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인 거대도식에 거리두기

Comment 2019. 10. 13. 02:27

[9월 7일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글]


한 사회 혹은 세계가 마주한 문제를 어떤 거대한 서사와 도식에 따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또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해결책을 탐색하는 건 특히나 앎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흔한 버릇이다. 복잡한 디테일을 전부 제거한 추상화된 모델에 기초하여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집적된 생명체의 크기에 있어서든 거대한 덩어리를 하나의 분석단위로 설정한 뒤 그것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을 몇 가지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해보려는 시도에는 분명 매력적인 면이 있다. 우리의 정신은 그러한 추상화를 통해 본래 우리의 두뇌가 적절하게 품어내기 힘든 범위까지도 계산해볼 수 있다. 특히 어느 정도 동적인 체계를 수립할만큼 영민한 이들이라면 사회의 역사적인 변화와 같은 것을 상당히 일관된 논지로 설명해보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그 무엇보다 커다란 쾌감 중 하나를 느껴보기도 한다(이는 대체로 부족한 지식에서 비롯된 착각의 결과물이지만, 어쨌든 그런 쾌감이 우리의 지성을 진작시키기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학문이 진보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거대도식이 대체로 틀릴 가능성이 높고, 그로부터 잘려져나간 미세한 요소들이 역사에서 다양한 형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심지어는 거대도식에서 사용된 범주들 자체가 대체로 인위적인 가공품으로서 종종 냉정하고도 생산적인 지식의 생산을 가로막기도 한다는 위험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의 연구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는 데 있다. 물론 우리에겐 언제나 여러 가지 실천적인 이유로 인해 거대서사를 구축해야만 하는, 혹은 그런 게 허용되는 순간들이 다가오기 마련이며 거대서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실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설령 거대하고 추상화된 설명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때조차도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매우 제한적으로만 설명하며 그러한 설명이 언제든 사소한 원인에 의해 틀릴 수 있기에 분석자 스스로가 자신의 도구에 다른 누구보다도 엄격하고 회의적인 시선을 견지해야만 한다는 조심성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다.

특히나 다른 뛰어난 이의 거대서사를 접하게 될 때, 그것이 매끄럽고 또 심원한 꺠달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충실한 연구자는 그러한 서사가 현실의 변화를 충분히 기술·설명하는지에 대해 본능적인 의심을 품게 된다. 그는 그러한 '거대서사 자체'가 이전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여러 관념을 취하여 구성되곤 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리기 좋은 위치에 있다. 더불어 가장 마이크로한 수준에까지 들어가보면, 혹은 파편화된 자료를 직접 만져보면, 어느 한 가지 거대서사에서 포착되지 않는 중요한 요소들이 이곳저곳에 부유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매끄러운 설명을 박살내어 버리곤 하는 상황을 수차례 목도한다(우리는 전문연구자의 '전문성'을 좁은 시야와 결부지어 조롱하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고 정교한 지식이 결코 거저 만들어질 수 없으며 그러한 지식의 변화로부터 아주 많은 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오류에 가깝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가령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를 주의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가 역사변화의 도식, 즉 신분·파당 간의 경쟁, 토지분배와 불평등, 정치체의 덕성(혹은 힘virtù)과 부패가 공화국 및 제국의 발흥과 멸망에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한 해석적 서사를 고전기의 로마사 서술로부터 물려받아 매우 정교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18세기의 몽테스키외나 기번의 문명사 모델을 거쳐 20세기의 여러 역사가·사회분석가들에게도 거의 그대로 살아남아 여전히 우리 자신의 사회를 분석하는 틀의 핵심적인 토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에서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시대를 찾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오늘날은 과거로부터 통용되어온 설명틀이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 일상화된 것처럼 보이는 때다. 따라서 세계를 더 명료하게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거대서사에 의존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거대서사가 종종 어리석고 순진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사람들을 무익한 절망을 거쳐 해로운 결과로 인도하거나, 구체적인 변화의 지점들을 충분히 섬세하게 읽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 있음을 잊으면 곤란하다. 예컨대 만약 절망감에 빠져 사회가 특정한 격변을 통해 '리셋'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최근에는 이런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마주하곤 한다), 19세기 말부터 양차대전기에 이르기까지의 서구에서 그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비일비재했고 종종 이후에 볼 때 타당하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는 것 또한 기억해주기 바란다--음울한 감정이 깃든 거대한 추상의 도취에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그러한 추상과 정념이 사실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것이며 때로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분석을 좀 더 유쾌한 회의감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한 유쾌하지만 엄격한 회의주의, 쉽게 속단하지 않고 가능한 끝까지 더 많은 요소를 관찰하며 성급한 인과론이나 도식을 적용하지 않는 신중한 태도가 바로 오늘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연구자가 한 명의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미덕중 하나라고 말해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연구자조차 연구를 존중하지 않으며, 학술장을 구성하는 규칙들이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는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잘못된 거대서사의 미몽에 빠져드는 걸 막아내기란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로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거대한 진리를 위해 사소한 진실(들)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을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한 각오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때 그때의 '실용적' 필요를 위해 동원되는 단순한 부품 이하의 처지로 떨어질 것이며, 그렇게 회의와 비판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한 사회일수록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세계에까지 위협적인 무언가로 손쉽게 전락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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