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근대 및 계몽주의 "페미니즘" 연구동향에 관한 짧은 코멘트
Comment 2021. 2. 23. 01:150.
계몽주의 시대 (서)유럽 젠더/여성담론이 루소와 울스턴크래프트의 대립구도로 설명될 수 있다고 서술하는 것
=> 저자가 17-18세기 젠더/여성 담론 1차 문헌을 읽지 않았고 2000년대 이후 영어권의 초기 근대 여성문인/지성사 연구도 따라가지 않았다는 뜻.
1.
내가 프랑스어권 연구자가 아닌만큼 루소에 관해서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보통 루소의 '여성혐오적' 입장이라고 지적되는 주장 대다수는 당대의 여성담론, 공화주의 계열 논의, 상업사회 비판론 등에 흔히 나오는 것들이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요 논의는 "최초"라기보다는 (영어권에 국한할 때) 그 전 한 세기 동안 이어진 여성문인의 저작들 & "여성논쟁"에서 나오던 주제들을 축적하고 활용한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한 설명일 듯 싶다. 가령 여성이 교육을 못 받아서 자신의 이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래서 더 속박되는 처지에 있으니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늦어도 1670년 경에도 이미 상당히 체계적인 형태로 서술된다. 17세기 후반부터 읽고 이제야 18세기 들어가느라 박논 끝날 때까지 울스턴크래프트를 다시 읽을 시간은 없겠지만(최근 연구서들만 계속 모으는 중), 당대에 더 주류적이고 더 많이 교육받은 다른 여성문인들의 입장과 비교할 때 공화주의 급진파에 속하는 편인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 담론 내에서도 (<여권의 옹호>가 주목을 끈 것과 별개로) 주변적인 위치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차라리 18세기 중후반 영국에서 좀 더 영향력 있는 여성문인/지식인 집단이 있다면 '블루스타킹 서클'을 꼽는 게 맞다. 이쪽도 1990년부터야 체계적인 연구가 나오고 몇 년 주기로 연구논문집이 묶여 나오니만큼 약간 발품을 팔면 연구사 따라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기존 연구 상당부분이 인적 네트워크를 따라 주고 받은 편지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각종 문서고 출입이 쉽지 않은 외국인 연구자들이 새로 영역을 개척하기가 까다로운 게 문제.
덧붙이자면, 1980-90년대부터 영국 18세기 교회사 연구가 일신되고, 계몽주의와 종교가 긴밀하게 얽혀있다는 걸 강조하는 연구 트렌드와 함께 당연히 (적어도 영국의) 여성지식인과 기독교-교회의 관계에 주목하는 연구도 계속 나오고 있다. 대충 2010년대 초반부터 논문집이 아닌 단행본 사이즈의 연구서가 나오고 있으며 그중에서는 교회사 베이스를 갖고 신학적 논쟁을 꽤 촘촘하게 따라가는 책도 있다. 처음에는 여성지식인들과 영국국교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17세기 후반 포스트-혁명기에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8세기 연구들을 모으다보니 적어도 18세기 중반까지 국교회와 여성지식인들의 관계는 꽤 가까웠던 것 같다. 구체적인 건 나도 이제부터 따라가봐야 알겠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기독교보다 반군주제적 공화주의자들이 여성의 평등 및 권리에 훨씬 우호적일 거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17-18세기 영국으로 들어가보면 오히려 여성들이 기독교적 도덕의 필요성을 여성의 교육 및 권리를 주장하는 받침대로 써먹고, 기독교 도덕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여성폄하/혐오도 더 거리낌없이 한다는 믿음이 보다 일반적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듯 하다.
2. 비전공자들을 위한 정리를 하자면,
"페미니즘 사상이 울스턴크래프트로부터 시작했다"는 역사적으로 틀린 이야기다. 여성의 평등과 권리에 관한 담론이 곧 페미니즘이라고 한다면 프로토페미니즘이라 할 만한 논리는 르네상스 시기부터 조금씩 나오고, 울스턴크래프트와 비슷한 정도의 주장은 17세기 후반쯤에는 나온다. 반대로 "페미니즘"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사회운동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이쪽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띄엄띄엄 책이 나오고 있다). 이름을 기준으로 삼든, 특정한 논리를 기준으로 삼든 울스턴크래프트는 딱히 페미니즘의 원조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17세기 후반부터 울스턴크래프트까지 제대로 정리하는 연구서는 영어권에서도 아직 안 나온 것 같고 (울스턴크래프트 연구 중에서는 계몽주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가고, 17세기 후반 연구에서는 18세기 연구로 내려오는 중인데 18세기 중반이 정리가 되기 전까지 랑데뷰는 시간이 걸릴 듯 하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진짜 "페미니즘"은 책 사이즈 연구서들이 몇 권 있긴 한데 아직 필드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물론 내가 19세기 후반 연구자가 아니므로 열심히 찾아본 건 아니다).
언젠가 연구트렌드를 좀 정리하는 리뷰를 쓸 날이 오면 좋겠지만, 일단 모든 건 박사논문 끝난 뒤에 :)
P. S. 18세기 계몽주의 젠더 논의를 다룬 논문 하나 읽다가 짜증나서 푸념하던 중 여기까지 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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