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인문학과 글쓰기교육의 개선을 위한 단상

Comment 2019. 12. 8. 17:40

1.


한국인들이 대학의 입학과정에는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거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덜 되어먹은 근대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진실로 남아있다. 이런 '시대정신'은 인문대학의 교육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교수자와 학생 간의 기묘하지만 합리적인 동맹이 그 한 예이다. '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은 읽고 쓰는 것이다'라는 표어는 관짝에 모셔놓고, 교수자는 수업에서 글쓰기 과제를 거의 내주지 않거나 '형식적인' 수준의 글쓰기 지도만을 할 뿐이다. 읽고 쓰기가 자신들의 경쟁력의 핵심임을, 그리고 그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교정과 훈련을 거쳐서만 생긴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다수의 학생들은 그런 수업을 '오오 꿀과목'이란 평가와 함께 널리 공유하며, 자신들이 이번 학기도 덜 빡세게 살았다는 것을 자랑과 안도감을 섞어 표출하고는 한다. 졸업 후 일부 운없는 학생들이 논문을 쓰고, 보고서를 쓰고, 기획안을 쓰고...등등의 과정에서 '내가 인문대에서 뭘 배웠지?...정작 글쓰기를 못 배웠구나 ㅠㅠ'라는 깨달음과 직면하면서 그러한 동맹의 진실은 드러나지만 때는 늦었다. 오늘도 대학에서 다수의 교수자와 다수의 학생은 그렇게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으며, 좀 더 나은 교육, 학생에게 꼭 필요한 교육을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수업은 '열정적인 괴짜' 혹은 '기피과목'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오늘 아침 여러 지인들이 학교 학생커뮤니티에 올라와 폭발적인 호응을 받고 있는 글 하나를 보내주었다. 글의 요점은 학부 때 수강했던 수업의 매우 불친절한 글쓰기 과제를 회고하며 인문대 교육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토로하는 것이었다. 과거부터 내 포스팅을 읽어온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이 문제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세부사항의 타당성과 별개로 해당 필자의 문제의식에, 특히 글쓰기 과제에 대한 불만에 분명히 동감한다. 서울대 인문대를 포함하여 한국의 인문대 전반에서는 글쓰기 교육, 좀 더 곧바로 말하면 학생들이 


①언어로 구성된 자료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②해당 자료를 정확히 요약하고 쟁점을 짚어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하여 

③그에 기초하여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무엇보다 다른 독자들이 무언가 얻어갈 수 있도록 서술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이러한 능력이 인문학 전공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화된 텍스트를 다루는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다른 전공보다 더욱 크게 요구된다). 특히 인문학 전공자들은 오늘날 인문대학의 위기를 자본주의와 경쟁사회의 심화나 취업난 같은 외부요인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분석(?)은 부분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긴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대학의 인문학교육이 학생에게 과연 무엇을 제공하는가? 4년여의 교육을 받고 졸업한 학생은 인문대교육으로부터 어떠한 역량을 기를 수 있으며, 그 역량을 졸업 후의 다양한 삶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인문학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신성한 무언가라고 해도 결국 학생들에게 유의미한 역량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버림받는 게 필연이다. 나는 대학의 인문학교육기관이, 우리 인문학 전공자들이 인문학 졸업자들이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강력한 능력을, 다시 말해 '읽고 쓰는' 역량의 육성을 위한 합리적이고 체계화된 교육을 지금까지 제공하지 않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변화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까지 인문학 관련 정책의 양대 키워드였던 '기초학문육성-인문학대중화'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넘어가자)



2.


나와 같은 문제제기에 대한 고전적인 반론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인문학교육을 비롯한 고등교육은 학생들이 알아서 자신의 능력을 신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구질구질하고 기초적인 글쓰기교육을 하라는 건 모욕적이다. 둘째,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애초에 교수들부터 글쓰기를 제대로 하는 사람도 글쓰기가 중요한지 아는 사람도 몇 없기 때문에 개선이 불가능하다; 변화를 위해서는 교육자가 교육되어야 하는데, 교수들은 교육이 안 되는 집단으로 악명이 높지 않은가. 셋째, 문제의식에 동의하고 바꿔야 하지만 이런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매우 많은 인적자원이 투여되어야 하며, 현재 한국 대학의 자원을 고려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 반론은 반론이라기보다는 (망해가는 필드에 속한 사람들이 흔히 공유하는, 재치는 있지만 현실적인 도움은 안 되는) 냉소적인 감정의 표현에 가깝기 때문에 제외하고, 첫 번째와 세 번째 반론에 답해보자. 낭만적 보수주의를 가장한 반지성주의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반론에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등교육에 적합한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은 제로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전제로 하며, 현대 한국에서 대학입학생에게 그런 교육이 제도적으로 제공된 적은 없었고 지금도 중등교육에서 그런 게 제공되지는 않는다. 본인이 어느 사회,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최소한의 고려를 한다면 이런 반론을 진지하게 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특히 전공자 중에 '나(때)는 그렇게 해도 잘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이의제기를 하시는 분이 종종 있으신데, 제도의 개선은 어디서나 잘 적응하는 극소수의 뛰어난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대신 평범한 다수의 학부생이 더 좋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적어도 자기주도적 학습이 가능한 수준의 지적 도구를 학생들에게 쥐어줄 필요가 있다--학생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문학 분과의 생존을 위해서도 그렇다.


세 번째 반론은 원칙적으로 타당한 현실을 지적하며 나 또한 그 문제의식에 매우 깊이 동의하지만(그런 점에서 정권 및 정당들이 고등교육의 질 확보라는 문제에 무심한 현황은 더 크게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반론이 곧 현재의 환경에서 인문대 글쓰기교육의 개선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자원의 투입을 통해서만 가능한 개선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어진 자원 내에서 보다 좋은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제도, 문화, 행위양식을 수정하는 방향의 개선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반대로 후자에서의 합리화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자원을 투입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고야 마는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 흔하게 본다). 오늘날 대학에서 행해지는 교육적 실천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가적인 자원 못지않게 간단하고 기초적인 차원의 합리화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3.


그렇다면 어떠한 종류의 개선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글쓰기교육이라고 할 때 가장 흔하게 꼽히는 것은 <첨삭-면담&수정 후 제출-재첨삭> 과정의 반복이다. 좋은 교수자와 성실한 학생의 결합할 때 이 방법은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일회성이 아닌 반복적인 첨삭과 면담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인력과 시간, 장소 등 적지 않은 자원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가끔 스스로의 시간을 갈아넣는 영웅적인 교수자/조교가 존재하지만) 곧바로 제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더불어 각 학교, 학과, 전공에 따라 처한 환경이 다른만큼 모든 곳에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개선방안을 억지로 제시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제한적인 경험 하에서 떠오르는 방법을 몇 가지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내 생각에 보다 적은 노력으로 좀 더 명확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학과/전공에 따라, 혹은 수업에 따라 필요한 기준에 맞춘 명확한 글쓰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너무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수업은 의외로 극히 드물다). 수업에서 어떤 글을 어떻게 쓰기를 요구하는지, 학생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만 (가급적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제시해줘도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참조할 모델이 생기고 글 첨삭자 입장에서도 좀 더 중요한 쟁점을 효율적으로 지도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학생들이 제출하는 글쓰기 과제를 여러 수업에 걸쳐 꾸준히 검토해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실수하는 지점들을 관찰할 수 있고, 그런 실수를 명확하게 나열하면서 피하라고 조언해주면 (적어도 의욕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실책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글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방식의 질문을 던지고, 어떤 스타일의 논증을 해야하는지--가령 문헌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반드시 텍스트로부터의 직접 인용에 기초하여 유의미한 근거를 제시하라는 주문 등--글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은지와 같이 이미 숙련된 연구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해보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 처음으로 글을 쓰는 학생들 다수에게는 어렵고 막막한 지점들에 대한 가이드를 하나하나 미리 제시해주는 게 좋다(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여진 모호한 글보다 딱딱한 문장이라도 요지를 명확히 드러내는 게 낫다 등등).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해친다'는 반감이 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그런 분께서는 스스로가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놓였을 때 어느 정도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상상해보신다면 이처럼 순박하고 낭만적인 반론을 자제하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잘 훈련되어 있어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할 단계에 도달한 학생들이 아니라 그러한 단계에 이를 수 있도록 기초적인 도구를 제공받아야 하는 학생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식하자. 가끔 나오는 정말로 뛰어난 학생이 있다면, 이러한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지 않아도 더 좋은 글을 제출할 것이고 그에 합당하게 평가하면 된다(물론 그런 예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거시적인 차원으로 올라간다면, 대학원생이 수업조교를 맡아 첨삭업무에 참여하는 학교의 경우, 그러한 조교가 충실한 글쓰기지도를 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게 필요하다. 결국 첨삭지도 수준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첨삭자의 역량에 달려있는데, 현재 한국의 대학은 조교를 위한 교육이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빈약하며 이는 대부분의 인문학과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이미 익숙하고 성실한 성격의 대학원생이라면 그런 교육 없이도 잘 하겠지만,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학부를 갓 졸업하거나 기껏해야 상처 가득한 석사논문을 쓴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원생이 참고할 수 있는 잘 정리된 교육과정 혹은 매뉴얼이 있다면 실제 학부생들이 체감하는 교육수준 또한 올라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항을 포함한 글쓰기교육 개선을 개별 수업교수자들의 책임으로만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이 무엇을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지, 어떤 실수를 자주 하는지, 어떤 스타일의 코멘트로부터 더 큰 도움을 받는지, 어떤 지도가 불필요하며 부작용을 낳는지 등 교육과정의 구체적인 개선은 한 번의 수업을 통해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수 년에 걸쳐 수십, 수백 명의 데이터를 참조하면서 점진적으로 수정/보완되어야만 하며, 이는 개개인이 아닌 최소한 학과 단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학생이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어떤 과목을 어떤 순서로 듣게 되며 각 단계에 어떤 글쓰기교육이 필요한지 분석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도 적어도 학과/전공 단위의 고민이 필요하다. 글쓰기교육의 강화를 개별 교수의 책임에 맡기기도 어려울 뿐더러, 다른 과목이 다 적은 부담만을 주는데 어느 한 과목만 많은 과제를 요구할 경우 학생들은 자신에게 장기적으로 유익한 과목을 듣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즉흥적인 계획을 떠올려보자; 전공과목은 그다지 부담이 크지 않도록 두더라도, 대신에 학과에 진입한 학생에게 1년 정도에 걸쳐 기본적인 글쓰기를--즉 어느 수업에 들어가도 주어진 과제를 큰 문제없이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을--훈련시키고, 고학년 차에 대학원 혹은 다른 전문적인 기관에 들어가 적응하는데 무리가 없는 수준의 보고서를 쓰도록 하는 연습을 시키고자 할 경우, 이러한 과목을 특정한 시기에 의무적으로 혹은 적절한 보상 하에 들을 수 있도록 학과 차원의 협의가 필요하다.



4.


 대학의 인문학교육이 단순히 전공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전공지식을 보다 잘 익히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특정한 역량의 획득과 증진을 목표로 한다면, 한편으로 우리가 학생들이 어떤 형태의 글을 쓰도록 할 것인지, 학생들이 졸업 후에 어떤 종류의 글쓰기를 수행하게 되는지에 대한 예측과 함께(나는 어떤 학과에서 아무런 문헌적 근거 없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스스로의 주관적인 감상을 늘어놓은 글에 높은 평가를 내리는 걸 보고 황당함을 참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그게 인문학이 망하는 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문학기구의 대응 또한 제도적인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개별 교수자의 자율성은 중요한 것이지만, 인간이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와 제도 차원에서의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학생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부터 시작해 일반적인 제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까지, 인문학 전공자들이 강조해온 비판적인 사고력을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해봐야 한다. 인문학 전공자가 졸업 후에 어디를 가더라도 스스로의 강점을--모호한 '인문학적 감성' 따위의 주술적인 신념이 아니라, 코드화된 현실을 명확히 분석하고 자신의 주장을 가장 효율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을--잘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그때서야 "인문대는 취업도 문제지만 교육도 엉성하다"는 식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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