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 3호: 전기, 삶에서 글로> 단평

Reading 2022. 11. 7. 04:32

<교차 3호: 전기, 삶에서 글로>(읻다, 2022)를 읽으면서 '이 책이 지금 한국 인문교양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한번 끝까지 읽은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1.
 

물론 이 잡지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문교양을 완벽하게 담아낸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기획위원의 글에서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하듯, <교차 3호>는 15편의 글 중 14편을 (대체로 영미와 프랑스, 독일 중심의) '서구 세계'의 도서에 할애하고 있으며, 이중 10편은 19세기 이후의 인물을 다룬다.

 

"전기"(biography)라는 주제의 성격상 이른바 '문사철'이 과대대표될 수밖에 없음은 사실이지만, 사회과학과 관련된 도서가 전무한 것은 아쉽다(굳이 쳐주자면 스테드먼 존스의 마르크스 전기가 소개되지만, '사회과학적' 전통에서의 마르크스를 논의하지는 않는다). 처음 내게 도서추천 요청이 왔을 때 제안했던 책 중 하나인 앨버트 허시먼의 전기 서평이 실릴 수 있었더라면 조금 더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최근 10년 사이 두 종의 허시먼 전기가 출간되었고 그중 하나는 좋은 국역본으로 나와 있다(제러미 애덜먼, <앨버트 허시먼> [김승진 역, 부키, 2020;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7444319).

 

한국 인문학에서 가장 크고 가장 깊이 있는 학계라 할 수 있는 (한)국학계에서 배출한 저작이나(설령 조금 덜 세련된 형식으로 표현될지언정, 뛰어난 국학 연구자들은 한국의 서양 연구자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공부량을 쌓는다), 좋든 싫든 현대 한국의 지식문화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일본 관련 저작에 대한 꼭지가 실리지 않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결점이다.

 

그러나 한 권의 잡지는 시간과 자원, 인간관계의 강력한 제약 속에서 빚어지고, 나아가 다종다양한 불행과 우연을 돌파해야만 현현할 수 있는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아쉬움이 없는 잡지란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빠졌고...하며 세어보던 우리는, 종래에는 그러한 누락의 나열이 너무나 간단해서 지루해지고야 마는 지적 스포츠, 아니 의례와 같이 되어버리고는 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언젠가는 무엇을 하지 않는가, 어떤 글이 없는가를 말하는 대신 어떤 글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야기하게 된다, 마침내.

 
 

2.

 

서로 다른 지적 배경에서 공부하는 필자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생성된 텍스트를 소개하는만큼, <교차 3호>에 실린 서평을 일괄적으로 평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흥미롭게 읽은 글들에 관해서는 다음의 미덕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대중적인 잡지든, 학술지든 한국에 유통되는 일반적인 서평에 비해 <교차 3호>의 글들은 훨씬 많은 수의 참고문헌을 인용한다. 아예 주석 및 참고문헌목록을 제시하지 않는 윤여일·나성인의 글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20여 개 가량의 참고문헌이 붙어있다.

 

이로부터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두 번째 미덕은, 다수의 서평이 단순히 책의 줄거리나 의의, 혹은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서평도서가 어떠한 지적·학문적 맥락에 놓여 있는지, 책이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를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각 서평은 인쇄된 문장이라는 무대 배후에 있는 더 넓은 세계의 풍경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미디어 (혹은 뭐가 붙든) 리터러시(literacy)가 중요하다는 구호가 거의 관습적으로 울려퍼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그러한 문해력의 핵심은 결국 지식과 언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역량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교차 3호>에 실린 글들에서처럼 출간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사실 모든 글이 그렇지만, 서로 다른 문제의식과 논변 사이에서 구축된 수많은 선택들의 축적물임을 가리키는 서평이 더 많이 쓰이고 읽혀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주석과 참고문헌, 복잡한 논쟁의 맥락을 짚어가며 책을 균일한 '말씀'이 아닌 때로는 이질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얽혀있는 구조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한국의 많은 독자에게 까다로운 요구일 것이다. 한 줄 짜리 별점평, 혹은 길어야 서너 문단짜리 일간지 도서소개란으로도 충분히 정신적 포만감을 느끼는 다수에게 어지간한 학술지 논문에 해당하는 분량의, 그것도 정보의 밀도가 결코 낮지 않은 글은 쉽게 손을 뻗기 어려운 대상일지 모른다. 서평이라는 표지를 걸어놓으나 실제로는 필자 본인의 정서를 경쾌한 문장에 한가득 담아놓은 글, 그리고 독자들의 정서적 허기를 손쉽게 채워주는 글이 '인문교양' 항목의 왕좌를 차지하기 유리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잡지는 명백히 반시대적인 방향을 고수한다.

 

하지만 <교차 3호>를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과연 그 모든 사실을 몰라서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나는 어떤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선택이야말로 <교차 3호>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고 믿는다. 필진과 편집진이 보다 대중적인 독자에게도 읽힐 수 있는 글을 완성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기울였음은 분명하다. 문장은 담겨있는 정보의 밀도에 비해 놀랄만큼 가독성이 높고, 필자들은 성찰적인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그 주제의 깊이에 비해 훨씬 평이하고 친절한 언어로 오늘날 우리에게 낯선 세계로의 통로를 열어주고자 한다. 한 쪽에 논문과 전문지식의 영역, 다른 한 쪽에 대중독자의 영역이 있다면, 이 책은 어느 한쪽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전자의 정수를 가능한 살려 전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른바 인문학 대중화의 구호가 널리 퍼진 이래 이제 연구자들조차도 지식과 학문, 언어와 사유의 가치에 냉소적인 시대에--그런 점에서 한국은 계몽과 교양의 도구조차도 파괴해버릴만큼 참으로 세속화된 사회라 할 수 있는데--이 책의 필진들은 자신들이 읽고 쓰는 글의 유의미함을 여전히 믿고 있는 소수에 속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고수, 이를 가능한 좋은 수준의 글로 구현하려는 열망이 바로 이들의 글에 힘을 실어준다.

 

그것이 내가 여러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차 3호>가 현재 한국 인문교양의 최전선에 있다고 단언하는 이유다. 이 책보다 널리 읽히는 잡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학술지는 많겠지만, 깊이 있는 교양의 추구라는 목적을 이 책 이상으로 진지하게 시도하는 정기간행물은 드물다.

 

 

3.
 

한 명의 기고자로서 나의 이야기는 간단하게만 풀어놓는다. 나는 본래 <교차> 창간호에 기고를 제안받았지만 당시 도저히 일정이 따르지 않아 고사했다. 작년 말 3호의 주제와 관련해 괜찮은 평전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번에 서평도서로 삼은 제임스 해리스(James A. Harris)의 흄 전기 외에 위에 언급한 허시먼의 전기, 리처드 버크(Richard Bourke)의 기념비적인 에드먼드 버크 전기, 스튜어트 엘든(Stuart Elden)의 푸코 전기 4부작, 로버트 러너(Robert E. Lerner)의 에른스트 칸토로비츠 전기 등을 추천했다. 올해 1월 흄 전기로 써달라는 청탁을 정식으로 받았다. 학위논문 제출까지는 다른 작업이 불가능했기에 사실상 마감 직전인 8월 중순에 몰아서 써야 했지만, 원래 해리스의 흄은 전부터 진지하게 소개하고 싶은 책이었기에 2월 초에 대략의 구성 및 인용문헌은 거의 완성해두기는 했다.

 

내 서평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여전히 흄이 영국경험주의/회의주의 철학자로만 읽히는 한국의 지성계에서, 1970년대 J. G. A. 포콕과 던컨 포브스의 천재적인 연구 이래 케임브리지학파의 흄 정치사상과 스코틀랜드계몽주의 연구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의 맥락을 보여주는 것이다(실제로 주요 연구의 궤적을 보여주는 연구사의 소개가 서평의 절반 이상 분량을 차지한다). 또 다른 목표는 해리스의 흄 전기가 전술한 연구사를 토대로 하되 어떻게 흄, 그리고 흄이 활동했던 18세기 영국 지식문예장의 문제의식과 언어를 새롭게 조명하는지를 충실히 요약전달하는 것이었다. 분량과 시간의 한계상 아주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해리스가 흄의 저작에서 형식의 문제에 주목한 것처럼 해리스의 전기를 글쓰기 형식이라는 차원에서 파고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 세 번째 목표였다. 요컨대,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지성사적 전기'란 과연 어떻게 쓰여질 수 있는가? 글의 형식과 장르, 방법의 문제를 민감하게 느낀다는 점에서, 설령 내가 다루는 텍스트가 좁은 의미의 문학장르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내가 문학 전공에서 훈련받았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미 서평 자체가 매우 많은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만큼 여기에서 그 내용을 굳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수정일정 상 초고를 읽은 안두환 선생님의 여러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적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언젠가 다른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본다.

 

 

4.

 

독자로서 <교차 3호>의 서평을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글을 몇 편 꼽아본다:

주아, "한 인간을 쓴다는 것: <한서 열전>";

김한결, "평전은 역사가 될 수 있는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강초롱, "철학을 살아내고자 한 철학자, 보부아르: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정성욱, "20세기 유전학을 비추는 독특한 역사적 렌즈, 바바라 매클린톡: <유기체와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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