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 정치사상을 세계 속의 행위로서 이해하기> 강연자료
Intellectual History 2020. 5. 27. 18:542020년 5월 26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유럽지역학 연계전공 주관 유럽지역연구 세미나에서 <지성사란 무엇인가?: 정치사상을 세계 속의 행위로서 이해하기>라는 (지나고보니 딱히 매력적이지 못한) 제목으로 강연 및 질의토론을 진행했다. 제목에서 이해할 수 있듯, 세미나는 올해 4월 초 출간된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7038094) 및 언어맥락주의 지성사 방법론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자리로 기획되었다. 어떤 지적 배경을 지닌 분들이 얼마나 참석할지(나와 주최측 모두 45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올 거라고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만큼 나는 가능한 대중적인 수준에 맞추어 이야기하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끊어짐 없이, 당초에 정한 시간을 넘겨서까지 진행된 질의와 토론은 조금 더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 혹시라도 관심을 두셨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강연자료와 녹화영상을 올린다.
결코 익숙지 않은 내용을 듣고자 바쁜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많은 분들, 강연준비에 커다란 도움을 주신 소진형 선배, 반주리 씨, 오석주 씨, 그리고 귀중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안두환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강연 녹화영상(Zoom) 링크: https://drive.google.com/open?id=1O7M5VByoHgBDQbogRsKx_to7zXWdi_gH
강연자료(pdf):
이우창_[Zoom] 유럽지역학연계전공 세미나 강연개요_20200526.pdf
이하는 강연자료를 미세하게 보완한 내용이다.
1. 강연 개요 [목차 소개]
2. 《지성사란 무엇인가?》 소개 [책 표지 및 목차를 중심으로 간략히 책 내용 소개]
3. 《지성사란 무엇인가?》 번역의 이유
- 기존에 케임브리지학파의 언어맥락주의를 제대로 소개하는 한국어 문헌이 거의 없음. 지성사의 일부 성과 및 퀜틴 스키너의 방법론 책 두 권이 번역되어 있으나 대체로는 이미 지성사를 어느 정도 접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움. 배경설명이 없으면 그런 책의 논쟁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기 힘듦.
- 이 책이 좋은 개설서라서. 여러 중요한 주제들을 아울러 소개하고,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초심자와 전공자 모두 각자의 시선에서 중요한 주제를 찾아 이해할 수 있는 책. 무엇보다 짧음(원서는 그리 크지 않은 판형으로 총 140쪽, 계약부터 출판까지 1년 5개월!).
- 그렇다면 왜 지성사를 소개하게 되었는가? 두 가지 개인적인 문제의식
① 영문학 전공자, 특히 과거의 텍스트를 다루는 입장에서 드는 의문
Q. 내가 텍스트를 충분히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과거의 텍스트와 텍스트가 속해 있던 시대/시공간을 어떻게 연결시키는 게 맞는가?
ex: “그때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던 시기니까, 이 책도 당연히 그런 흐름이 반영되어 있겠지!” 혹은 “언제나 가부장제는 여성을 억압해왔으니까, 이것도 그 문제를 다루고 있을 거야!”, “18세기 영국에서 남성답지 않고 여성화된 남성을 논하는 글이 있네? 이건 게이를 가리키는 게 분명해!” 같은 판단을 멋대로 내려도 괜찮을까?
-> 연구대상으로서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역사 속의 대상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엄밀한 방법론적 질문의 탐색
② 대학원생 인권운동&한국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담론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면서, 즉 언어적 실천을 통해 행위하는 정치적 행위자로서 실천적인 고민을 하게 됨
Q. 몇 가지 '이론' 혹은 '철학'을 공부한 다음 이를 정치/사회/문화적 현상에 적용하는 게 사실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 않나? 어떤 현상/실천이 좋은지 나쁜지를 이야기하는 게 전부인 도덕주의적 외침이 “정치적인 실천”이라 생각하는 게 정말로 정치적으로 책임있는 일인가?
ex: “한국이 헬조선이란 주장은 사람들이 억압과 지배의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나쁜 생각이야!” 혹은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내용이 들어있으니 좋은 정치적 의의가 있는 작품이야!” 같은 판단이 정말로 유의미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는가?
->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그리고 매 시대 상황에 따라 어떤 행위/선택의 정치적인 효과/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론의 탐색
=> 케임브리지학파의 언어맥락주의 방법론; 텍스트와 사상의 해석에서 역사와 정치의 차원을 엄밀하게 도입하려는 기획
4. 역사와 정치를 깊이 읽어보기: 언어맥락주의 지성사 방법론
1) 해당 시대의 언어&(언어적)맥락의 세세한 결을 복원하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텍스트 혹은 사상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좀 더 정확하게는 과거의 텍스트/사상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를 읽어내는 연구방법.
Q. 과거의 사상/텍스트를 읽을 때, 그 문헌에 담긴 언어가 정말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뜻일까?
A. 당장 지금 한국의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르는데(ex: “현타”), 과거의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만 읽어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하는 뜻이 정말 그 텍스트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부합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ex: 17-18세기 유럽정치사상, 가령 홉스, 로크, 루소 등에서 나오는 자연권(natural rights)·인간의 권리(rights of man) 같은 말들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human rights)과 정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러한 권리가 정확히 어떤 요소들을 지칭했는지, 당시 사람들이 그 표현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는지를 찾아보지 않은 채, 과거 ‘인간의 권리’·‘자연권’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인권’과 같거나 이어지는 개념이라고 판단하는 건 실수이지 않을까?
=> 언어맥락주의의 제안
: 자신이 읽고자 하는 텍스트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구체적인 근거들을 통해 찾아야 함. 실제로 텍스트의 저자가 읽고 인용하는 다른 텍스트들을 찾아 함께 읽고, 그것들이 어떤 언어적 패러다임을 공유하며 무슨 논쟁에 속해 있는지를 복원·재구성한다. 그러한 패러다임·논쟁 속에서 텍스트가 사용하는 언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당시의 독자들에게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가 어떤 정치적인·실천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을지를 이해하기
==> 특히 문헌학적 접근법을 통해 텍스트·사상·언어가 가졌던 역사적인 의미를 탐색하기
2) 과거 시대의 상황, 특히 텍스트와 저자가 속해 있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적인·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지를 이해해보기
Q.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범위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그대로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볼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A.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먼저 정해놓지 말고, 해당 시대의 상황, 특히 텍스트와 저자가 속해 있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적인·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지를 이해해보기. 무엇이 어떻게 정치적인지, 혹은 달리 말하면 매 시대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 혹은 몇몇 책을 읽고 생각하는 ‘정치’의 개념보다 훨씬 넓은 대상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ex. 토마스 홉스는 왜 《리바이어던》(1651)의 절반인 3권과 4권을 할애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었을까? 왜 홉스의 《리바이어던》 3권 37장에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1670) 6장에서, 그리고 《기독교의 합리성》(1695)을 포함한 로크의 여러 저작에서 기적(miracles)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는가? 중세 이래 유럽에서 교회는 그 자체로 중요한 통치기구였으며, 특히 종교개혁 이래 초기 근대 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여러 분파들 간 갈등으로 인한 종교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지게 됨. 이때 어떤 성직자들이 신의 의지를 어떻게 대변하는지, 무엇이 진짜 신의 의지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한 논쟁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의제였음. 종교와 정치를 구별하는 게 ‘근대적’이라는 오늘날의 관점을 과거에 덧씌우는 대신, 종교적인 논쟁이 실제로 권력의 정당성과 결부된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진 주제였음을 직시해야 함
=> 지금 우리가 배운, 혹은 당연하게 믿고 있는 ‘정치’의 범주도 시간과 상황이 달라지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
- “토착왜구”라는 말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역사논쟁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단순히 ‘강렬한 민족주의’로 정리하면 해결이 될까?
- 미투운동과 성폭력 이슈가 한국과 미국의 대선주자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단순히 문화운동이나 ‘미시정치’로 분류하면 충분할까?
- 민주주의와 인권, 분배정의, 공론장, 인정, 저항과 전복, 지배질서의 교란 같은 몇 가지 ‘이론적’ 개념으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논쟁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유효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게 가능할까? 현실에서 나타나는 정치적인 논쟁지점들을 분석할 수도 없고, 해결의 참조점도 제공하지 못하는 정치철학/정치이론은 과연 충분히 “비판적”인가?
3) 논쟁을 이해하기: 사상의 정치 대 정치사상
- 정치사상·정치철학·정치이론은 특정한 사상적인 텍스트·논변을 따로 떼어내어 그것이 갖는 사상적·철학적·이론적 의미를 논의하는 경향이 있음. 이런 접근법은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실천이 현실세계 속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의미를 가졌는지를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음.
- 사상·언어의 정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사상·논변·텍스트를 진공상태의 고립된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 자체의 논리만 꼼꼼히 읽어보는’ 대신 그것이 다른 텍스트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고, 적대적인 입장을 격파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전술을 채택했는지, 어떤 입장과 믿음을 지켜내고 싶었으며 어떤 도덕적·정치적 제약 하에 있었는가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함. 달리 말해 텍스트와 텍스트, 텍스트와 시대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철저하게 파고드는 노력이 필요.
- 따라서 고정된 정치사상에서 사상의 정치, 좀 더 정확히 말해 사상적 실천의 정치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맥락주의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과거에 있었던 논쟁의 추이와 쟁점, 전략을 역사적으로 풀어내야 함
=> 그리고 이는 우리 자신의 시대에도 적용되는 이야기
5. ‘지금, 여기’를 지성사적으로 접근하기: 몇 가지 사례
1) ‘페미니즘’ 대 ‘안티페미니즘’ [cf 이우창, 「"20대 남자" 문제, 혹은 반페미니즘 언어 분석을 위한 시론」, 『인문잡지 한편 1: 세대』, 민음사, 69-92. ]
2) ‘근대화’, ‘근대성’과 ‘(서구)선진국’: 초기 근대의 논쟁과 현대 한국 [cf. 이우창, 「헬조선 담론의 기원」(2016, http://www.riss.kr/link?id=A102165008) 및 이우창,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2017, http://www.riss.kr/link?id=A104245657)]
3) 코로나19, ‘한국 모델’, “국뽕”: 국제적 논쟁(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을 국내정치화 하기
4) ‘대학원생 인권’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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