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개혁론의 유행에 대한 단상

Comment 2025. 10. 26. 23:51

다음은 10월 19일 페이스북 계정에 작성한 포스팅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원 포스팅에서 몇 군데 표현만 다듬었다). 주어진 시간이 워낙 짧기도 했고, 가끔은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로 써보는 것도 좋아해서 간만에 음슴체를 골랐다. 대학이 위기라는 말은 다들 하지만, 대학개혁론 관련 논의 맥락을 이 정도 수준에서 정리하는 글도 찾기 어려운만큼 관심 있는 분께 도움될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학개혁론의 유행에 대한 단상. (음슴체)

1. 마침내 대학개혁론의 n번째 유행이 돌아옴. 왜 유행할까?


a)심지어 교수사회에서부터 '대학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확실히 커졌고
b)세계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두뇌유출&인재유치 문제가 국가적인 쟁점이 되었는데
c)정치권은 진보-민주-보수를 아울러 대학 개혁에 별 관심이 없고 그럴만한 식견을 보여주는 정치인도 안 보임. 쉽게 말해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는데 정책결정권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상황

→ 답답하니 우리라도 뭐든 얘기해야 한다...는 분위기

 


2. 지금까지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음

a) 한국에서 대학이 수행해온 기본적인 기능은 중산층을 주 타깃으로 고등교육을 싸게 많이 공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음. 쉽게 말해 대졸자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었음
b) 이는 지금도 무시할 수 없는 기능. 개인적으로는 높은 대졸자 비중이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강점, 예컨대 안정적인 민주주의적 질서 유지 + 높은 시민의식 + 급격한 사회변동에 집단적으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학습능력 등을 가능케 했다고 생각.
c) 종종 한국은 '불필요하게 대학을 많이 간다' '과잉 학력'이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는데(대부분 본인들이 고학력자고 그 고학력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분들) 바로 그런 과잉투입 때문에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역동성, 안정성이 높아진 것이 아닌가 질문해봐야 함.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뭔 혁신이 나오겠음?
d) 다만 '싸게 많이'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한국 대학은 20세기 후반까지도 교육이든 연구든 퀄리티 보장이 되지 않음

e)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정부 주도 하에 퀄리티 컨트롤 개시. 많은 부작용이 지적되었지만, 어쨌든 이후 교육과 연구 환경, 교수진의 질 등등 대학이 단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음
(그 이전에 대학을 다닌--그리고 지금 가장 큰 정책결정권을 가진--7080학번대 정치인들이 00년대 이후 대학 현실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음)
f) 당연하지만 사람으로 돌아가는 곳에서 퀄리티를 올리려면 더 큰 비용이 투입되어야 함. 한국 대학 재정이 대체적으로 등록금 수입에 기대다보니 2000년대 전후로 등록금이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됨
g) 앞서 말했듯 중산층이 적당히 감당가능한 비용으로 고등교육을 대량 공급하겠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암묵적 합의였기에 반발이 많이 나옴

h) 결정타는 바로 현재 한국 대학 위기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2010년대 초 등록금통제 정책의 도입. 원래 이걸 주장한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반값등록금 정책의 지속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함
h-1) 이후 급격한 물가상승에 비해 대학들의 재정규모가 동결되면서 사실상 대학들은 긴축재정을 강요받음. 이는 교육, 연구, 교수진을 위한 비용 모두의 감축으로 이어짐. 시간강사 문제, 학문후속세대 문제, 우수인력 유출문제, 대학원 진학 미달 등 진영을 초월하여 한번씩 나오는 각종 대학문제의 기본 메커니즘은 등록금동결 → 재정압박 → 인건비 축소&저투자 → 고등교육 퀄리티 저하 ... 에 있음
(사립대학 재단이 쌓아놓은 돈을 안 풀어서 문제다!라는 반론이 있는데, 국공립대의 퀄리티 저하는 어떻게 설명할 거임? + 15년 가까이 조였는데 안 풀렸으면 조이는 게 해법이 아닌 거임)
h-2) 사실상 대학이 이전보다도 더욱 강하게 정부통제 하에 놓이면서 불필요한 구속/제약이 많아지고 유연성과 혁신성이 낮아짐. 역으로 생각해보면 정부가 대학에 갖가지 혁신을 강요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런 면도 있었을 것임) 교육부/정권에서 그 정도의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플레이어가 나오지는 않은 듯

i) 정치권/사회는 대학문제를 외면했으나, 몇 가지 구조적인 변화가 더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짐
j) 하나는 다들 아는 학령인구감소 + 수도권 집중에 따라 지방위기에 악영향을 줌. 간단히 말해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지방 쪽 대학들부터 타격을 받고, 대학이 꺾이면서 지방의 청년인구&관련 상권의 감소가 가시화됨. 점점 대학을 어떻게든 붙드는 게 지자체/지역구 정치인들의 관심사가 됨
k) 덜 주목받고 있는 다른 요인은 국제화임. 간단히 말해 냉전 이후 지구화 경향 + 초국가적 기업의 등장 + 한국에서 생산되는 인적 자원의 국제화... 가 겹치면서 고급 인력이 한국을 떠나 해외에 정착을 시도하는 게 과거에 비해 훨씬 현실적인 선택지가 됨. 특히 '선별적' 이민이 유행하게 되면서 더 많이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고 타국으로 떠나버리는 게 가능해짐. 고급인력유출이 남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물론 최근 트럼프 2기의 작동은 이러한 경향을 어느 정도 상쇄하지만, 대신 중국에서...)
l) 한국 산업/지식장의 발전과 함께 이제 과거의 맘편한 추격자 모델에서 더 골치아픈 선도자 모델로 바꿔야 생존경쟁이 가능하다는 절박감도 점차 보편화됨(진보-민주 진영 정치인들은 아직 모르는 거 같지만...ㅠㅠ).

m) 결국 2022년에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일부를 고등교육에 넣어보는 시도나, 거점국립대 중심 지방대 통폐합(글로컬), 돈 조금 줄테니 지자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라이즈), 해외 유학생 땡겨와서 학생수 커버해봐~ 등의 해법이 시도되고 있지만 대체로 미봉책이라는 평가

→ 요컨대 2010년대의 게임 규칙을 그대로 지속하다가는 대학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면서 대학개혁론이 불타오름

 

3.

현재의 대학개혁론 논의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교수짬밥은 얼마 되지 않으나 지식&논쟁의 역사를 뜯어보는 게 직업이자 취미인 입장에서 최근의 대학개혁론을 바라보면 몇 가지 눈에 들어오는 특성이 있음.

a) 주된 논의의 장은 언론지와 SNS, 뉴미디어
b) 주된 스피커는 보수·경제지 기자들과 이공계/경제 교수들
c) a+b를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음: 대학/고등교육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없다.

왜 없어??? → 한국에 그쪽 전공 연구자가 별로 없는 현실 + 교육학계에 고등교육 전공자들이 배출되기는 하지만 한국 사범대의 여러 조건으로 말미암아 학계에 안착하기 너무 힘듦(물론 영어권으로 가도 고등교육 연구는 아직 개척의 여지가 많음). 즉 논의를 주도할만한 전문가들이 희소한 상태에서 각계 교수들이 자기 경험 기반 이것저것 개혁론을 꺼내보게 됨

그런 상황이다보니 논의는 이렇게 흘러감
d) 대충 (유학/보직) 경험에 기초해 '여기가 좋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는 썰방의 경향이 강함. 쉽게 말해 개혁론의 수준이 그닥 정교하지 않음(물론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님. 이런 거라도 있어야 한다고 봄). 발화자가 경험이 풍부하고 섬세한 사람이면 흥미로운 디테일이 많은 거 정도
e) 예컨대 많이 유통되는 주장을 요약하면 이런 식임
-돈을 많이 부어서 좋은 인재를 유치해오고 충분한 경쟁을 유도하면 잘 될 겁니다 (대충 펀쿨섹이 "끄덕"하는 짤)
↔ 반론: 한국의 현실과 안 맞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맞는 말일 뿐인 건 별 차이 없음)
f) 한국 대학정책의 역사적인 경로나, 대학들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한국의 지식생태계에서 대학이 무슨 기능을 하고 있는지... 같은 얘기들이 하나도 안 나옴.
g) 대학 개혁론이라고 하는데 실제 듣다 보면 대학보다는 학과 단위에서나 생각해볼만한 이야기고, 대학 본부는 걍 학과에 돈과 자율권만 많이 주면 된다는 식. 해외 사례와 비교를 해도 비교가 너무 단순하게 됨(거기는 이렇게 좋은데! vs. 맞는 비교 대상임? 의 끝없는 대결을 보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학부 때 풋볼매니저에 n년 정도 빠졌던--게임을 끊으면서 탈출했음--기억을 소환하면 FM감독들이 이거보다 좀 더 복잡한 고민을 했던 거 같음

h) 이런 상황이다보니 명망가(진)들이 일단 위기론을 던진다! → 사실 진단이나 분석을 들어보면 많이 듣던 얘기다! → 대안도 사실 하나씩 뜯어보면 구체성이 떨어진다! → 지나고 나서 그에 따른 실험결과물을 보면 별 거 없다! → 어쨌든 명망가는 명성을 얻고 보상을 얻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다! 는 패턴이 몇 번 반복됨(진영과 상관없음). 그 사이 대학 개혁론의 퀄리티는 별로 나아지지 않음

*참고로 진보-민주 진영은 더 처참함. 광야에서 외치는 교수 몇 명 빼고는 걍 텅 비어 있음. 지난 1년 사이 진보 언론지 쪽에서 내는 대학 관련 기사를 보면 '등록금 올리면 학생들이 힘들잖아!' 정도에서 더 나아간 게 없음. 같은 기간 보수/경제지에서 쏟아낸 특집들과 비교하면--거기도 냉정히 뜯어보면 비슷한 이야기 반복이지만--논의 수준이 너무 원시적이라 눈물이 나올 정도. 지금 추세로 한 3-5년 정도 지나면 레벨 차이가 더 현격해져서 보수 쪽에 질질 끌려다닐 것으로 전망

 

4.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몇 가지 제언?

-한국은 대학 퀄 못지 않게 교수들의 대학 논쟁 퀄도 정체상태임. 교수들이 각자 떠드는 것도 좋지만 논의를 모아서 길고 짧은 것도 대보고 디테일도 얘기해보면 좋겠음.
-현재 대학개혁론자들이 주로 이공계-경영/경제 쪽이다보니 글로벌 경쟁이 대학의 유일한 과제인양 초점을 맞추는데, '고학력 중산층의 대량 생산'이란 한국 대학의 전통적인 기능 역시 무시할 순 없음.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의 중간 계층이 무너지면 정치적으로 빠르게 불안정해지고, 이는 교육/연구환경에도 급격한 타격을 줄 수 있음(못 믿겠으면 고개를 들어 태평양 너머를 보라). 비슷한 맥락에서 자기들의 지성을 과신하는 이공계 엘리트들은 인문사회 계열의 시민사회 관련 교육/연구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곤 함. 그런데 담론 전쟁에서 지식인들의 헤게모니 붕괴 → 좌우파 급진 정치세력 약진 → 대학의 고립...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전개임.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들 역시 시민사회의 일부분이고 시민사회가 박살나면 당신들 삶 역시 멀쩡할 수 없음
-우리는 어떻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함. 쉬운 얘기는 아니지만, Either A or B 보다는 이쪽이 훨씬 현실적인 태도라고 생각

-당연히 개별 대학 하나 단위에서 개혁을 논하는 건 한계가 있음. 지식생태계에서 전체 대학들의 분업화된 지형 역시 고려해야 함. 현재 대학개혁론은 대부분이 SKY/과기원, 좀 쳐줘봐야 지거국까지만을 시야에 넣는데 거기에 포함 안 되는 대학이 더 많음. 지식생산의 총량도 저 대학 바깥에서 나오는 게 더 많음(연구자 수가 훨씬 더 많으니까 당연함. 서울대 출신들은 '야생'에 나오기 전 서울대 바깥에 학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걍 무지한 거임). 다 조건/역할이 조금씩 다른데, 대학-지식 생태계 전체에 대한 기초적인 조감이 너무 안 되어 있는 상태

-대학에 대한 우리의 앎 역시 여전히 너무 성김. 지방 쪽 대학에 재직하는 친구에게 지거국 중심 지원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적 있는데, '지거국에 갑자기 늘어난 예산을 제대로 처리할 행정 조직/경험이 있는지 생각해봤어?'라는 반문을 받음. 나는 당연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이건 현재 대학개혁론자 대부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 대학 단위에서 행정과 연구지원 체계를 개편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일임?

-당연하지만 지속가능성 역시 중요함. 그냥 뻔한 구호로서의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특정한 대학모델이 좀 더 긴 시간적인 변화 속에 노출될 때 다른 변수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시뮬레이트할 필요가 있음. NUS나 홍콩과기대 모델이 한국에서 얼마나 지속가능함? 과연 의도한 대로 작동할 수 있음? 그렇게 하려면 도대체 뭐가 필요한 거임?
-대학 하나가 NUS나 홍콩과기대 모델에 따라 변화를 시도한다면, 그런 실험 자체는 난 반대하지 않음(내 직장이 아니니까^^). 물론 우리는 돈 조금 더 주고 조교수 때부터 연구실적을 빡세게 요구하고 테뉴어 난이도를 높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이미 경험한 바 있음. '수도권 대학 교수 사관학교'로 불리는 모 과기원이라든가...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경험도 매우 풍부함. 우리의 약점은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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