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한국어판 번역출간을 앞두고.

Intellectual History 2020. 3. 21. 22:27

오늘 아침 7시, 《지성사란 무엇인가?》의 (희망컨대) 마지막 수정원고를 보냈다. 분명 남아있는 오탈자나 표기오류가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분량을 맞추기 위해 조금 더 수정할 필요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용의 차원에서는 실질적으로 마지막 수정이 끝났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표지도, 부제도 정해진만큼 이번 4월 전반기 중 책이 실제로 출간될 때까지 내가 할 큰 작업은 거의 끝났다(물론 이제부터 열심히 홍보를 해야한다!). 지난 몇 주간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모든 일정이 취소된 김에 페이스북도 블로그도 쉬고 번역원고를 수정보완하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앞으로 지성사 연구 출판에 흥미를 갖는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좋은 연구는 정말 산처럼 많다) 출판사들이 나타날만큼은 팔릴 것인지는, 최근 인문출판계의 불황을 생각해보면 그닥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이 정말 지적으로 풍성하고 유익한, 잘 만든 책이 될 거라는 점에서만큼은 아주 확고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1.


나의 목표는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을 이미 지성사·(정치)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넘어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학구열이 있는 대학 학부생들까지도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재이자 입문서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가능한 한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에게 번역원고를 보내고 의견을 청취하는, 다시 말해 번역과정을 일종의 집단적 작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당초 기대치에 비해 상당히 많은 분들이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기대 이상으로 성실한 코멘트를 보내주셨다. 


20명이 넘는, 2교 및 3교 수정과정에 국한해도 10명이 넘는 리뷰어들이 상당한 분량의 지적과 수정제안을 보내오면서 (놀랍게도 그 코멘트들은 거의 겹치지 않았다) 이미 2교 시점에서부터 '무리 없이 잘 읽힌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번역원고의 수정 폭은 나와 편집자가 예상했던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예를 들면 조판본 본문이 200쪽 정도 분량이었던 3교에 달린 수정주석을 세어보면 1500개가 넘으며, 그걸 반영한 4교 조판본을 다시 고친 대목이 400군데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좋은 한국어로 옮겼는지 자신이 없는 대목은 있고, 고친 부분의 한국어 문장이 더 불분명한 느낌을 주는 듯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번역문이 이전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듬어졌음은 명확하다. 꽤 엄격한 기준을 가진 리뷰어들에게도 합격점을 받을 정도니까, 첫 번역서, 그것도 (비록 입문서라고 해도) 학술번역서를 내는 역자의 작업치고는 분명 꽤나 괜찮은 결과물일 거라 믿고 있다. 그냥 번역서로 그럭저럭 읽어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어 학술행위로서 그 자체로 제법 괜찮은 결과물 말이다.



2.


두 번째로, 역시나 재밌고 유익한 교재·입문서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원저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친절한 책이 되었다. 분량만 따져봐도 한국어판은 한국어판 저자 서문을 포함해 원저의 약 4/3 정도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 원저는 이미 친절하고 재미있는 책이지만, 기본적으로 역사학에 훨씬 친숙한 영국의 학생들을 독자로 상정한 만큼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선 내용을 당연히 전제하고 넘어가는 대목이 있다. 한국어판 역자해제는 이런 부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아주 기본적인 개념부터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조금 더 쉬운 가이드 역할을 한다. (사실 역자 해제를 살짝 고쳐서 독립적인 학술논문으로 출판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교수급 리뷰어들에게만 세 번 정도 받았는데, 4월 초 정도까지 책을 내려는 일정 상 불가능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나올 법한 예상질문들을, 그리고 실제로 리뷰 과정에서 나왔던 반론이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쓴 만큼 본문과 해제를 읽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5개가 넘는 본문 역주는--리뷰어들이 '이런 부분에 설명이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제안한 대목은 거의 다 역주를 붙였다--왓모어가 사례로 드는 역사적·사상적·이론적 논의를 독자들이 대략이나마 하지만 정확하게 요점을 이해하며 따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자 했다. 그중에서는 연구자들이 지성사학계의 큰 흐름을 곧바로 붙잡을 수 있을만큼의 정리를 제공하는 것들도 제법 있다. 마지막으로 케임브리지(및 서섹스)학파의 주요 지성사가 여섯 명, J. G. A. 포콕, 퀜틴 스키너, 존 던, 이슈트반 혼트, 도널드 윈치, 리처드 턱에 관해 주요 이력과 연구사에서의 위치, 주저를 소개하는 각각 1쪽 정도 분량의 약전도 덧붙였다. 역자해제, 역주, 지성사가 소개에 담긴 내용 중 상당수는 (애초에 《지성사란 무엇인가?》 본문에 소개되는 내용 대부분도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바 내에서는 한국어로 제대로 소개가 된 적이 없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해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방법론의 안내에서든, 18세기 및 근대 지성사 연구 안내에 있어서든 적어도 앞으로 수 년 간 한국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입문서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3.


이 부분은 출판사 오월의봄 및 편집에 맡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야 할 대목이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내용 외 책의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적어도 비판적인 사고와 지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표지 디자인 컨셉을 제안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20대 및 학부생들이 일상적으로 들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만큼 예쁘고 세련된 표지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만 답했다. 내 의견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어차피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문맹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니 고려되지 않아도 크게 문제는 없다--내 상상력의 범위를 뛰어넘어 정말 멋진 표지가 나온 것은 분명하다. 원저의 밋밋한 표지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수준이며, 표지 후보를 본 여러 사람들 모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만 말해둔다(개인적으로는 최종 결정에서 탈락한 표지 또한 따로 프린트해서 보관하고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교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의도한 책이니만큼 가격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낮추고자 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소위 '학술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어차피 소수의 독자들만 사볼 가능성이 높기에 일정 범위 이상의 가격을 매기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을 느끼면서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우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지성사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게 한국의 학술장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에도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 믿는다. 물론 역주 및 (역시 한국어판에 새롭게 수록될) 일러스트가 어느 정도 분량을 늘릴지에 따라 변동이 있겠지만, 어느 리뷰어의 표현을 옮기면, "이 정도 부피와 수고가 들어간 책이라면" 절대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범위 내에서 가격이 정해질 예정이다.



4.


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번역수정 후반부 작업에 몰입하는 동안 쉬는 시간에 브누아 페터스의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변광배, 김중현 역, 그린비, 2019)를 읽었다. 직접적으로 데리다의 언어와 사상을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 데리다가 매 시기 누구와 어떤 지적·인간적인 교류를 주고 받았으며 무슨 맥락을 염두에 두었는지를 상세하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데리다가 살았던 세계가 어떤 곳이었는지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도 무척 재밌게 읽힌다(확실한 건 20세기 중후반 '프랑스철학'이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떨칠 때조차도 그것은 전혀 동질적인, 단일한 공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매우 사적인 감상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번역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종종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제 박사논문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내게, 약간의 농담어린 과장을 섞는 게 허용된다면, 굳이 말하자면 20세기 중반 프랑스대학의 인문학 박사들이 써야했던 부논문에 가까운 느낌이다. 실제로 나는 나 자신의 명확한 문제의식을 갖고 이 책을 번역했고, 제법 상세한 주석과 해설도 덧붙였다.


모든 지적인 활동이 아직도 기나긴 겨울에 묶여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2020년 4월,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뿐히 다가오는 봄과 같이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종종 홍보를 하면서) 박사논문작업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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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S 2020.03.21 22:29 Modify/Delete Reply

    우와! 너무 기대되는 책이네요. 나중에 꼭 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 BeGray 2020.03.21 22:38 신고 Modify/Delete

      앗 빠른 댓글 감사합니다! 책 출간되는 대로 다시 또 홍보(?)하겠습니다 ㅎㅎㅎ

  2. Lecanix 2020.03.21 23:05 Modify/Delete Reply

    드디어 출간되는군요!! 저는 아직 명확한 진로를 택하진 않았지만, 인문학을 우리사회에서 진중하게 공부하는 것이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 큰 회의와 고민을 하면서도 무언가 분명 얻을 것은 있다고 막연하게라도 믿으며, 최근 진지한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학과 학부생의 입장에선 매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ㅠㅠ 꼭 사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BeGray 2020.03.22 00:22 신고 Modify/Delete

      말씀하신 문제의식은 저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번 역서에서도 명시적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책이 부디 너무 어렵지 않게 또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3. 겨울나무 2020.03.22 08:18 Modify/Delete Reply

    기대됩니다! 꼭 사보겠습니다 :)

    • BeGray 2020.03.23 00:26 신고 Modify/Delete

      감사합니다 ㅎㅎㅎ 많이 팔려서 다음 기획하고 있는 책들 번역계약도 신속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ㅠㅠ

  4. 익명 2020.03.22 09:32 Modify/Delete Reply

    평범한 문과 고등학생이나 공대생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는 책인가요? 아니면 원활히 독파하기에 인문사회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상당히 필요한 편인가요?

    • BeGray 2020.03.23 00:27 신고 Modify/Delete

      고등학생에겐 조금 낯설 내용이 많을텐데, 아주 심오하거나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 공들여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블로그를 자주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질문이 들어오면 보는 대로 성심성의껏 대답할 생각이긴 합니다^^;;

  5. 나그네 2020.03.29 15:16 Modify/Delete Reply

    오오 프랑스 국가박사학위 부논문 언급하실정도의 자신감이시라면 정말 고생하셨다는건데 해제만 해도 양이 상당할테니 정말 what more 겠네요. (개드립 죄송합니다...) 번역이라는게 풍문으로 듣기로는 학계에서 가치를 잘 쳐주는것도 아니었던지라 다들 학계와 시민들에게 좋은책 소개한다는 마음으로 작업 한다고 들었는데 고생많으셨습니다 ㅎㅎ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번역을 하게 되면 출판사에서 번역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나요? 굳이 답변 안해주셔도 됩니다. 그냥 궁금해서 적어봅니다.

    • BeGray 2020.04.01 11:11 신고 Modify/Delete

      ㅎㅎㅎ 실제 부논문보다야 당연히 품이 덜 든 작업이겠습니다만, 데리다 전기를 읽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ㅋㅋㅋ

      번역소프트웨어는 따로 제공받은 것 없고(오 번역전문 소프트웨어가 있나요?) 그냥 hwp와 pdf로 작업해서 보냈습니다^^

  6. 안녕하세요 2020.04.01 04:07 Modify/Delete Reply

    지난번에도 댓글 단적 있었던 한 (이제는 대학원 진학을 앞둔) 인문학 전공 학부생입니다. 포스트이론이 서구 학술장 전체인줄로만 알고만 있었던 저같은 학생들에게도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를 통해서도 이것저것 많이 배웠지만, 거기에 더해 너무나 고퀄의 새로운 내용을 담은 학술서/입문서를 볼 생각에 벌써 설레네요. 귀중한 작업을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책이 나오는데로 꼭 구입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 BeGray 2020.04.01 11:12 신고 Modify/Delete

      먼저 대학원 진학을 앞두셨다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즐겁고 보람찬 공부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에 옮기는 책은 본격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입문서로 분류되는 게 맞겠지만, 저자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넣어두었으니 정보량은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7. 안녕하십니까! 2020.04.02 19:25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경영학부 재학 중인 대학생입니다. 현행 대학 교육이 제공하는 글쓰기 수업의 부실함에 관한 글을 통하여 어제 처음 블로그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글의 깊이는 물론이고 너무 술술 읽혀서 앞으로도 종종 들를 것 같아요! (간간이 쓰시는 비유가 굉장히 위트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ㅋㅋ)

    지성사라는 분야가 사실 매우 낯선데, 몇 년 전에 군생활하면서 표지만 보았던 <예일대 지성사 강의>라는 책이 생각나더라고요. 안 그래도 한 번쯤 찾아 읽어 보려고 했었는데, 이번에 출간되는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을 읽는다면 굳이 그 책은 읽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글의 말미에 언급하신 데리다 전기에 대해서도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나카마사 미사키 씨가 쓴 <자크 데리다를 읽는 시간>이라는 책을 읽고 데리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데리다가 워낙 난해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요! 혹시 어떤 학자의 사상을 공부할 때 그의 저서를 읽기 전에 전기를 읽는 것이 많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효율적 독서를 위해서는 해설서를 한두 권 더 읽는 것이 나을까요?

    • BeGray 2020.04.03 20:20 신고 Modify/Delete

      저는 그 책은 목차 정도만 훑어보긴 했는데요, 제가 소개하는 지성사랑은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추측입니다만, (제가 소개하는 바와 같은) 오늘날의 지성사가들은 해당 저자가 이야기하는 많은 내용을 비판할 가능성이 높을 듯 합니다^^;;

      '전기'라고 해도 사실은 내용도 관심사도 수준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가령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전기라면 그 자체로 매우 좋은 프로이트 입문서가 될 수 있겠죠), 기본적으로 도움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누군가의 인간으로서의 행적을 이해한다는 것과 누군가의 사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일이라서, 전기를 읽는다고 곧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는 합니다(해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데리다를 잘 모르기 때문에 좋은 안내자가 될 수는 없는데, 일단 데리다를 왜 읽고 싶은지에 따라서 답이 또 달라질 것 같습니다.

    • 2020.04.04 00:10 Modify/Delete

      비밀댓글입니다

    • BeGray 2020.04.04 21:52 신고 Modify/Delete

      1) 핵심부터 바로 들어가면 창작자와 평론가, 연구자에게 필요한 훈련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서도 시대에 따라 또 유행에 따라 무엇이 좋은 방식인지는 달라지는 것 같고요. 연구자라면 결국 좋은 대학원 들어가는 게 가장 빠를 길이겠지만, 다른 두 가지 영역이라면 정말 취미수준의 앎을 원하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 직업적인 것을 원하는지 등에 따라 또 다를 듯 합니다(어느 정도 직업적이나 이력으로 쓸 수 있는 경로를 원하신다면 이런저런 창작/등단준비모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제가 답변을 드릴 수 있는 건 제한적이겠지만(저는 연구자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이니까요), 혹시 정확히 어떤 영역을 어느 정도로 목표로 하시는지를 말씀해주시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2) 일단 언급하신 지점들에서 제 스탠스는,

      ①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건 감정적인 진술이지 사실진술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느끼는 감정은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대신 다수의 남성들에게 문제적인 행위가 아무렇지 않은 듯 혹은 바람직한 것인 듯 용인되는 관습/문화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교정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② '성적 대상화'가 만약에 특정한 인격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이에 수반되는 사고/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특정한 양태의 성적 대상화가 현실의 인간/사회의 기본권과 안녕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경우에 해당 행위유형은 제재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주 간단한 유비를 들어보자면, 우리 대다수가 공격성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될 수 있지만, 그 공격성이 과도하게 표출되어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해치는 행위로 이어질 때 이것이 본성의 표출이라는 이유만으로 옹호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③ 말씀해주신 논지에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성차에 따른 대략의 경향성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물론 어디까지가 본성이고 어디까지가 형성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본성의 적절한 범위를 우리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등등은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가령 저는 17세기 말-18세기 초반 여성교육에 대한 팸플릿들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그러나 분명히 작성자들 입장에서는 경험적으로 타당하게 관찰되었을) 내용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것들이 무제약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뜻은 전혀 되지 않으며, 이는 의견을 주신 분께서도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여성주의의 스펙트럼 중에서 극단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생물학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이 점을 공략하고픈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봤던 안티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위의 문제에서 여성주의가 행해온 기여라든가, '본성의 표출'에 합리적이고 적절한 선을 긋는 데 건설적인 의견을 낸 경우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본성에 대한 대체로 생산적이지도 않고 어리석은 논쟁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가 적절한 선이고, 어디부터가 적절한 조치인가'에 대한 물음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채로 '남성의 본성이라는 게 있으니 페미니즘에 동의가 안 된다' 식의 논변에 머무르는 건, 물론 저는 의견 주신 분께서 이러한 입장에 머무르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만큼 현명하신 분일 거라 믿습니다만^^, 사실상 건설적인 대화라기보다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레토릭에 어정쩡하게 멈출 위험이 있어 보입니다.

      사실 상기한 내용들은 젠더/성차의 문제를 어느 영역이 되었든 역사적으로 검토해본 사람이라면 너무 당연한 내용이라, 딱히 확 떠오르는 한국어 읽을거리는 아직 없네요^^;

    • 안녕하십니까 2020.04.05 16:18 Modify/Delete

      다시 한 번 답변 감사드립니다! 주위에선 이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좀처럼 없어 홀로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데에 머물렀는데, 정리해 주신 사항들을 보니 사실 제 의견 자체가 근본적인 지점들을 갈팡지팡 맴돌고 있었다는 게 확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ㅎㅎ

      1)번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현실적으로 제가 놓인 환경에서 쉽지 않기도 하고, 대학원을 가서 연구자 과정을 밟을 생각은 없습니다. 창작이나 평론을 조금 더 심도 있게 공부해 보고 싶은데요, 우선은 취미적인 수준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긴 코멘트에도 세심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BeGray 2020.04.10 10:54 신고 Modify/Delete

      제게 익숙한 영역이 아니라서 쉽게 말하기 힘듭니다만, 일단 좋은 저작들을 많이 또 다양하게 보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창작은 저의 영역이 아니니 논외로 치면, 평론의 경우엔 사실 다양한 접근법이 있고 또 그에 따라 참고할 수 있는 문헌의 종류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주어진 대상을 철저하게 읽고 자신의 분석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서사화할 수 있는 능력
      2) 대상과 연결된 다른 자료들을 인식하고 비교할 수 있는 넓은 시야(예컨대 특정한 [서브]장르의 핵심과, 그것이 다른 장르들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설명할 수 있을만큼 넓게 보는 것)
      3) 특정한 주제나 장르가 어떻게 변천하는지를 인지할 수 있는 역사적 감각

      이 세 가지 능력은 어떤 유형의 평론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피하길 권하는 경로는 특정한 철학/이론의 도식을 하나 정리한 뒤 그 도식을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내세우는 식의 독서입니다.

      제가 평론들을 많이 보지는 않는데, 최근에 재밌게 읽은 책은 상당히 오래된 글이지만 얼마 전 번역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나보코프 문학강의>였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2020.04.10 14:27 Modify/Delete

      답변 감사드립니다. 창작과 평론은 제가 좀 더 발품을 팔고 많이 읽어봐야겠지요...ㅋㅋ 나보코프 문학강의 관련한 서평은 블로그에서 읽었습니다. 나보코프가 다루는 책들을 읽어본 뒤에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BeGray 2020.04.12 15:18 신고 Modify/Delete

      ㅎㅎ 나보코프가 다루는 책들이 꽤나 두껍고 시간이 걸리는 게 많아서 그걸 다 보고 보시려면 짧아도 1년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냥 나보코프를 먼저 보시고 나중에 해당 문학텍스트를 읽은 뒤에 다시 돌아와서 나보코프를 다시 보셔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8. 나그네 2020.04.04 11:04 Modify/Delete Reply

    몇달전에 우연히 알게됐는데 직업 번역가분들은 소위 Cattool(캣툴)이라고 부르는 프로그램을 사용하시더군여.
    SDL Trados가 가장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회사 홈페이지 가서 좀 살펴보니까 번역작업의 생산성을 올려주는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요? 인터페이스가 번역작업을 하기 좋게 되어있는것 같습니다. 뭐 이것도 바로 쓸수있다기보다 여러 기능들을 공부해야 잘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여튼 굉장히 좋아보였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인공지능 기술에 투자가 많은 시대에는 발전가능성을 더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학술번역쪽은 이런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하는지 잘모르겠지만 해외에서는 아무튼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컴퓨터에 설치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웹 기반으로 작업하는 서비스들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작업을 할때 좋겠죠. 정보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BeGray 2020.04.04 21:21 신고 Modify/Delete

      감사합니다 ㅎㅎ 아마 제가 개인구매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제가 전문 번역가인 것도 아니니까요), 혹시라도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출판사 있으면 재미있게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9. 틸리히 2020.04.11 19:40 Modify/Delete Reply

    오월의 봄 출판사에서 나온 '지성사란 무엇인가' 주문했습니다. 선생님 블로그 종종 들르면서 지성의 폭과 너비에 늘 자극을 받고 갑니다.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을 통해 당대의 역사와 사회적 현상을 날카롭게 성찰해내시는 선생님의 사상적 지도가 드높게 펼쳐지길 계속 기원하겠습니다. 브누아 페터스의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도 흥미롭게 독서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같은 분과 데리다에 대해 소주한잔 나누며 뒷-담화 할 수 있는 때가 오길 바래봅니다. 늘 건강하세요!

    • BeGray 2020.04.12 15:20 신고 Modify/Delete

      저는 데리다를 잘 모르지만, 그 시기 프랑스의 지식장과 그것으로부터 유래된 여러 지적인 흐름은 오늘날 우리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흥미를 가져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구매 감사드리며, 그리고 지적인 대화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10. 학부학부 2020.04.12 17:23 Modify/Delete Reply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주인장님의 독서 추천 리스트를 보고 한두권이라도 따라 읽으면서 막연하게 갖고 있던 정치사상 영역이 얼마나 깊고 넓은 바다인지(그리고 제가 업으로 공부할 곳은 절대 아니구나^^라는 생각은 덤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영어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고 따로 할 일은 할 일대로 있고 스터디가 아니라 혼자서 책을 읽는 식으로 진행하다보니 막상 많은 독서를 하지는 못했네요 부끄럽게도. 그래도 정치사상사에 관심있는 사학과 졸업생이라고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ㅎㅎㅎ... 이 책도 부족한 역량이지만 어떻게든 잘 소화해 보겠습니다. (추신으로 2020 버전으로 블로그의 독서 리스트는 수정될 여지가 있는가도 궁금했습니다~) 바쁘신 일정일텐데 메마른 한국 인문학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BeGray 2020.04.19 13:08 신고 Modify/Delete

      ^^한국어로만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목표로 설정했는데,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네요.

      / 그 리스트는 낡은 지점이 많아서 업데이트해야겠다고 늘 생각은 하는데 언제 하게 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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