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개선안 및 피해 조력자를 위한 행동지침 제안》

Comment 2021. 4. 29. 22:54

2021년 3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대학원생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개선안 및 피해 조력자를 위한 행동지침 제안》 보고서는 내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전문위원 신분으로 참여한 마지막 작업물이다(www.facebook.com/snugsc/posts/4161689257215584). 보고서 내용에 흥미를 가지실 분들을 위해 개인적인 코멘트를 덧붙여 자료를 공유한다.

 

 

1. 보고서 기획 및 제작에 참여하게 된 취지는 크게 공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두 가지다.

 

2015년부터 만 6년간 서울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전문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내가 맡았던 업무에는 학내외 대학원생 대상 인권침해·성폭력 사건을 상담하고 필요에 따라 피해자를 대리·조력하는 일이 포함된다(피치 못할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자 신원보호를 위해서라도 업무노출을 가급적 피했던만큼 지인들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가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이해하는 인권침해·성폭력 사건의 핵심쟁점은 통상적으로 피해발생, 엄밀한 조사, 올바른 처벌로 요약된다. 그러나 실제로 대학원생 인권침해 사건을 대리·조력하게 되면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현실의 사건처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가해자의) '공정한 처벌' 자체가 아니라,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피해자의 삶과 진로가 최대한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도 대학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한국 대학에서 그러한 목표가 제대로 달성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매우 미흡한 현실이다. 어느 피해자의 솔직한 토로를 옮긴다면, "사건 신고 후 지도교수 교체부터 지금까지 해오던 연구의 지속 여부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조치도 시행되지 않았다. 학교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졌음을 깨닫고 나는 학부 때부터 정말로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이 학교를 증오하고 경멸하게 되었다"--인권이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은 한국의 대학에서 여전히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례의 누적 속에서 나와 동료들은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가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으며, 그러한 난점이 어떻게 해소되거나 적어도 반감될 수 있을지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는 무엇보다 인수인계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통상적인 직장에서의 사건과 달리, 대학원에서의 인권침해 사건은 대학원이라는 제도·공동체의 독특한 성격과 교수-대학원생의 (필연적인) 위계적 관계 등이 복잡하게 작용하며, 그에 더하여 대부분의 한국 대학(원)이 피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제도를 아직 갖추지 않은--그리고 대학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제도의 구비를 그렇게 중요한 과제로 여기지 않고 있는--상황이니만큼 대학원의 환경이 작동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의 법조인 혹은 지원단체의 조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를 포함해 지난 수 년 간 대학원생 피해자 조력·대리를 수행했던 사람들은 (기존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조건 하에서) 어쩔 수 없이 거의 직접적인 사건대응 자체의 경험 및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서만 사건대응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이제 일련의 '1세대' 활동가들이 은퇴 또는 활동종료를 앞둔 시점에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축적한 암묵적인 실천지를 종합하여 후속세대와 공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다시 말해, 피해자 상담·조력 업무의 인수인계를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이 무척 빡빡한 개인적인 일정 사이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였다.

 

 

2. 보고서 자체의 목표 및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대학원생 성폭력 및 인권침해 피해 사건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가 경험하는 이차적인 피해와 고충을 인터뷰·문헌조사 등의 방법을 통해 수집하여 분석한다. 둘째, 이를 바탕으로 사건 발생부터 징계 이후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의 어려움을 유발하는 제도적·문화적 미비점을 추적하고, 이러한 미비점을 보완 및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셋째, 사건 처리 과정에 관여하는 피해자 주변의 조력자·목격자 등이 보다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행동 지침을 작성한다. 최종적으로 피해자의 보호와 권리 보장 및 일상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개선안 및 사건 처리 과정의 다양한 참여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구체적인 권고안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3쪽). 이를 위해 본론1은 "인권침해/성폭력 피해, 2차 피해의 유형"(7-12쪽)을 정리하고, 본론2는 "피해학생의 이차피해 및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개선안"(13-19쪽)을 제출하며, 마지막 본론3은 피해자 조력자·대리인이 참고할 수 있는 실천적인 가이드(20-28쪽)를 제시한다.

 

간단히 말해 실제 사례 인터뷰 및 문헌조사를 통해 (이차피해를 포함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수집·분석하고, 그러한 난점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의 제도적 환경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을지를 탐색하며, 마지막으로 실제 피해자 및 대리인·조력자의 관점에서 사건 발생 이후 어떤 상황을 맞닥트릴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 보고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본론2가 제도의 시점에서 작성되었다면, 본론3은 행위자의 시점에서 효율적인 전략 수립을 위한 사고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보고서 작성 전반에 강조된 기조이지만, 특히 본론3은 수 년 동안 다양한 사건을 겪은 조력자들의 조언과 노하우를 일반적인 진술로나마 충실히 요약하는 데 집중했다.

 

 

3. 보고서 작성에서 나는 특히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쟁점을 염두에 두었다.

 

첫째, 대학원생 인권침해 사건의 초점을 가해자와 사건이 아닌 피해자의 삶과 경험으로 옮기는 것이다. 대학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사회는 통상적으로 피해자중심주의를 특히 결정적인 증거수집에 난점이 있는 사건의 사실판단을 확정함에 있어 피해자의 관점을 충실하게 참고하는 정도로 이해하고는 한다. 이러한 '피해자중심주의'가 결국 가해-피해의 행위사실을 판단하기 위한 하나의 인식론적 방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가해=사건에 집중하고 있다면, 나는 우리가 이제 그에 못지않게 사건의 처리과정에서부터 최종적인 진로와 행복의 회복에 이르기까지 피해자가 무엇을 경험하며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범죄자가 극형에 처해진다고 해도, 피해자의 현재와 미래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도)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조건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쟁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앞서의 연장선에서, 제도적 정의(justice)를 실현에서 가해행위에 대한 공정한 '처벌'만이 아닌 피해자의 삶, 행복, 진로의 '회복과 지원' 또한 핵심적인 기준점으로 삼는 것이다. 인권침해 및 성폭력 사건 보도에 달리는 댓글에서 알 수 있듯, 우리의 사회는 피해자가 겪은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지, 또 가해자 혹은 죄인이 얼마나 강력한 처벌을 받는지에 목말라 있다. 그러한 '정의로운 가학성'의 유통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와 순기능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처벌에의 허기가 채워진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피해자가 사건처리 과정에서 불필요한 어려움과 이차피해를 얼마나 겪는지, 그리고 피해자가 (특히 대학원에서 핵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자신이 계획했던 당초의 진로를 제대로 실현해나갈 수 있는지의 문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적어도 제도적 환경의 설계에서의 목표는 콜로세움의 환호와 정의감을 고양시키는 데 멈추어서는 안 되며, 사건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 즉 피해 대학원생의 회복과 이를 위한 지원을 포함해야 한다.

 

셋째, '회복과 지원'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환경의 적극적인 구축을 시도해야 한다. 한국 대학에서 인권센터가 세워지기 시작한 2010년대 초 이래 지금까지 대학 내 인권·성폭력 사건의 제도화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지금까지 묻혀왔던 문제를 공론화하고 또 충실하고 공정한 조사-징계과정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건의 공론화와 처벌을 넘어 피해자의 삶이 회복되어 자신의 행복과 진로를 추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는 피해자가 이차피해 및 부당한 차별, 권력관계를 포함한 어떠한 불필요한 장애물과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또 혹시라도 그러한 장애물과 직면했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경감시키는' 단계를, 동시에 사건 및 처리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누적되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피해를 고려하여 피해자가 자신의 행복과 학문적 진로를 주체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적극적인 지원'의 단계를 포함해야 한다.

 

넷째, 제도적 환경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성하기 위해서 피해자가 겪을 수 있는 경험을 사건처리의 단계별로 나누어 세부적으로 분석한 뒤 각 단계별로 피해자의 보호, 회복, 진로를 지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책임자를 명시하고 그에게 권한과 자원, 무엇보다 '책임'을 적절하게 분배해야 한다. 기존에 존재하는 공론화 및 처벌의 요구가 단체 혹은 공동체의 최종결정권자나 해당 집단, 또는 여론과 같이 비교적 크고 균질화된 단일 주체의 움직임을 겨냥하는 경향이 있었다. 피해자의 실질적인 회복과정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과제는 작동하는 제도의 내부로 들어가 구체적인 행위자, 결정권자, 권한보유자가 누구인지 탐색하고, 그러한 행위자의 행동방향을 적절하게 설정하여 전체 제도가 특정한 목표를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작업을 포함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제도적 환경을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행위자들 및 그 동기라는 가장 구체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다시 그 행위자들의 적절한 행위를 유인하는 규정을 설계하는 실천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혁작업에 있어 핵심적인 키워드는 바로 '책임'이다. 실제로 한국 대학(원) 인권침해 사건에서 반복되는 한 가지 패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책임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교수-대학원생 간 인권침해 사건에 있어, 총장과 같은 학교의 최고결정권자는 인권침해 사건 자체에 대한 언급을 꺼리며, 단과대·학과 교수들은 '동료 교수가 연루되어 있으니 곤란하다'는 태도로 (이차피해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멀리서 관망하기가 예사고, 징계기구는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마지못해 겨우 제공하고는 한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교육기구는 '어쨌든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니다'라는 말로 피해학생의 학문적 진로라는 명백히 교육적인 과제를 철저하게 회피하는 데 최고의 효율성을 보이곤 한다. 그러한 무책임의 태도가 보는 이들에게 도덕적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a) 구체적인 행위자들을 포착해 b) 이들에게 적절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공간분리를 하고, 지도교수를 교체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는 적절한 후보자를 찾아 연결해주는 등 수업에서 진로설정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의 삶이 자연스럽게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세부적인 조치와 그를 수행하는 책임자를 설정하는 작업, 이것이 피해자의 삶과 진로가 원활하게 회복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제다.

 

 

4. 보고서 작성 과정은 지금까지 도움을 주고 받은 많은 분들과 다시 한 번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과거의, 혹은 슬프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고통스러운 경험을 공유하는 데 기꺼이 협력해준 피해자들께 가장 큰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함께 보고서 작성에 뛰어든 여러 동료들이 없었다면 나의 소망은 혼자만의 공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보고서 작성을 위한 제반 비용을 기꺼이 지원해 준, 또 (인권센터를 향한 비판적인 언급이 일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 공개 전 검토작업에 솔직하고 유용한 의견을 제시해 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의 여러 선생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누가 무슨 말을 덧붙이든, 지금까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갖가지 시행착오를 먼저 겪으며 한국 대학(원)생 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그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해 온 역사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수 년 간 고군분투하며 축적한 지식을 공유하고 정리하고 검토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피해조력자·대리인들이야말로 이 보고서의 실질적인 주역이라 할 수 있다. 2010년대 한국 대학원생 인권운동의 성장과정에서 우리들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활동가들이자, 문제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언어를 발명하는 연구자들이었으며, 그렇게 발견한 제도의 빈 공간을 메꾸는 정책을 구상하고 제안하는 개혁가들이었다. 누군가가 활동가, 연구자, 개혁가를 동시에 겸하는 상황은 물론 그 자신들에게는 비할 바 없이 귀중한 체험일지 모르나, 역으로 문명의 진보 혹은 선진화라는 것은 더 이상 누구도 그러한 사건들의 고원에 설 필요가 없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보고서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문명화된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보고서 다운로드 링크: drive.google.com/file/d/1Q6AYOJyipnNafFycCCEp0ldS0mkxYdR-/view

202103 대학원생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개선안 및 피해 조력자를 위한 행동지침 제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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