야기를 꺼내며 라투르에 대한 추억을 다시 불러올 때까지만 해도 슬픔과 미소가 뒤섞인 따스한 회고일 것만 같던 글은 중반부터 갑자기 진지한 학적-사상적 논평에 돌입한다. 섀핀은 라투르의 카톨릭 신도로서의 면모에서 출발, 그의 저작에 나타나는 카톨릭 사상적 요소--종말론, 구원론, 범신론...혹은 (섀핀이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정치신학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독자들의 눈 앞에 올려놓는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를 또 다른 카톨릭으로 함께 언급하는 걸 보면서, 나는 섀핀이 오늘날 서구의 주요한 생태 사상가들의 기저에 놓인 종교적 배경을 상당히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스스로가 생태 사상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가끔 생태 사상 및 관련 논의를 접할 때 나는 종종 그 기저에 놓인 종교적인, 혹은 정치신학적인 '토대'를 의식하게 된다. 그중에서는 예컨대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처럼 그러한 토대를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이도 있고(『육두구의 저주』에 대한 나의 짧은 서평은 다음을 참조) 아니면 명백히 종교적인 전제 위에서 작업하면서도 스스로의 토대가 무엇인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순진한 '세속주의자'들도 있다. 순전히 얕은 식견에서 기인한 인상이지만, 나는 (칼 슈미트Carl Schmitt 식의) '정치신학'의 진정한 계승자 중 하나는 생태 사상이요, 역으로 오늘날 생태 사상에 영감을 주는 주요 저자들 중 일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종교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내가 그런 편견을 품게 된 계기를 제공한 원인은 섀핀의 기고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책, 즉 『가이아 대면하기: 새로운 기후 체제에 관한 여덟 번의 강연』(Facing Gaia: Eight Lectures on the New Climate Regime; 프랑스어판은 2015년, 영어판은 2017년 출간)이다. 라투르는 2013년 2월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유서깊은 "자연종교에 관한 기퍼드 강연"the Gifford Lectures on Natural Religion*을 진행하면서 "가이아 대면하기: 자연의 정치신학에 관한 여섯 번의 강연"(Facing Gaia: Six lectures on the political theology of nature, 강연 원문은 여기서 다운로드 가능; 강조는 나의 것)이란 제목을 붙였고, 출판된 책은 이를 보충 및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거의 『젊은 과학의 전선: 테크노사이언스와 행위자』(Science in Action: How to Follow Scientists and Engineers Through Society, 영어판 1987)만큼이나 『가이아 대면하기』를 재미있게 읽었으나, 고백컨대 라투르에 대한 나의 독서는 미미하다. 다만 해당 도서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으며, 지금 내가 검색할 수 있는 한국어 문헌 중에는 라투르의 가이아 개념 자체를 상세히 살펴본 것은 있으나 해당 도서의 "정치신학적" 측면에 주목한 것은 없다(영어권의 경우, 나는 아직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라투르의 정치신학을 탐구한 논문으로는 Timothy Howles, The Political Theology of Bruno Latour,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Oxford, 2018를 참조). 따라서 여기서 후자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일에는 나름의 효용이 있으리라.

 

정통적인 과학학 혹은 과학기술사회학(STS)의 맥락에서 라투르를 따라온 이들에게 『가이아 대면하기』의 전반부 및 마지막 장은 비교적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1장은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2장은 자연의 행위자성을, 3장은 저자 본인이 재규정하는 가이아 개념을, 4장은 마찬가지로 저자 본인이 (비판적으로) 재규정하는 지구Globe 개념을 짚어보며, 마지막 8장은 '사물들의 의회', 즉 비인간 행위자들을 어떻게 인간의 정치적 의사결정 내에 '대표'representation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언급한다. 문제는 이 책에서 라투르가 수사적으로, 또 사상적으로 가장 강렬한 면모를 드러내는 대목이 5장에서 7장까지의 서술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라투르는 각각 독일의 이집트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 유태계 독일인으로 나치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 그리고 칼 슈미트를 꼼꼼히 독해하면서 주석을 달고 자신의 논의로 끌고 온다. 그 핵심적인 주제는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학도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질 영역--실제로 내가 검색할 수 있는 한국어 서평은 대체로 아예 이 부분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데--즉 기독교 종말론과 세속화, 정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논지를 상세하게 정리하는 것은 이 포스팅의 목적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가이아 대면하기』  5-7장이 설정하는 논쟁의 구도만 간략히 요약한다. 우선 라투르는 (생태적 위기에 무관심한) '근대인들의 자연/시간/역사관'을 공격하면서 그 반대편에서 생태적 위기의 실재와 변화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이들을 놓는다. 라투르의 독자에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 구도를 흥미롭게 만드는 점은 그가 두 입장을 모두 일종의 기독교 종말론으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그의 논의에서 전자의 태도는 세속주의나 자연배제, 과학환원론 같은 게 아닌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된 버전'으로 규정되며(칼 뢰비트의 『역사의 의미』 등을 읽었다면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라투르 본인이 지지하는 입장은 생태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으니 삶의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믿음/신앙', 즉 진정한 종말론적 태도로 규정된다. 다시 말해 라투르는 기후위기를 둘러싼 두 입장의 대립을 묵시록적 상황 속에서 세속화된 (잘못된) 종말론과 진정한 종말론 사이의 투쟁으로 재규정한다.

 

정치신학, 특히 종말론에 한창 젖어있던 20세기 초중반 독일사상 전통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독자라면 라투르가 펼치는 게임이 뜻밖에 낯익을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의 인문학도들이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붙잡아 읽고자 했던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역사철학테제」에서 영원회귀적 진보('자유주의' 등)와 혁명적 신학으로서의 역사유물론을 대립시킨 바 있으며, 이때 그가 옹호하는 후자는 "비상 브레이크"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 역사의 무한한 진보라는 관념을 끝장낼 단절의 계기를 품은 것이었다--실제로 라투르는 『가이아 대면하기』 7장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특히 '진보의 천사' 이미지를 인용한다(영어판 242쪽). 간단히 말하자면, 라투르는 20세기 초중반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던 정치신학론, 즉 자유주의에 대한 종말론적 비판의 형식을 소환하여 인류에게 신기후체제·인류세로의 단절적인 혹은 묵시록적인 도약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기후 위기를 포함한 여러 생태 담론의 종교적 맥락/논리구조를 포착하는 일이 반드시 그것들의 '비과학성'을 폭로하는 흠집내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논리와 언어가 본래 어디서 어떤 형태로 제련된 것이었는지, 또 그 언어의 힘과 한계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종교에 '빙의된'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세력으로 다시 돌아온 오늘날 그들과의 대화를 재개하고 설득을 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결국 종교의 언어를 완전히 회피할 수 없다. 한때 세속주의적 자유주의-진보가 과학과의 동맹을 통해 종교를 공론의 장에서 밀어내고 결국에는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전략으로 인해 종교와의 대화창구 자체가 극도로 가늘어진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많은 종교인 혹은 신앙인들이 사라지기는커녕 대화불가능한 따라서 설득불가능한 거대한 질료로 재등장해 온갖 오물을 빨아들이며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광경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종교적 언어의 영역을 다시 탐색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많은 사람에게 급격한 생존양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생태 사상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래의 기퍼드 강연 중 한국어로 출간된 것은 내가 알기로는 잉글랜드국교회 주교이자 신약성서학자인 톰 라이트Tom Wright의 『역사와 종말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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