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연구)노동을 다시 생각하기 / 기타 단상

Comment 2020. 12. 1. 06:50
전국대학원생노조 의 요청을 받아 아래 오마이뉴스에 아래 기고문을 썼다(http://omn.kr/1qpue). "대학원생 노동기본권"이란 주제를 받아들긴 했지만 원생노조 지부장께서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셨고, 그래서 현재 오마이뉴스에 올라가 있는 표제와 실제 내용이 아주 완벽하게 합치하는 것은 아닌 글이 되었다(원문은 하단 참조). 본 포스팅에서는 내가 어떤 흥미와 관심사를 갖고 이 기고문을 쓰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덧붙인다.

1.

정치사상·정치철학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곧바로 눈치채셨겠지만, '소극적'(negative) 권리로서의 노동 개념과 '적극적'(positive) 행위·체험으로서의 노동 개념 사이의 대비는 당연히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저 유명한 "자유의 두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 및 그를 둘러싼 논쟁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벌린은 '회의주의적 냉전자유주의자'로서 침해받지 않을 권리로서의 소극적 자유와 공동체·집단적 자기실현으로서의 적극적 자유를 대비하고, 또 전자를 옹호하는 논변을 제출했다. 특히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와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한국어로 번역된 텍스트로는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Liberty before Liberalism>를 보라)를 비롯한 '자유주의' 비판자들은 벌린의 구도를 차용하면서도 자유 개념의 복잡한 용법들을 다시 발굴했으며, 그것이 '소극적인' 용법에만 머무를 때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물론 이러한 '자유' 개념의 논의에서 가장 심오한 성찰을 보여주는 저작은 J. G. A. 포콕의 <야만과 종교> 제3권이다)--오늘날 '신공화주의'를 포함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는 그러한 논쟁들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기고문에서 나의 관심사는 그러한 주제를 전문적인 정치철학·윤리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대신 그러한 논쟁과 대화 자체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시선을 통해 우리가 마주한 현상을, 그리고 현상을 언어화해온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있었다. 원문 기준으로 기고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절은 우선 대학원생 운동에 나선 이들이 왜, 어떤 맥락에서 노동권의 언어를 통해 대학원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2010년대 한국 대학에 특유한 조건에서 빚어진 반론과 마주한 이들은 그러한 반론을 돌파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전략을 탐색했다. 이처럼 맥락과 언어행위, 행위자의 전략에 초점을 맞춰 대학원생 (연구)노동권 개념 활용을 검토한다는 점에서 1절은 가장 평범한 형태의 지성사 서술방식을 채택하여 현상을 기술한다.

2절은 조금 더 긴 역사적인 호흡 속에서 볼 때 '노동'의 개념이 다양한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무엇보다 나는 코젤렉 개념사 사전 <노동> 항목을 다시 참고했다). 노동 개념이 반드시 소극적 권리로서의 용법에 국한될 필요는 없음을 깨닫게 되면, 다른 선택지들을 통해 현상의 어떠한 측면을 조명하고 또 서사화할 수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약간 추상적으로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개념을 통해 현상을 분석한다는 것은 특정한 서사화를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과 같다. 아마도 푸코주의자들이라면 '계보학적'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어할지 모르겠는데, 그 어떤 태그를 붙이든 간에 요점은 분명하다. 다른 용법의 '노동' 개념을 통해 우리는 대학원생·연구자의 역량강화empowerment라는 주제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과 전략이 무엇인지를 논의의 지평 내에 끌어들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용법은 다른 사고를, 다른 사고는 다른 전략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말해왔듯, 나는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단순히 특정한 '신화'에 입각한 슬로건이나 규범적 선언문을 되풀이하는 이데올로그의 역할을 반복해서는 안 되며(그것이 내가 연구자들이 신좌파적 철학·'포스트' 이론에 여전히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구체적이고 엄밀한 연구 혹은 그와 닿아있는 통찰에 기반한 실천을 가능케 하는 연구방법론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전문역사가들 이외의 연구자들 또한 지성사 방법론을, 적어도 그 요점을 활용한 사유모델을 이해하고 자신의 연장통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내 기고문이 지성사적 접근법이 갖는 실천적인 잠재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한편으로 현상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규범적 변화를 요구하는 사고·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또 그러한 개념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또 새로운 목표와 전략을 사고하게 하는 언어의 선택지를 확보해야 한다. 지성사는 단순한 역사연구방법만이 아닌, 이러한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하는 사유도구다.


2.

나는 21세기 한국사회의 도덕언어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법률적인' 언어가 대중적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느덧 우리는 절차·규정과 권리, 계약과 위반, 피해와 가해 등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유통되었던 도덕적 논리들, 예컨대 '기득권에 맞서는 저항'이나 '약자·빈자에 대한 배려와 예의', '사회구성원들 간의 평등'이 법과 계약보다 우월한 가치일 수 있다는 주장이 이제 '감성팔이'로 조롱받으면서 사회적인 설득력을 거의 상실했다는 사실을 보라. 특히나 586 진보 연구자들, 혹은 그들의 프레임을 그대로 답습한 사회비평가들이 주목하곤 하는 '공정성'의 문제는 내 생각에는 이처럼 사법적 논리가 도덕 관념에 전면적으로 침투하는 더 거대한 현상의 일면에 불과하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그 자체로 나쁘고 해로운 일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법과 권리, 계약의 언어는 다른 언어에 비해 우리가 무엇을 안/하면 되는지를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해주며, 무엇보다 다양한 상황에도 일관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강력한 범용성을 지닌다. 권리의 언어는 특히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아야 할 최소한의 범위를 그려내는 데 있어 다른 어떤 언어도 비교할 수 없는 직관적인 힘을 보유하고, 피해-가해의 언어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 및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논리로 넘어가기 쉽다. 특히나 이미 법률적 언어로 재구성된 현상은 현대 사회의 분쟁과 갈등의 해결을 위한 가장 강력하고 일반적인 장치인 법제도를 적용하기 수월하다. 그것이 영미의 정치철학·윤리학이 법의 언어와 긴밀하게 뒤얽힌 이유, 현실의 대학원생 운동이나 성폭력의 고발을 포함하여 '약자'와 '피해자'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현실의 수많은 시도가 권리와 피해, 합의, 처벌의 언어를 채택하고 그러한 경로에 따라 움직이는 이유이기도 하다(무엇보다 나 자신이 대학원생 운동에 기본권·인권의 개념을 도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과연 법과 권리의 언어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한가? 우리는 권리를 보호받고, 피해에 따른 적절한 처벌과 보상이 존재하며, 종래에는 '정상적인' 삶의 경로에 지장을 주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그러한 의미에서 '소극적인' 도덕 언어로만 규정되는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내가 사회적 가치를 빠르게 상실하고 있는 인문학 분과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사회에 유의미한' 연구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한국의 서양 전공자로서 일급의 연구자가 내놓는 결과물과 그렇지 않은 연구자의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인 차이의 크기를 계속해서 의식하게 되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대학원생 운동과정에서 좋은 대학·네트워크에 속한 연구자와 그렇지 않은 연구자의 연구환경이 얼마나 극적으로 차이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지 않았다면 연구자들이 처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방식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마주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가치있는, 사회적 효용을 지닌 연구를 해야하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하며, 능력을 성장시키고 발현하기 위한 환경·경험을 공급해야 한다. 요컨대 '적극적인' 범주로서의 '역량·성장'의 개념을 사고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나는 기고문 2절에서 권리와 보호의 법률적 언어의 계보와는 다른 방식의 계열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것은 a)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지식의 생산'-b)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역량'-c) '역량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경험'-d) '그러한 경험을 적절하게 공급할 수 있는 환경의 설계'의 개념적 연속체다. 여기에서 연구노동은 한편으로 지식의 생산과정이자, 연구노동자의 역량과 사고를 확장시키는 경험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는 특히 젊은 연구자, 지적인 잠재성을 가진 대학원생들이 '좋은' 연구노동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잠재성을 발현시키고, 그렇게 성장한 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학원 대부분은 (일부 존경할 만한 교수들의 개인적인 노력을 제외하면) 단순히 일정한 기간과 비용을 투여하여 학위라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노동권을 위시하여 대학원생 기본권 및 보호규정의 설정을 추진해 온 지금까지의 대학원생 운동이 그 장소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침해를 제거하고 최소화하는 '소극적인' 활동이었다면, 앞으로는 대학원을 대학원생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과정, 대학원 안팎에서 대학원생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면 학위 이후에도 계속해서 좋은 연구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비/제도적 환경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활동이 우리의 과제로 들어와야 한다.


3.

2019년 뜻하지 않게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추진위원회의 위원직을 맡게 되었다; 서울대 학생회가 갖는 이점 중 하나는, 가끔 다른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거대프로젝트에 부분적으로나마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대체로 기숙형 캠퍼스Residential Campus 관련 논란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서울대 시흥캠퍼스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시흥시에서 '스마트시티'로 새로 조성하는 배곧신도시의 한 가운데에 '스마트캠퍼스'로서의 서울대 시흥캠퍼스를 건설한다(물론 '스마트'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후대의 역사가들이나 알게 될 것이다). 여러 제약조건 속에서 이 기획이 가진 잠재력의 극히 일부분만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위원회 활동과정에서 나는 그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여러 주제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막대한 지적 자원을 보유한 집단이 커다란 공간을, 작게는 캠퍼스, 크게는 도시 자체의 새로운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리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도시건설과 같은 초거대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말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어떤 과제와 직면할 것이며, 그러한 과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고 때로는 우회하는 과정을 통해 어떠한 '지적인 경험'을 하게 될 수 있을까? 만약에 서울대학교와 같은 종합연구기구가 이러한 프로젝트를 집단적으로 진행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어느 대학이나 연구자집단도 경험할 수 없었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막대한 지식과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위의 물음은 한낱 공상에 가까우며, 시흥캠퍼스의 개발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과는 별다른 연관 없이 진행되었다(어쨌든 나는 대학원생 대표자로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정 속에서 대학원생의 편의를 증진시키는 노력을 하는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한 가지 중요한 문제의식을 간직하고 있다. 연구자가 현실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과제와 조우하는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을 넘어 연구자로 하여금 질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물론 연구자의 전문분야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연구자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젝트와 계속해서 대면할 기회를 최대한 많이 제공하는 것 또한 연구환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닐까? (심지어 그런 성장과 가장 거리가 멀어보이는 문헌학적 연구자 또한 새로운 문헌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주제를 찾아낸다.)

역시나 개인의 공상 정도이지만, 기고문 말미에서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사단법인 연구자의집 또한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적용할 때 매우 흥미로운 시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연구자의집은 LH와의 협력을 통해 개별 연구자들을 위한 주거·연구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체가 꼭 연구자를 위한 '최소한의' 삶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데 만족해야만 할까? (비약이 섞인 발상이지만) 특정한 지자체와의 협력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인문사회분야 연구자들이 한국에서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지역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고 지식화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전문연구와 지역사회, 행정의 관계를 지금보다 더 복잡하게 활성화하면 어떤 새로운 경험이 가능해질까? 어차피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연구자들이 늘어나는 게 필연이라면, 현재와 같이 박사를 마친 연구자가 자신의 학과/학문분과에서 요구하는 주제나, 사실상 형식과 답이 정해져 있는 국가/공공프로젝트에만 집중해야 하는 경로와 다른 방식의 경로, 그것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프로젝트펀딩을 배분하는 것을 넘어 연구자로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적극적인' 기회로서의 프로젝트를 시험적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나는 나의 부족한 구상이 곧바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계속해서 말해왔듯,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이제 (꼭 특정 학과에서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 연구환경을 개편하는 데 있어 연구자들로 하여금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고 사회적 의의를 지닌 지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경험의 기회를 제도적으로 더 많이 배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 고유의 문제의식을 가진 학문분과들이 그렇게 작동하고 있으나, 특히 인문사회분과의 결코 작지 않은 여러 영역은 의식적인 노력을 요하고 있다. 이는 대학구조조정의 가속화와 함께 대학 내에서의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질 여러 학문분과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문영역으로서의 학문은 본래 사회의 여러 영역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학문분과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적인 신성불가침의 범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회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만약 우리가 '지식의 식민주의'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오리엔탈리즘이나 서구의존주의 같은 이야기보다는 우리의 학문분과 자체를 역사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풍토를 겨냥함이 옳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학문을 언제든 자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학문은 현실의 연구자들이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학문분과가 충분히 효율적인 구획을 제공하기는커녕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설명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래서 학문의 제도적 구별 자체를 재편성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될 때 태어난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학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한 소수의 학과를 제외하면 자체적으로 그러한 '재편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이는 인문사회 분과에서 더욱 그러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다.


4.

전적으로 우연적인 일이지만, 기고문을 쓰는 동안 마침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가 쓴 벌린 평전을 틈틈이 읽었다(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이사야 벌린>, 이화여대 통역번역연구소 역, 아산정책연구원, 2012; 원저는 _Isaiah Berlin: A Life_, 1998). 심지어 <해저 2만리>가 바로 같은 문장에서 언급되는데도 쥘 베른Jules Verne을 "줄스 반스"로 옮기는 충격적인 교양이 가끔 눈에 밟히고, 저자가 속해 있던 세계에 대한 공동역자의 무관심이 작은 오역을 낳는 예를 마주하게 되는 게 아쉬운 번역이다; 후자의 예를 들자면, 가령 "한때 벌린의 제자였던 래리 시덴톱Larry Siedentop, a one-time pupil of Berlin"을 "베를린 시절의 제자였던 래리 시덴톱"으로 옮긴다거나(시덴톱은 하버드와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정통(?) 영미인이고, 책에서도 벌린이 베를린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한글hwp 맞춤법 검사기를 기계적으로 돌린 나머지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gliano"를 "아르날도 _메밀_리아노"로 표기하는 식의, 아산정책연구원의 냉전기 전공자가 한번만 제대로 검수했어도 잡아냈을 오류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판은 대체로 요지를 이해함에 큰 무리가 없다. 책은 단순히 학술적인 논의로만은 소화되지 않는 벌린의 복잡하고 다양한 경력과, 그가 학자이자 사회명사로, 또 고급관료로서의 경력을 가진 영향력 있는 지식엘리트로, 또 '러시아 출신 영국 유대인'으로 다양한 층위를 오가며 활동할 수 있게 했던 20세기 초중반의 영어권 세계, 그리고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잘 정리하고 있는 무척이나 유용한 전기다. 벌린의 회의주의적 '냉전자유주의'가 어떤 세계에서 작동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고전학과 PPE를 공부한 철학자-역사학자 엘리트가 활동한 세계가 어떤 곳이었는지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주의깊게 또 즐겁게 읽어도 좋다.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에 따라 인상 깊은 대목을 인용한다:

"문제는 이런 류의 [논리실증주의적] 철학--과학적 편향이 있고 윤리·역사·정치적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철학--이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 논리실증주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벌린의 [사고는 더욱 더 역사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버나드 윌리엄스의 말을 빌리면, 벌린은 "그 어떤 관념적·분석적 주장도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사고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사고는 [특정한 장소는 물론 특정한 인간에 속해 있으며], 다른 사고들로 이루어진 맥락--오로지 형식만으로 규정되지 않은 맥락--안에서 제 위치를 [가진다는" 의견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벌린은 현실과의 연계가 없는disembodied 철학적 논변의 특성을 갈수록 견뎌낼 수 없게 되었고, 철학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상사에 기초한 철학으로 향하게 되었다]"(pp. 162-63, 번역수정)

"후에 그는 '사람이 인생[을 시작할 때보다 마무리할 때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기를 희망하게 되는] 분야가 있고, 나는 그러한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라고 썼다. 다음 날 아침 흐트러지고 게슴츠레한 모습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철학을 접고 사상사를 선택하기로 결심하였다"(227-28, 번역수정).

아마도 내가 흄과 벌린에 다소간의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 있다면, '순전한' 철학적 논변보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그것을 이해하는 작업의 가치를 이해하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 언어와 행위가 오직 세계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는 형태로만 작동한다는 그들의 인식에 있다.


(*이하는 내가 <오마이뉴스>에 업로드한 최종고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부제와 문단구성 등에 차이가 있다. 본래 내가 생각한 표제는 "대학원생 (연구)노동을 다시 생각하기" 쯤이었다)


1.

 

한국에서 대학원생의 기본권·교육연구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물론 이전부터 대학원생이 열악한 처우에 노출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KAIST 대학원총학생회가 꾸준히 대학원 연구환경실태조사를 진행해왔다는 사실 또한 잊혀서는 안 될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대학원생 인권운동이 현재와 같은 공적인 관심을 획득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필요했다. 먼저 2014년 대통령직속청년위의 대학원생 연구환경 실태보고서, 2015년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연구팀의 2014년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제도개선 조사보고서, 같은 해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등 대학원생 인권문제를 다룬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다음으로 2015년 중반 악명높은 인분교수사건을 기점으로 충격적인 대학원생 권리침해 사례가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전국대학원총학생회협의회를 포함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당사자 단체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대학원생 문제는 비로소 뜬소문이나 개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와 제도의 문제가 되었다. 대학원생·연구원의 연구활동을 노동 혹은 근로 개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태어났다.

 

왜 노동권이었을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들의 입장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성희롱·성폭력과 인권침해는 물론, 인건비 횡령이나 과도한 근무시간, 사적인 업무 혹은 부적절한 업무 부여에 이르기까지 대학원생 문제 사례를 검토한 이들은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대부분의 대학원생 문제는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에 비해 이를 제어할 제도적인 장치가 부재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한국의 법과 제도 내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즉 연구실을 운영하는 교수가 조직 구성원인 대학원생에게 행사하는 권한을 제약하고 후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법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쉽게 찾기 어렵다. 그 한 가지 방법이란 바로 교수-대학원생 관계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즉 근로기준법을 제외하면 에게 용역을 제공하는 을 보호하는 제도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조건에서, 이 문제를 처음으로 접한 사람들이 대학원생에게 법적인 노동자 지위를 부여하는 해결책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바였다.

 

그러한 해결책이 아직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시니어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학원생의 노동자성 지위 부여에 반감을 표출했다. 직업 간 귀천이 확고했던 시기에 성장한 그들은 왜 대학원생들이 고귀한학자·연구자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비천한노동자로 격하시키고자 애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동시에 갖은 고생과 부조리를 기꺼이 감수하는 자신들의 파이팅 넘치던 삶에 젊은 학생들이 동참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러한 도덕적 차원에서의 반대가 2010년대의 변화한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인 꼰대라는 비난과 조롱만을 유발할 뿐이라면, 대학원생 노동자성이 제도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 또한 존재했다. 덜 감정적인 교수들은 대학원생의 연구에 노동의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연구가 그에 못지않게 대학원생 본인의 교육과 경력 발달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근본적인 장애물은 역시나 돈이었다. 대학관계자들은 대학원생 연구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게 될 때 발생하는 추가적인 비용을 감당할만한 재정여력을 지닌 대학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호소했다. 근로소득의 유무에 따라 장학지원의 수혜자격이 달라지는 기존의 복지제도 또한 문제였다. 노동자 지위의 인정이 기존의 장학금·세제 혜택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2018년 이래 대학원생 노동자성 인정 추진 흐름의 전면에 서 있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이러한 난점을 돌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대학원생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중에서 명확히 노동으로 규정될 수 있는 지점에서 노동자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2020106일 국회 앞 농성 돌입 기자회견에서 대학원생노동조합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노동권 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육/연구/행정에 종사하는 조교”, “국가와 기업에서 수주하여 수행하는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하는 학생연구원”, “학회 운영의 실무를 수행하는 학회 간사”, “대학에서 강의하는 강사를 맡는 경우, 대학원생 신분과 무관하게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규정을 통해 현실화할지, 그 과정에서 전체 대학의 연구환경이 어떻게 변화할지 현재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해 강사법 통과와 그에 대한 사립대의 대응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고자 한다면, 대학 및 교수집단 또한 지금까지의 무기력을 내려놓고 대학원생 문제 해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2.

 

지금까지 우리는 소극적인(negative) 권리로서의 대학원생 노동을 논의했다. 누군가가 소극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보유한 권리가 타인의 침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과 같다. 예를 들자면 어떤 대학원생 조교가 사전에 합의된 업무시간에 따라 일할 권리를 지닌다고 할 때 교수 혹은 상급자는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여 업무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상급자가 이를 무시하고 추가 업무시간을 강요할 경우 그는 노동권 침해에 따른 제재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소극적 권리로서의 노동 개념은 강력한 사용자의 권력이 사전에 합의된 범위를 침범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의 영역을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스스로가 약자·피해자의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노동이 아니더라도) 권리의 개념에 의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물론 대학원생과 노동이라는 문제를 꼭 한 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노동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의미를 축적해온 매우 풍부한 개념이다. 그중에서는 오늘날 대학원생 및 연구자가 속한 복잡한 세계를 조금 더 다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른 용법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많은 대학원생에게, 그리고 학위를 마치고 학계 안팎에서 전업 연구자의 삶을 선택한 이들에게 노동은 경제적이고 직업적인 기회를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자리로서의 노동개념은 사회 전체의 인력과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 학령인구수의 극적인 감소에 따른 급격한 대학구조조정의 가능성을 목전에 둔 오늘날, 학위를 마친 대학원생, 그중에서도 기업과 같은 다른 영역으로의 구직이 쉽지 않은 기초학문분야 연구자 집단이 연구노동을 지속할 수 있는 자리를 어떻게 공급할 수 있는가는 앞으로의 대학원생 문제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다.

 

조금 더 주목하고 싶은 용법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 그리고 노동자를 성장시키는 경험으로서의 노동 개념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노동은 한편으로 세계에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 자신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성장의 경험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대학원생의 노동, 특히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자들이 수행하는 연구노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논의에서 이러한 측면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적극적’(positive) 행위로서의 노동 개념을 통해서만 지식의 생산이 단순히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대가를 지불받는 과정 이상의 것임을 설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한창 지적으로 성장하는 단계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적절한 연구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전문연구자의 핵심적인 역할이 지식의 생산과 관리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비교적 시장가치를 측정하기 수월한 분야든, 아니면 그러한 측정이 매우 쉽지 않은 분야든(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기 역사가 중요하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해당 분야의 특정 연구가 어느 정도 금액의 가치를 지니는지 판단하려 들지는 않는다) 지식의 생산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세계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때로는 약간 더 효율적이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회에 필수적인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연구노동은 무엇보다도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다. 중요한 것은 어떤 연구노동을 수행할 기회를 얻느냐에 따라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노동자들의 역량 또한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더 크고 수준 높은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사람의 시야와 분석력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그것보다 더 넓고 정교할 가능성이 높듯, 대학원생·연구원 또한 더 중요한 연구경험을 축적할 때 생산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와 밀도가 증대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상식적이지만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결론이 도출된다대학원생·연구자에게 더 뛰어난 질의 연구노동경험을 제공할 때, 그들이 사회에 제공하는 지식의 가치 또한 높아질 것이다.

 

나는 교육부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과 같이 국가 전체의 지식생산에 관여하는 공적 기구는 물론,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이나 사단법인 지식공유 연구자의집처럼 대학원생·연구자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 또한 방금과 같은 의미에서의 (연구)노동 개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연구자의 인권침해를 막고, 필수적인 의식주 여건을 제공하며,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통해 연구자를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생산하는 연구물·지식이 굳이 과거의 수준에 정체되어야 할 게 아니라면, 젊은 연구자들이 어떤 성격의 연구노동을 경험할 수 있을지, 연구자들의 효율적인 성장을 위해 무슨 기회를 제공하고 어떤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을지 의식적으로 고민할 필요는 있다. 이는 박사학위 이후에 유의미한 지적 전진을 이룩하는 연구자를 찾기 힘들며, 또 사회의 다양한 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지식인을 좀처럼 재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는 한국 학술장에 주어진 오랜 숙제다. 연구노동 개념의 다양한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그러한 숙제를 풀어내기 위한 첫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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