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0 연말연시의 노트들. 계몽주의 지성사 연구와 한국의 노학자들 외

Comment 2020. 1. 11. 14:37

[2019년 12월 30일 페이스북 포스팅]


1. <지성사란 무엇인가?> 2교 원고까지 나왔다. 목표는 3월 중 출간이다. 3월까지는 온갖 개인사를 빼더라도 각종 펀딩지원과 학위논문 첫 챕터 초고를 쓰는 과제가 있는데, 과연 그 어느 하나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무사히 저글링을 해내는 게 가능할까? 물론 석 달 뒤에나 알 일이다 :)

2.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들어왔더니 제시 노먼의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The First Conservative)란 책이 번역출간된 모양이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497549). 마침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에서 정확히 이 책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기에 번역 중인 원고를 일부 가져와본다. 작은 광고문구를 덧붙이자면, 여러분, 사상사를 읽고 똑똑해지고 싶으시다면 노먼의 책 말고 곧 출간될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읽어주세요!

*페이스북에서의 가독성을 위해 임의로 문단을 분할했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정치가들 혹은 공인들이 역사책을 적어도 한 권 정도 쓰는 일을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책장은 스스로가 다른 이들의 작업을 적절히 각색했으며 1차 자료를 거의 또는 완전히 무시했다고 고백하는 책들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저작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어느 한 권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게 공정하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영국 보수당 하원의원 제시 노먼Jesse Norman의 《에드먼드 버크》(2013)는 여러 도서상의 최종 후보로 올랐고 호평도 수없이 받았으니 좋은 사례가 되겠다. 물론 노먼의 준수한 필력 및 그가 버크의 출판저작을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책이 호평을 받은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이 지성사적 저술로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버크의 삶과 사상을 구별해 다루는 노먼의 저작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후자, 즉 사상을 다루는 부분이다. 그는 버크를 “근대 정치를 발명한 인물”이며 “정치적 근대성으로 넘어가는 기준점”일 뿐 아니라, “최초의 포스트모던한 정치사상가이자, 근대 세계를, 또한 오늘날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 지칭되는 것을 처음으로 겨냥한 위대한 비평가”로 그려낸다. 나아가 그는 권력을 제한할 필요성,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지도자의 필요성, 추상적 원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피할 필요성, 소위 ‘사회적 가치’를 회복할 필요성 등 오늘날의 정치학이 참고할 수 있는 여러 교훈을 버크에게서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노먼이 버크가 살아가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지적인 논쟁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계몽주의’는 완전히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사상가들은 이론과 추상화를 신봉하는 진영 대 현실성과 신중함을 지지하는 진영으로 분류된다. 당시 버크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너트리기 위한 전쟁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노먼 같은 저자들은 고려하지 않고 있으나 1790년대 버크의 당대인들 모두에게 너무나 명확했던 사항이다. 버크는 혁명의 지지자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쓸어내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위기의 시절에는 자유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것, 전쟁을 치르면서 영국이 파산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버크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버크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들이 파리의 혁명적 공화주의와의 대결에서 패배했고, 따라서 그것들이 파산이나 다름없는, 철저히 쇄신되어야 하는 상황으로 전락해버렸다고 믿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버크는 후대에 계승될 체계적이고 일관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지 못했다.

어느 비평가는 [나의 지적에 대해] 일반적인 독자들이 학술적인 지성사 연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노먼의 책과 같은 저작들은 이렇게 어려운 분야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응수할지도 모른다. 그 말이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루스 스커Ruth Scurr가 《치명적인 순수성: 로베스피에르와 프랑스혁명Fatal Purity: Robespierre and the French Revolution》(2006)이라는 저작을 아름답게 집필했듯, 넓은 범위의 독자들에게 어필하면서도 역사적으로 타당성 있는 책을 쓰는 지성사가들은 분명 존재한다."

3. 내가 알기로 버크, 스미스, 흄을 포함해 18세기 중후반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정치경제사상에 관해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제대로 담은 신뢰할 만한 책은 아직 번역된 적이 없다.

만약 (꼭 보수주의에의 열망에서가 아니라고 해도) 에드먼드 버크에 대해 제대로 된 전기를 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최근 5년 내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intellectual biography는 위에 번역된 제시 노먼의 책이 아니라 리처드 버크(Richard Bourke)의 <제국과 혁명: 에드먼드 버크의 정치적인 삶>_Empire and Revolution: The Political Life of Edmund Burke_(Princeton UP, 2015)이다. 90년대 워즈워스로 박사논문을 쓴 뒤 눈에 띄는 저작이 없던 리처드 버크는 이 천 쪽이 넘는 전기 한 방으로 판세를 뒤집고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과 지성사 주임 교수직을 꿰차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이 모든 면에서 타당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그러나 진지한 연구자의 결과물 중에 그러한 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후 버크 연구자들 중 이 책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상이고 뭐고 번역을 하고 싶다면 꼭 지성사 전공자에게 한번만 체크를 해주세요(...).

4. 리처드 버크의 책과 같은 시기에 데이비드 흄의 사상에 관한 매우 뛰어난 전기,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의 <흄: 지성사적 전기>_Hume: An Intellectual Biography_(Cambridge UP)도 출간되었다. 당장은 아닌데 한 4-5년쯤 뒤에 이 책을 번역하면 어떨까 요즘 생각 중이다--다행히도 이 책은 600쪽 밖에(!) 안 된다. 미리 말해두자면, 18세기 전반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지성사를 모르면 제대로 옮길 수 없는 책이라서 철학자로서의 흄만 공부한 철학전공자가 번역을 맡는 걸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견제구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960년대 Duncan Forbes 이래의 흄/스미스&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사상사를 거의 모르는 철학전공자가 지성사 번역을 엉망으로 하는 건 슈니윈드의 <자율성의 발명>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소망과 함께, 우리는 좀 더 괜찮은 초기 근대 영국 지성사 연구서의 번역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5. 마지막으로 오늘 로그인을 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한 기사를 링크한다(https://v.kakao.com/v/20191229202515046).

짧게 말하자.

- 2030세대 청년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희망하는 청년정치(인)의 모습: 유럽 정당(의 이상적인 모습)에서 그렇듯, 지역구부터 커리어를 쌓고 젊은 나이에 한 명의 훈련된 정당정치인으로 성장하여 자신의 의제와 조직, 지지층을 가지고 등장하는 청년정치인&그걸 가능하게 하는 정당 내 시스템.

- 민주당을 포함해 한국 정당들의 운영진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청년정치(인)의 모습: 청년층 지지율이 하락하니까 어떻게든 스타성과 미담이 있는 사람을 단기로 영입해 '민주당은 이렇게 청년에도 관심이 있습니다!'는 이미지로 분위기를 반전! 한 명의 청년정치인이 자신의 경험, 의제, 지지층, 커리어를 쌓고 성장하는 시스템...의 구축은 무슨, 그런 생각할 시간이 어딨나?

원종건 씨의 역량과는 별개로(다른 기사에서 언급된 그의 인생경로를 보면 그가 매우 좋은 사람임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당 정책결정권자쯤 되면, 이런 식의 단기영입에 쉽게 여론이 돌아설만큼 청년층이 멍청하지 않다는 걸 이해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게 안 되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요즘 김종인 전 의원이 중립지대 이야기하면서 젊은 피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실소가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3년 반 전, 민주당 비례대표후보 결정과정에서 청년정치인 선정에 잡음이 생기니까 아예 청년정치인들을 후보자 순번에서 멀찍이 뒤로 보내버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본인일텐데, 갑자기 웬 청년타령인가 싶다. 한국의 청년정치를 가장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이란 게 2019년의 마지막 코미디이길 바랄 뿐이다.



6. 박정자 선생이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인문 감성으로 자본주의 공부하기>(기파랑, 2020, http://www.yes24.com/Product/Goods/85473599)란 책을 출간하실 예정인가보다.

다른 건 차치하고 책의 중심부에 홉스, 로크, 루소, 스미스, 버크, 하이에크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의 '역사'가 놓여있는 목차를 보자면 한숨이 나온다. 홉스부터 버크까지 이어지는 스칼라십이 지난 반 세기 간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아주 피상적인 수준에서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식의 목차를 쓸 수가 없다. 적어도 1970년대부터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성장,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탄생과 같은 테제로는 영국 18세기 사상사가 전혀 설명될 수 없다는 비판적 교정이 자리잡아가는 과정이 바로 20세기 후반 영국지성사학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교정을 이끈 연구자들이 좌파라서 그랬냐면,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그 반대다. 한국의 정치적 스탠스에서 볼 때 우파에 훨씬 가까운 역사가들은 저러한 교정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그리고 더하여 미국의 '정치철학'과) 수십 년에 걸쳐 처절하게 싸웠고, 이제 홉스, 로크, 스미스, 버크 스칼라십의 주류에서는 박정자 선생이 여전히 반복하리라 예상되는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는다. 극보수적인 스탠스로 영국 장기 18세기에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력 있는 통사 중 하나인 J. C. D. Clark의 <잉글랜드 사회, 1660-1832: 구체제의 종교, 이데올로기, 정치>(_English Society 1660-1832: Religion, Ideology and Politics during the Ancien Regime_, 2nd ed(2000)[초판은 1985])에서 로크랑 흄, 스미스를 설명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권의 붕괴 이래, 여러 우파 원로들이 한국에서 괜찮은 우파 사상가들이 안 나온다는 한탄을 토로하고는 한다. 내 생각에 이유는 명백하다. 자칭 우파 지성들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그에 더해 자신들의 지적 무능과 나태함을 드러내는 걸 부끄럽게 여길만한 반성능력도 없다. 수십 년 전에 폐기된 논의를 반복해도 그걸 교정해줄 지적 네트워크도 없다. 다른 나라 우파들이 열심히 연구를 해놔도 연구를 안 따라가니까 업데이트가 안 된다(우파들은 좌파를 연구한답시고 386의 약점과 과거사를 캐내는 대신 다른 나라의 우파 지식인엘리트들이 뭘 하는지 공부하는 게 인생을 덜 허비하는 게 아닐까 겸손한 제안을 드려본다). 업데이트가 된 사람이 없으니까 서로 비판도 개선도 안 한다. 그리고 젊은 우파들은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1960년대 냉전기 미국 우파들을 수입하거나 복음주의 성경공부나 하는 게 지적인 활동의 전부인 청년우파들의 우직한 성실함을 봐라--뷔리당의 당나귀라 해도 이들보다는 더 영악할 것이다. 당신이 최소한의 지성을 가졌다고 하면, 이런 데 들어가서 같이 하고 싶겠나?

그러니, 혹시라도 진심으로 우파의 미래를 걱정하는 분이 이 포스팅을 읽으신다면, 오오 박정자 선생 오오 같은 구호를 외치기 전에 이런 책으로부터 단호히 고개를 돌려 공부를 해라. 돈이 있는 분이라면 Liberty Fund Online Library 를 몇 달 정도 살펴본 뒤 한국에도 비슷한 거 만들고, 돈이 없으면 영어공부를 해서 리버티펀드에서 무료로 올려놓은 사상사 고전 최상급 비평판을 읽어라(한국 우파 중에 리버티 펀드 이야기 꺼내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는데, 그것도 안 되는 레벨이면 한국 우파 지식인 집단은 망해서 사라지는 게 더 유익할 것이다). 그게 태극기를 보며 가슴찡해하고 안티페미, 반동성애 활동에 공감하는 것보다 당신들에게 훨씬 도움되는 일이다.


[2020년 1월 9일 페이스북 포스팅]

7. 내 직접적인 연구분야가 아니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초기 근대 및 계몽주의 시기의 유럽지식인들이 중국과 유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최소한 영어권에 국한하더라도) 이미 적지 않은 연구들이 쌓여있다. 특히 레이던Leiden의 브릴Brill 출판사에서는 지금도 초기 근대 예수회의 구성원들이 중국에서 무엇을 했고 또 유럽에 중국을 어떻게 소개했는지에 관한 연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좀 더 뒤인 18세기 계몽주의 시기로 들어와 자료들을 읽다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지식인들이 자국의 "사제통치"priestcraft를 비판하기 위해 중국의 유교를 '종교적 미신을 무기로 인민을 지배하는 사제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하는 경우를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와 자료를 다룰 때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초기 근대 유럽인들은, 중국의 문헌을 소개하고 번역하는 이들이든, 그러한 자료에 기초해서 중국/유교를 칭송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이든, 각자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은 그들의 중국/유교관,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중국/유교를 상상하고 재현하는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아주 기본적인 맥락을 모르고 몇몇 사상가/지식인들이 중국과 유교를 어떻게 이야기했는지에만 일차원적인 관심을 쏟다보면, "십수년간 유럽의 사료들을 추적한 필자의 연구"라 할지라도 완전히 틀린 해석에 도달하기가 매우 쉽다. 황태연 교수의 칼럼은 바로 그런 안쓰러운 결과물의 대표적인 예다(https://news.joins.com/article/23676554).

18세기 계몽주의 시기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솔직한 평가를 내리자면, 황태연 교수의 칼럼은, 그리고 그 칼럼의 밑받침이 되는 서구 계몽주의를 다룬 저작 상당수는 거의 모든 문장/문단이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글 상당수는 1차 문헌을 매우 자의적으로 읽으며, 기존에 학계에서 축적된 논의를 놀라울 정도로 다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황태연의 저작은 커다란 해석 이전에 사실관계의 차원에서부터 서구 계몽주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데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해로운 텍스트다. 그의 저작에 유용한 면이 하나 있다면, 그의 저작을 진지하게 인용하는 연구자들을 큰 고민없이 거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료조사시간을 아주 약간 단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위대한 공자철학을 서구인들이 받아들여 근대계몽주의를 이루었고 그것이 다시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우월한 근대화에 기여했다'로 요약되는, 계몽주의 연구자라면 당연히 기괴한 농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이야기가 한국학/동양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유통되는 광경을 드물게나마 접할 때면 동료 연구자로서 낯이 뜨거울만큼 부끄러워진다. 자신의 분야 바깥을 잘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오류에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더불어 <중앙일보>의 편집진은, 만약 그들이 정말 자신들이 합리적이고 세련된 중도적 보수라고 생각한다면, 학문적인 기본이 안 된 이야기를 필터링하려는 노력 정도는 했으면 좋겠다. 한국어권에 제대로 된 18세기 유럽/영어권 지성사 전공자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건 사실이지만, 아주 약간만 발품을 팔면 최소한의 자문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나? 이런 칼럼을 볼 때마다 자칭 합리적/세련된 보수가 실제로는 반지성주의의 첨병이 아닌가 고소를 금할 수 없다.



8. 정치신학/세속화 연구가 별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거다. 실천적인 지향을 가진 정치신학/세속화 연구자라면, 몇몇 철학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노력 못지않게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와 정치의 상호교차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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