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환, 「세력균형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유럽 질서의 붕괴」

Intellectual History 2020. 6. 12. 17:31

아래는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에 재직 중이신 안두환 선생님(http://psir.snu.ac.kr/korean/faculty_view.php?id=26)의 논문 「세력균형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유럽 질서의 붕괴」(이하 「세력균형」)의 원고를 저자의 동의를 얻어 출간 전 공개하는 것이다(해당 원고는 『평화의 정치사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집으로 묶여 출간될 예정이다). 케임브리지 학파, 그중에서도 이슈트반 혼트(István Hont, 1947-2013)와 안두환 선생님을 포함한 혼트의 학생들은 지난 40년 간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국제정치경제사상의 의미와 복잡성을 조명하는 다양한 연구를 해왔으며, 그들의 노력에 의해 상업사회 논쟁은 이제 18세기 서구 정치사상을 조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로 다시 인식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블로그와 번역서 등을 통해 누차 언급해왔듯, 케임브리지학파가 일구어놓은 18세기 계몽주의·상업사회 논의의 진면목을 한국어로 음미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없었다. 본 포스팅을 통해 그 첫 걸음을 내딛는 영광을 허락해주신 안두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을 통해 지성사에 흥미와 호기심을 갖게 되신 분에게는 그 호기심을 달래면서도 더욱 크게 만드는 계기가, 해당 시기 국제정치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 있다면 풍부한 참고문헌을 통해 앞으로의 공부방향을 다듬는 교두보가 되기를 희망한다.


글의 길이는 200자 원고지 기준 230매가 넘는 짧지 않은 분량이다. 더하여 베스트팔렌조약부터 프랑스혁명기까지 한반세기 가량의 시대를, 또 사무엘 푸펜도르프·찰스 데브넌트·볼링브로크·프랑수아 페늘롱·데이비드 흄·몽테스키외·에머 드 바텔·장-자크 루소·아이작 드 핀토·칸트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상가와 논자들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글이니만큼 18세기 유럽정치사상사, 특히 국제정치경제적 논의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겐 내용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도 선명한 논리를 지닌 친절한 글에 약간의 설명을 붙이는 실례를 무릅쓰고자 한다.



서론부터 결론까지 총 여섯 개의 절로 구성된 「세력균형」의 목적은 "18세기 세력균형의 개념과 실천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글은 크게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첫째는 베스트팔렌조약에서 루이 14세의 도전, 다시 위트레흐트조약과 각국의 무역경쟁을 거쳐 제국 간의 충돌과 혁명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치사의 맥락이다. 글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축은 그와 같은 국가·왕조들 간의 전쟁과 무역, 동맹과 확장이 쉴틈없이 이어졌던 18세기 유럽정치사를 배경으로 각각의 사상가들이 전쟁과 평화에 관해 무슨 문제의식을 지녔고 어떠한 논리를 제시했는지를 살피는 세력균형의 지성사다. 


세력균형의 논리가 형성되고 변모해가는 역사적 과정은 좀 더 상세한 시선이 필요하다. 먼저, 1절에서 상세히 소개되는 페늘롱의 입장에서 드러나듯, 세력균형의 논리는 단순히 평화와 전쟁의 문제 이전에 고대 로마의 역사를 전범으로 삼는 고전기의 정치언어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공화국에서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제국의 몰락이 보여주듯, 권력의 집중에 의해 누구에게도 견제받지 않는 세력이 통치하는 세계가 부패와 파괴, 멸망을 피할수 없다는 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정치언어에서 '보편적 사실'에 가까운 위치를 점하는 교리였으니, 17-18세기의 유럽 또한 이러한 운명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고 다수의 논자들은 믿었다). 이러한 믿음에 입각해 여러 논자들은 (특히 프랑스와 같은) 어느 한 국가도 절대적인 패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세력균형이야말로 국가간의 진정한 평화와 번영을 가능케하는 대안이라고 주장했고, 또 그러한 기준에 따라 각국의 정치적 선택을 평가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글의 3절에서 흄과 몽테스키외를 통해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상업"의 역할이다. 실제로 위트레흐트 조약 이전에도 '근대' 자연법 전통에서는 교역이 상호의존성을 증대시켜 인간의 사회성sociability을 증진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교화한다는 논리가 존재했으며,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비교적 선진적인 국가들에서는 자신들이 '상업사회' 문명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갔다. 17세기부터의 자유무역옹호론과 함께 이는 흄과 몽테스키외를 경유하여 다시 국가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즉 국제적인 상업과 교역의 번성이 국가들 간의 호혜적인 평화를 가져온다는 틀로 재구축되었다. 그러나 상업의 대두가 갖는 함의는 양가적인 것이었다. 당대인들은 상업으로 얽힌 관계가 단순히 호혜와 상호번영만이 아닌 경쟁과 다툼의 장이기도 하다는 걸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국제교역에 입각한 세력균형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상업은 평화의 사도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나팔수가 될 수 있었다. 3절 후반부에서부터 특히 4절까지는 무역경쟁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국제적 세력균형에 대한 믿음이 위기에 직면하는 과정을 그리며, 5절은 이제 유럽 밖에서까지 이어지는 제국들간의 경쟁과 혁명들의 도래로 계몽주의 시기 세력균형론이 붕괴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간략히 그려낸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체의 명운을 설명하던 초기 근대의 언어들이 상업과 교역이라는 주제와 어떻게 맞닥트리는지, 그리고 후자가 어떻게 전자를 재구축하는 강력한 자장으로 작용하는지에 주목하여 장기 18세기/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사상사를 개괄하는 내러티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세력균형」은 혼트와 그의 학생들이 구축해온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선명히 드러내는 뛰어난 저술이다. 『무역의 질투』(Jealousy of Trade, 2005)를 비롯한 혼트의 저작을 주의깊게 읽었던 독자라면, 그리고 긴 호흡을 갖고 20세기 초 독일의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에게까지 닿는 정치사상사의 고전들을 떠올릴 수 있는 독자라면, 이 논문의 뿌리가 연결된 보다 깊은 지적 전통이 지성사 연구에서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도, 이 글은 길고 요동치는 시간 내에서 사상과 세계의 역동적인 관계를 음미할 수 있는 좋은 안내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이 글이 도달하기를 기대해본다.



PDF로 보실 분은 다음 파일을 참고하시라:

안두환_세력균형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유럽 질서의 붕괴(2020).pdf

아래의 글은 같은 내용에서 독자들의 가독성을 위해 약간의 편집을 더했다.



세력균형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유럽 질서의 붕괴* 

 

 

안두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dhwahn@snu.ac.kr 

 

  

I. 서론 

 

“계몽주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이 났다. 18세기를 개시한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의 전쟁이었고, 18세기를 마감한 것은 프랑스 혁명 전쟁(1792-1802)과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었다(Blanning, 2008; 심스, 2014: 87-286).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전쟁에 영원히 마침표를 찍고자 열망한 시대가 전례 없는 혼란과 유혈로 끝이 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개혁과 진보 그리고 개선으로 흔히 상징되는 시대가 계속된 전쟁으로 이토록 상처를 입을 수 있었을까?  


        캉브레 대주교Archbishop of Cambrai이자 루이 14세의 손자 부르고뉴 공Duke of Burgundy의 교사였던 프랑수와 페늘롱François Fénelon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2-1713) 와중 자신의 제자를 위해 격언론을 집필한 바 있다(Fénelon, 1747: 76-91; Fénelon, 1720; Riley, 1994: xiii-xxxi). 우리는 페늘롱이 격언론에 첨부한 짧은 부록에서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2년 전인 1700년 카를로스 2세Carlos II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된 스페인 왕좌에 루이 14세가 자신의 둘째 손자 필립 앙주 공Philip of Anjou을 앉히려고 하자 오스트리아 제국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이 대동맹Grand Alliance을 맺고 무력으로 대항하면서 발발했다. 이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드 1세Leopold I의 둘째 아들 카를 대공Archduke Charles이 스페인 왕좌에 앉아야 유럽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국가가 합심해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제어하고자 싸웠던 9년 전쟁(1688-1697)이 끝난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속 전쟁(1667-1668) 이래 계속된 루이 14세의 전쟁을 지켜봐온 페늘롱은 자신의 제자에게 시급히 국가간 평화 유지와 안전 보장이야말로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Blom, et. al., 2007). 하나 페늘롱의 경고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비롯한 이전의 기독교 인문주의 사상가의 전쟁 비판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Hinsley, 1967: 13-80; Johnson, 1975; 하워드, 2018, 27-47). 페늘롱은 에라스무스와 달리 전쟁의 참상을 들춰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페늘롱은 한 발 더 나아가 국가간 체제를 네 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을 분석했다. 안타깝게도 페늘롱의 논의는 정치적인 이유로 페늘롱이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지난 1734년에야 빛을 보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계몽주의 주류 담론을 압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상호 견제를 통해 과도한 권력의 집중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이라는, 그 기원을 찾자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까지 거슬로 올라가는 세력균형 이론의 확장이었다.   


        페늘롱의 첫 번째 국제 체제는 하나의 지배적인 국가가 존재하는 단극 체제였다. 페늘롱에 따르면, 이 체제는 “가장 위대해 보이기도” 있지만, “가공할 부정과 폭력을 마구잡이로 저지르지 않는 한 세워질 수 없는” 체제라 절대 마음에 두어서는 안되었다(Fénelon, 1747: 85-87). 설상가상, 로마 제국의 멸망이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듯이, 당시 “보편 군주정universal monarchy”이라 불리웠던 이 체제는 그것의 붕괴로 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줄 것이었다(Bosback, 1988; Pagden, 1995). 페늘롱이 다룬 두 번째 국제 체제는 “한 국가가 다른 모든 국가 개개에 대해서는 우세하지만, 이들을 합친 것보다 월등히 우세하지는 않은” 체제였다(Fénelon, 1747: 87). 페늘롱은 이 체제가 자신이 나눈 네 가지 체제 중 최악의 체제로 꼽았다. 이유인즉, “이 체제는 가장 좋은 상태라 하더라도 결국 앞서 논한 첫 번째 체제로 넘어가기” 때문이다(Fénelon, 1747: 88). 페늘롱이 살펴본 다음 세 번째 체제는 “강한 국가가 있기는 하지만, 약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함께 한다면, 충분히 대등한, 따라서 모든 약한 국가가 안전할 수 있는” 상태였다(Fénelon, 1747:88). 페늘롱은 이 체제가 두 번째 체제보다 훨씬 나은 체제라 보았는데, 왜냐하면 패권을 차지하려는 국가를 적은 비용으로 저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페늘롱이 구분한 마지막 체제는 “모든 국가가 서로 거의 동등한, 따라서 모든 국가가 안전한” 상태로 “어느 국가도 이 상태에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 체제였다(Fénelon, 1747: 89). 페늘롱은 이 체제를 “가장 행복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 말하며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부르고뉴 공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다(Fénelon, 1747: 90).   


        당시 프랑스 정부가 이와 같은 주장을 담고 있는 페늘롱의 저작의 출판을 금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였다. 페늘롱은 루이 14세에 대한 비판을 넘어 얼마 전 서거한 루이 14세의 주적 영국의 윌리엄 3세William III가 취했던 정책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었다. 페늘롱의 관찰하기에,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체제 사이에서 위태롭게 진동하고 있었다. 루이 14세가 네덜란드 지역에 대한 야욕에 더해 1685년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통해 프랑스 내 개신교 세력을 쫓아내던 당시, 프랑스가 월등한 힘으로 이웃 국가를 하나둘씩 정복하고 가톨릭을 유일한 종교로 강제할 것이라는 공포는 현실이었다. 이듬해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의 지위로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1세와 연합해 아우크스부르크 연맹League of Augsburg이라 불리는 방어 동맹을 결성했으며, 제2의 샤를마뉴Charlemagne가 되고자 한 루이 14세의 시도를 힘겹게나마 막아내며 유럽을 페늘롱의 두 번째 체제로부터 구원해냈다. 하지만 곧 1698년 헤이그 조약Treaty of the Hague에 따라 카를로스 2세에 이어 스페인 왕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던 바바리아의 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루이 14세는 자신의 둘째 손자 앙주 공 필립을 내세우며 유럽을 다시 한 번 페늘롱의 두 번째 체제로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페늘롱은 첨부된 짧은 부록의 내용 대부분을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국가에 맞서 약한 국가가 함께 방어 동맹을 결성할 권리는 정당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는데 할애했다. 페늘롱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웃 국가가 너무 강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만 아니라 우리 이웃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것은 자유와 평온 그리고 모두의 안녕을 위해 불연히 일어나 싸우는 용감하고도 의로운 행동이다”(Fénelon, 1747: 78). 


        정리하자면, 페늘롱과 동시대 대다수에게,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전쟁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세력균형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1713년, 11년 동안 지속된 처절한 전투와 막대한 희생을 치른 후, 프랑스와 영국간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Treaty of Utrecht을 통해 페늘롱의 세 번째 다극 체제가 들어서면서 유럽은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롭게 서로 경쟁하며 부를 쌓는, 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Fénelon, 1747: 82; Schuurman, 2012: 179-199). 이 시기의 중요성은 이미 많은 학자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예를 들어, 존 포칵John Pocock은 유럽이 야만주의와 종교의 굴레에서 탈피하는데 있어서 세력균형이 중심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유트레히트 계몽주의Utrecht Enlightenment”라는 용어를 고안했다(Pocock, 1997: 23; 1999: 106-114). 18세기 세력균형에 대한 집착은, 또 다른 학자의 말처럼,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낙관주의”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Anderson, 1970: 198). 세력균형은 통념과 달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이나 1659년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nes에 의해 등장한 개념이 아닌, 계몽주의 시대가 낳은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여러 논자가 지적하듯, 계몽주의 시대는 이론의 측면에서나 실천의 측면에서나 세력균형의 “황금기Golden Age”였다(Hassall, 1896; Morgenthau, 1961: 9, 189; Rosecrance, 1963: 26; Butterfield, 1966: 138-139; Anderson, 1993: 163-189).   


        하지만, 엄밀히 따져볼 때, 세력균형에 기초한 국제 체제에는 침략 행위를 사전에 억지할 억제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페늘롱이 경고한 바 있듯이, “모든 국가는 이웃 국가 위에 서고자 갈망한다. 모든 국가는 그렇기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어떤 이웃 국가도 과도한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언제나 주의를 살펴야 행동해야 할 것이다”(Fénelon, 1747: 77). 즉, 세력균형의 근본적인 목표는 전쟁이 없는 평화 상태가 아니라 세속적인 혹은 종교적인 보편 군주정에 대한 열망을 막는데 있다고 하겠다. 세력균형은 모든 국가가 동등하기 위해서 군사적인 수단을 써서든 외교적인 수단을 써서든 끊임없이 서로 견제하는 체제인 것이다. 


        본 장의 목적은 18세기 세력균형의 개념과 실천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연구가 이미 진행되어 있다(Haslam, 2002: 89-127; Sheehan, 1996; Luard, 1992; Maurseth, 1964: 120-136; Dehio, 1962). 하지만 세력균형에 따라 국가간 관계가 안정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급기야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과정에 대해서는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문헌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 전역에 걸쳐 몰락이 임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종말론적인 예언이 급증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내전과 파산, 심지어는 동에서 넘어오는 야만주의까지, 유럽은 이제 희망이 없다는 우려가 유럽 전역에 만연했다(Hont, 2005a: 1-158). 당연히 이와 동시에 세력균형을 통해 안보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명확해졌다. 이러한 점에서, 이마뉴엘 칸트Immanuel Kant가 프랑스 혁명 전쟁과 제2차 폴란드 분할 직전 생_피에르 신부Abbé de Saint_Pierre의 유럽 연합 구상을 세력균형의 대안으로 되살리고자 시도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Kant, 1991a: 47-49; 1991b: 87-92; 1991c: 93-130). 하지만 그로부터 채 10년도 채 지나기 전에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은 생-피에르 신부가 과거 유트레히트 조약 체결 즈음 예언했던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난폭하게 확인해 주었다. 유럽 국가는 서로를 대할 때,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의 왕, 서인도 제도의 비참한 추장, 아니 아메리카 대륙의 작은 주권자”와 다를 바 없는 “야만족의 우두머리”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Saint-Pierre, 1714: 3). 1815년 빈 회의Congress of Vienna를 통해서 구축된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가 세력균형의 복원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체제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느 누구도 세력균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와 그의 대군이 유럽 대륙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것을 막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Schroeder, 1994: Mitzen, 2013; Vick, 2014; Ghervas, 2016: 404-425; 안두환, 2014). 본 장에서는 세력균형의 실패와 이에 따라 안보와 억제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며 평화의 세계가 아니라 전쟁의 세계로 유럽이 변모하는 과정을 되집어 보고자 한다. 개혁과 진보 그리고 개선의 시대로 알려진 18세기는 국가간 관계에 있어서는 전쟁과 공포 그리고 실패의 시대였다.   

 

 

II. 베스트팔렌 조약과 프랑스의 부상, 1648-1713  

 

계몽주의 시대 유럽은 세력균형을 국가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한 가장 주된 수단으로 여겼다. 유럽 각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이 세력균형의 확보를 대외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기 시작한 시점은 17세기 중반 30년 전쟁의 승리로 프랑스가 동에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성장을 저지하는 한편 서에서는 피레네 조약을 통해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성장을 저지하면서 향후 성장의 발판을 확고히 다질 무렵부터였다 하겠다. 모친 앤 여왕Anne of Austria의 섭정을 보좌했던 재상 추기경 쥘 마자랭Cardinal Jules Mazarin이 서거한 뒤 실권을 장악한 루이 14세의 프랑스를 경험하면서 유럽은 평화로운 질서가 세력균형의 보존에 달려있다고 믿게 되었다(김준석, 2018).  


        가장 대표적으로 사무엘 푸펜도르프는 『주요 유럽 왕국과 국가의 역사에 대한 개설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Principal Kingdoms and States of Europe』(1682)에서 유럽이 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사리 구축한 베스트팔렌 체제가 루이 14세의 프랑스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이 짙다고 경고했다. 상속 전쟁과 네덜란드 전쟁(1672-1678)을 배경으로 집필된 푸펜도르프의 이 책은 사실 프랑스의 부상에 맞서 신속히 동맹을 구축하라는 호소였다. 푸펜도르프는 본론의 각 장을 유럽의 각 국가가 처한 상이한 상황에 비춰볼 때 프랑스의 위협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평가로 마무리했다. 푸펜도르프는 이로써 세력균형을 통해 유럽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체계적인 계획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푸펜도르프는 스웨덴에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스웨덴은 이전에 “오스트리아 가문의 과도한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제는 외교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선회해야만 한다(Pufendorf, 2013: 602). “프랑스의 국왕은 이제 다른 군주의 지배자 흉내를 내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스웨덴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뒤짚기 위한 프랑스의 계략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푸펜도르프는 설득했다(Pufendorf, 2013: 602). 특히 푸펜도르프는 스웨덴 국왕에게 네덜란드 공화국과 한시라도 빨리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푸펜도로프는 “독일의 군주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들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 진격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고 아니면 심지어 프랑스군과 연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Pufendorf, 2013: 311).  


        푸펜도르프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또한 각자의 안보를 위해 결국 반부르봉 연맹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견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만큼 엄청난 군사적인 잠재력을 지닌 나라이기는 하지만, 정치 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심각한 결점을 갖고 있다고 푸펜도르프는 분석했다. 푸펜도르프에 따르면,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왕국도 제대로 된 연방도 아니었으며, 이 둘의 이상한 혼합체였다”(Pufendorf, 2013: 350; 2007). 여기서 푸펜도르프가 가장 우려한 것은 독일의 정치적 분열이었다.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악용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Pufendorf, 2013: 358).  


        푸펜도르프가 볼 때 프랑스의 부상으로 인해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될 국가는 단연코 스페인이었다. 루이 14세는 “남은 네덜란드 지역을 짐어삼키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스페인의 다른 곳을 모두 정복하는 것이다”라고 푸펜도르프는 적었다(Pufendorf, 2013: 95). 설상가상으로 스페인은 왕위 계승 문제로 이미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푸펜도르프는 다가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예견하며 “만약 아직도 계승자가 없는 스페인의 왕가가 결국 계승자를 보지 못한다면 유럽에 어떠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조정할 수도,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탄식했다(Pufendorf, 2013: 95-96). 푸펜도르프는 스페인 제국 전체가 완전히 분열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고 보았다. 혹여라도 그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 푸펜도르프는 프랑스가 가장 큰 몫을 챙길 것이 분명하며, 이로써 유럽 대륙에 보편 군주정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푸펜도르프의 제안은 확실하고 확고했다. “유럽 각국의 자유와 영토가 한 개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도록 할” 유일한 방책은 스페인 제국의 수호를 목적으로 한 세력균형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었다(Pufendorf, 2013: 95).  


        끝으로 푸펜도르프는 영국에게 세력균형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했다. 영국은 균형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푸펜도르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면,  

 

영국은 강하고, 크기도 큰 왕국으로 유럽의 기독교 군주 간의 균형을 유지할 능력을 갖고 있다. 영국은 또한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가장 주된 국가 이익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영국은 프랑스의 왕이 네덜란드 전역의 지배자가 되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는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강한 국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Pufendorf, 2013: 187-189).  

 

        그러나 프랑스에 맞서 방어 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푸펜도르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반부르봉 동맹의 결성은 장기적으로 볼 때 프랑스를 이웃한 모든 국가가 이득을 보는 일이었다. 하나 이들 국가가 눈앞의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먼 미래에 얻게 될지도 모를 이익을 계산해 동맹 관계에 들어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루이 14세와 영국의 찰스 2세Charles II가 1670년 체결한 도버 비밀 조약Secret Treaty of Dover은 이러한 문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무역 독점을 와해시키기 위해 찰스 2세는 2년 전인 1668년 루이 14세로 하여금 병력을 거두고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을 조인하도록 네덜란드 공화국 및 스웨덴과 결성했던 삼국 동맹Triple Alliance을 파기했다(Pufendorf, 2013: 270). 반프랑스 세력균형 동맹을 조직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은 푸펜도르프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떠올렸다(Pufendorf, 2013: 189, 310-312). “정복에 몰두하고 있는” 프랑스는 로마 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국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릴 것이다”라고 푸펜도르프는 예언했다(Pufendorf, 2013: 271). 프랑스의 팽창에 대한 푸펜도르프의 암울한 전망은 그럼에도 소용이 없었다. 푸펜도르프가 곧이어 자포자기 투로 적었듯이, 프랑스가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기 전에 “프랑스와 이웃하고 있는 모든 작은 국가가 융성하는 이 왕국에 의해 잡아먹힐 중차대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확실하기 때문이다”(Pufendorf, 2013: 271).   


        이후 세력균형에 대한 유럽의 논의는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를 견제해야 할 알맞은 시점을 파악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당연히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나라는 영국이었다(Black, 2011; 2014). 지리적으로도 영국은 균형자의 역할을 하기에 최상의 국가였다.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할 핵심축으로서 영국의 능력은 명예 혁명을 통해 확정되었다(Gibbs, 1969: 59-79; Thompson, 2011: 267-282). 1688년 자신의 장인 제임스 2세James II를 내쫓고 부인 메리 2세Mary II Stuart와 함께 영국의 왕위를 꿰찬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는 자신의 새로운 왕국을 즉각 아우크스부르크 연맹의 선두에 위치시켰다. 윌리엄 3세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수많은 이가 이해하고 있었듯이, 명예 혁명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과도하게 커진 힘을 제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비밀리에 준비되고 착수된 전략적이고 군사적인 조치였다(Thoyras, 1744: 29).  


        명예 혁명에 따라 대동맹으로 커진 아우크스부르크 연맹의 루이 14세에 맞선 전쟁은 와해된 힘의 균형을 복원시켜 유럽의 평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때늦은 시도로 정당화되었다. 일례로 토리당 소속 정치인이자 언론인으로 당시 시민적 인문주의 정치 담론의 전파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찰스 데브넌트Charles Davenant의 논평을 들 수 있다. 출판되자마자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세력균형, 전쟁·평화·동맹의 권리, 보편 군주정에 대한 논고Essays upon I. The Ballance of Power, II. The Right of Making War, Peace, and Alliances, III. Universal Monarchy』(1701)에서 데브넌트는 “오랫 동안 우리는 유럽의 균형을 지탱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으며, 영국민 전체는 이 역할을 그만두는 것이 영국의 명예와 안보를 증진시키는 일이라 여기지 않는다”라고 적었다((Davenant, 1701: 7). 데브넌트는 삼국 동맹을 배신하기로 한 찰스 2세의 결정을 비판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게도 책임을 따졌다. 데브넌트는 크롬웰이 12년 전 전략적 요충지인 뒹케르크 항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으면서 유럽의 세력균형이 프랑스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게 되어다고 추궁했다(Davenant, 1701: 15). 반 세기 가량 세력균형의 원칙을 어기고 패권으로 부상하는 국가의 편에 섰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은 이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했다. 과도하게 커진 프랑스의 국력을 제어하기 위해 영국은 10년 가까이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동원해 싸워야 했다. 데브넌트는 잘못된 편승 정책으로 인해 치루는 비용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Davenant, 1701: 284, 289). 세금은 물론이거니와 부채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Dickson, 1967; Jones, 1988; Brewer, 1989). 게다가 전쟁이 끝없이 지속되면서 군대는 그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평시에도 해산하지 않고 계속 운영되었다(Schwoerer, 1974). 데브넌트는 이로 인해 명예 혁명을 통해 어렵사리 구축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을 중핵으로 하는 영국의 자유의 체제가 다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우려했다(포칵, 2011: 121-216).  


        데브넌트와 마찬가지로 토리당 소속 정치인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와중 남유럽 담당 국무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Southern Department에 임명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고자 노력했던 헨리 세인트 존, 볼링브로크 자작Henry St. John, Viscount Bolingbroke 역시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MacLachlan, 1969: 197-215). 중세 이후 유럽 역사를 개괄하여 당시 유럽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화자되었던 『역사 공부와 이의 쓸모에 대한 편지Letters on the Study and Use of History』(1752)에서 볼링브로크도 데브넌트처럼 크롬웰이 떠오르고 있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가라앉고 있는 스페인을 공격한 것은 중대한 실책이라 논했다(St. John, 1932: 32). 그럼에도 볼링브로크는 반패권 연합을 형성할 적기를 아는 것만큼 반패권 연합을 해체할 적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제국 두 강대국이 패권을 두고 쟁투하는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체제 하 유럽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볼링브로크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크롬웰의 친프랑스 정책은 심각한 실수이지만 우리 모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라고 아래와 같이 두둔했다.  

 

다른 저울과 달리 정치적인 세력균형의 저울에서는 비어서 가벼운 측이 내려앉고 가득차 무거운 측이 올라간다. 문제는 이 저울에서 내려가는 측에 있는 이가 여태까지 누렸던 더 큰 부와 권력 그리고 기술과 용기에 따른 습관적인 편견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러한 편견과 용기가 불러일으키는 자신감을 떨쳐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반대로 올라가는 측에 있는 이는 자신의 힘을 즉각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향후 자신의 힘을 발휘해 성공한 경험에 따라 가지게 될 자신감을 선뜻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정치적인 세력균형의 다양한 변화를 제 아무리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한들 종종 우리는 이들과 똑같은 편견에 입각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St. John, 1932: 32-33).   

 

        볼링브로크의 주장인즉, 크롬웰이 스페인의 국력을 과대 평가하여 프랑스 측에 섰던 것처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휘그당은 프랑스의 국력을 과대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Ahn, 2017: 125-149). 게다가 전쟁 초기 부친 레오폴드 1세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형 요제프 1세Joseph I가 예기치 않게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에 오르고자 한 카를 대공이 직위를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스페인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휘그당의 주장은 프랑스 대신에 오스트리아 제국을 보편 군주정으로 만들고자 하는 잘못된 행동이었다(Hare, 1711a; 1711b; Swift, 1712; 1916; Anon., 1714; Defoe, 1712: 817). 볼링브로크는 균형자로서 영국이 해야 할 일은 “탈선이 너무 크지 않도록” 확실히 해두는 것이라고 조언했다(St. John, 1932: 84). 바꿔 말해, 볼링브로크는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빨리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볼링브로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면,  

 

[균형 상태로부터의 일탈의 정도가] 그리 크지 않을 때는 신속히 조치를 취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어가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올바른 정책이 강조하는 조심성인 것이다. 반면 [균형 상태로부터의 일탈의 정도가] 너무 커서 이 정도로는 되돌릴 수 없는 경우에는, 또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터졌을 경우에는, 훨씬 더 많은 힘을 써야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국면을 초래한 모든 상황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에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섣불리 공격해 실패한다면 일탈한 국가는 더 일탈하게 될 것이다. 이미 힘이 과하게 커진 것 같은 국가는 이를 기회로 삼아 더 힘을 키울 것이다. 반대로 공격이 크게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힘이 쏠렸던 저울의 한 쪽이 완전히 비워지면서 다른 쪽으로 힘이 완전히 쏠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St. John, 1932: 84).  

 

        이와 같은 이유로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영국 내 논의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의 문제에 집중되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영국 해협 반대편의 분위기는 이와는 사뭇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러 성찰 시도 중 두 가지가 눈에 띄는데, 하나는 생-피에르 신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늘롱의 것이다.  

 

 

III. 유트레히트 조약과 세력균형 평화, 1713-1739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종결은 세력균형에 대한 성찰이 진화하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흔히 언급되곤 한다. 세력균형에 대한 당시 논의는 대략 두 가지 관점을 축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먼저 세력균형 체제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을 지적하며 국가 연합을 결성할 것을 촉구한 생-피에르 신부와 같은 이가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의 퀘이커Quaker 교도 윌리엄 펜William Penn과 존 벨러스John Bellers 등도 비슷한 주장을 펼졌지만, 이들처럼 급진적인 제안을 했던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Saint-Pierre, 1714; Penn, 1693; Bellers, 1710; 안두환, 2016a). 대다수는 세력균형 원칙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강한 의문을 표했다. 생-피에르 신부나 펜이나 벨러스 등의 날카로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세력균형 체제를 오랫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고심했다.  


        이들 중 일부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이 대체로 복구되었다고 확신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영국의 균형자 역할에 너무 의존하지 않으면서 세력균형을 지속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생각한 논자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프랑스에 유독 많았다. 당시 세력균형에 대한 유럽 내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던 이들은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체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개혁할 수만 있다면 이전과 같은 참상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 것이라 확신했다(Rothkrug, 1965; 벤투리, 2018). 이들의 지도자는 페늘롱이었다. 자신의 제자 부르고뉴 공을 위해 집필한 정치 소설 『텔레마쿠스의 모험Les aventures de Télémaque, fils d’Ulysse』(1699)에서 페늘롱은 루이 14세 사후 세력균형의 원칙에 입각해 유럽의 평화 질서의 청사진을 내놓았다(안두환, 2016b). 페늘롱의 소망은 부르고뉴 공이 조부를 반면교사로 삼아 성군이 되어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힘이 강한 프랑스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유럽의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가 아니라 유럽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가 되기를 페늘롱은 희망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프랑스가 하루라도 빨리 루이 14세의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폐기하고, 대신 추기경 마자랭이 독일의 여러 작은 국가와 라인 연맹League of the Rhine을 맺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보장하면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했듯 다자주의적이고 우호적인 외교 정책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보았다. 페늘롱의 주장의 기저에는 폭정과 정복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인식이 놓여있었다. “자신들의 국왕이 다른 나라를 침공해 굴복시켰다고 한들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자신들이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고 페늘롱은 꼬집어 물었다(Fénelon, 1994: 69). “국가의 보루는 정의와 절제 그리고 정직과 더불어 당신이 자신들의 영토를 강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당신의 이웃의 믿음”이라 강조하며 페늘롱은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프랑스 대외 정책의 중심 기조가 되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창했다(Fénelon, 1994: 134).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 왕은 행복하여라! 자신의 이웃을 신뢰하고 그들의 신뢰를 받는 왕은 행복하여라! 자신의 이웃을 침략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나서서 말리는 왕은 행복하여라!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왕은 다른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리라(Fénelon, 1994: 148)! 

 

        볼링브로크를 비롯한 영국의 많은 논자와 동일하게 페늘롱은 “인류는 너무 강대해지는 국가에 맞서 이웃 국가와 함께 공동의 안전을 도모해야 할 의무를 서로 지우고 있다”고 믿었다(Fénelon, 1747: 83). 하지만 볼링브로크나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영국의 여러 논자와 달리 페늘롱은 견제와 균형의 체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페늘롱은 세력균형이 안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Fénelon, 1747: 82-83). 그러나 페늘롱은 생-피에르 신부나 영국의 두 퀘이커 교도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생-피에르 신부와 펜 그리고 벨러스가 세력균형에서 어떠한 밝은 미래도 보지 못했다면, 페늘롱은 세력균형 체제를 항구적인 평화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는 하더라도 도달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페늘롱은 프랑스가 “정직한 중개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기만 한다면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설득했다(Fénelon, 1747: 89-90). 페늘롱은 부르고뉴 공에게 루이 14세가 했던 것처럼 “내키는대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지 말고”, 다음처럼 행동할 것을 간청했다(Fénelon, 1994: 134, 143).   

 

어떻게 해서라도 이웃 국가의 질투를 사는 것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대신 어떻게 해서라도 명예로운 심판관과 중재자가 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어떠한 정복자가 누릴 수 있는 영광보다 더 확실하고 확고한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이웃 국가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이웃 나라가 전하와 친하게 지내고자 애를 쓸 것이고, 전하는 이웃 나라가 전하를 존중하는 정도만큼 그들을 지도하게 될 것입니다(Fénelon, 1994: 197).  

 

        페늘롱의 평화안은 세력균형 체제의 성격이 궁극적으로 패권을 장악한 국가가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에 정초하고 있었다(Fénelon, 1747: 91). 여기서 하나 더 특기할 점은 페늘롱의 세력균형에 따른 평화안이 유럽을 단일한 운명 공통체로 보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늘롱에 의하면, 유럽의 국가는 각자의 안전을 보장해 줄 세력균형 체제를 유지하고자 협력하면서 서로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이는 상업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경제 교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유럽의 국가는 이제 “하나의 사회를, 커다란 공화국”을 이루고 있었다(Fénelon, 1747: 76).  

 

[유럽이] 함께 평정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이웃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 평등과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 덕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럽의] 모든 국가는 서로에게 이웃이며, 상업에 의해 결합되며, 이로써 거대한 정치체를 이루고 있다.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Fénelon, 1747: 82).   

 

        페늘롱의 세력균형의 이상에 입각한 해결책은 이를 야심차게 집행할 부르고뉴 공의 때이른 사망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걸쳐 큰 호응을 받았다(Schmitt-Maaß et. al., 2014). 실제로 유트레히트 평화는 유럽의 균형을 북구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4년 뒤인 1718년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맺은 사국 동맹Quadruple Alliance은 이를 수정하려는 스페인에 맞서 효과적으로 응대하기도 했다. 국가간 관계의 기초는 “신뢰good faith”라는 생각도 다시금 힘을 얻기 시작했다Callière, 1716; Onnekink, 2016: 69-91; Schröder, 2017: 154-176; Ahn, 2017: 125-149). 또한 루이 14세의 사망 후 프랑스도 생-피에르 신부와 페늘롱이 소망했던 바대로 내부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듯 보였다(Saint-Pierre, 1719; Fénelon, 1997: 1085-1105).  


        유트레히트 조약 이후 유럽을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 견제를 하는 한편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교역을 하는 국가들로 구성된 유기적인 모임으로 이해하고 묘사하는 경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옹호한 이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었다. 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유럽은 주권 국가의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는 자신의 생각을 「예술과 과학의 발전과 진보Of the Rise and Progress of the Arts and Sciences」(1742)라는 시평에 명쾌한 논조로 담아냈다. 유트레히트 조약 이래 프랑스와 영국 사이 25년 넘게 지속된 평화에 마침표를 찍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흄은 유럽의 미래에 대해 낙관했다. 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상업을 통해 또 정책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다수의 주권 국가가 서로 이웃하는 것만큼 예의와 지식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Hume, 1994d: 64). 또한 흄은 페늘롱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주정을 이러한 - 독일의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표현을 빌리자면 - “문명화 과정civilising process”의 중심에 배치했다(엘리아스, 1996; 1999). 페늘롱이 바랬던 것처럼 프랑스는 마침내 “문명화된 군주정civilised monarchy”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로써 유럽 정치의 본질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흄은 자신에 차 말했다(Hume, 1994d: 67-70). 흄은 지난 반 세기 세력균형이 제대로 작동했으며, 이제 이전처럼 이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안심했다. 유럽의 국가는 생존을 위한 쟁투를 멈추고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유럽의 국가는 이제 평화적으로 경쟁하고 모방하며 역사의 진보를 이끌고 있었다. 마치 수세기 전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의 국가는 인류의 문명을 새롭게 개척하고 있었다.   

 

만약 지구의 표면을 살펴보면 세계의 네 구역 중 유럽이 바다와 강 그리고 산에 의해 가장 잘게 쪼개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럽의 모든 나라 중에서 그리스가 가장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자연스럽게 여러 정부에 의해 나뉘어졌다. 이에 따라 그리스에서는 과학이 발전했고, 유럽은 지금까지 과학의 발전에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Hume, 1994d: 67).  

 

        반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의 종식을 알리는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이 조인될 즈음에 출간된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1748)에서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는 유럽의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흄과 마찬가지로 몽테스키외도 프랑스가 지배자의 변덕이 아니라 법에 의거해 통치되는 “절제된 군주정moderate monarchy”이 되었다고 인정했다(Montesquieu, 1989: 132). 몽테스키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흄과 달리 “군주정의 정신은 전쟁과 팽창이다”라는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Montesquieu, 1989: 132). 몽테스키외는 프랑스가 상당한 정도로 개혁을 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유럽의 안정을 위협하는 중대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고 생각했다(Montesquieu, 1989: 136). 따라서 몽테스키외가 “평화와 절제”를 통치의 원칙으로 삼는다고 정의한 작은 공화국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제국과 같은 거대한 군주정 국가의 행동을 항시 주시하면서, 만일의 경우, 신속하게 방어 동맹을 결성하거나 정말로 필요하다면 선제 공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Montesquieu, 1989: 138-139).  


        몽테스키외가 “상업의 자연스러운 효과는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라고 가정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Montesquieu, 1989: 338). 하나 외관상으로는 자유 무역을 옹호하면서도 몽테스키외는 사회가 상업을 통해 구성된다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이론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서로에 대한 적의를 다시금 불태우는 것을 목도한 몽테스키외는 힘이 지배하는 유럽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했다. 특히 몽테스키외는 국가간, 사회간, 그리고 개인간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편견이 상업을 통해 치유되는 것을 그러한 현실이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몽테스키외는 유럽의 모든 국가가 “상업적인 이해 관계를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 종속시켰다”고 관찰했다(Montesquieu, 1989: 343).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과 스페인 사이 서인도 제도 무역을 두고 벌어진 젠킨스 귀의 전쟁(1739-1740)을 지켜보며 몽테스키외는 영국이 대표하던 “상업의 정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Montesquieu, 1989: 346-347). 스페인과 영국의 식민지 갈등은 이듬해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제국을 침략하며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흡수되며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확대되게 된다.     


        사실 몽테스키외가 소위 “부드러운 상업doux commerce”에 대해 의문을 품기 10여년 전부터 영국에서는 이미 유트레히트 조약이 오래 지속될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휴전 협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정치인과 지식인 등 여론 주도 계층 사이에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Montesquieu, 1989: 338). 프랑스가 루이 14세의 반 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복구하고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시간을 유트레히트 조약이 벌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는 국부와 국력을 동일시하는 중상주의적 사고의 부활에 투영되어 나타났다(Wilson, 1995: 137-205; Colley, 2009: 55-100). 후일 흄이 “영국을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은” 논저라 평한 『영국의 무역과 항해에 관한 고찰Trade and Navigation of Great Britain Considered』(1729)에서 조슈아 지Joshua Gee는 다양한 통계 자료에 근거해 양국간 무역에서 이득을 보는 측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라고 단언했다(Gee, 1738; Hume, 1994c: 137). 1738년에는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영국에 대한 비교 우위를 실증적으로 논증한 장-프랑수와 믈롱Jean-François Melon의 『상업에 대한 정치적 소론Essai politique sur le commerce』(1734)이 영어로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영국민에게 또 다시 큰 충격을 안겼다(Melon, 1738). 영국의 신문과 잡지의 지면은 유럽의 세력균형이 다시 한 번 프랑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논조의 글로 뒤덮였다. 영국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이에 대해 확실한 조치를 단호하게 취해야 한다는 여론의 강한 압박을 받았다. 이렇게 볼 때, 젠킨스 귀의 전쟁은 로버트 젠킨스Robert Jenkins 선장을 비롯한 영국의 상인과 밀수밀매업자가 스페인 아메리카 식민지 경비대에 의해 굴욕당한 것을 되갚기 위한 작은 다툼이 아니었다(Wilson, 1995). 적어도 영국 정부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 웨일스 공, 프레데릭Frederick, Prince of Wales의 비서, 조지 리틀턴George Lyttelton과 같은 이에게 젠킨스 귀의 전쟁은 부르봉 보편 군주정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적인 공격이었다(Anon., 1740: 18-19). 리틀턴에게 세력균형의 근저에는 무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유럽 안에서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유럽 밖에서 무역을 장악해야 했다.       

 

유트레히트 조약에 의해 보장이 되었듯 서인도 제도에서 적정한 무역 수지를 획득하는 것은 오랫 동안 부의 올바른 순환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로 간주되어 왔으며, 이는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보존하는데 있어 너무나 긴요하다고 하겠다(Lyttelton, 1739: 1-2).   

 

        영국에게나 프랑스에게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둘러싼 전쟁의 연속이었으며, 당시 어느 논자가 풀이한 것처럼, 젠킨스 귀의 전쟁은 “엄밀히 따져서 세력균형을 결정짓는 가장 주된 요소는 무역이다”라는 가정에 입각한 싸움이었다(Campbell, 1750: 24). 하지만 국가의 경제력이 국가의 군사력으로 전환되기에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역 수지가 흑자를 계속 달성해야 한다면, 유럽의 수많은 국가간 균형을 확보하고 이를 지탱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왜냐하면 무역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지식인과 정치인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Hont, 2005b: 267-324; 2007: 222-342). 첫째는 상업이 시장의 규모가 크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번성한다는 것으로, 이는 제국주의 정책을 새로운 시장을 향한 정당한 욕구의 발현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둘째는 국가간 무역에 의존하는 국가일수록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부유한 국가는 임금이 올라 경쟁력이 떨어지고 반대로 가난한 국가는 임금이 낮아 경쟁력이 올라가는 국제 경제의 동학은 국가간 질서에 내재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페늘롱이 부르고뉴 공에게 제출한 경제 개혁 계획의 중심에 농업을 위치시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Cuche, 2009: 103-118; Hont, 2006: 397-418). 국가간 무역의 심화 및 확장은 세력균형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상업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Kapossy et. al., 2017).   

 

 

IV. 왕위 계승과 무역 전쟁, 1740-1763 

 

영국과 프랑스의 무역과 식민지 경쟁의 격화가 유럽의 세력균형을 기저에서부터 흔들고 있었다면, 불확실한 왕위 계승 문제는 상황을 순식간에 악화시킬 수 있었다. 사실 1716년 체결되어 1731년까지 유지되면서 유트레히트 조약 이후 세력균형 원칙에 의거해 유럽의 평화로운 질서를 뒷받침한 프랑스와 영국간 동맹은 양국의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1714년 영국 스튜어트 가문의 마지막 국왕 앤Anne Stuart이 후계자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자 영국의 의회는 1701년 가톨릭 교도의 왕위 계승을 금지한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에 따라 독일 하노버 가문의 게오르그 루드비히Georg Ludwig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듬해에는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자식과 손자 모두 앞서 보낸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어린 증손자 루이 15세Louis XV가 삼촌 필립 2세, 오를레앙 공Philippe II, Duc d’Orléans의 섭정을 받으며 프랑스의 왕좌에 올랐다. 유트레히트 평화가 자리잡을 무렵, 프랑스와 영국은 지난 두 버의 대전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에 더하여 두 나라 모두 왕조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우연에 힘입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능했다(Trenchard and Gordon, 1995: 619; Ahn, 2016).  


        하나 1740년 가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Karl VI가 남성 후계자 없이 운명한 독일의 상황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부친이 취한 국사 조치Pragmatic Sanction 덕분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계승했고, 남편 프란츠 스테판Franz Stephan은 프랜시스 1세Francis I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으나, 비엔나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은 서인도 제도와 대서양 무역을 두고 다시 격돌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게다가 러시아의 여왕 앤Anne마저도 비슷한 시기에 운명하고 어린 이반 6세Ivan VI가 모친 안나 레오폴도브나Anna Leopoldovna의 섭정을 받으며 즉위했다. 같은 해 봄, 왕위에 오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는 이 같은 상황이 자신의 왕국을 키울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그 해 겨울,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페인만 아니라 자신의 부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ederick William I도 승인한 국사 조치를 부정하며 오스트리아의 곡창 지대 슐레지엔을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한 세기 전 푸펜도르프가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독일의 통일성을 심각하게 저해했고, 이로써 유럽 전체의 질서를 위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 내놓은 자서전 『나의 시대의 역사Histoire de mon temps』(1746)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이와 같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다음의 논리로 변호했다.  

 

만약 다른 군주가 한 군주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다면 이 군주의 잘못을 바로 잡을 법정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 개인의 발언은 한 개인의 불행만 야기할 뿐이지만, 한 주권자의 발언은 여러 나라에 불행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문제는 결국 이것이다. 군주는 조약을 어기고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백성이 모두 죽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Frederick II the Great, 1789: xviii-xix)?  

 

        프리드리히 2세가 또 다시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면서 유럽 대륙에서 7년 전쟁(1756-1763)이 개시될 무렵, 유럽의 대다수 지식인과 정치인은 유트레히트 조약에 의해 구축된 평화로운 세력균형 체제가 끝내 붕괴되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Nakhimovsky, 2017: 44-77). 일례로,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저작은 생-피에르 신부의 세력균형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갈수록 암울해져만 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투영해냈다(Rousseau, 1991: 53-100). 프랑스와 영국은 영국의 상업에 기초한 패권과 프랑스의 농업에 기초한 패권 중 하나만 남길 운명의 싸움을 치룰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Baugh, 2011). 마지막 승자는 영국이 될 터지만, 페늘롱을 추종하는 다수의 프랑스 논자는 농업 경제에 기초하고 자연 자원이 훨씬 더 풍부한 프랑스의 패권이 훨씬 더 자연의 이치에 알맞은 질서라 확신하며, 유럽의 안정을 위해 영국을 반드시 꺾어야 한다고 외쳤다(Riley, 2014). 머지않아 전쟁은 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킬 것이며 유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이 빠르게 힘을 얻고 있었다. 유트레히트 평화에 따른 유럽의 번영을 노래했던 흄 역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1752년 「세력균형에 대하여Of the Balance of Power」라는 시평에서 흄은 영국이 “근대 정치의 신중한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서로 질투하여 어떻게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자 모방하는 정신에 더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개탄했다(Hume, 1994b: 158). 마찬가지로 1752년 출판된 「국가 신용에 대하여Of Public Credit」란 또 다른 시평에서도 흄은 유럽의 “막대한 부채와 국채 그리고 저당에도 불구하고 싸우고 다투고 있는 군주들과 국가들을 볼 때면 나는 그릇 가게 안에서 곤봉을 휘두르며 대결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탄식했다(Hume, 1994a: 175). 흄은 세상을 뜰 때까지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국가가 전쟁 부채를 줄이고자 함께 노력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거두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끝났지만,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지식인 중 양국을 위시한 유럽의 모든 국가가 전쟁과 파산을 거듭하며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어떠한 형태로든 남기지 않은 이는 없었다(Wilson, 1793: 30).  


        『국제법 또는 자연법의 원리Le droit des gens; ou Principes de la loi naturelle』(1758)의 저자 스위스의 위대한 법학자 에머 드 바텔Emer de Vattel 또한 흄에 비해서는 낙관적이라 해도 그러한 전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바텔은 페늘롱을 따라 유럽의 모든 국가는 “공동의 이익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질서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애쓰고 있기에 “일종의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Vattel, 2008: 496). 하지만 이로부터 비롯되어 유럽이 한 동안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번영할 수 있도록 했던 “어느 군주도 내키는대로 패권을 휘두르며 다른 군주에게 법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적인 균형 또는 힘의 균형”이 무역 경쟁이 심화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가 전통적인 패권에 집착하면서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바텔은 분석했다(Vattel, 2008: 496). 반면 영국에게 책임을 묻는 이도 적지 않았다. 볼테르Voltaire, François-Marie Arouet의 적수로 잘 알려진 로랑 앙글리비엘 들 라 보멜Laurent Angliviel de La Beaumelle은 유럽 질서가 붕괴되는 주된 원인으로 영국의 부상을 꼽았다. “지난 세기가 프랑스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영국의 시대이며”, “머지 않아 영국은 보편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Beaumelle, 1753: 85). 전쟁으로 점철된 루이 14세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루소 역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지만,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유럽의 몰락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라 예언했다. 영국에서는 상업이 사적 이익에 앞서 공적 이익을 고민하고 추구하는 덕성을 오염시키고 있었고,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의 주요 왕국은 점점 더 분열되고 약해지고 있었다. 특히 루소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시작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노골적인 독일 내 패권 다툼을 걱정했다(Scott, 2001). 푸펜도르프가 이로 인해 프랑스가 팽창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 경고를 했다면, 루소는 이로 인해 러시아가 팽창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와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Treaty of Saint Petersburg으로 프로이센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직후 출판된 『사회계약 혹은 정치적 권리의 원리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1762)의 두 번째 권에서 루소는 다가올 유럽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그렸다.   

 

러시아 제국은 유럽을 복속시키고자 하지만, 자신이 복속될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웃 부족 타타르족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될 것이며 또 우리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혁명은 피할 수 없다. 유럽의 모든 군주가 이를 앞당기고자 경주하고 있다(Rousseau, 1997: 73).  

 

        7년 전쟁이 끝날 무렵, 어느 누구도 유럽의 평화를 다시 한 번 그리고 이전보다 확실히 안착시킬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Lloyd, 1771: 70-71). 세력균형만 복원되면 유렵의 국가는 평화 속에서 상업을 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번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트레히트 조약의 기저에 놓여있던 확신은 온데간데없었다(Price, 1780: 17-30). 7년 전쟁의 와중 쓴 「무역의 질투에 대하여Of the Jealousy of Trade」(1759)라는 시평에서 흄은 자신이 품었던 희망이 정치와 경제의 기괴한 결합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고 논했다(Hume, 1994e: 150-153; Hont, 2005: 1-156). 상업은 더 이상 평화를 촉진하지 않고 있었다. 정반대였다. 상업은 오히려 전통적인 국가간 쟁투를 악화시키고 또 확장시키고 있었다. 설령 왕위 계승의 문제가 모두 일단락된다고 하더라도 유럽의 국가는 더 많은 시장을 위해 또 더 많은 영토를 위해 계속 싸울 터였고, 종국에는 막대한 부채로 인해 하나씩 무너져내릴 터였다.  

 

 

V. 제국의 등장과 세력균형 질서의 붕괴, 1763-1815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으로 7년 전쟁이 영국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미국 독립 혁명(1765-1783)과 프랑스 혁명이 폭발하기 전까지 영국을 위시한 유럽 곳곳은 다가올 종말에 대한 비탄에 젖어 있었다. 세력균형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곳곳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전력을 다해 또 다른 충돌을 대비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유럽의 국가를 각자의 편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서로에 대한 시기와 분노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은 어느 한 쪽이 상대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이전 적지 않은 논자가 이 대결의 최후의 승자는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가 될 것이라 예측했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막대한 전쟁 부채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나, 영국의 상업 식민지 제국에 대한 유럽 대륙 국가의 질투에 더해 영국의 경제는 프랑스의 경제에 비해 기초가 튼실해 보이지 않았다. 문제가 먼저 터진 곳 역시 광활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획득한 영국 제국이었다.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한 해법 중 하나로 제시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과세는 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급기야 무장 독립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번성하는 상업에 따른 부와 지속되는 전쟁에 따른 부채는 9년 전쟁 와중 설립된 영란 은행으로 상징되는 소위 금융 혁명을 심화시켰고, 이로 인해 토지 세력에서 금융 세력으로 경제적인 권력이 넘어가면서 영국의 의회는 날로 타락해갔다(포칵, 2011: 155-357). 영국의 의회를 장악한 금융 세력에게 전쟁은 새로운 이자로 그리고, 이길 경우, 새로운 시장으로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미국 혁명 전쟁(1775-1783)은 타락한 영국의 제국 체제에 맞선 저항으로 영국 안팎의 질서를 올바르게 조정할 기회로 여겨졌다(Pocock, 2010: 215-310). 지난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한 프랑스만 아니라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까지 모두 영국의 패권을 견제하고자 식민지를 도왔다. 미국 혁명 전쟁 막바지 제1 재무 대신First Lord of the Treasury으로 식민지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과의 평화 협정을 진두지휘했던 셀번 백작 윌리엄William Petty, 2nd Earl of Shelburne은 종전을 기회로 삼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래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설정하고자 했다(Kippis, 1783: 5, 79-81).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거두는 동시에 중상주의 정책을 멈추면, 경제적인 교류 본래의 호혜와 균형이 되살아나면서 유럽의 모든 국가가 평화 속에서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셀번 백작은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에 영국과 프랑스 양국 사이 자유 무역 조항을 넣고자 백방으로 뛰었다(Shelburne, 1783: 4). 셀번 백작의 노력 덕택에 미국 혁명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786년 오클랜드 남작, 윌리엄 에덴William Eden, 1st Baron Auckland과 조제프 마티아스 제라드 드 레느발Joseph Mathias Gérard de Rayneval은 “호혜와 상호 편의에 기초한 상업 체제를” 영국과 프랑스 양국 사이에 구축할 것을 천명한 에덴 협정Eden Agreement에 조인할 수 있었다(Eden and Rayneval, 1786: 3).     


        그러나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간 경쟁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고자 했던 셀번 백작과 에덴 그리고 레느발의 헌신적인 노력은 얼마가지 않아 헛수고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Shelburne, 1790: 7). 예컨대, 저지대 지역 무역이 첨예한 갈등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의해 관리되고 있던 스헬데 강을 자유롭게 통행하겠다고 공표하며 불씨를 당겼고, 프랑스와 영국간 자유 무역 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프로이센은 오라녜 가문의 장기 집권에 반발하며 총독 빌렘 5세William III를 내쫓고자 한 애국 세력Patriotten을 처단하고 저지대 지역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공했다. 저지대 지역의 경제적 또 안보적 중요성을 고려한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의 영국은 즉시 재무장을 추진했으며, 이로써 유럽에는 또 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Rose, 1909: 262-283).       


        프랑스의 경우, 미국 혁명 전쟁의 승리에 따른 기쁨도 잠시였다. 전쟁 부채 해결을 골자로 한 일련의 재정 개혁 시도가 물거품이 되면서 프랑스 혁명이 터진 것이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다행히도 희망적인 요소가 있었다. 새 정부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것이며, 영국과의 자유 무역과 이에 기초한 동맹도 이의 일환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일례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은 전쟁이 군주제 국가의 재정 문제로 인해 유발되기에 정부 체제가 공화정으로 바뀌면 대외 정책의 기조도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설 것이라 주장했다(Paine, 1791: 169-170). 하지만 영국이 민중 혁명으로 독립한 미국과 혁명 프랑스의 자매공화국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페인은 반동 세력의 축이 된 영국을 확실히 굴복시킬 전쟁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위한 지출의 항구적인 체제”를 장착하고 “자국민의 재산만 아니라 인류가 문명의 행복을 누릴 기회까지도 빼앗는” 국가와의 평화란 있을 수 없었다(Paine, 1792: 79-84). 페인의 옛 친구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도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멈춤 없는 전쟁을 호소했지만, 대상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and on the Proceedings of Certain Societies in London relative to That Event』(1790)에서 이미 혁명 프랑스 및 그를 옹호하는 페인과 같은 논자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했던 버크는 자유의 이름으로 정복을 정당화하는 혁명 프랑스와는 어떠한 평화 협상도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외쳤다. 버크가 볼 때, 혁명 프랑스에 맞선 영국의 전쟁은 “모든 국가를 위한” 싸움으로 “정당하고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경건하고 숭고하기까지 했다”(Burke, 1991: 191-197, 238-242, 248-257). 버크는 영국이 이길 승산이 아무리 낮다하더라도 이웃한 작은 국가를 모조리 집어삼키며 “유럽의 자유Liberties of Europe”를 짓밟는 혁명 프랑스의 행동을 좌시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를 잉태한 프랑스 혁명 정부만 유럽의 안정을 위협했던 것은 아니다. 버크 역시 인지했듯, 유럽의 세력균형 질서는 동유럽에서 이미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다(Lukowski, 1999). 30년 전쟁 중반 구스타부스 아돌프스Gustavus Adolphus의 대활약을 마지막으로 약화일로에 있던 스웨덴 제국의 지역 패권을 둘러싼 다툼은 9년 전쟁과 더불어 18세기를 열었던 대북방 전쟁(1700-1721) 이래 나날이 거세졌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불씨를 당긴 프로이센의 성장도 놀랄 만한 것이었으나 같은 시기 러시아 제국의 성장에 비하면 약소한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은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II가 집권한 7년 전쟁 말부터 특히 빨라졌다. 1768년에서 1774년 그리고 1787년에서 1792년, 러시아 제국은 오토만 제국을 연거푸 격파하며 크림 반도로의 길을 확보했고, 이로써 발칸 반도의 패권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토만 제국과의 두 번의 전쟁 사이 일어난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1778-1779)에서도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은 여지없이 입증되었다. 다급해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폴란드의 분할을 제안했고, 결국 폴란드는 1772년, 1793년, 그리고 1795년 세 번의 분할로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폴란드 정부와 폴란드 정부의 개혁 방안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s sur le gouvernement de Pologne, et sur sa réformation projettée』(1772)에서 루소는 위험에 처한 폴란드를 구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Rousseau, 1985; Whatmore, 2012).  


        18세기 후반, 어느 누구도 유럽이 제국의 각축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Muthu, 2003). 서유럽에서는 상업 제국 영국이, 동유럽에서는 영토 제국 러시아가 기존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허물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로이센 등이 각자의 이익을 쫓으며 힘을 보태고 있었다(Venturi, 1991a; 1991b). 스코틀랜드의 정치철학자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이 날카롭게 비유했듯이, 유럽의 수많은 작은 국가는 “자신보다 훨씬 큰 나무 그늘 아래 관목처럼, 자신보다 훨씬 강한 이웃 국가에 직실당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Ferguson, 1995: 60-62). 18세기 초반, 대다수가 이상으로 삼았던 세력균형에 기초한 유럽의 안정된 평화는 생-피에르 신부의 분석대로 현실이 될 수 없었다.  

 

 

VI. 결론 

 

흔히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로 묘사되는 18세기는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기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18세기를 열었던 9년 전쟁부터 18세기를 닫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맞선 잰쟁까지 거의 모든 전쟁이 당대인들에게는 필연적인, 심지어는 정당한 전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18세기 내내 전쟁 자체는 근심과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비난의 대상은 보편 군주정을 설립하려는 시도였다.  


        로마 제국이 상징하는 어두운 과거에 대한 이와 같은 본능적인 거부감의 근저에는 유럽은 서로 다른 정치 문화와 필요를 가진 크고 작은 국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럽 역사의 진보는 이러한 특징을 보존하는데 달려있다는 계몽주의 사고가 놓여 있었다. 페늘롱과 흄에 이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 제국 쇠망사History of the Ris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1776)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다종다양한 도시 국가가 서로 경쟁하며 번영하는 국가간 관계에 대한 계몽주의 시대의 희구가 어느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는지 유려한 문장으로 알려주고 있다(Gibbon, 1994: 287-297). 이러한 관점에서 세력균형은 “유럽의 자유”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세력균형에 기초한 평화나 안정이 영속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든 주요한 행위자가 세력균형의 원칙을 대외 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고 이를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 영국의 한 하원 의원이 연설했듯, “자기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유럽의 어떠한 군주도 함부로 유럽의 자유를 훼손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Parliamentary Debates, 1742: 92). 7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지구적 전쟁으로 인한 천문학적인 부채를 신속하게 갚을 방도를 찾아 헤매고 있을 무렵, 네덜란드 유대인 상인이자 은행가 아이작 드 핀토Issac de Pinto 역시 자신의 주저 『유통과 신용에 대한 논고Traité de la circulation et du crédit』(1771)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국인 대부분은 프랑스가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다. 프랑스인은 모두 영국이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다. 두 국가는 서로를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형성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자신의 이익이라고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  

         상업의 질투 그리고 패권을 위한 경쟁은 개인간 그리고 국가간 적대를 낳고 있다. 국가와 개인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동일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서로 경쟁을 하기에 적이 되는 것이다. 상업 국가의 진정한 이익은 절대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럽의 군주에게 가르칠 수만 있다면, 평화와 인류의 행복의 튼튼한 기초가 분명히 놓여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시도하는 바다(Pinto, 1774: xv).  

 

        18세기 초 유럽의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은 상업이 유럽의 군주로 하여금 서로의 이익과 운명이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 것이라 확신했다. 상업은 세력균형의 틀에서 과도하게 벗어나려고 하는 국가를 확실히 제어할 것이며, 유럽은 이제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이들은 믿었다. 하지만 페늘롱이 예견한 것처럼 이러한 낙관적인 이론은 계속해서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18세기 말, 또 다른 재앙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을 무렵, 칸트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칸트는 영구적인 평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애써 고집했지만, 유럽 각국이 서로 싸우고 죽이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반사회적 사회성ungesellige Geselligkeit” 개념은 위안보다는 절망에 훨씬 더 가깝게 들리는 말이었다(Kant, 1991a: 41-53).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 이념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ürgerlicher Absicht』(1784)에서 칸트가 이렇게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를 환상시킨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의 열강은 하나둘씩 프랑스 혁명이 촉발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이로써 계몽주의 시대 유럽은 세력균형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수많은 전쟁으로부터 배운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하워드, 2002: 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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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의 논지와 구조는 필자가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 역사학과의 리처드 왓모어Richard Whatmore 교수와 함께 집필한 다음의 논문 중 필자가 작성한 부분을 기본적으로 따른다. Doohwan Ahn and Richard Whatmore, “Peace, Security and Deterrence,” in Stella Ghervas and David Armitage (eds.), A Cultural History of Peace in the Age of Enlightenment (London: Bloomsbury, 2020), pp. 117-132. 하나 본고의 주제나 접근 방식이 생소한 국내 독자를 위해 과도하게 상세한 논의는 줄이는 한편 추가적인 설명과 문헌을 보충하고자 노력했다. 본고의 초고는 2020년 2월 12일 일본 토요 대학교에서 개최된 제3회 동아시아 지성사 네트워크 연구회에서 행한 기조 연설에 기초해 작성되었으며, 평을 아까지 않은 우에노 히로키Ueno Hiroki 박사와 사토 소라Sato Sora 교수에게 감사한다. 바쁜 와중에도 본고의 발전에 여러 도움을 준 오석주 학생과 이우창 선생에게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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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ecanix 2020.06.15 13:19 Modify/Delete Reply

    이렇게 매번 수준높은 텍스트들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한번 꼭 읽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전부터 간간히 봐온 이 블로그에서 특히 얼마 전 번역하신 <지성사란 무엇인가>에서 몇 차례씩이나 구체적으로 목도했던 포콕 선생님의 위엄을 여기서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게, 거의 대부분의 근대 정치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포콕의 저술들은 사실상 교과서 이상의 지위를 지니고 있구나 싶더군요...물론 제가 본건 극히 소수긴 하지만은, 참고문헌 중에 포콕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ㅋㅋㅋ

    이쯤되니 그 말로만 듣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를 읽지않으면 안되겠다 싶습니다만, 그런데 이거 거의 고등학교 수준에 준하는 얄팍한 서양사&철학사 지식을 갖춘 저로서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 저술인지 모르겠네요;; 혹시나 비교적 심도있는 배경지식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책일련지 궁금합니다.. 학부 전공으로 미국사를 제외하곤, 서양사를 제대로 깊이 파본적이 전무합니다ㅜㅜ
    +혹시 제임스 탈리의 <의미와 콘텍스트>를 구할 수 있는 경로를 알고 계실까요? 주변의 공공도서관에는 커녕 저희 학교 도서관에서조차도 소장되어있지 않군요...

    • BeGray 2020.06.19 11:46 신고 Modify/Delete

      며칠 간 여유가 없다가 짧게 들러 댓글 확인합니다^^;

      1) "언젠가 한번" 대신 시간 나실 때 지금 바로 읽어보시는 게 lecanix 님의 공부에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애초에 큰 설명틀을 쉽게 제공하는 글이기도 하고, 지금 당장 다 와닿지 않더라도 일단 지금 읽고 나중에 또 읽으면 됩니다. 꼭 글을 홍보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제 생각에는 그쪽이 더 효율적인 공부방식인 것 같아요 ㅎㅎ

      2) 포콕의 주요 저작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 시간과 노력을 쏟아 꼼꼼히 읽을만 합니다. 그 시간을 거치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저자이기 때문이죠.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는 특히 3부의 밀도가 매우 높긴 한데, 제 생각에는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1-2부를 보고, 그 다음 버나드 베일린의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을 보고, 그 뒤에 다시 포콕의 책 3부를 읽는 게 약간이나마 수월한 독서순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ㅎㅎ

      3) <의미와 콘텍스트>는... 비밀댓글로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거기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2020.07.04 00:38 Modify/Delete

      비밀댓글입니다

    • BeGray 2020.07.04 01:27 신고 Modify/Delete

      마침 블로그를 둘러보고 있을 때 답변을 주셨군요 ㅎㅎ 댓글에서는 질문해주신 내용 위주로 답변을 달겠습니다.

      0)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그것도 주류가 아닌 포지션의) 역사학자가 맞닥트린 여러 방법론적 도전들을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여러 독서가 필요하실 겁니다; 그리고 독일적 전통을 포함해 그 대부분은 한국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고요. 당장 조급하게 모든 걸 풀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벤느가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어쨌든 무시할 수 없었던 당시 프랑스 역사학계의 지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한 권을 언급한다면,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를 추천합니다. 국역되어 있고 요점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자국의 '전통적인' 역사학에서 탈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특히 미국에서 유입되어 오는) '사회과학'(들)의 도전에 상대해야 하는 과제를 아날학파 초기세대들이 어떻게 수행했는가를 재미있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더불어 프랑스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사학 대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과학 자체의 역사화라는 층위에서는 도로시 로스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국역본 전2권)도 추천합니다.

      1) "history of ideas"는 러브조이 식의 사상사 방법론에 국한할 때는 "관념사"/"관념의 역사"로 옮기고, 넓은 의미의 사상사를 지칭할 때는 그냥 "사상사" 정도로 옮겨도 무방합니다. 영어권 연구자들도 (적어도 사상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같은 표현이 두 용법을 갖는다는 걸 명확히 인지하는 듯 하네요.

      2) 일단 지성사가들은 확실히 '사회과학화한 역사학'의 계보와는 구별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케임브리지에 살아남아 있던) 문헌학 베이스의 역사학 전통, 다른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이나 토머스 쿤처럼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고유의 영역으로 다룰 수 있게 해준 20세기 중후반의 철학적·이론적 흐름 등등이 교차하는 지점들에 있던 사람들이죠. 물론 이들이 오토 폰 기르케, 마이네케, 한스 바론, 펠릭스 길버트 같은 독일 정치사상사의 전통이나, 동시대의 정치이론 전통을 (선별적으로나마) 참고했던 건 분명하고요.

      이들이 원래부터 자의식을 가진 그룹으로 지속되었다기보다는, 1950-60년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비슷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적 정향을 가진 똑똑한 연구자들이 모여 그룹을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과거를 파고 올라가다보니 (특히 왓모어와 포콕은) 자신들의 선조를 계몽주의 역사학에서까지 찾는 건데, 그건 저는 엄밀한 역사학적 계보의 형성이라기보다는 약간은 슬로건 비슷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 우리가 '유럽/서구 역사학계'라고 묶어 부르기 쉽지만, 2차 대전과 나치가 가져온 대격변 이전 각국의 역사학은 (독일 역사학자들의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구별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역사학의 역사, 특히 19세기부터의 궤적은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바이저의 책도, 그러니까 다이제스트인 <헤겔 이후> 말고 본격적으로 독일 역사주의를 다룬 (번역되지 않은) 책도 이 주제에 관해서는 매우 부분적인 차원만 조명할 뿐입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여전히 영어권 연구자들은 19-20세기 독일을 잘 모르기도 하고, 해당 분야에서 독일인들이 자신들에 관해서 어떤 연구를 했는지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 한국인 연구자는 아직 본 적이 없군요.

      3) 사실 영어로 된 논문을 볼 수 없으면 케임브리지나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2000년대 이후 묶여나오는 시대별 철학사 개설논문집을 참고할 수 없으니 흐름을 좇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단권개설서는 대체로는 '이제는 비판받아야 할 통설'을 거의 답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저는 철학과 학생들이 여전히 낡고 비역사적인 철학사 개설서로 철학사를 이해하려 하는 것이 무척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일한 예외는 17-18세기 도덕철학사를 다룬 J. B. 슈니윈드의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자율의 발명>(국역본은 3권 분책) 정도인데, 아쉬운 점이 많은 번역과 이제는 점점 낡아가는 세부사항들이 보이지만 그나마 근본관점은 여전히 도움이 되는 편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쪽은, 첫째로 철학과를 준비하실 게 아니라면 굳이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사'를 참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을 읽어야 한다면 Cambridge History of Philosophy 나 Oxford Handbook / Routledge Companion 시리즈에서 특정 세기 철학사(가령 17세기 철학, 18세기 철학, 19세기 철학 등등)를 다룬 책에 실린 논문들을 훑어보시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맑스의 작업은 18세기까지의 여러 지적 전통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리 읽힐 수 있습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맑스 전기가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솔직히 부분적인 성과만을 거둘 뿐입니다). 어떤 면에서 18세기까지의 언어들에 익숙한 사람의 눈에는 맑스의 작업은 그러한 언어들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여러 변형물 중 하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9세기 후반부터 여러 지식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고, 많은 연구자/사상가들이 그에 기초해서 혹은 그에 대항하여 많은 작업을 내놓았으며 그러한 흐름이 비교적 최근까지 서구와 우리의 지식장에 잔존했다는 점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들이 없이는 맑스의 언어들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연구들을 몇 가지 추천드리자면,

      - 포콕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 버나드 베일린의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 이슈트반 혼트의 작업들(한국어 번역 아직 없음)
      - 도널드 윈치의 작업들(한국어 번역 아직 없음)
      - 기독교 종말론적 전통; 칼 뢰비트의 <역사의 의미>, 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둘 다 번역이 있습니다)

      정도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프랑스혁명기 이후에, 그리고 19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연구가 영어권에서 이제야 점점 커지는 정황을 목도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외 Cambridg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시리즈도 참고하세요. 서양사/서양문학 전공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시리즈에 실린 논문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 시간을 투자하는 게 좋습니다.

      아도르노는 무척 재미있고 철학이나 미학에서만 다루는 게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만, 역사가는 아니며 그의 작업은 종종 수사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개인적으로 아도르노는 결국 20세기 초반-중반 독일의 사람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는 그게 이 블로그에서 아도르노 인용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텍스트 중 하나입니다만, 친절한 것으로는 세창출판사에서 내놓은 강의록들, 가령 <변증법 입문> <사회학 강의> 같은 것들이 좀 더 좋습니다.

    • lecanix 2020.07.04 09:05 Modify/Delete

      우왓 그새 답변을 남겨놓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침 어제 도서관에서 <조각난 역사>와 (의외로 짧은 분량에 혹해서 고른...ㅋ)<사회학자와 역사학자>를 빌렸던 참이었습니다. 말씀해주신 점들을 유념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메일 확인했습니다ㅎㅎ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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