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경찰관의 체력검정 강화와 '남성주의적 인식'에 관하여
Comment 2019. 5. 28. 01:342019년 5월 27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대림동 주취자 공무집행방해 사건' 혹은 이른바 '대림동 여경 논란'에 관한 성명서를 내면서, (여성을 포함한) 경찰 선발과정에서 체력 검정 기준을 상향시키겠다는 경찰청의 결정이 "물리력이 경찰의 가장 주요한 역량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왜곡된 남성주의적 인식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성명서 링크: http://www.kncw.or.kr/admin/bbs/board.php?bo_table=02_03&wr_id=121).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이번 사건을 두고 해당 경관 및 여성 경찰관 일반에 가해진 비난 상당수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며,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성명서에서 '여경 무용론'을 비판한 데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어떠한 검정기준이 채택될 지 대략의 가늠조차도 하기 어려운 현 시점에서, 체력검정 강화 자체가 "남성주의적 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명백히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평등의 진전에 기여하기는커녕 역으로 장애물이 될 뿐이라는 사실은 외면하기 어렵다.
내가 해당 성명서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에서다. 첫째, 분명 여성경찰관 채용과정에서의 체력검정 강화가 남초 커뮤니티에서 주로 논의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체력검정 강화 자체가 "남성주의적 인식"에 기반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치 강한 체력은 남성들의 전유물이고, 여성은 강한 체력과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설정하는 '역량의 성별화'를 전제하는 듯 읽히기 때문에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명서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물리력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면서 "민원인과 소통하며 피해상황과 갈등을 조정, 중재하는 등 소통능력이 필수적이며 여성 피해자 및 가해자가 발생했을 시 수사과정에서 여성 경찰관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때, 이러한 태도가 역량/과업의 성별 분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 여성 경찰관 혹은 지망자가 기본적인 물리적 역량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리라는 반여성주의적 태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우리가 성차에 따라 특정한 영역의 역량이 다르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는 적절하고 효율적인 역량측정을 위한 합리적인 논의를 요구하는 사실이지 여성으로부터 물리적 역량을 박탈하는 선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둘째, 현재 우리 담론장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성명서와 같은 논리는 최근의 반여성주의적 담론을 논박하기는커녕 더욱 확산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근의 여러 기사를 굳이 참고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여성혐오적/반여성주의적 담론은 한국 여성을 '합당한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결실만 누리려는 기생적 존재'로 보는 시각을 확산시켜왔으며, 이러한 논리에 따라 여러 여성주의적/성평등적 정책 자체에 강력한 대중적 반감을 조장하고 있다. 이는 이번 대림동 사건을 둘러싼 '여경 무용론' 혹은 갖가지 무분별한 인신공격에도 그대로 나타난다--여성경찰관은 훨씬 낮은 자격요건만을 요구받으면서도 업무에 필요한 노고와 역량강화는 기피한다는, 요컨대 여성을 역량과 책임성 모두에서 열등한 존재로 그려내는 편견이 바로 그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이번 성명은 정확히 그러한 편견이 사실인 것인양 확산시킬 수 있는 논리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성명집필진의 본의가 무엇이든, 이 논리를 접하는 다수의 남성독자들은 성명서가 여성에게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이러한 경향 자체는 성평등이 진전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하는 '이기적이고 무책임, 무능력한 여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읽어낼 것이며, 이를 '여경 무용론', 나아가 여성 일반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관련 기사의 댓글들을 보라: https://v.kakao.com/v/20190527204050335).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표자들의 추정 연령대를 고려할 때, 그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어떤 상황인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내 생각에는 체력검정의 강화·합리화 자체는 거부하지 않으면서 보다 적절하고 합리적인 측정방식을 찾아나가는 쪽이 보다 타당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물리력이 곧 남성적인 영역이라는, 혹은 그렇게 오독될 수 있는 주장을 하는 대신에, 왜 우리는 여성이 최소한의 신체적 역량조차도 발휘할 수 없는 존재라는 편견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지, 우리의 초중등교육과정에서 여성의 신체능력을 더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행해지고 있는지를 검토해보는 편이 더 여성주의에 부합하는 실천일 것이다.
P. S.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여경무용론'에 찬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길 바란다. 대림동 사건을 통해 여성 경찰에 대한 모욕적인 비난이 일상화되면서, 그 반작용으로 '남성' 교사의 성희롱·성폭력 사건 기사 댓글란에는 교단에서 남성 교사 자체를 추방하라는 요구가 계속해서 더 큰 목소리로 등장하고 있다(당연하지만 성희롱 성폭력 교사의 대다수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기서 남성교사를 옹호하기란 쉽지 않다). 대림동 사건이 남초의 승리의 찬가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개별 남성이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다른 사건에서 해당 직군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공격하는 보복전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경찰, 교사를 포함해 지금까지 특정한 성별과 동일시되어왔던 직군들의 성별화 경향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흐름이 남성, 여성, 혹은 그 누구에게든 결코 더 좋은 일이 아님은 불합리한 성별 제약에 동의하지 않는 그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대림동 사건을 보면서 경찰에게 더 강력한 신체능력이 요구된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으로부터 여성경찰관을, 여성을 싸잡아 마음껏 비난해도 된다는 행동으로 비약할 근거를 찾아내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이른바 '한남=잠재적 성범죄자' 도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정도의 사리분별은 갖추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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