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 인쇄 이후: 방법의 번역과 운동

Intellectual History 2020. 4. 1. 11:09
1.

이미 인쇄소에 맡겼고 수정할 기회는 더는 없으나,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읽었다. 불행히도 오탈자를 세 군데 찾았고 표현이 약간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이 두 군데 정도 있었다(다행히도 그중 내용 이해에 지장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그다지 사려깊지 못한 태도인 것은 잘 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게 잘 읽히는 책인 건 확실하다. 적어도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읽어가면서도 한번에 백 쪽 넘게 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는 그렇다. 좀 더 마음에 드는 지점은 본문과 옮긴이 해제 모두에서 낭비되는 언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부디 2쇄에 들어가 오탈자들을 수정한 책을 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며칠 간 홍보부수 배부 문제로 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싶은 사람은 정말 많지만, 보낼 수 있는 권수는 (최대치를 짜내더라도) 제한되어 있다. 어쨌든 출판사는 책을 기부하기만 해서는 다음 책을 낼 수 없다. 최대한 사적인 친분 및 감정을 억누르고 원래 이 책이 특별히 다가가고 싶었던 독자층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험난한 인문출판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했다. 학술서 번역을 해보신 분들에겐 상식이지만 책이 잘 팔린다고 해서 내가 큰 돈을 벌 일은 없다. 그러나, 아래에 좀 더 덧붙이겠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가 어느 정도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야 지성사 연구서 번역작업을 본격적으로 밀고 갈 수 있다. 혹시라도 책을 받지 못해 섭섭함을 느끼는 친구/동료라면, 혹은 이 책을 정말 읽고 싶은데 구할 방법이 없다면, 곧바로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실제로 책이 나온 뒤의 이야기다^^.

홍보에 이처럼 신경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두 권의 매우 뛰어난 지성사 연구서가 이어서 번역출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이미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번역자 후보로 확보되어 있다!). 옮긴이 해제에 언급하지만, 하나의 연구방법론이 제대로 수용/활용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방법론의 요점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풀어 설명해주는 저작(<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둘째, 방법론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기존 학계에 어떤 중요한 연구가 나왔고 어떤 쟁점이 있었는지 그려주는 지도(<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 약간 소개되어 있고, 내년-내후년 출간을 목표로 기획 중인 프로젝트가 하나 더 있다). 셋째, 실제로 방법론을 어떻게 사용하여 어떤 연구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

이번 책 다음으로 내놓고 싶은 두 권의 역서는 이중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하나는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다른 하나는 20세기 중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데, 둘 다 2015년 이후에 출간된, 다시 말해 영어권 지성사 학계의 최근 동향과 문제의식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저작들이다. 그리고 한국의 연구자와 지적인 독자들에게도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러나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책들이기도 하다. 역자(를 맡기로 한 분)들과 번역검토서를 함께 준비하면서 한국 출판시장에 좋은 인문학술서를 소개하는 게 얼마나 큰 재정적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일인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가 충분히 잘 팔리는 책이 되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런 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털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3.

누군가는 내가 이 프로젝트에 쏟는 노력과 시간을 보면서 '운동'movement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스스로가 일종의 학술운동을 시작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사회가, 특히 우리의 인문학계가 단지 유익한 지식을 많이 보유할 뿐만 아니라 유용한 지식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을 갖기를 원한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사유와 언어를 통해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그러한 방법에 기초하여 더욱 실천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유의 방법에 대한 책을, 그것도 입문서를 번역한 것은, 거기에 (출판본 기준) 40쪽 짜리 해제를 포함해 최대한 책과 지성사 연구의 핵심에 가까이 닿을 수 있는 보조장치를 많이 달기로 했던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까닭은, 그리고 표지를 최대한 아름답고 당당히 들고다니고 싶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던 것은 모두 이런 목표 때문이다.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인문사회학술장은 특히 '포스트이론'을 중심으로 전후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의 다양한 흐름을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갱신되었다. 그 흐름이 아주 작은 지류들만 남겨놓은 지금,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학술장, 특히 인문학술장 중에 스스로 세계에 대한 새롭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한 분야는 그렇게 많아보이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예전보다 더 성실하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들인 번역서도 제법 눈에 띄는데, 인문학적 연구를 통해 세계에, 사회에 무엇인가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시대착오적인 발악 혹은 상업적인 제스처 정도로 조롱당할 뿐이다. 이를 바꾸지 않는 한 인문학의 소멸을, 우리가 세계를 분석하고 판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특정한 사유방법의 소멸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인문학자들에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자체에도 심각한 손실이다.

이런 상황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부터 출발한다. 학문은, 적어도 사회 제도로서의 학문은, 하나의 도구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기 위해 축적하는 집단적 지식이다. 이는 바꿔말하면 그와 같은 도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학문은--개별 연구자들의 영혼의 안녕과는 별개로--사회적으로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방법을 놓고 논쟁과 혁신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러한 논변이 더 아름답거나 고상해서가 아니다. 학문이 스스로의 사회적인 존재이유를 더욱 충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더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방법론의 투쟁은 지적 허세가 아니라 존망을 앞둔 절박감에서 나온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많은 분과들이 스스로의 토대를 구성하는 존재이유와, 그 존재이유에 따른 실천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유의미한 존재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이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더 이상 묻지 않는 순간 학문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학위논문의 지연을 감수하고 언어맥락주의 지성사 방법론의 탐구와 소개로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의 언어맥락주의자들이 살아남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갖가지 포스트이론적 시도가 게토화되거나 장기자랑용 클리셰가 되어버리는 와중에 말이다. 그들은 단지 살아남는 데 성공했을 뿐이 아니었다. 1960년대 소규모 아웃사이더 엘리트 그룹에서 출발한 케임브리지 학파는 50년 동안 여러 학교 학과를 공략했고, 제국을 건설했고, 심지어 (주로 북미에서) 언어맥락주의를 잘 모르는 이들조차도 일단 본인들의 프로필에 '지성사'를 한다고 써놓게 만들었다. 그들은 한 두 명의 절대적인 대가에 의존하는 대신 여러 대가들의 협력을 통해 계속해서 뛰어난 연구자들을 재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단지 과거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흐름으로 존재하며, 탄탄한 과거를 딛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실제로 과거의 사상과 언어를, 그리고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오늘날의 사상과 언어를 분석하는 유의미한 작업을 해왔다. 모든 연구가 다 훌륭한 건 아니지만, 덜 위대한 연구조차도 충분히 탄탄한 자료에 근거했다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인용되면서 후대의 더 나은 연구를 위한 발판이 되어준다. 기본적인 훈련만 잘 받고 충분한 노력을 들인다면, 천재가 아니라도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들고 신비로운 언어를 억지로 따라외울 필요도 없고, 상식적인 사고를 엄밀하게 적용하려는 노력만 기울이면 괜찮은 결과가 나온다.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은 (비록 우리와 매우 다른 환경에서라고 할 지라도) 인문학 연구가 실제로 유의미한 지식을 생산하면서 왕성하게 성장하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모델이다. 한국의 서구 인문학 연구자 99%는 이들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지만 말이다.

지성사 방법론은 만능이 아니다. 지성사가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 있다는 걸 흔쾌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한다고 자부하는 만능의 이론이나 이름만 '비판적'일 뿐 실제로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고장난 시계, 고유명사나 개념어를 몇 가지 늘어놓고 아무 것도 말해주는 게 없는 혼돈의 덩어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확실하게 작업할 수 있는 실천적이고 실용적인practical 도구로서의 학문이다. 언어맥락주의 지성사 방법론은 바로 그런 도구 중 하나다. 전업 역사가들만이 아니라, 문학/문화연구자도, 정치 연구자도, 기타 인간의 사유와 표현이 중요한 모든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도구. 나는 그런 도구를 갖고 세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운동이라고 부르겠다면, 나는 기꺼이 그런 호칭을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그걸 통해 (필요하다면 내가 속한 분과에서도) 더 좋은 연구, 더 엄밀하고 정확하며 통찰력 있는 분석과 이해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다. 지성사 방법론을 활용하는 연구자들의 수가 늘어날 때 우리의 연구분야가 더 많은 걸 할 수 있게 된다는 걸 입증하겠다.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출간은 바로 그 시작이다. 몇 년의 시간이, 얼마나 많은 괴로움이 들어갈지, 과연 최소한의 성공이라도 거둘 가능성이 있는 건지, 이런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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