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의 어려움과 기쁨: 《지성사란 무엇인가?》홍보

Intellectual History 2020. 10. 23. 20:45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매일 보는 사람과 한참을 다투고 나서야 비로소 “난 원래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란 말로 시작하는 화해의 시간에 들어선다. “헬조선”이란 표현이 처음 유행했을 때 나왔던 언론사 칼럼들을 보면, 40대 이상의 지식인 중에서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한 사람들은 없었다. 지금도 비판에 직면한 정치인이 그런 비판이 나오는 이유를 잘못 읽는 예는 흔하며, 반대로 어떤 정책이 결정된 이유를 완전히 잘못 파악한 사람들이 수천 개의 댓글로 욕을 퍼붓는 일도 많다. 당장 가까운 시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수십 년, 수백 년 전 사람이 남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그가 그 말을 통해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오해하지 않기란 당연히 쉽지 않다. 역사가 중에서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성사, 즉 과거의 말과 생각을 다루는 역사학은 그 사람들의 논쟁과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지성사가 무엇인지 소개하는 게 《지성사란 무엇인가?》의 목표다.

 

그럼 옛날의, 지금과 너무나도 다른 세계의 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성사는 먼저 과거에 어떤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러분이 어느 포털사이트의 카페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고 치자. 그중에서는 처음 가입한 회원들에게 “닥눈삼”, 즉 “닥치고 눈팅 3개월[또는 3년]”을 요구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좀 오래된 표현이지만, 대충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화하는지, 어떤 말버릇이 유행하며 무엇을 하면 욕을 먹는지 충분히 지켜보면서 코드를 익힌 다음에 활동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성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도 비슷하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책(또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 왜, 어떤 주제로 싸우거나 같은 편이 되는지를 계속 찾아서 읽어보자. 그렇게 읽다가 다시 처음에 봤던 책으로 돌아오면, 처음에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표현이 눈에 들어오고, 뭘 이런 것까지 쓸데없이 써놨을까 싶었던 대목이 실제로는 매우 정교한 논리로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지지하는 내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댓글을 달고 게시물을 올려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당당한 커뮤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실제로 지성사가 무엇인지 짧게 설명을 하면 너무 상식적인 말처럼 들려서 실망스럽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맞는 말은 당연한 법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과거의 생각과 말을 이해해온 결과물을 보면 이 진부해보이는 교훈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다에서도 인기있는 분야인 철학의 경우,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서양철학입문서 중에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과거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설명하는 책은 거의 없다(당장 생각해봐도 두세 권이 될까 말까다). 대부분의 철학입문서는 20세기 또는 19세기 사람들의 관점에서 멋대로 만든 기준을 갖고, 아니면 지금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가지고 과거 사람들도 그런 문제를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고 너무나 쉽게 생각해버린다. 바로 옆 사람과도 관심사가 다른데, 시대도 공간도 너무나 다른 세계 사람들이 지금 나의 문제를 나처럼 생각했어야 한다고 우긴다면, 폭력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잘못 달면 쌍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는지 이해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죽은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쉽다. 지성사를 하는 사람들은 쉽지만 잘못된 길보다 좀 시간이 걸리지만 당연한 길을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지성사란 무엇인가?》는 사실 청소년이 편안하게 읽기 좋은 책은 아니다. 원서 자체가 영국의 대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책인 것도 있고, 원저자가 18세기 및 프랑스혁명기 지성사 전공자인만큼 한국의 독자들에게 낯선 사람, 낯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영국의 지식인들이 쓴 책들이 종종 그런데, 별 생각없이 쉽게 지나가려면 지나갈 수 있으나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목도 적지 않다. 언젠가 인터넷 서점에 다음과 같은 리뷰가 달린 적이 있다. 중학생 딸이 다니는 학원 수업에서 교재로 쓰는데, 딸이 어렵다고 하더라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내 생각에도 어려웠을 것 같긴 하다(그래도 별점은 그럭저럭 낮지 않게 주어서 감사했다). 그래서 최대한 잘 읽힐 수 있도록 문장도 많이 다듬었고, 독자들이 모를 것 같은 내용에는 주석으로 설명을 더했다. 원래 처음 보는 내용은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다. 당장 이해가 안 되어도 일단 끝까지 읽은 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더 와닿는 게 있을 것이다. 지루하고 힘든 방법이긴 한데,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겪고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이우창 역, 오월의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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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인문학 교육단체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홍보할 기회를 주셨다. 지금까지 쓴 책 홍보/안내 글 중에서 가장 쉽게 또 잘 읽히는 글이 되도록 적잖이 고민을 기울였다. 그게 성공했는지 평가는 읽는 분들의 몫이다 🙂


해당 포스팅이 실린 나다 소식지 링크: http://nada.jinbo.net/moda/19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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