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어권 독일지성사 연구의 몇몇 소식

Intellectual History 2020. 11. 6. 11:50

간만에 영어권의 독일지성사 관련 포스팅.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이쪽 전공도 아니고 독일어도 못한다(...).

 

1.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과 지성사교수 Richard Bourke 와 역시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현재 LSE에서 현대 독일 지성사를 연구하고 있는 Dina Gusejnova 이 공동 감독한 다큐멘터리 <장미유(油)와 독일정신: 독일 지성사의 운명Rosenöl und deutscher Geist: The fortunes of German intellectual history> (2020)이 공개되었습니다--영상 처음에 소개되듯, "장미유"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가 <근대사에서 국가이성의 이념>(한국어판 <국가권력의 이념사>)에서 사상사의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사용한 비유입니다; 수많은 장미잎을 모아 한 방울의 장미기름을 짜내는 게 이념의 역사라는 거죠(물론 케임브리지 지성사학파는 정확히 이러한 비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50분 가량의 그리 길지 않은 영상이고요, 영어 인터뷰에는 독일어 자막이, 독일어 인터뷰에는 영어 자막이 붙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바흐의 음악을 배경으로 크리스토퍼 클라크, 마틴 제이, 볼프 레페니스, 빌프리트 니펠, 마틴 륄, 퀜틴 스키너를 포함해 독일 사상사·인문사회학계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셨을 연구자들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상은 19세기 독일대학의 신학·문헌학 연구의 부흥과 독일사 서술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하여, 20세기 초반 베버와 마이네케를 짚어보고, 무엇보다 나치 시대의 상황과 미국으로의 망명자들이 겪었던 운명에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뒤에 '개념사'로 널리 알려진 코젤렉을 포함한 전후의 상황도 어느 정도 다루어집니다. 분량에서 알 수 있듯 아주 깊고 정밀한 논의라기보다는 대가들 혹은 주요한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근대 독일의 지성사·사상사연구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훑는 작업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주제에 흥미가 있지만 잘 모르는 분들에겐 당연히 나쁘지 않은 입문용 자료가 될 수 있고요(물론 영어권에서 19세기 이래 독일지성사 연구는 앞으로 아주 많은 과제가 남아있는 주제이긴 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 독일지성사에 익숙하신 분들도 절제된 음악과 영상에서 독일의 적절히 음울한 분위기를 끌어내는 이 작업을 즐기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https://vimeo.com/458065665

 

[2021년 12월 21일 추기: A Film Discussion: Rosenöl und Deutscher Geist The Fortunes of German Intellectual History, 2020년 10월 29일.
https://vimeo.com/475112778 ]

 

 

2.

 

올해 베버의 저 유명한 두 편의 "소명/직업"(Beruf) 강연, 즉 <소명/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소명/직업으로서의 정치>의 새로운 영역본이 <카리스마와 탈주술화: 소명 강연Charisma and Disenchantment: The Vocation Lectures>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https://www.amazon.com/Charisma-Disenchantment-Vocation-Lectures-Classics/dp/1681373890). 공역자들은 둘 다 19-20세기 독일학 전공 교수들이고, 지금까지 베버의 강연제목을 영어권에서 "Scholarship as a Vocation”, “Politics as a Vocation" 옮겨온 전통과 달리 각각 "The Scholar’s Work”, “The Politician’s Work"으로 고쳐 옮겼다. 이를 놓고 <뉴욕리뷰오브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작은 논쟁이 있었다. 하버드 역사학과 교수로서 독일지성사를 연구하는 피터 E. 고든(Peter E. Gordon)이 새로운 번역서에 대한 서평을 썼고, 베버에 대한 몇 가지 이해 및 Beruf의 번역어를 놓고 역자들과 고든이 다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첨예한 논쟁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우나, 특히 점차 파국으로 치달아간다는 느낌이 만연했던 20세기 초반 독일과 자신들의 현재를 겹쳐보지 않을 수 없는 미국 연구자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고든의 글이 베버의 여러 주제를 쉽고 친숙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링크해둔다.

 

고든의 서평: https://www.nybooks.com/articles/2020/06/11/max-weber-fatalist/

역자들의 반론과 고든의 답변: https://www.nybooks.com/articles/2020/11/19/max-weber-agon/

 

 

3.

 

영어권의 독일 비판이론/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에 흥미를 갖고 있는 연구자라면 200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발터 벤야민 저작의 영역본을 새롭게 출판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년에 드디어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의 영역본이 _Origin of the German Trauerspiel_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1977년도에 번역된 기존의 영역본 _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_과 비교해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차이는 비애극Trauerspiel을 독일어 표현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비극Tragedy과 구별되는 16-17세기 희곡장르로서의 비애극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지는 영어권 벤야민 연구자들에게 악명높은 골칫거리였으며, "Tragic Drama"란 표현이 Trauerspiel의 함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로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기존 영역본과의 거리를 두는 것이 그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신 영역본의 역자는 한국어로도 번역된 (역시나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평전>(_Walter Benjamin: A Critical Life_, 2014, 한국어판은 2018)의 공저자이자 하버드판 벤야민 영역 선집의 편집자인만큼 지적 권위에서 흠잡기는 어렵다. 그러나 원저 자체가 워낙 난해하고 까다롭기로 말이 많은 책이니만큼--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들보다 왜 이 논문을 받아든 심사위원들이 국가박사학위Habilitation를 수여하기를 거부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신 영역본에 어떤 평가가 이어질지는 기다려보자. 영어권에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번역소개된 첫 시점이 1960-70년대였다면, 우리는 1990년대 후반 정도부터 새로운 영역본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신 영역본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벤야민의 <원천> 신 영역본의 출간은 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독일지성사 연구가 계속해서 후속세대 및 연구성과를 재생산하는 데 성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재생산과 세대교체의 과정에서 미국 대학의 독일학/독일지성사 연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체가 흥미로운 주제라고 나는 믿는데, 2000년대 이래 벤야민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던 한국에서 언젠가 그러한 흐름을 정리하는 작업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제 관심사도, 방법도 상당히 다른 영역을 향하고 있지만, 한때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즐겁게 읽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독자로서 짧은 상념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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