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사회학회 발표로 9-10월 간 이어졌던 정신없는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오늘 내일 학부생 페이퍼 첨삭만 하면 (...) 드디어 학위논문으로 돌아간다! 수개월 전 별 생각없이 이런저런 일감을 한꺼번에 받아놓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논문의 흐름도 끊기고 매주 새로 닥쳐오는 마감에 시달리는 험난한 시간이었다. 물론 문학에 관한 주제나 문화텍스트 비평, 에세이 등 덜 엄밀하고 더 자유로운 글을 다시 써보는 일은 역시 재미있었다. 나 자신이 워커홀릭에 가까운 면이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난 두 달은 스스로가 단 한 가지 형식의 글만이 아닌 조금 더 다양한 장르와 목적을 가진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즐긴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회이기도 했다.
대학원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겁할지 모르겠지만(나는 인문학 대학원생들이 논문 이야기만 들으면 큰 무례와 상처에 직면한 것처럼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 한국 대학원의 클리셰가 너무 지겹고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멍청한 존재로 보이도록 만든다고 생각한다...논문에 대해 의식적으로 더 많이 토론하고 그걸 발전시켜야 하는 사람, 다시 말해 논문의 진짜 주인은 우리 대학원생들이어야 한다), 그러한 즐거움의 대상에는 학위논문 쓰기도 포함된다. 아주 특별하게 운이 좋은 연구자가 아니라면 지적인 엄밀함을 추구하는 글을 책 한 권 분량으로 기획하고, 구성하고, 쓰는 일이 삶에서 그렇게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원고지 140여매 안팎의 짧은 학술지논문 '성과'만을 생산하는 것이 취직과 승진시장에서 살아남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공인받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더 많은 맥락을 끌어들이고, 더 많은 자료를 더 엄밀하게 검토해야 하는 많은 연구가 그러한 길이에 딱 들어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 연구자들은 좀 더 긴 길이의 글쓰기, 그리고 보다 다양한 길이와 구성, 접근법을 테스트해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학위논문을 어느 정도는 그런 연습과 시도의 기회로 삼고 싶다.
주말이 지나면 그동안 놓아두었던 메리 아스텔의 마지막 주저, _The Christian Religion, as Professed by a Daughter of the Church of England_ (초판은 1705, 현대비평판은 2013)을 읽는다. 11월 초까지 1장을 끝내고, 겨울방학 중에 2장까지 마치는 게 목표다. 사실 푸코 강좌(아직 두 차례 강의를 더 해야한다)와 프로젝트 참여가 남아있긴 하지만, 앞으로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 주제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면서 학위논문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한 밤이다.
몇 달 전 오른손 엄지 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다양한 형태의 재활운동을 해왔다. 20대 때 운동을 할 때는 재활에 대한 적절한 개념이 없다보니 부상을 입어도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 받고 약이나 타는 게 고작이었다면, 2년 여 정도부터 체육 쪽 연구자와 대화를 하게 되면서 재활과 스포츠의학 분야가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축적하고 있으며 사람의 신체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다양한 방식의 테크닉이 연구되어 있다는 것을 새로이 배우게 되었다--대학원에서의 훈련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게 하나 있다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전문성이 축적되어 있을 수 있으며 그에 적절한 존중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태도일 것이다. 전문적인 조언을 들어가면서 손가락과 손의 힘을 강화하는 여러 보조도구를 사용해보았고, 그 다음에는 손가락만이 아니라 팔과 상체 자체를 강화하는 운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몇 달의 코칭 끝에 주어진 마지막 과제는 턱걸이 횟수를 늘려보는 것이었다. 완벽한 수준은 아니지만 숫자를 채웠고, 오늘로 앞으로 더 이상 재활 가이드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물론 스마트폰 키보드 타이핑은 앞으로도 절제해야 한다...).
이제 점점 바깥에서 운동하기 쉽지 않은 날씨가 다가오면서 큰 맘을 먹고 케틀벨을 샀다. 처음으로 케틀벨을 만져봤던 때는 2007-08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몇 번 사용해보는 걸로도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후 딱 현상유지만을 목표로 집에서 맨몸운동만을 하다보니 주위의 다양한 사람들이 케틀벨을 접하는 동안 정작 내가 써볼 일이 없었다. 이번에 10년만에 다시 쇳덩이를 들어보니 반갑고 애착이 간다. 데드리프트와 스윙 위주로 조금씩 횟수를 늘려서 24kg짜리를--지금은 18kg로 시작이다--그럭저럭 무리없이 다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 딱 그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밖에 가끔씩 쉬어가면서 영화도 보고 다른 책도 읽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10월 21일 Facebook 포스팅]
웹툰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이 2년 3개월만에 특별편으로 돌아왔다. 이번 편은 2019년 말의 경북대 화학실험 폐기물 폭발사고를 다루고 있다. 사건이 터진 건 2019년 12월 27일이지만, 치료비 지원/보상 협의 및 관련법 개정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14년 대학원생 기본권 개선 관련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실험실 안전사고 예방/보상 문제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이슈였다. "한국은 사람이 다쳐야 제도가 바뀐다"는 말을 자조적으로 하고 살았는데, 사람이 죽고 다쳐도 바뀌지 않는 대학원 안전문제를 보면 여기는 한국도 못 되는 곳인가 싶다. 이번에는 전국대학원생노조와 함께 관련법 개정을 준비하는 의원실도 나타난 만큼 부디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 이번 특별편은 과장하지 않으면서도--전형적인 것처럼 보이는 전개는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많은 걸 전달하기 위해 꾹꾹 눌러 쓴 티가 나는 에피소드다. 경북대 폭발사고에 관심이 없으셨던 분이라도 한번쯤 가볍게라도 읽어주시면 좋겠다.
https://slownews.kr/78042
더불어 현재 관련법 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의 해당 사안 관련 기고문을 첨부한다.
https://www.facebook.com/graduunion/posts/849251249155172
[9월 21일 Facebook 포스팅]
내일, 이제 오늘 마감인 짧은 원고준비를 위해--주제는 영국 에세이 장르의 간략한 역사 쯤이 되겠다--문헌들을 읽다가 잠시 쉬려고 김민철 선배가 번역한 <인간 볼테르>(후마니타스, 2020)를 들었다. 2/5 정도 읽었는데, 근래 읽은 한국어 번역서 중에 가장 부드럽게 읽힌다. 너무 쭉쭉 잘 넘어가다 보니 쉽고 부드러운 문장 내에 깃든 탄탄한 학술적 쟁점들을 제대로 캐치하기 위해 천천히 여러 번 읽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다. 문인이자 논객으로서의 볼테르, 그리고 그가 속한 18세기 계몽주의 시기 프랑스(와 영국) 지성계 및 문화계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는 일급의 안내서인만큼, 이 시기와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좋은 책 자체를 읽는 기쁨을 아는 독자에겐 분명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볼테르를 다루는 2장에는 <샤틀레 부인을 위한 소절>(Stances à Mme du Châtelet, 1741)의 전문이 실려있다. 여기서 볼테르는 사랑에 대한 우정의 우위라는 당대 문헌에서 자주 다뤄지는 고전적인 소재를 취하되, 세월의 흐름에 이끌려가는 이의 구슬픔을 덧붙여 노래한다. <인간 볼테르>의 번역에서 가장 뛰어난 대목이 아닐 수는 있겠으나 (시 전공자들이 원문의 각운이 맞춰지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 번역에서 한국어로서의 유려함과 원문의 형식, 서정을 모두 갖추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 정서는 누구라도 한번쯤 음미할 만하기에 옮겨둔다.
따를 것이 우정뿐이라 나는 눈물 흘렸네"(<인간 볼테르> 40-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