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140503]

Comment 2014. 5. 4. 03:47

"가만히 있으라" 에 다녀왔다. 홍대의 첫 행진, 명동의 두 번째 행진, 명동에서 시청분향소까지의 행진까지만 마치고 들어왔다(그때까지는 경찰과의 대치가 없었는데, 이후 분향소에서 촛불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청계광장까지의 이동 중에 경찰들에게 가로막혔다고 한다...). 홍대와 명동이라는 곳에서 공적인 목적을 갖고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경험 자체가 꽤나 독특한 것이었다. 홍대에서는 한 백 수십 여명 정도 되었던 듯싶고, 명동에서는 거의 300여명쯤 되지 않았나 싶다. 생각보다 줄이 꽤 길었다. 같이 참석한 C와 함께 한 외국인에게 기념촬영(...) 당하기도 했다-_-;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에너지가 있고 대화가 있는 집회를 더 좋아하지만, 어쨌든 추모행진이니까... 예상보다 오래 걸어서 두 번째 행진 때는 허리가 꽤 아팠다. 사람들은 예상보다 많았고 생각할 것은 더 많았다.


11년 법인화투쟁 이후 어떤 종류의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고, 시청을 간 것은 2009년 촛불 1주년 때 집회 이후 아주 오랜만이라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08-09년 이후 사람들이 정치적 집회나 촛불이란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꼴을 봐왔기에 거의 5년만에 거리로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다. 다만 확실히 다들 채증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두려움은 있었던 것 같다. 마스크는 확실히 채증을 부분적으로나마 방지하는 좋은 수단이긴 하지만, 어쨌든 참여자들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는 물건은 아니다. 아직 한국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을 회피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집회와 추모행사의 경계선을 오가는 기획이 시의적절한 전략이 되었다. 발언을 들어보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분명히 슬픔만이 아닌 분노가 가득함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분노가 유의미한 변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매개항으로서의 정치적 활동이 어떤 형태로든 요구되기 마련인데, 이 추모행진과 같은 아직 작은(300명이라면, 지금 시점에서 대중의 추모행진으로는 꽤나 크지만 집회로서의 08 촛불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작은 수치다) 행사가 그러한 매개를 다시 가능하게 하는 도화선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분향소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줄을 서 있었다. (밤의 집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지 모르겠다...만약 갈 일이 있다면 일교차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겉옷을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김용옥 선생이 적절하게 인용했듯,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는 우파들의 아버지 이승만 때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서울은 안전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야말로 어떤 우파도 변호할 수 없는 무책임의 소치 아니던가. "가만히 있으라"는 진술은 대상으로부터 어떠한 능동적인 권리도, 책임도, 행위능력도 박탈한다는 점에서 악랄한 것이다. 나는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한 저 유명한 진술, "감히 너의 이성을 사용하라"sapere aude와 이 명령이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듣는 이를, 우리를 미성숙한 이들로, 그저 제자리에 앉아서 하루하루 자기 먹을 몫만 생각하면 되는 동물로 퇴화시키는 저주스러운 속박의 언어다. 너는 신경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너는 아무 것도 몰라도 되니 가만히 있어,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만히 있어--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는 "Don't Move"라는 영어 표현보다 조금 더 무거운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라"가 한편으로 미성숙을 강요하는 언어라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구분의 언어이기도 하다. 명령하고 지휘하는 (생략된) 주어와 저 말을 듣는 이들을, 역시나 생략된 목적어를 갈라놓는 언어 말이다. 이 사실은 생략된 목적어를 다시 되돌려놓는 것만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역시나 올해의 유행어가 된 형용사와 함께 다시 붙여보자. "미개한 국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는다면 이 문장의 진의가 좀 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가? 내친 김에 주어까지 되살려보자. "선진화된 우리 지도자들이 알아서 할테니까 미개한 국민들은 가만히 있으라" 정도면 나름대로 원문과 원래의 의도를, 이 사태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문장이 되지 않을까? 물론 이 문장을 발화하는 것은 지도자들만이 아니다. "선진화된 지도자들이 알아서 하신다니까 너나 나같은 미개한 국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라고 쓴다면, 스스로 주어처럼 기능하는 목적어가 다른 대상들을 그 목적어에 수반하는 서술어로 종속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우리는 사실 이쪽의 언어를 현실에서 더 많이 접한다). 어쨌든 이 문장의 생략된 어구들을 되살렸을 때 평소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하나의 표현 아래 묶여있던 두 개의 집단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배하는 이들과 지배당해야 할 이들 말이다.


어떤 면에서 박근혜 정부, 특히 청와대가 계속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발언을 계속해서 꺼낸다는 것은 거짓된 책임회피가 아니라 매우 솔직한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지배당하는 인간들한테 문제가 생긴 것인데 왜 지배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너희들과 같은 사람이 아닌데 ("미개한 국민들"이란 표현이야말로 아주 정확하게 이러한 의사를 함축한다! 그 말의 문제는 무례하다는 게 아니라 너무나 진실되다는 데 있다) 왜 너희들의 어려움을 떠안고, 내 것으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고, 장례비를 내줘야 한단 말인가? 국무총리가 장례식 비용을 유족의 보상금에서 공제하라고 지시했다는 기사를 따른다면, 남의 장례식에 쓸데없는 비용을 들이고 싶지 않다는 지배자들의 마음이 아주 솔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이 점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책임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요구이기도 하다. 나한테 책임을 묻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라, 라는 요구말이다. 너희들의 죽음이니까 내 얘기 꺼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등등.


결국 "가만히 있으라"는 세 가지 의사를 함축한다. 너희는 아무 것도 하지/되지 마. 너희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야. 그리고 우리한테 따지지도 질문하지도 마. 문제는 이 노골적인 타자화의 전략이, 그러니까 '시민들'을 행위능력이 부재한 사적인 공간에 갇힌 단자들의 파편으로, 오로지 식도에 지방을 투입당하여 간을 빼주어야 하는 거위들처럼 만들고자 하는 기획이 지배자들 자신의 무능력과 조우했을 때이다. 그들의 요구처럼 지난 5년간 한국의 시민들은 아무 것도 되지 않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 절반 이상의 국민들이 하늘에서 황새를 임금님으로 내려주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개구리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이다(사실 그건 7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책임이란 개념 자체를 조각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지배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책임능력을 박탈했고, 많은 사람들은 생계와 직장을 이유로 기꺼이 책임능력을 박탈당했다. 마치 일병이 이병을 학대한 후 자신은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듯이 말이다. 결국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고서 일이 돌아갈 수는 없기에, 허공에 뜬 책임은 누군가가 받아주어야 했다. 비극은 자신들이 그 역할을 맡아줄 것처럼 굴었던 지배자들이 그 역할을 회피한 순간에 가시화되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세 가지를 앗아갔다. 공적인 책임이라는 개념이 사라졌고, '우리'는 나'들'로 산산조각 쪼개졌으며, 마지막으로 문제제기의 권리조차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대답으로 나온 언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그런 점에서 세 가지 요구를 담고 있다. 수많은 고립된 나'들'의 나열이 아닌 '우리'를 다시 꺼낸다는 것, 바로 그 우리의 이름으로 공적인 책임/애도를 다시 수행하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회피한 자들,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자 했던 자들, 다른 모두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의 명령을 내뱉었던 자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돌려주고자 한다는 것. 특히나 마지막 요구는 한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는데, 이번에야말로 올바르게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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