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교육의 '사이버화', 그리고 인문교양의 미래에 관한 단상

Comment 2020. 4. 20. 14:19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대학교육의 온라인/사이버화에 대해 우려와 환호가 뒤섞인 전망들이 벌써부터 이곳저곳에 나오고 있다(오늘 아침에 본 예로는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227867). 미래 예측은 언제나 누구든 틀릴 가능성이 높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개인적이고 즉흥적인 전망을 이야기해본다.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한 정도인만큼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기를 바란다.



대학 교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든 대학의 사이버대학화(?)'는, 특수한 장비의 사용(실험장비 사용법을 비대면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이나 기예의 전달(악기 연주를 유튜브만 보면서 배울 수 있는가?)에서처럼 물리적 접근성이 강하게 요구되는 분야를 제외하더라도, 생각보다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난점이 있는데, 하나는 온라인수업 수강으로 이루어진 학위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받을지의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대학 학위는 많은 경우 단순히 법적으로 인정받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은 학위들의 가치를 비교평가한다. '사이버학위'가 어느 정도의 시장가치를 인정받을 때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고, 그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중에 언급할 이유로 인해 아주 낙관적인 전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 난점은, 특히 온라인학위과정 혹은 그에 준하는 정도의 사이버화를 시도하는 대학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 온라인학위과정처럼 교육에서 물리적인 여건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동일한 교육내용을 대량전달하는 게 수월한 영역일수록 몇몇 상위권 대학들이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대략 중하위권의 평판을 가진 대학이 수년간 열심히 투자해서 제법 내실을 갖춘 온라인 학위과정을 만들어놓으면, 훨씬 더 많은 물질적·인적·사회적 자원을 보유한 최상위권 대학이 곧바로 대규모 투자를 통해 그렇게 형성된 온라인학위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가장 크고 유명한 대학이 온라인 학위과정 정원을 무제한에 가깝게 풀어버리는 순간, 다른 대학이 차지할 몫은 매우 줄어들 것이다. 이는 대다수의 대학에 전면적인 사이버화가 그다지 안정적인 생존전략이 아닐 수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은 마음놓고 기존의 대면 강의를 온라인 강의로 전환할 것인가? 물론 지금까지 일부 대학에서 결정권자들이 분별력없는 선택을 내리는 사례를 적지 않게 봐 왔으니 그런 시도가 나타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내 생각에 '합리적인' 결정권자들이라면 그런 형태의 유토피아적 몽상을 당장 너무 깊게 밀고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 첫째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학에서는 절대적으로 대면 지도가 요구되는 영역들이 남아있다. 이는 특히 전공에서 요구하는 훈련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연구·전문화의 영역과 가까울수록 그렇다. 통상적으로 한국의 최상위권 대학들이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학부 교육 이외의 영역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모든 대면 지도가 비대면 온라인 교육으로 대체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당연히 그러한 영역을 위한 시설과 장소가 극적으로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둘째로 섣부른 '사이버대학화'는 학생들이 '고급상품'에 요구하는 만족도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거칠게 말해 지구 어디서든 하버드·예일 최정상급 교원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들을 수 있는데(물론 현실적으로는 언어 장벽이 작용한다), 비싼 등록금 내고 그보다 떨어지는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서 만족할 학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약간은 과감한 추측을 해보자면, 이미 높은 수준의 브랜드가치를 갖고 있는 대학이 기존 강의를 조급하게 온라인 강의로 대체하려 할 경우, 이는 해당 대학의 브랜드가치를 하락시킬 위험이 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온라인 강의를 더욱 쉽게 만들고 접할 수 있는 세계가 오면 올수록,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지 않는 영역들이 일종의 '고급사치품'으로 계속해서 통용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후자의 자산을 많이 가진 대학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마케팅 전략을 취할 것이다(물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의 최상위권 대학은 아직까지 고급화 전략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이버대학으로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자녀를 사이버대학으로 교육시키겠다는 예가 몇이나 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셋째로 대학의 '사이버화'가 일정 비율 이상 높아질 경우 기존의 최상위권 대학이 제공하던 중요한 교육적 자산의 가치가 하락한다--이는 바로 교수-학생, 학생-학생 간 인적 네트워크다. 사람들이 (특히 본인이 고등교육을 경험해본 학부모가)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것은 단지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학부생 당사자들이나, 대학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를 수 있지만, 최상위권 대학이 학생에게 제공하는 진정한 자산 중 하나는 수년 동안 '뛰어난' 사람들과 연결될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아름다운 예일지 모르겠으나, 현재 사회 각 분야에서 발언권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80년대 대학운동권들을 보라. 그들이 20대일 때는 고만고만한 학생조직의 지도자였을지 모르겠으나, 3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단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적 네트워크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물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온라인 교육을 통해서도 성공적인 네트워킹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게 전통적인 최상위권 대학에서 사람들의 공간적 집중을 통해 제공해오던 것을 곧바로 대체할 수 있을지에 나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것이 전면적인 비대면 교육의 경험이 대학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기존의 단순지식전달형 대형강의는 사실 사이버강의와 별다른 변별력이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공교과목 중에서도 실시간 온라인 강의를 통해 실질적인 차이 없이 진행이 가능한 수업도 있다. 무엇보다 모든 대학이 재정확보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에서, 시설과 인력의 '효율화'가 가능해보이는 사이버대학화는 계속해서 유혹적인 선택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학에서의 온라인 강의는 한동안은 유토피아적 몽상의 현실화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저렴하게 공급가능한 '새로운' 교육시장을 개척하는 경로가 되거나(예컨대 직장인 및 은퇴자를 대상으로 한 실용적인 재교육/평생교육 모델), 기존 교육모델의 보완적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진지하고 현실적인 예측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첫째, 사람들이 대학교육에 기대하거나 기대하게 될 것은 무엇이며, 대학구성원들이 자신들이 보유한/할 자원과 역량을 통해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전통적으로 국가의 규제가 교육시장의 규칙에 강력한 영향을 끼쳐온 한국에서, 어떤 법적/제도적 규제가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셋째, 기술적 가능성과 제도적 환경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서로 다른 자원과 위상, 생존전략을 가진 대학 및 대학 내 행위자들이 각각 어떤 방식의 서로 다른 대응책을 찾아낼 것인가? 새로운 기술이 보여주는 미래의 가능성은 용이 지키고 있는 보물만큼이나 매혹적이어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기술적 변화도 기존의 사회적 요인들의 작용 없이 스스로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역사적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는 고등교육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인문교양과 온라인 교육의 미래에 관해 짧게 덧붙이자. 유감스럽게도 '사이버대학화'이 실현되기 가장 좋은 지점은 그것과 가장 멀어보이는 이미지를 가진 인문교양 영역이다. 대다수의 인문교양은 별다른 시설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기예의 전달처럼 물리적 접촉을 강하게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현실의 한국 인문교양 교육에서 사이버강의 녹화로 대체될 수 없는 고급화된 교육모델이 제대로 성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인문교양 교수자들이 사이버강의의 대량보급으로 인한 구조조정의 물결 속에서 멸종위기종이 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두 가지다. 전통적으로 선호되어 왔던 해결책은, 최근 강사법의 사례가 그러하듯, 막대한 부작용을 무릅쓰더라도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 '대학 내 인문학 보호구역'을 만들어놓는 것이다(그게 인문학 전공자들을 얼마나 조롱거리로 만들지는 예상하지 않겠다). 


또 다른 해결책은, 물론 각자 어떤 자원을 가진 기구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업모델이든 학생관리모델이든, 몇 명의 사이버강의 녹화배포로 대체되지 않을 '고급화' 전략을 찾아내는 데 있다(당연히 그게 새로운 도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연구든 교육이든 한국의 인문학 교육이 그다지 신뢰할만한 퀄리티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이미 연구자든 아니든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 된지 오래다. 전세계적 코로나바이러스 유행과 사이버강의의 일시적인 전면화는 이제 인문학 연구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진화된 모습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살아남기 힘든 난관을 제시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식을 되풀이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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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etaykov 2020.04.23 02:49 Modify/Delete Reply

    개인적으로 보기에 현재의 인문학은 이른바 문사철의 범위 내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사상을 연구한다고 하면 철학이나 역사학 이외에도 정치외교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의 현대적 논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석사라면 학사 수준으로, 박사라면 석사 수준으로), 그 논의들을 자신의 논문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문사철의 학생들은 사회과학(경영학, 법학, 행정학까지 포함)이나 자연과학, 공학 등 외부의 학문을 반드시 복수전공하거나 부전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인문학은 다른 학문 중에서도 학문을 위한 학문, 특히 그 학문의 옛 대가(플라톤, 칸트, 마르크스 등)의 말을 훈고학적으로 주해하는 수준입니다. 아무리 경제-경영학이 비판받을 점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은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 드러커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교과서에서 가차없이 삭제하고 비판하는 것과는 대조되지요. 그런데, 과거의 이른바 인문학이 강성했을 때의 인문학자들은 현대로 치자면 철학+역사학+물리학+기계공학+생물학+신학+법학 등의 수많은 학문들을 다루거나, 그 학위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인문학이 현재에도 의의를 갖고, 적어도 현대인들에게 무언가라도 어필하기 위해서는 문사철 대가들의 말을 주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유롭게 비판하고, 심지어는 공학까지도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대로 가면 인문학은 인문학자들만을 위한 인문학만이 될 겁니다...

    • BeGray 2020.05.09 13:11 신고 Modify/Delete

      말씀하시는 지점에 동의하는 것도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물론 Tretaykov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 한국의 많은 인문학 수업이 몇몇 저자들의 논의를 무비판적으로 다루는 데 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적어도 서구 학술장을 시야에 넣는다면 인문학 필드 자체의 전문화도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과거에서처럼 학문 분과가 덜 세분화되어 있거나 전문화의 수준이 낮았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 전문연구자들로서의 인문학자에게 타 필드의 논의를 석사급까지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건 (특별히 그런 지식이 필요한 분야라면 모를까) 무리이고 효용도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타 전문가와의 네트워킹을 통한 협업의 조건을 고민하는 게 낫겠죠.

      별개로, 특히 학부 수준에서 사회과학의 이론적 직관이나 모델링의 논리 정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저도 적극적으로 찬성입니다 :)

    • Tretyakov 2020.05.10 22:24 Modify/Delete

      글쎄요. 지금 학부 수준에서 사회과학의 직관이나 논리를 이해하는 건 지금 인문학자들도 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 수준의 인문학적 논의로 인문학이 어떻다고 재단하기 어렵듯, 학부 수준의 사회과학적 논의로 현재의 사회과학을 재단하기 어렵습니다. 인문학을 제외한 타 학문분야들은 학문에서 대가들의 인격성을 제거하고, 다양한 학자들의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사 이상의 타 학문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제가 서구 학술장의 논의를 모두 알지 않아서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인문학 필드 자체의 전문화가 무엇이 있을까요? 오히려 그것도 훈고학적 주해에 포함이 되지 않을까요? 가령 마르크스를 읽어도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레이몽 아롱처럼 다양한 학자들을 끌어와서 비판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반면, 훈고학적인 주해를 벗어난 전문화된 인문학이 존재하나요?

    • BeGray 2020.05.11 23:13 신고 Modify/Delete

      "훈고학적인 주해"가 정확히 어떤 활동들까지를 묶어 지칭하시는지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과거 혹은 현재의 자료들을 신화적으로 읽는다거나, 단순히 비판 혹은 긍정의 대상으로 읽는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훨씬 철저하게 과거의 언어/사고의 장을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시도들은 한국에서도 매우 드물게나마 등장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첨언하자면, 언급하신 레이몽 아롱의 사례는 오늘날의 전문화된 인문학 연구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비전문적인 과거의 연구행태에 가깝거나, 연구자라기보다는 '비평가'의 그것에 가깝다고 여겨질 듯 합니다. 정말로 그 대상을 전문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라면, 레이몽 아롱이 근거하고 있는 전제들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상대화하는 작업을 먼저 진행하겠죠(적어도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라면 그렇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문학 연구 역시 그 전문화의 경로는 "대가들의 인격성을" 신화적 숭배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대신 엄밀한 역사적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에 있습니다(물론 그런 점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19세기를 벗어나면 애초에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 역시 인문학에 속한 여러 분과/방법론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지성사적 방법론에 입각해 전문화를 시도하는 연구자라면 과거의 자료들로부터 모든 특수성을 제거하고 '과학적'으로 읽으려는 시도야말로 시대착오에 빠지기 쉽다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엄격한 문헌학적 훈련은--저는 이것이 몇몇 대가의 말에 별 근거없는 찬반의 주석을 붙인다는 의미에서의 '훈고학'과는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은데--여러 인문학 분과 전문화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명확한 이해없는 비판은 무의미한 독백과 큰 차이가 없으니까요.

      학부 수준에서나마 사회과학의 직관이나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금 인문학자"가 한국에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그 지점에서는 제가 Tretyakov 님보다 비관적일 듯 합니다), 어차피 최근 필드 논의를 필드 바깥의 사람이 전문가의 조언 없이 따라가는 것은 어렵고 늘 생산적인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 점에서는 일차적으로 시민교양 차원에서 (사회)과학분야의 대중적인 쟁점을 이해하는 수준, 이차적으로는 인문학 연구모델에 참고하기 위해 일부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직관과 전제를 이해하는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본인이 더 참고하고 싶은 방법론이 있으면 해당 분야 전문가와 관계를 형성하고 협업을 하면 되니까요. 그런 게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2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학위를 더 따는 걸 의무화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현실적인 커리어 설정을 보면요. 물론 필요한 분야에서 따는 거라든가, 중요한 논문들 몇 편을 읽고 이해하는 건 좋다고 생각합니다.

    • Tretyakov 2020.05.14 22:50 Modify/Delete

      저로서는 말씀하신 역사적으로, 상대화적으로 읽는다는 전문화된 인문학 연구가 과거의 훈고학적 주해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네요. 과거의 훈고학적인 주해들 또한 대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상가를 찬양하기는 어려우니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자고 했고 상대적인 맥락에서, 내재적인 접근으로 이해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그러한 접근은 두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시대와 맥락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적용되기를 바라고 있는데(이것이 다른 문과 학자들과는 좀 더 많이 다른 철학의 특성이지요.) 자기가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건 시대, 맥락을 넘어야 하고, 비판받을 때에는 시대, 맥락으로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발상은 역사와 상대성을 자기 좋을 때 써먹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레이몽 아롱의 비판이 그 역시 비판받을 점 있고 현재의 시대에서 보면 불완전한 측면도 있지만, 이런 기준이면 차라리 시대, 상대성을 초월해서 마르크스를 까는 것도 맞는거죠. 마르크스가 시대를 넘어 영향을 끼쳐야 한다면, 시대를 넘어 비판받을 점도 있으니까.)

      두 번째로, 역사적이고 상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비판받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인문학자들이 싫어할 만한 히틀러, 대처, 레이건, 밀튼 프리드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이런 사람들 또한 충분히 역사상에서 그럴 만한 행동을 취할 이유가 있었고 내재적으로 이해받을 구석이 있지요. 왜 마르크스, 칸트 등에는 그런 접근을 취하면서, 히틀러, 프리드먼, 하이에크 등의 보수주의에는 그런 관점을 취하지 않을까요?

      번외로, 학부 수준에서 타 학문을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이 그나마 쉽게 타 학문에 접근하는 방법이겠지만. 얼마나 효율적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인문학자들이 타 학문에서 역사나 철학을 인용하는 것을 보고 비웃는 게 있는 것처럼, 인문학자들이 학부 수준의 타 학문 성과들을 이용한다고 타 학문에서 좋게 볼까요?

    • BeGray 2020.05.16 15:01 신고 Modify/Delete

      1.

      "과거의 훈고학적인 주해들 또한 대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상가를 찬양하기는 어려우니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자고 했고 상대적인 맥락에서, 내재적인 접근으로 이해하자고 했지요":

      => Tretyakov 님께서 어떤 사람들로부터 어떤 수업을 들으셨는지 제가 알 길은 없겠습니다만, 이건 문헌비판적 전통의 등장과 필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진술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문헌비판이 중요한 학문적 기법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핵심은, 과거의 특정한 텍스트나 언어가 여전히 지금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이후의 사람들이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게 좋을지를 판단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전망하는 언어들이 과거의 여러 지적 전통들의 연장선에 있는 이상, 그 언어를 역사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는 작업 없이 우리 자신의 지적인 행위를 제대로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추정컨대, Tretyakov 님께서는 매우 한정된 고전적인 저자들만을 대상으로 + 그 저자들의 뛰어난 점을 들춰내는 모습만 접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물론 한국 대학 안팎의 여러 인문학 수업에서 그런 식으로만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들은 '훈고학적'이라서 잘못된 게 아니라, 충분히 '훈고학적'이지 않아서, 달리 말해 문헌비판과 그에 기초한 인문학의 전문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있기 때문에 문제일 듯 합니다.

      2. "우선적으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시대와 맥락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적용되기를 바라고 있는데(이것이 다른 문과 학자들과는 좀 더 많이 다른 철학의 특성이지요.) 자기가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건 시대, 맥락을 넘어야 하고, 비판받을 때에는 시대, 맥락으로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발상은 역사와 상대성을 자기 좋을 때 써먹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 반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데요, 철학자든 사상가든 사람에 따라 본인의 주장이 특정한 시공간을 넘어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희망을--당연하지만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건 없는--가진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람들의 주장과 논변을 구체적인 시공간적 맥락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모순된단 말입니까? 만약 상정하시는 상황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주장은 전부 맥락에 제한되지만, 자신의 주장은 보편적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거라면, 그건 그 사람이 비웃음을 받아야 하는 거지 역사적 맥락에 기초해서 텍스트를 엄정하게 읽어야 한다는 방법에 대한 비판의 사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유컨대, 어느 범죄자가 "다른 사람의 칼은 식품조리용으로만 쓰여야 하지만, 내 칼은 사람을 찔러도 된다"라고 주장한다고 할 때, Tretyakov 님은 "그러니까 애초에 칼이라는 게 나쁜거다"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저는 칼을 사용한 범죄를 문제삼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게 칼을 향한 비난의 적절한 근거가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3. "역사적이고 상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비판받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인문학자들이 싫어할 만한 히틀러, 대처, 레이건, 밀튼 프리드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이런 사람들 또한 충분히 역사상에서 그럴 만한 행동을 취할 이유가 있었고 내재적으로 이해받을 구석이 있지요"

      => 우리가 아마추어적인 술자리 평가를 할 게 아니라면, 동시대도 아니고 과거의 누가 얼마나 좋고 나쁘고 의 판단을 하는 게 학술적으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역으로 여쭤보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선과 악 혹은 좋고 나쁘고의 판단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은 도대체 누가 어떤 근거에 기초하여 내린단 말입니까? 저는 역사에서 누가 더 탁월하고 부족한지, 혹은 누구의 성품이 선하고 악한지를 후대인들이 따져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고민은 대체로 몇몇 개인의 썰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며, 때로 그런 평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해도 그런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준을 설정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문제라는 걸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누군가를 충분히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를 가급적 엄밀한 레벨까지 이해하는 게 필수조건이지 않나요? 저는 애초에 그런 평가가 얼마나 필요한지에도 의문이지만, 혹시나 정말로 그런 평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오히려 그런 목표를 위해서 누군가의 언어와 행위를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Tretyakov 님께서는 스스로가 Tretyakov 님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또 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평가되는 게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저는 그런 무책임한 평가를 막기 위해서라도 더욱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학문적이기 이전에 윤리적으로도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봅니다.

      4. "학부 수준에서 타 학문을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이 그나마 쉽게 타 학문에 접근하는 방법이겠지만. 얼마나 효율적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인문학자들이 타 학문에서 역사나 철학을 인용하는 것을 보고 비웃는 게 있는 것처럼, 인문학자들이 학부 수준의 타 학문 성과들을 이용한다고 타 학문에서 좋게 볼까요?"

      => 저는 위 댓글에서 이미 "저는 그 점에서는 일차적으로 시민교양 차원에서 (사회)과학분야의 대중적인 쟁점을 이해하는 수준, 이차적으로는 인문학 연구모델에 참고하기 위해 일부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직관과 전제를 이해하는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본인이 더 참고하고 싶은 방법론이 있으면 해당 분야 전문가와 관계를 형성하고 협업을 하면 되니까요." 라고 썼습니다. 번외로 하신 질문은 제 답변을 충분히 숙지하셨으면 하실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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