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을 위한 효과적인 공부법: 학술지 정리하기

Comment 2021. 5. 10. 15:39

18세기 세미나그룹에서 어떻게 영어권 학술장의 연구동향 및 앞으로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지 기초적인 팁을 설명할 기회가 생긴 김에 정리하여 올려둡니다. A4 4쪽 분량의 포스팅입니다만, 한줄 요약하면 "나온지 한참 지난 책 사이즈 연구만 보지 말고 관심 분야 학술지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정리하고 업데이트하자"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사회과학을 포함해 타 분야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게 팁 씩이나 되는지 의아할 수 있을텐데, 인문학(서양) 분과에서는 대학원에서 이런 걸 배우고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경우가 의외로 매우 드뭅니다. 교수들도 생각보다 업데이트가 늦기도 하고, 본인이 따로 하시는 선생님들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듯 하네요. 최소한 석사 코스웍 끝나고 자기 분야/주제가 잡혀 논문 쓰는 과정에서부터는 당연히 몸에 붙어야 하는 습관이니만큼 필요하신 분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정보완 및 첨언하실 내용이 있다면 당연히 환영입니다 :)

 

 

1. 

 

먼저 서구 학술장에서 연구의 흐름과 유행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a. 필드를 이끌어가는 세미나팀, 그룹, 연구소 & 그런 그룹과 연결된 조교수·포닥·대학원생 등이 최전선에서 작업을 시작함

b. a의 작업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면 반쯤 오픈된 세미나와 학회에서 교류 및 토론(a 시점부터 약 + 1-3년?)

c. b를 기반으로 나온 글이 주요 학술지에 실리기 시작(a 시점부터 약 + 2-5년)

d. b, c의 논의를 기본으로 주요 출판사에서 선도적인 연구서와 논문모음집이 출판(a 시점부터 + 4-7년)

e. 유명한 연구자의 두툼한 단독주저급이 출간(a 시점부터 7-10년)

f. 이미 확고한 유행으로 자리 잡은 논의의 세부를 발전시키거나 반복하는 연구가 나옴(가끔 운이 좋으면 여기에서 다시 b-c 단계로 가는 경우가 있음). 주변부(?) 대학 커리큘럼에도 반영

*당연하지만 영어권을 포함한 서구학술장에도 필드를 주도하는 (편의상) "중심부"에 있는 학교/연구소/출판사와 그런 데서 먼저 주도한 연구동향을 따라가는 "주변부" 그룹이 대략이나마 구별됩니다. 그나마 연구자들의 경우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여러 대학에 골고루 퍼지는 편인데, 출판사 별 위상의 차이는 여전히 공고한 것 같네요.

한국은... 세부 전공별로 다르긴 한데, 대체로 완전히 중심부 네트워크에 들어가서 소식을 접하는 연구자는 (특히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는) 아직 드문 편이고요, 보통은 d-f 단계일 때 '이게 지금 유행이구나'하고 캐치를 해서 e-f쯤일 때 한국 학술지 논문이 실리거나 수업 커리큘럼에 반영되는 듯 하네요(역시 반영시점은 수업 커리를 짜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고요). 한국어 번역서는 슬픈 일이지만 아주 드문 예를 제외하면 15-20년, 경우에 따라서는 30-40년 넘게 지나서 보통 해당 분야의 중심부에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때에야 들어오는 편입니다. 물론 지금 유학 마치고 들어오는 분들은 온라인으로 교류하는 데 훨씬 익숙하고 유학 때 형성한 네트워크를 가늘게라도 지속하는 예가 많아서, b-c 단계에서 앞으로의 학계 흐름을 캐치하는 경우가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2.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유학 또는 한국 진학을 통해 학문을 계속해 나갈 동료 학생분들께 드리고 싶은 일차적인 조언은 (출판된지 수십 년 된) 큰 책 위주로만 공부하는 게 그렇게 효율적이 아니며, 지금 한국의 인문학 분야 대학원 수업에서 다루는 것보다 학술지 논문을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참고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1번 항목에서 말씀드렸듯 중요한 연구자, 이미 정교수가 된 지 좀 된 사람들의 두꺼운 단독저작은 대체로 해당 주제가 처음 다뤄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10년 가까이 지나 출간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더불어 출판 이후 10-2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특히 이후에도 현재성을 유지해서 계속 논의가 된 주제라면 학술장 중심부의 논의는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바꿔 말해 누군가의 저작이 거의 수정되지 않고 확고하게 남아있는 주제라면, 그 책이 정말 중요한 작업일 가능성도 있지만 해당 주제가 뛰어난 연구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보통은 후자죠). 물론 특히 특정한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가기 위해서는 고전급의 연구서를 꼼꼼히 읽고 소화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만, 그런 저작'만' 봐서는 전체 학술장의 논의지형이 어떻게 구축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공부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열심히 했는데도 시쳇말로 '갈라파고스'에서 살아가는 연구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좀 더 효율적이고 필수적인 공부방식은, 특히 자신의 관심분야를 어느 정도 좁히고 정한 석사논문작성 전후의 대학원생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관심 분야의 주요 학술지를 몇 개 선정하여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해당 학술지가 누구의 어떤 작업을 실었는지를 적어도 스스로의 머릿속에나마 정리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그 내용을 전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매 호마다 학자의 이름과 제목을 간략히 살펴보고 눈길이 가면 초록abstract을 읽어봅니다. 초록을 읽고 자신이 대충이라도 봐야할 논문이다 싶으면 그때 읽으면 됩니다(논문도 일단 서론을 먼저 보고 그 다음 주석에서 어떤 문헌들이 인용되고 있는지를 본 뒤 그 뒤에 논문 전체를 읽을지 여부를 결정합시다). 더하여 어떤 책들이 리뷰되고 있는가를 파악합니다. 중요한 평가를 받은 책과 논문이 있다면 해당 저자를 검색해서 어떤 작업들을 해왔고 또 하고 있는지, 어느 기관에서 누구와 무슨 세미나를 했는지, 책·논문의 사사표기(acknowledgment)에서 어떤 이름이 언급되는지 추적합시다.

이런 작업을 틈틈이 쌓아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 정도의 흐름이 잡히면, 또 주요 학술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나아가 (저의 경우에) 18세기 지성사 연구와 18세기 영국문학 연구처럼 인접한 학문분과들을 그렇게 정리할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당 분야의 전반적인 흐름을 붙잡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주제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런 쟁점을 다른 연구자들이 어떤 식으로 (종종 비효율적으로) 소화해서 변용하고 있는지, 어떤 식의 연구가 오래 살아남고 영향력을 끼치는지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합시다. 자연스럽게 자신 및 동료의 관심사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와 있으며, 어떤 주제를 공부할 때 누구의 작업부터 읽는 게 효율적인지, 특정한 쟁점을 나의 연구에 들여오고 싶을 때 어떤 작업을 어떻게 인용하는 게 좋을지 등이 보일 것입니다. 

선택한 학술지를 처음 볼 때는 큰 부담없이 최근 1-2년치 및 First View(온라인 선공개) 논문을 먼저 훑어보고 점점 범위를 늘려가면 됩니다(영어권은 대부분의 저널이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해서 적어도 초록까지는 앉아서 전자기기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5-10년치의 흐름만 한번 정리해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분기나 반기, 연간으로 한두번씩만 들어가서 새로 나온 것들만 한번 훑어보면 되는만큼 별로 부담이 없습니다. 사람 성격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꼭 따로 써놓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큰 흐름이나 유행만 기억해두고, 자신에게 중요한 작업, 앞으로 중요해질 것 같은 연구를 하는 사람은 따로 체크해서 추적하고, 관련 논문이나 책은 구해놓으면 됩니다. 정말 중요한 논문, 혹은 큰 흐름을 정리해주는 논문(보통 중요한 저널은, 역사 쪽이 이런 경향이 더 큽니다만, 짧은 북리뷰 외에도 필드의 큰 흐름과 주요 저작, 쟁점을 검토 및 정리해주는 논문이 가끔씩 실립니다)은 주의깊게 읽고 필요하다면 나중에 빠르게 찾아보기 좋게 따로 요약정리해 둡시다. 이른바 학문적 전문성의 토대는 이처럼 해당 분야 학술장의 동향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는지, 또 자신이 공부하는 방향이 시시각각 움직이는 학문지형 내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에서 나옵니다.


3. 

 

학술지와 논문을 꾸준히 참조하는 공부방식이 특히 대학원생에게 가장 좋은 점은 학술지 논문을 쓰는 방식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직접 학술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좀처럼 알기 힘든 사실입니다만, 전문적인 연구자가 가장 많이 쓰는 유형의 글은 학술지 논문입니다(그 다음은, 특별히 다른 장르의 글을 많이 쓰는 예가 아니라면, 아마도 장학금·연구비 신청서 및 이메일이겠죠). 이른바 직업적인 전문연구자 집단이 생기고, 학술지 논문 포맷이 그들이 지적인 교류를 주고 받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연구자의 삶에서 학술지 논문을 쓰는 것은 핵심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각 분야마다 어느 정도 표준적인, 혹은 과거에 비해 좀 더 효율적인 스타일의 논문형식들이 나타나고 있죠. 

예컨대 오늘날 학술지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서론(introduction) 파트를 잘 쓰는 것입니다. 에세이로서의 성격을 여전히 적지 않게 지니고 있던 수십 년 전의 논문들은 서론을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식전 여흥 정도로 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제 학술장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발달하게 되면서, 서론은 자신이 다루려는 주제에서 a) 기존의 논의지형과 그 쟁점을 날카롭게 정리하고 b) 자신의 문제의식과 접근법이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c) 논문의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어쩌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이는 당연합니다. 실시간으로 새로운 책과 논문이 전부 따라가는 게 불가능할만큼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니까 리뷰논문이 점점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논문을 집어든 독자는 일단 서론을 보고 이 논문을 계속 읽을지 말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읽는 논문에는 서론과 본론이 아울러 충실한 논문, 그리고 서론만 그럴듯하고 본론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논문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러한 서론을 쓰는 기술을 포함하여, 각 장/절을 어떤 식으로 나누고 연결시킬 것인지, 어느 만큼의 분량을 쓸 때 어느 정도의 밀도로 어디까지 다룰 수 있을지 등을 효과적으로 예측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결국 좋은 논문을 많이 읽고, 정리하고, 자신이 쓰면서 고쳐보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습득됩니다(대학원 수업 최종과제의 요구사항이 보통 학술지 논문 사이즈의 글을 써보라는 지시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히 좋은 책을 많이 읽는 노력만으로는 이런 연습이 잘 되지 않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런만큼 학술지 논문을 많이 읽어보면서 어떤 논문이 잘 읽히고 또 독자를 설득하는지, 그러한 과업에 성공하는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은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는 게 석사논문 이후 연구자로서의 과정을 한결 효율적으로 밟아나가는 길입니다.


4. 

 

마지막으로 1, 2번 항목의 연장선에서, 학술장의 지형을 조금 더 빠르게 효과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1번에서 b 단계의 작업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2번 항목에서 이야기한 작업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관심사에서 어디의 누가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는지, 그들이 어느 대학·연구소·기관의 학술대회·세미나에 참여해서 발표와 토론을 주고 받는지가 파악이 되었을 것입니다(특히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분야라면 말이죠). 특히 그런 그룹들이 언제 어떤 행사를 하는지 지속적으로 체크해둡시다. 관심이 없는 주제라면 상관없지만, 가끔이라도 자신이 흥미롭게 읽었던 논문의 저자나 중요한 연구자가 발표나 강연을 맡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이름을 처음 접한 연구자가 관심사와 인접한 분야를 다루는 경우도 보게 될 것입니다. 본인이 참석할 수 없는 장소에서 열리는 행사라면 어쩔 수 없지만, 요즘처럼 ZOOM 등을 통한 온라인 학술대회·세미나의 비중이 높아진 때는 시간대만 어떻게든 맞출 수 있으면 아직 논문으로 나오지 않은 정말로 '첨단'의 연구를 거의 시간 차이 없이 접하는 게 가능합니다.

더불어 이미 정교수가 된 유명한 사람의 연구에만 주목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현재진행형으로 확장되고 있는 연구분야라면, 이미 정년보장(tenure)을 받은 교수들이 그 분야 최전선에서 필사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고 작업하고 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박사논문 전후의 연구자들, 포닥 펠로, 갓 임용되어 테뉴어를 받을 때까지 자신의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조교수들입니다. 이른바 좋은 학교에서 어떤 박사논문이 나오는지(운이 좋다면 갓 나온 박사논문을 pdf로 쉽게 구해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박사학위 전후의 연구자 중 특히 좋은 학술지에 게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어떤 작업을 했는지(보통 한창 박사논문 혹은 책 출간 직전에 써서 게재한 논문이 가장 밀도도 신선함도 높을 가능성이 큽니다), 포닥이나 조교수들이 무슨 논문을 쓰고 어떤 책을 쓰고 있는지 체크해둡시다. 늦어도 2-3년, 빠르면 7-8년 정도 먼저 중요한 연구주제와 연구자를 파악하고 자신의 연구를 설정하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상기한 내용은 서구 학술장에서 뛰어난 인력이 모여 치열하게 (종종 경쟁적으로) 토론하고 논문을 생산하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서구학술장의 기준에서 주변부에 있는 한국의 서구연구에서는 이런 내용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환경이 좀처럼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업에서는 기초적인 수준을 맞추는데 버겁고 간신히 동시대 연구의 극히 일부분만을 접하며, 석사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도 학술장의 지형을 파악하는 과제가 제대로 수행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리고 그 원인 중 상당수는 우리가 우리의 연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의식적으로 공유·지도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한국 대학원의 관행에서 비롯됩니다. 이 글이 서구 인문학 전공자들이 좀 더 공부를 재밌게, 효과적으로, 생산적으로 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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