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 출간에 부쳐

Comment 2023. 11. 6. 01:41

북저널리즘 총서 신간으로 데이비드 옥스 & 헨리 윌리엄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 (전리오 역, 스리체어스, 2023; 원문은 David Oks and Henry Williams, "The Long, Slow Death of Global Development", American Affairs 6.4 [2022]: 122-50 [https://americanaffairsjournal.org/2022/11/the-long-slow-death-of-global-development/])이 번역출간되었다. 나는 해제 격의 프롤로그를 썼다(아래에 에디터의 허락을 얻어 해제의 초고를 옮겨두었다). 내가 이 책의 출간에 왜, 어떻게 관여했는지 간략하게 밝힌다.

 

알라딘 링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7616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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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링크: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0804774

 

 

1.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의 출간을 처음 이야기하기 전, 내게는 크게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사회가 동시대 미국의 정치담론의 향방에 매우 낮은 이해도만을 지니고 있는 데 대한 아쉬움이다. 양국의 긴밀한 관계,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깊은 관심과 선망,  그리고 무엇보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미국 유학파'에 비할 때, 한국에 미국 전문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터무니없이 드물다. 이는 미국의 정치적-사회적 논쟁 지형의 이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면, 미국 내 논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해는 대체로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를 포함한 몇 개의 전통적 언론지를 띄엄띄엄 참고하는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문제는 과거에는 그럭저럭 유의미했을 이러한 통로가 현재로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2010년대 중반 뉴미디어·트위터의 부흥, 대학원 이상 고학력자 집단의 증가, 그리고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등장(및 그에 대한 리버럴들의 반발)은 미국에서 '공적 지식인'--혹은 한국식으로는 '논객'--예비군이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큰 규모로  형성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허핑턴포스트를 비롯한 뉴미디어들이 몰락한 후에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각종 싱크탱크·재단의 지원 하에) 다양한 성향의 매거진이 출범하면서--혹은 기존의 매체가 인터넷 세계에 둥지를 트는 데 성공하면서--트위터 타래에 비해 훨씬 더 정밀하고 촘촘한 논지를 펼치는 정치적·사회적 기고문을 접하기 어렵지 않게 되었다. '주의 깊게 읽을만한 글'이 늘어나다보니, 심지어 이제는 의식적으로 꽤 많은 시간을 쏟아붓지 않으면 논의를 충분히 따라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는 전통적인 언론, 특히 기사 보도만을 읽는 것으로는 북미 공론장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트위터가 가장 다양한 발언자들이 뛰어드는 즉각적인 논쟁의 장소이며, '공식적' 언론들의 기사란이 (물론 long read로 여전히 빼어나고 많이 읽히는 글들이 올라오지만) 대체로 한정된 시간적 지평 내에서 정리된 사실관계 혹은 서사를 제공한다면, 연구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젊은 필자들이 대거 들어오는 매거진 기고는 이제 깊이에서든 지형의 조망에서든 당대 담론의 최전선을 이끄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일간지를 제외한 주요 정기간행물이 겨우 생존을 걱정하는 한국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정파별 주요 매거진을 따라가지 않고 당대의 쟁점을 깊이 있게 소화하기란 매우 힘들다.

 

두 번째 문제의식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담론의 유통방식에 대한 불만이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초반 이래 한국의 (진보적) 공론장·학술장에서 신자유주의는 한국의 거의 모든 문제를 설명하는 결정적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때, 당연히 신자유주의는 상당한 유효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행정부의 주도 하에 전국적인 토목공사를 시행했던 MB정부는 도대체 어느 정도나 신자유주의 정권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선거용 정책만 보면 사실상 복지국가로 이행하는 것처럼 보였던 박근혜 정부에서 새처나 레이건과 비교할 수 있는 일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보건에서 부동산까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문재인 정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역대 정권의 행보가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중반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와 반비례라도 하듯 연구자들이나 논평자들이 일단 만악의 근원으로 "신자유주의"를 소환하는 모습은 우리 지적 세계의 닳고 닳은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러한 '이게-다-신자유주의-때문이다-주의'의 범람이 한국 지성계의 비판적 자기성찰 능력을 퇴화시키는 하나의 치명적인 덫이라고 생각한다. 최종원인을 이미 정해놓고 분석을 전개하는 연구자들의 사유가 정밀하게 발달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이러한 지적 게으름은 심지어 반대편에 선 이들조차 예외가 아니니, 우파의 자칭 지식인들 또한 그저 "국가 개입은 나쁘다", "시장 자유는 좋다" 정도의 멘트를 읊조리는 수준에서 안온하게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은 그런 모델로 성장한 나라도, 그런 단순해 빠진 원리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 전망을 보다 정밀하게 검토할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는, 세부 분야 전공자들의 논의를 제외하면, 좌우파 모두에서 제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

 

 

2.

 

 

아래 해제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북미의 여러 논자가 "산업/제조업 정책"(Industrial Policy)이라 호칭하는 담론을 한국에 정리해서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앞서 언급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제조업 정책"은 트럼프 정권 하반기부터 점차 등장, 바이든 정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의 논객들이 조우하는 만남의 광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 기반에는 오바마 정권까지의 신자유주의·스마트경제가 한편으로 미국 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터전을 훼손하는--그리하여 극단적 포퓰리즘의 유행을 초래하는--결과를 초래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제조업역량에 힘입어 탈냉전 이래 미국의 첫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든다는 초당파적 인식이 있다. 다시 말해, 제조업 정책 논쟁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와의 결별만이 아니라 미국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또 국가-정부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이 마침내 공론장의 전면에 올라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도체법(CHIPS act)이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그러한 사고의 구현물 중 일부일 뿐이다.

 

이와 같은 담론의 전개와 함의, 그에 깃든 충돌지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쟁을 점이 아닌 선 혹은 면의 차원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를 위해 다양한 매거진/싱크탱크의 기고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바로 아래에 제시한 목록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 논의의 상당 부분은 일간지가 아닌--때로는 논문 수준의--글들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적-정책적 방향을 다루는 다른 논의와 마찬가지로, 제조업정책을 둘러싼 대화와 논평은 기존에 우리가 참조해오던 자료들보다 좀 더 넓은 범위의 문헌을 통해 전개되는 중이다.

(IP 관련 몇 가지 읽을 거리:

https://www.rubio.senate.gov/public/index.cfm/2019/2/rubio-releases-report-outlining-china-s-plan-for-global-dominance-and-why-america-must-respond ;

https://americanaffairsjournal.org/2019/05/national-developmentalism-from-forgotten-tradition-to-new-consensus/ ;

https://www.manhattan-institute.org/resolved-that-america-should-adopt-an-industrial-policy ;

https://nymag.com/intelligencer/2023/02/industrial-policy-designer-economy.html ;

https://www.theamericanconservative.com/how-national-developmentalism-built-america/ ;
https://www.noemamag.com/the-designer-economy/ ;

https://americancompass.org/rebuilding-american-capitalism/ ;

https://www.project-syndicate.org/commentary/new-economic-research-more-favorable-to-industrial-policy-by-dani-rodrik-et-al-2023-08 ;

https://americanaffairsjournal.org/2023/08/americas-advanced-manufacturing-problem-and-how-to-fix-it/

https://www.dissentmagazine.org/issue/fall-2023/ ;

"제조업정책 연구그룹"The Industrial Policy Group이 내놓고 있는 연구물도 참조: https://www.industrialpolicygroup.com/research)

 

 

3.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의 출간은 순전히 편집자의 놀라운 추진력 덕분에 가능했다. 올해 초부터 미국 쪽 담론을 공유해주는 친구들을 통해 제조업정책 담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재밌게 읽은 기고 링크를 여러 지인에게 뿌려대고 있었다. 그중 『한국에서 박사하기』 담당 편집자였던 김혜림 에디터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이런저런 내용을 다소 무질서하게 늘어놓은지 불과 2주(!) 정도 뒤에, 그는 공유받은 기고 중 하나를 북저널리즘에서 번역출간하기로 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왔다. 나는 한국 독자들을 위해 글의 맥락을 소개하는 해제를 써줄 필자를 찾아주기로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연락한 후보들은 모두 일정이 맞지 않았다. 미국에도, 정치경제 담론에도 문외한인 내가 (비록 원래 염두에 두었던 후보들에게 감수를 받는다고는 해도) 해제를 쓰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 연유는 이런 사정 때문이다.

 

나는 솔직한 마음으로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이 상업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일정 이상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번에 번역출간된 글 외에 한국에 소개되어 필요한 이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하는 글이 몇 편 더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국을, 미국의 지식세계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자체가 좀처럼 인지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인문사회 출판시장이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세계의 빈곤과 발전, 국가의 역량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짧은 글이 얼마만큼의 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까? 나아가 국가와 사회를 다루어온 기존의 태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물음이 과연 좌우파 모두에게 깊숙히 자리잡은 편안한 관습을 뒤흔들 수 있을까? 모쪼록 북저널리즘의 모험적인 선택이 출판사와 독자층 모두에게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의 시발점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I.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은 『아메리칸 어페어스』 6권 4호(2022년 겨울)에 게재된 기고문으로, 지난 70여 년간 전세계의 빈국·개도국이 맞이한 운명과 그 원인, 대안을 설득력 있게 검토한다. 자칫 산만하게 흐를 수 있는 방대한 내용을 명확하고 낭비 없는 언어로 풀어내는 구성력이 돋보이는 글이지만, 논의의 밀도 및 (한국 독자 대부분에게 비교적 낯설게 느껴질 국가들을 포함해) 광대한 지역적 범위를 감안하여 여기서는 우선 전체적인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해보도록 하자.

 

글은 지난 수십 년간의 빈국·개도국의 발전 전망을 지배해온 “엄청난 낙관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시작한다. 갖가지 건강 관련 지표의 개선과 극빈층의 현저한 감소로 빛나던 세계 발전의 순항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갖가지 위기로 점철된 2020년대에 들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는 그저 일시적인 비틀거림이 아니며, 지금까지의 세계 발전을 그려온 “승리의 서사”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정량적 지표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보다 “지리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치경제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법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빈국에서 부국으로의 국가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반복 가능한 유일한 전략은 고도의 산업화뿐이다. 둘째, 지난 수십 년간 제조업을 바탕으로 한 고도 산업화가 실현된 유일한 지역은 중국과 동아시아뿐이었으며, 다른 지역은 설령 소득 증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동아시아 등지로의) 원자재 수출에 의존했을 뿐, 실질적으로 부국으로의 전환에 성공한 예가 없다. 즉 “동아시아의 산업화, 발전, 대규모 소득 증가가 거의 모든 다른 지역의 침체를 통계적으로 ‘보상’”했기에 정량 지표에서의 평균값만으로는 빈곤과 개발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1980년대 이래 중국이 보여준 경이로운 성장의 원인이 “제조업의 기적”에 기인한다는 주장에서처럼, 저자들은 부국으로의 발전과정에서 제조업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글이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네 번째 절 “황금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다른 국가들, 즉 제조업 발달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로다. 주지하다시피 1950년대 이래 “영광의 30년”은 1970년대의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와 에너지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 파격적인 고금리를 꺼내든 “볼커 쇼크”로 종말을 맞이했다. 한창 성장 궤도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개도국들은 원자재 가격의 하락과 함께 극심한 경기침체를 맞이했고, 개중에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 “충격 요법” (즉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정책의 급작스러운 도입), 경제적 원시화, 그리고 내전 및 무력충돌과 같은 파국적인 결과로 미끄러져 내려간 예도 적지 않았다. 저자들은 특히 국가 발전주의의 상실을 치명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국제기구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강요한 갖가지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국가·정부의 역량을 축소했으며, 그로 인해 사회 관리능력을 상실한 국가들은 핵심 기능에서조차 인도주의 단체와 원조 산업에 의존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발전역량을 기를 기회 또한 얻지 못했다.

 

“중국이라는 산업 괴물”의 출현은 빈국들의 운명을 확정짓는 쐐기와 같았다. 부상하는 중국 제조업에 의해 빈국들은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을 곧 상실했고, 이는 강제적인 “조기 탈산업화”로 이어졌다. 녹색 혁명과 농업의 자본 집약도 상승은 빈국 농촌의 소득 감소를, 결국에는 “탈농업화”를 초래했다. 제조업과 농업의 기대소득이 모두 하락하면서 대량의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었고, 도시는 거대한 슬럼이 되었다. 브라질과 같은 일부 국가들은 중국의 도약에서 수요가 증대한 원자재 수출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단기간에 비교적 높은 소득을 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자재 수출형 경제 모델은 자체적인 산업 발전 역량의 확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010년대 중반 이래 중국의 성장 둔화와 미국의 셰일 가스 개발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이 모델의 취약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났고, 그에 의존하던 국가들은 경제 침체와 함께 정치적인 충격에 직면해야만 했다.

 

다수의 저숙련 노동자를 흡수할 수 있는 제조업과 달리, 원자재 수출형 모델은 탈산업화·탈농업화와 맞닥트린 개도국의 고용 시장을 구원할 수 없었다. 특히 슬럼화된 대도시는 저숙련 비정규직 서비스 노동자들로 가득 찼으며, 대규모 불완전고용 상태는 다시 “금융화”와 맞물려 저소득층의 부채 비율을 끌어올렸다. 서비스 산업 또한 빈국이 부유해질 수 있는 경로를 제시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여덟 번째 절(“일꾼, 이민자, 군인”)은 거대한 잉여 노동이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만성화된 실업 상태에서 청년들은 범죄·폭력집단·반군조직과 같은 ‘대안’에 뛰어들기도 하며, 이는 정부의 통치 능력을 약화시킨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다른 국가로의 이주 역시 중요한 선택지로, 1980년대 이래 국제 이민자의 규모는 빠른 속도로 증가 중이다(이제는 빈국 경제에서 이민자들이 본국에 송금하는 금액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은 지구사적 스케치를 바탕으로 저자들은 글 전체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절(“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하는 것이 낫다?”)에서 빈국의 발전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공했듯, 오늘날의 빈국들 또한 뒤늦게나마 산업화의 길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20세기 후반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지구적 경쟁은 심화하였고, 성장 둔화·인구구조 변화와 맞물려 (선진 사회의) 소비 수요는 감소했으며, 결정적으로 제조업의 고용흡수율을 하락시키는 자동화가 점차 본격화되고 있다. 둘째, 현재의 빈국들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유했던 주요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중국의 예에서처럼 후자는 높은 국가역량을 지녔다. 전통적 지배세력인 지주층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폭력은 국가에 의해 독점되었고, 엘리트 집단은 국가와 기업 사이를 조율했으며,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도 풍부했다. 반면 신흥 개도국들은 고숙련 하이테크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지금까지의 개발동맹을 넘어서거나(“중진국의 함정”), 아니면 멕시코, 브라질, 이집트, 러시아처럼 지대 추구에만 골몰하는 엘리트 계층 혹은 아프리카의 패권적인 소작농 세력처럼 애초에 국가적 발전에 무관심하거나 이를 추진할 유인이 없는 집단의 강고한 지배에 도전해야 하는 난제가 있다. 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빈국은 범죄와 폭력을 제어하고 최소한의 안정을 확보할 국가의 주권적 역량조차 위태로운 상황이다(특히 저자들은 국가의 빈 곳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국제적 “외부 기관”의 활동에 매우 비판적이다). 한때 “아프리카의 중국”이 될 것으로 기대받았으나 개발주의 정권의 붕괴와 함께 내전으로 치달은 에티오피아는 안타까운 사례 중 하나다.

 

마지막 세 개의 절은 빈국들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두 가지 추가적인 요인들을 짚어보고, 빈국 개발 전략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대안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첫 번째 요인은 기후 위기로 인한 생태학적 혼란으로, 이는 농업의 파괴를 통해 탈농업화를 가속화하며, 또한 해수면 상승·홍수·폭염 등은 인간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영역을 축소한다. 이는 “가난한 세계의 상당한 지역에 엄청나게 파괴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요인은 인구통계학적 변화다. 고령화와 인구감소는 이미 선진국만의 현상이 아니며, 개도국 단계를 벗어나기 위해 도약해야만 하는 여러 중진국에도 “너무 일찍”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아프리카의 빈국들은 인구 폭증을 맞이하고 있는데, 남성 청년 노동력을 충분히 흡수할 경제적 기반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는 사회적·정치적 위기를 심화할 것이다. 마지막 절에서 저자들은 이러한 요인들이 단지 빈국 내에서의 위기로만 끝나지 않으며, 세계적인 대량 이민을 초래하리라 예측한다(그리고 부국들은 이주자 수를 제약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유, 무역, 민주화, ‘포용적 제도’ [...] 등 지난 수십 년의 진부한 정통 교리”를 되풀이하는 대신 “새로운 발전주의”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패러다임의 핵심은 일종의 ‘근대 국가 재건설’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에서 세 번째 문단이 이를 집약하는데, 그에 따르면 기존의 비(非) 발전적 지배층을 “개발 지향적인 엘리트로 구성된 새로운 동맹”으로 대체하고, 토지 개혁·농업 현대화를 통해 식량의 자급을 확보하며, 폭력은 다시금 국가의 독점물이 된다.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며, 행정 역량을 제고하고, 대규모의 강건한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교육과 보건 체제를 구축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근대화 프로그램이 한편으로 서방에서 온 기존의 “개발 전문가”를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개별 빈국의 노력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궁극적으로 저자들은 부국과 빈국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국제적 “엘리트 동맹”이 다시 필요하며, 필요하다면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의 대대적인 재편성”도 시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조적 개혁”이 놀랄만큼 발본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의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법에 머무른다면 무엇도 바뀔 수 없을 것이다.

 

 

II.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국가적 빈곤’은 일상적인 관심사에 속하는 주제는 아니다. 인도주의적 단체의 모금광고나 한국 현대사의 교육자료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이 문제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매우 드물며, 이는 빈국·개도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도덕적 평가자의 그것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곳의 사람들은 마땅히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 대상, 혹은 스스로 부와 성공을 일궈나가지 못하는 나태하고 무능한 존재, 아니면 어떤 사악한 강대국의 ‘피해자’ 정도로 그려질 뿐이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의 저자들은 사태를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들의 발전과 쇠퇴는 각국이 지구적 정치경제 질서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또 그것들이 어떠한 발전 경로를 따랐느냐에 의해 도출된 역사적 결과물이다. 국가의 역량은 경제와 정치, 사회, 문화 등에 걸친 다양한 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며, 국가발전의 경로를 재설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요소를 다시 배치하고 결합하는 (결코 쉽지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들의 분석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20세기 후반 좀 더 성공적인 조류에 속해 있던 한국의 과거와 그 미래 역시 성찰적으로 이해하는 시선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을 국내에 번역·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글이 지난 수년간 미국의 정치경제적 담론이 변화하는 양상을 잘 드러내는 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분기점은 역시 트럼프 정권이다. 위대한 엘리트 버락 오바마와 천박한 광인 도널드 트럼프를 대비시키는 한국인들의 대중적인 인식과 별개로, 트럼프 정권의 등장은 북미의 지식인들이 자국과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관점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러스트 벨트”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의 몰락이 부각되고, 시진핑 집권 이래 중국의 도전적인 행보가 무시할 수 없게 되면서 오바마 정권까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스마트 경제”는 지속될 수 없다는 평가가 힘을 얻은 것이다. 공화당 내에서는 한편으로 (종종 신자유주의와 묶이는) 네오콘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제조 2025’를 겨냥해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주도한 보고서를 비롯해 정부와 시장, 산업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정타는 2022년 바이든 정권의 등장이었다. “바이드노믹스”에 대한 반감과 별개로, 대규모 정부지출이 정권의 입장이 되면서 친민주당 지식인들 또한 마찬가지의 노선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이제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미국 담론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 핵심에는 국가·정부의 역할이 있다. 물론 과거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론에서도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었으나, 이는 주로 정부가 시장을 보완·견제하는 복지국가 담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새로운 담론은 정부를 국제적 정치경제 경쟁에서 자국의 생존 및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하는 전략적 행위자로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이제 국가가 시장과 기업을 방관하느냐 통제하느냐의 대립은 낡고 무용한 도식이다. 시장과 기업은 국가의 발전과 번영이라는 더 큰 범주의 세부 요소가 되며, 그것들의 효율적인 작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활동이 정부의 핵심적인 책무다. 이때 국가의 전략적 이해관계라는 차원에서 모든 산업·기업이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대표적으로 반도체와 에너지전환 관련 산업 등의 첨단 제조업에는 특권적인 중요성이 부여된다. 특히 중국과의 경쟁을 강하게 의식하는 논자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무역정책이 사실상 미국의 첨단 제조업 역량을 무너트렸다고 비판하며, 미국이 해당 산업의 인력과 기업을 자국의 영향권에 두고 나아가 직접 그러한 역량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산업을 진흥하고, 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설치하며, 인력과 자본, 자재의 공급망을 확보하고, 국내외 규제를 조정하는 등의 복잡하고 섬세한 과업은 가장 효율적인 정부조직에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로부터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또 다른 쟁점이 출현한다. 바로 국가·정부의 능력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이를 어떻게 끌어올리냐는 물음이다. 이는 단순히 인력·예산의 규모와 관련 부처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으로만 갈음할 수 없다. 환경의 ‘설계’는 그에 필요한 기획력과 지식을 전제한다. 외부의 전문가·당사자 집단의 견해를 수렴한다고 해도, 일정 이상의 전문성과 복잡성이 요구되는 사안이라면 결국 어느 시점에는 의사결정권자 자신의 판단을 피할 수 없다. 반드시 전문적 의사결정의 영역이 아니라 해도, 고급 인력의 인건비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의 역량을 어떤 식으로 제고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담론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을 다시 읽어보자.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강력히 비판하고,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에 주목하며, 무엇보다 국가발전과 제조업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국가의 능력을 육성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상당 부분 그와 공명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글의 소개를 시발점으로 북미의 담론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논의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나아가 세계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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