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에세이 장르의 역사 / 마크 패티슨과 학자의 운명
Intellectual History 2020. 10. 13. 18:541.
<릿터> 26호(2020년 10/11월) 커버스토리 "에세이스트가 되다"의 한 꼭지로 영어권 에세이 장르의 역사에 관한 짧은 에세이를 썼다(30-34쪽). 이번 호 <릿터>에 실린 글 중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장 학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이를 숨기지 않는 글이다. 청탁을 받았을 때 시간적 여유가 넉넉한 상황은 도저히 아니었지만, 짧은 분량에 고료가 좋았다(...). 무엇보다 에세이 장르에 대해선 과거 아도르노의 <형식으로서의 에세이>를 읽은 뒤에 늘 어느 정도 호기심이 있었기에 공부해서 쓴다 치고 약간은 욕심을 내어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특히 지금껏 잘 모르던 19세기 영국 산문의 세계를 살짝이나마 훑어볼 수 있어서 즐겁게 읽고 썼다. 16세기부터 21세기까지 아우르는 글이니만큼, 글쓰기 장르의 역사 자체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원고의 첫 문단만 옮겨둔다. 출판된 버전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3244552 를 참고.
"한국의 국어·문학 교과목은 일반적으로 “에세이essay”를 “수필隨筆”, 즉 작자 개인의 체험과 감상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글쓰기와 같은 것이라 가르친다. 배운 바를 성실히 따라온 중등교육의 모범생들은 대학의 첫 글쓰기 과제를 마주하여 뜻밖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에세이”를 제출하라는 요구에 따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스스로의 속내를 (가끔 약간의 ‘문학적인’ 기교를 발휘해보려는 열망을 품고) 솔직하게 적어 낸 보답은, 물론 과제물에 논평을 더하여 돌려주는 수업일 때의 이야기지만, “C+, 학술에세이는 감상문이 아닙니다”라는 심술궂고 무뚝뚝한 평가뿐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는 영어권의 에세이와 한국에서의 수필이 어느 정도의 교집합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상기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박애주의적이고 실용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여 영어권에서 에세이 장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아주 얕게나마 역사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이 짧은 에세이의 목표다."
*대학과제물을 잘 쓰는 방법...같은 것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학술에세이academic essay 장르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다룰 수 없었다. 이걸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영국에서 18-20세기에 걸쳐 다양한 학회academic society가 어떻게 형성되고 학자들이 처음에 어떻게 교류했는지, 어떤 글을 썼고 글쓰기 규범이 어떤 식으로 형성/정착되는지 따로 쫓아가봐야 한다. 한국의 학회/학술지/논문의 틀이 대체로 이미 외국에서 어느 정도 완성된 형식을 받아와 적용한 결과물이라면, 서구에서 지식/학문교류 집단을 처음 만들고 논의했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활동이 미래에 어떤 성격을 부여받게 될지 알 수 없던 상황에서 그때그때 (종종 우연적인) 필요에 따라 규범을 만들고 바꾸어야 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최근 학문의 역사에 관해 재밌게 읽었던 문헌 중 하나는 학술사 연구의 대가 앤서니 그래프턴Anthony Grafton이 19세기 옥스퍼드대학의 학자/지식인이었던 마크 패티슨Mark Pattison, 1813-1884에 대해 1983년에 쓴 짧은 글이다.
https://www.academia.edu/37504816/Anthony_Grafton_Mark_Pattison_American_Scholar_52_2_Spring_1983_229_236
초기 근대 영국의 옥스브리지 대학은 기본적으로 국교회 성직자(=지식엘리트 겸 준 관료) 및 일부 전문직을 양성하고 상층계급의 자제들이 즐겁게 지내다 가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대학이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은 최소한 17세기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자연스럽게 대학의 전문연구 기구로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하면 곤란하다. 역으로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영국의 담론장에서 훨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대학이 실생활에 필요없으며 분란만을 조장하는 과도한 지식추구를 유포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며, 신사숙녀들에게는 그러한 쓸데없이 앎을 파고드는 대신 일상에서 품위있고 현명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갖추는 편이 낫다는 믿음이다. 요컨대 "현학적인 태도"pedantry는 그 자체로 경멸스러운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지배하던 19세기 초중반 옥스퍼드의 학자들은 동시대 독일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학문의 수준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18세기 후반까지 독일이 문화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서유럽에 뒤떨어진 곳이라는 인식은 널리 공유되었지만--1754년 리처드슨의 <찰스 그랜디슨 경>에서 독일은 숲에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묘사된다--19세기에 접어들며 적어도 학문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각 영방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대학을 세우고 뛰어난 교수를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나에서 (약간의 고생길을 거쳐) 하이델베르크로, 다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긴 헤겔의 커리어는 그 한 예다. 특히나 19세기까지 인문학의 핵심분과였던 문헌학 연구에서 독일의 학자들은 '전문적인 학문'으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독일 역사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자 최초의 '근대 역사학자'로 칭송받는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학적 여정을 떠올려보자.** 고전문헌 중심의 교육이나 과거의 자료에 대한 엄격한 문헌비판 방법, 사회와 역사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철학적' 모델 등 개별적인 실천에서 랑케와 19세기 독일의 역사가들이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기에 형성된 학문적 경향과 근본적인 단절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단적으로 그들은 학술적 각주를 달 수 있었지만, 그것을 최대한 배제하거나 아예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18세기의 덜 전문적이고 더 신사적이고자 했던 저자들과 유사한 미적 취향을 공유했다. 이러한 관습은 에른스트 칸토로비츠나 한스 바론 같은 20세기 초중반의 위대한 역사학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케는 각종 공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문서고를 역사학자의 핵심적인 목표물로 설정했으며, 그 혹은 그를 모방한 역사가들이 꾸려낸 집단적인 세미나는 전문 연구자 집단의 형성을 촉진했다. 이들이 축적한 학문적인 성과는 20세기 중반 독일 학자들이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나기 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감히 비교할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한국 학계에서는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분과들 사이의 유의미한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17세기 이래 유럽지식인들이 물적, 인적, 지적 네트워크로 긴밀히 연결된 세계 속에 살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9세기 영국인들의 독일 학문 수용 또한 그런 점에서 그다지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J. S. 밀과 토마스 칼라일의 글에서 흠뻑 배어나는 독일적인 것에의 정취나, 다비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번역한 조지 엘리엇의 이력, 독일 헬레니즘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은 벤저민 조윗(Benjamin Jowett) 등의 예는 19세기 중후반 영국 지식장의 첨단에 선다는 것과 독일인들의 풍부한 지적 생산물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 사이에 광범위한 교집합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패티슨은 적어도 과거 문헌의 연구와 정확한 이해에 있어, 즉 학문에 있어 자신이 배우고 가르친 옥스퍼드의 칼리지들과 독일의 '최신 유행' 사이의 간극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1851년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 학장(rector) 선출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맛본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진짜' 학문과 비평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당대 독일의 문헌학자들과 교류하고, 나아가 아예 직접 독일을 방문하여 교육시스템을 경험하면서, 패티슨은 직접 이자크 카조봉Issac Casaubon 및 조제프 스칼리제르Joseph Scaliger 등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위대한 문헌학자들을 연구하겠다는 목적을 세웠다. 1861년 링컨 칼리지의 학장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결혼한 그는, 이후 1875년 출간한 카조봉의 전기를 제외하고, 자신이 구상했던 프로젝트를 더 진척시키지 않았다.
패티슨은, 여러 비평적 에세이에서 잘 드러나듯, 분명히 엄밀하고 높은 수준의 학문적 연구를 수행할 지적인 도구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그래프턴은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그 길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패티슨은 학장으로서의 업무, 그리고 무엇보다도 18세기 이래의 영국적인 전통에서 하나의 이상으로 지속되었던 사교계/사회 속의 신사-학자로서의 삶에 만족했다. 옥스퍼드가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되기까지는 아직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더 흘러야 했으나, 그러한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그가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독일 학자들과의 교류는 이어졌지만, 가끔 패티슨은 독일인들이 지나치게 학문적으로 엄밀하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린다고, 그런 건 영국에서 먹히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했다. "현학"에 대한 거부와, "실용적인", 그러니까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는 품위있고 세련된 도덕적인 지식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있는 지식이라는 18세기적 전통은 여전히 강고했고, 패티슨 또한 그 속에서, 물론 옥스퍼드 학문의 형편없는 수준을 잊지는 않았겠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이 글이 내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정념을 불러일으킨다면, 한국 인문사회학계, 특히 서양 연구자들의 학문적인 삶을 보면 패티슨의 운명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고전문헌학 연구의 역사에 관한 고전적인 서사로는 루돌프 파이퍼, <인문정신의 역사>, 정기문 역, 길, 2011을 참고할 수 있으나, 그와 동시에 아직 20대였던 그래프턴이 쓴 비판적 서평 또한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Anthony Grafton, "The Origins of Scholarship", _The American Scholar_, Vol. 48, No. 2 (Spring 1979), pp. 236, 238, 240, 242, 244, 246, 256-258, 260-261.
**랑케에 관해서 비전공자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한국어 출판물로는 앤서니 그래프턴, <각주의 역사>, 김지혜 역, 테오리아, 2016에서 특히 2-3장; 레오폴트 폰 랑케, <강대세력들·정치대담·자서전>, 이상신 역, 신서원, 2014, 161-299 등을 보라. 독일역사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저작인 게오르그 G. 이거스의 <독일역사주의>, 최호근 역, 박문각, 1992의 4장은 랑케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의 이론적 입장의 정치적인 함의를 읽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정밀한 지성사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다.
***패티슨에 대한 에세이를 쓴 해에 그래프턴은 지성사·학술사의 가장 위대한 연구성과 중 하나이며 지금도 젊은 연구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_Joseph Scaliger: A Study in the History of Classical Scholarship_, 2 Vols., Oxford UP, 1983-1993 의 제1권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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