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서구지성사 번역서:『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바이마르의 세기』

Intellectual History 2019. 6. 1. 12:29

다음은 <학산문학> 103호(2019년 봄호)에 수록된 서평으로, 최근의 서구지성사 번역서 세 권을 간결하게 그러나 효율적으로 소개하고자 했다(본래 더 일찍 올렸어야 했지만 개인적으로 바빴다). 나는 세 권의 초점을 각각 서구계몽주의(사상) 연구사, 도덕철학사의 지성사적 접근, 냉전사/대학사와 지성사의 결합에 두고 소개하고자 했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분량이 길어지면서 시간이 모자랐고, 편집과 구성에서 미진함이 남지만 기본적인 효용은 하리라 여겨 올려둔다.


서지사항 및 인쇄본은 다음과 같다(포스팅하면서 몇몇 문장을 다듬었으므로 포스팅과 출판본이 다를 수 있다).


이우창, 「최근의 서구지성사 번역서: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바이마르의 세기』」, 『학산문학』 103(2019년 봄): 263-87.

인쇄본 링크: https://drive.google.com/open?id=1acWwMgd1mtjg_IVLFVXcJ1HzbGGRRSdI




최근의 서구지성사 번역서: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바이마르의 세기』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철학이 아닌 역사로 밝힌 18세기 계몽사상』, 김민철 역, 글항아리, 2018년 10월.

J. B. 슈니윈드,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자율의 발명』, 전3권, 김성호 역, 나남, 2018년 8월

우디 그린버그, 『바이마르의 세기: 독일 망명자들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이재욱 역, 회화나무, 2018년 12월.


2018년 하반기는 좁게는 서구지성사·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전문적인 독자들, 넓게는 우리의 사유가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빚어지고 움직이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들을 위한 읽을거리가 여럿 번역된 지적으로 풍성한 시기였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지성사 연구는 매우 간헐적으로만 출판되어 왔으며 때로는 도저히 읽기 힘들 정도의 번역도 있었음을 고려하면, 지난 반년간은 출간된 역서의 수로든, 한 권 한권의 중요성으로든, 번역 가독성의 수월함에 있어서든 대체로 만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물게도 운이 좋았다 할 수 있다. 이후에 이러한 연구들이 더욱 많이 본격적으로 출간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본 서평에서는 그중 세 종의 책을 골라 그 요점과 의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1)


1. 프랑코 벤투리,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철학이 아닌 역사로 밝힌 18세기 계몽사상』2)


프랑코 벤투리의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이 깔끔한 한국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는 문장을 쓸 수 있어 기쁘다. 이러한 감정은 두 가지 이유로부터 기인한다. 첫째는 뛰어난 저자가 쓴 좋은 책이 좋은 번역으로 나왔다는 순수한 기쁨에서다. 두 번째는 여전히 한국 학술출판시장에서 불모지로 남아있는 서구 지성사, 그중에서도 18세기 계몽기·계몽주 지성사 연구 분야의 고전적인 저작이 무탈하게 출간되는 일은 쉽게 기대하기 힘든 행운이기 때문이다. 곧 상술하겠지만,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은 단순히 계몽주의 자체에 관해 여러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책일 뿐만 아니라―역사가의 고전적인 미덕이 박식함이라면, 벤투리는 그 미덕에서 부족함이 없다―서구 계몽주의 연구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기여한 책 중 한 권이기도 하다. 어떤 주제든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연구의 역사를 훑어본다면, 학적 지식이 결코 한 가지 고정된 방식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이, 또 어떤 방법에 의해 생산된 지식이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지를 두고 격렬한 투쟁이 끝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랜 시간 혹은 먼 거리로 인해 그 뜨거움을 알아보기 어려운 독자들에게는 책 혹은 논문의 형태로 굳어져버린 지식만이 손에 잡히지만, 개중에는 드물게 자신이 용암과 같이 격렬한 논쟁 속에서 학문의 형태를 녹여 뒤바꾸는 과정에 참전하고 있음을 명확히 드러내는 저작들이 있다. 벤투리의 책은 후자에 속한다.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의 서론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역사의 역사에 매혹되는 독자들에게, 학문의 방법론적 투쟁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지성인들에게 모두 꼼꼼히 읽힐만한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벤투리는 여기에서 자신의 목표를 매우 명확하게 밝힌다. 그것은 당시까지의 18세기 유럽 계몽주의·계몽사상 연구의 주된 흐름들을 비판하고 연구의 초점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첫 번째 적수는 “칸트에서 카시러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상가까지, 독일 계몽사상의 철학적 해석”으로, 계몽주의 연구의 핵심과제를 당대의 철학적 체계를 탐구하는 일로 설정하는 입장이다.3) 벤투리는 이러한 관점이 “애석하게도 철학적 체계 구축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철학적 체계의 유효성을 철저히 불신하는 계몽사상의 근본 성격에 정면으로 역행”하며(16), “당시에 디드로나 돌바크, 볼테르나 흄의 사상이 맺었던 새롭고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결실들”을 외면한다고 말한다(18). ‘철학사적’ 계몽주의 연구의 또 다른 문제는 ‘근원’(Ur, 17)에 집착하는 태도로, 피터 게이의 위대한 저작 『계몽주의의 기원』 1권(1966)의 부제 “근대 이교 정신의 대두”(The Rise of Modern Paganism)에서 잘 드러나듯 계몽 정신의 원천을 고대 그리스·로마 정신의 회복으로부터 찾으려는 시각을 지칭한다.4) 벤투리는 이러한 시각이 계몽사상의 주요 인물들이 고대를 향한 향수에 젖어 지내는 대신 자신들의 “근대적” 현실 속에서 정치적 운동·투쟁에 뛰어든 이들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서론에서 언급되는 저자의 두 번째 적수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에서부터, 개인이 아닌 집단에서부터, 사유의 요소들이 아닌 여론의 동향에서부터 출발”하는, “사회학 및 경제사의 기법들을 활용”하는 접근법의 (주로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연구자들이다(26). 벤투리가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대상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사가들로, 이들은 “계몽사상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그들 학파의 글과 견해에 비추어 설명하려” 하여 종국에는 그것을 “마르크스주의적 전망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도식을 계몽사상을 해석하는 데 적용하려는” 기계적인 반영론을 반복한다. 정도는 덜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암묵적으로 영감을 받은 사회적 해석” 또한 문제인데(29), 이 또한 특정한 심성·사회적 상황이라는 집단적 실체를 상정하고 역사 속 인간행위의 다양한 층위를 “하나의 심성에 대한 여러 표현으로서, 하나의 사회적 상황의 여러 반영으로서” 해석해버린다(31). 다음으로 프랑스의 일부 서책사·간행물연구를 포함한 “계몽사상의 사회사”는 이미 정립된 “지질학적” “심성적 구조들”을 전제해 버리면서 “역동적인 창조의 순간”, “사상 자체가 싹트고 자라나는 토양”을 외면해 버리며, “그 결과는 새로운 방법론을 화려하게 전시한 다음 결국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재확인”하고 “당대의 투쟁과 역사가들의 성찰을 통해 이미 밝혀진 것들을 다시금 승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32-33). 이처럼 벤투리는 계몽사상이 “결코 사회학 방법론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정치적·역사적 문제”의 일부분이라고 보며(32), 그 주요 문제들이 “아무리 상이해 보일지라도 계몽사상의 정치사로 수렴한다”고 주장한다(36). 요컨대 철학사적, 사회(과)학적 접근을 비판하고 계몽사상을 역사 속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수행한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벤투리의 요지라고 할 수 있겠다.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1장부터 3장은 상기한 방법론·대상설정에 입각하여 “공화주의 전통이 계몽사상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조명한다(36). 1장 “17세기, 18세기의 왕들과 공화국들”은 먼저 연합주들로 구성된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탈리아 도시공화국들이 18세기의 왕정·전제국가와의 투쟁에서 어떻게 지속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조명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지점은 두 가지다. 먼저 벤투리는 “근대국가의 형성 및 성장은 승리한 군주국들의 관점이 아닌 끈질기게 살아남은 공화국들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유럽의 공화국들이 고대의 퇴적물이 아니라 근대 세계에 속해 있고 또 그것을 만들어나간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주장한다(42). 다음으로 그는 이러한 정치사적 맥락 위에서 마라나·포스카리니·몽테스키외 등 당시의 저자·문필가들의 사상과 출판물이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분석이자 행위였음을, 근대 공화국에 대한 논의였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2장 “영국 공화주의자들”은 17세기 후반 왕정복고부터 18세기 중반의 정치적 안정기에 이르기까지, 특히 “1685년부터 1715년까지”(78)의 잉글랜드에서 로버트 몰즈워스, 존 톨런드, 샤프츠베리 백작(제3대) 등을 포함한 잉글랜드 사상가들의 활동을 통해 “공화주의 전통 전체가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서 정치적 자유의 새로운 전망으로 서서히 전환해가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러나 폭넓게 살펴본다(81). 벤투리는 이들의 공화주의적 사상은 잉글랜드의 정치적 전망을 프랑스식의 혁명으로 이끌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전언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계몽사상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77). 특히 이 대목에서 저자는 톨런드에 중점을 두고 종교적 논의에 깃든 “계몽주의적 유토피아의 씨앗”(92)이 다양한 경로로 유럽대륙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한다. 3장 “몽테스키외에서 혁명까지”는 드디어 프랑스 계몽철학자들(philosophes)과 혁명으로 논의를 옮기는데, 중요한 사실은 벤투리가 이를 프랑스 파리 내부의 사상적 투쟁으로 풀어내기보다는 잉글랜드 공화주의와 제네바 공화국의 논쟁 같은 프랑스 바깥의 지적 흐름들이 프랑스 계몽주의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범 유럽적 기원을 가진 공화주의 전통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기에까지 근본적인 사상적 동력을 제공했다. 저자는 당시의 격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세기 말 민주주의 사상의 대두를 검토하는 것보다 공화주의 전통의 진입·수정·분산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확신”한다(130).


이탈리아의 모렐리와 18세기 공산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기술로 시작하는 4장 “처벌할 권리”는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의 전 유럽적 수용을 중심으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계몽사상에서의 유토피아와 개혁” 논의를 다룬다. 이때 (좌파 정치론에 익숙한 독자라면 바로 감을 잡을 수 있는) 유토피아와 개혁은 각각 ““사회적 열광”, 즉 “형이상학적·도덕적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인간 사회에 만개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힘들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사회들의 이런저런 측면을 바꿔서 실질적인 변화를 일구려는 확고한 결심”으로 규정된다(143). 공리주의적 형벌개혁을 주장한 베카리아의 저술은 유럽 각지에서 유토피아적 평등사회론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벤투리는 이 논쟁을 결국 프랑스혁명과 공산주의의 문제로까지―원저의 바탕이 된 트리벨리언 강의가 1969년에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하다―연결시킨다. 5장 “계몽사상의 연대기와 지리적 분포”는 1-3장의 ‘공화주의의 영향’ 테제와 함께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이 계몽주의 연구에 끼친 가장 중요한 함의들을 간직한 부분이다. 그것은 전 유럽적 개혁운동으로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시각이다. 각 지역의 고유한 맥락과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벤투리는 여러 지역들 간의 “사상의 유통이 우리가 의심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이었다는 결론,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우리는 계몽된 유럽의 대두를 목격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169). 이 중심에는 파리의 계몽철학자들과 『백과전서』가 있었다. 『백과전서』는 파리 바깥의 유럽 세계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계몽사상은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와 아메리카 식민지에까지 확산되면서 ‘계몽된 유럽’의 등장을, 나아가 1780년대 이후 혁명기의 등장을 가속화시켰다. 5장의 마지막 다섯 페이지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대조하면서) 잉글랜드에만 그러한 계몽주의의 흐름이 비껴갔음을 지적하는 데 할애된다.


마지막으로 계몽주의·사상 연구사에서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짧게 덧붙이자. 벤투리의 짧은 책은 이후 영어권 계몽주의 연구에서 보다 일반화 될 두 가지 면모를 앞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철학사·사회사적 접근 이상으로 정치사상사·지성사적 접근이 폭넓게 확산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프랑스 중심 관점을 넘어 전 유럽적 운동으로서의 계몽주의가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5) 후자는 다시 전 유럽적인 사상·서책의 유통·교류에 주목하는 시선과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 계몽처럼) 각각의 국가적·지역적 맥락에서 고유한 계몽주의 운동이 발생했음에 주목하는 시선을 포함한다. 비록 5장에서 벤투리가 여전히 프랑스 파리 중심적 계몽주의를 일반적인 모델로 설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책에서 프랑스 외부의 서로 다른 맥락에 주목하는 시선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계몽주의 연구는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지점들도 포함하고 있다. 1970년대 이래 정치사상사의 케임브리지 학파는 17세기의 자연법 논쟁을 포함해 공화주의적 언어 이외에도 법적·신학적 언어가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드러냈고, 이는 계몽주의 지성사에서도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6) 18세기 초중반 이래 잉글랜드에는 계몽주의가 없었다는 벤투리의 주장은 포칵(J. G. A. Pocock)의 현존하는 지성사 연구서 중 가장 위대한 저작으로 손꼽힐 대작 『야만과 종교』(Barbarism and Religion, 전6권, 1999-2015)를 통해 도전받았다.7) 그러나 이 책이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패러다임을 제시한 계몽주의 역사연구의 중요한 고전으로 남아있음은 분명하며, 우리는 여전히 이 위트있고 신랄하며 박식한 위대한 역사가가 반세기 전에 내뿜었던 열기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2. J. B. 슈니윈드,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자율의 발명』8)


벤투리의 명예로운 트리벨리언 강연이 열렸던 1969년의 케임브리지 대학은, 정확히 말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과는, 곧이어 17-18세기 영국·유럽 정치사상사의 판도를 뒤바꾸어놓는 지적 흐름의 중심지가 되었다. J. G. A. 포칵,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존 던(John Dunn), 리처드 턱(Richard Tuck) 등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빼어난 역사가들은 17세기 중반 영국혁명기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재해석하는 작업에서 출발, 초기 근대의 정치사상 문헌들이 현대인들의 관심사 혹은 해당 시기의 ‘물질적 토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연구되는 대신 해당 시대의 문제의식에 입각해 읽힐 때 보다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과거의 사상가 혹은 저자들을 해당 시대의 관점·문제의식에 읽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작업을 포함한다. 하나는 과거의 발화자·텍스트가 속해 있던 지적 배경·문제의식을 특히 그것이 어떠한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는지를 면밀히 재구성하는 작업, 즉 ‘언어적 맥락’을 복원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맥락 내에서 저자 혹은 텍스트가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혹은 그 언어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요컨대 무언가를 말하고 쓰고 발표하는 언어적 실천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이며, 그 행위의 의미는 실천이 속해 있는 언어적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작업을 하나둘 씩 내놓고 있던 케임브리지 학파의 역사가들은 1970년대 후반 오늘날까지도 고전적인 연구서로 꼽히는 위대한 저작들을 출간하면서 17-18세기 서구 사상을 이해하는 틀을 재구성했다.9) 대표적으로 자연법 전통과 헌정주의의 문제, 공화주의 전통, 18세기의 “상업”(commerce)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사회이론의 등장 등은 이들의 연구를 통해 그 중요성이 정당하게 부각되었다. 이어 소개할 저작은 바로 이러한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초기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 야심찬 저작이다.


J. B. 슈니윈드의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자율의 발명』(이하 『자율의 발명』)이 현존하는 초기 근대 서구 도덕철학사 중 단 한 명의 저자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는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견줄 바가 없는 저작임은 명확해 보인다.10) 원저가 출간된 지 20년이 지나 슈니윈드가 활용할 수 없었던 다양한 연구성과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영어권 철학사·지성사 논문에서 종종 인용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성을 가진 책을 한국어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독자로서 무척 기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저작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학술적인 서평은 전무하며 짧은 언론기사 또한 거의 나오지 않은 현재까지의 상황은 무척 유감스럽다. 이는 아마도 한편으로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17-18세기 서구 도덕철학사―즉 단순히 해당 시기 도덕철학 저술을 읽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그에 역사적으로 접근하는―연구자가 한국에 아직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과 함께 『자율의 발명』 자체가 다루는 내용이 무척 방대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책 자체의 물리적인 분량이 한국어판 기준 3권 1,230여 쪽(원저는 찾아보기 포함 xxii + 624쪽)에 달하고, 단순한 참고사항으로서의 인용이 아니라 독립된 절에 배치되어 원문 인용을 통해 주요 논지가 분석적으로 다루어지는 철학자·사상가는 총 56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면, 아니 심지어 전공자에게조차도 낯설 수 있는 저자들이다. 따라서 본 서평에서는 저작을 상세히 소개하기보다는 대략의 큰 흐름만 짚고자 한다.


『자율의 발명』의 목표는 “자율[autonomy]로서의 도덕(morality)이라는 개념을 발명”한(1권 31쪽) “칸트의 도덕철학을 그 이전에 등장한 성과들, 특히 그것이 등장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성과들과 관련해서 고찰함으로써 역사적 측면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에 관한 이해를 더욱 넓히려”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칸트의 도덕철학은 그 자체로 역사적 맥락을 떠나 읽힐 수 있는 성취, 또는 과거의 논의와 완전히 단절된 혁명적 저작이 아닌, 과거의 여러 성과·문제의식들과의 대화 속에서 형성된 무언가로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다른 저자들의 논의들로 구성된 맥락 내에 적절하게 위치시키는 작업이 요구된다. 칸트의 이해는 칸트가 속한 맥락의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맥락주의적 혹은 “역사적” 접근법에 대한 슈니윈드 본인의 입장은 24장 5-7절에서 분명하게 개진되며, 여기에서 그는 포칵과 스키너의 방법론에 자신이 받은 영향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3권 251쪽 각주30). 자신의 방법론적 입장에 입각하여 슈니윈드는 칸트의 문제의식과 닿아있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다양한 신학적·도덕철학적 전통들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먼저 수행하며, 독자들은 직접적으로 칸트의 논의와 대면하기(4부 22장) 전까지 약 천 쪽에 걸쳐 50명이 넘는 저자들의 논의를 만나게 된다.11) 물론 슈니윈드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러한 구성이 무척 당황스럽게 다가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칸트에 관한 부분을 독립된 장으로 써 놓았다. 칸트 자체에 좀 더 관심을 가진 독자는 필요하다면 칸트의 주요한 입장이 어떻게 과거의 도덕철학적 맥락들이 형성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지를 상세히 검토하는 23장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슈니윈드가 재구성하는 맥락들을 크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부 “근대적 자연법의 등장과 쇠퇴”는 종교개혁 이후의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회의주의의 도전에 맞서 모든 인간이 합의할 수 있는 정치적·신학적·도덕철학적 논리를 제공하고자 했던 16-17세기 자연법 이론가들을 다룬다. (리처드 턱의 연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서사에서) 그로티우스가 결정적인 시발점으로 간주되는 근대 자연법 이론가들은 우리가 함부로 파악할 수 없는, 따라서 그 누구도 쉽게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끌어올 수 없는 신의 “의지”(will)를 강조하는 주의주의적(voluntaristic) 입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논리는 종파 간의 갈등을 억누르고 만인이 복종할 수 있는 세속적 권위를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이었으나, 신과 인간의 관계가 마치 (신민들이 그 뜻을 이해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전제군주와 그 피통치자들의 관계처럼 묘사되는 유비는 특히 전제정 비판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였던 이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입장은 인간이 신 혹은 주권자의 처벌과 포상에 따라 움직이는, 결과적으로 그 자체로 선을 추구하는 덕과 도덕이 무의미해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자연법과 주의주의의 목표와 난점은 이 책의 마지막까지도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언급되므로 성실한 독자들은 1부, 특히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가 나오는 대목을 충실히 이해해두면 좋을 것이다). 2부 “완성주의와 합리성”은 이러한 주의주의적 입장의 반대편에서 인간이 이성과 사랑 등의 역량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보다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16-17세기의 “완성주의”(perfectionism) 논리를 검토한다. 선함 혹은 좋음(good)의 원천이 신의 의지가 아닌 실재하는 도덕적 기준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주지주의적(intellectualistic) 전제를 받아들이는 완성주의적 입장은 신 혹은 신이 표방하는 선함과 인간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보다 강조하는 강점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개념이라기보다는 자기완성이 가능한 뛰어난 소수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남았다. 인간의 쾌락과 선함이 같이 간다는 논리는 쾌락·이익과 도덕적 선함의 구별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각 인간 행위자의 도덕에 필수적인 자유의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오래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3부 “스스로 전개되는 세계를 향해”는 3부 제목 및 첫 부분인 13장의 제목 “구원이 없는 도덕”(Morality without Salvation)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 도덕이 신의 의지 혹은 초월적인 선에의 복종에 기인하는 대신 이 세계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어떠한 도덕적 능력에 기반한다는 논리가 18세기에 점차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영국의 도덕철학자들을 상세하게 검토하는, 『자율의 발명』 전체에서 가장 많은 저자들이 등장하며 또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3부는―이는 지난 수십여 년 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를 포함한 지성사의 확장과 함께 17-18세기 영국철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풍성하게 축적되어온 것에 힘입고 있다―도덕감정(moral sense)과 같은 인간의 정서적·감정적 기능에 도덕적 능력을 부여하고 나아가 도덕 자체를 자연화하는(naturalize) 논리들의 등장을 조명한다.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는 도덕성의 원천을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초월적인 의지·기준이 아닌 인간 내부의 역량에서 찾아내는, 곧 인간이 스스로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도덕철학의 등장과정으로 그려지며,12) 칸트의 “자율” 개념은 이러한 흐름의 후계자이자 근대 도덕철학의 결정적인 계기로 지목된다. 그 점에서 슈니윈드의 논의는, 비록 그 자신이 기존의 세속화(secularization) 논의들을 비판하고(1장 3절) 또 신학적 논점의 중요성을 지속해서 강조하긴 하지만, 명백히 또 하나의 세속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4부 “자율과 신성한 질서”는 다시 독일의 전통 및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을 소개한 뒤 마침내 칸트의 도덕철학이 지금까지의 전개되어온 논의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인지를 밝힌다. 칸트는 총 두 장에 걸쳐 다루어지는데, 22장 “자율의 발명”은 자율 개념에 중점을 두고 그것이 이전 18세기의 여러 입장들이 직면한 문제를 어떻게 돌파하는지를 상세히 검토하며, 23장 “도덕철학사에서 칸트의 위치”는 『자율의 발명』 전체 서술의 긴 호흡에서 제기되었던 주요한 쟁점들의 맥락에서 칸트가 어떠한 입장을 설정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13) 에필로그인 24장 “도덕철학사에 대한 이해: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그리고 칸트”의 전반부는 흥미롭게도 도덕철학의 역사쓰기 자체에 대한 메타적 관점에 입각하여 17-18세기에, 그리고 칸트에 이르기까지 도덕철학의 역사가 어떠한 전제 위에서 서술되었는지를 조명한다. 여기서 칸트에게 기독교와 성경적 역사(biblical history)의 영향력은 오늘날의 독자들이 상상했을 정도보다 훨씬 근본적임이 드러난다. 24장 5-7절에서는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분명해졌듯 시공간마다 도덕철학이 상이한 목표를 추구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의 철학적 목표를 설정하고 텍스트를 환원적으로 읽는 기존의 철학사적 서술 대신 각 시대의 언어와 맥락, 문제의식 내에서 철학을 이해하는 방식이 보다 유의미하다는 저자 본인의 방법론적 입장을 피력한다.


『자율의 발명』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다음의 세 층위, 즉 16세기부터 18세기 말 칸트까지로 향하는 가장 거시적인 층위, 각 시기의 주요한 도덕철학적 흐름들을 묶어 설정하는 중간 층위, 개별 저자들의 논지를 직접 따져가며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미시적인 층위 간의 균형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한 데 있다. 물론 고유한 거대서사를 설정하는 모든 저작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저자가 보다 초점을 맞추는 지점이 있으며 개별 철학자의 연구를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슈니윈드의 서술에 만족하기 힘들 수 있다(개인적으로는 로크를 다루는 대목이 그러하다). 그러나 슈니윈드는 자신이 설정한 커다란 구분선, 가령 주의주의 대 주지주의·완성주의·이성주의 등의 구별이 실제 개별 저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계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환기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거대한 철학적 입장·범주가 선행하고 개별 철학자들이 이에 속하는 게 아니라 개별 저자들의 논쟁과 고투를 통해 주요한 철학적 논점·문제의식이 변모해간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상의 변화는 초개인적 실체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개별자들의 운동과 상호과정을 통해서 전진되며, 맥락은 항상 구체적인 행위자·언어적 실천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바꿔말하면 개별 철학자에 대한 서술을 읽을 때 독자가 지속적으로 해당 서술이 슈니윈드가 그때까지 이끌어 온 거시적인 문제의식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정리해야 더 철저한 독서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맥락에 접속하려는 독자의 노력이 없다면 철학자의 입장·논증·체계를 최대한 분석적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는데 집중하는 저자의 서술방식이 무척 추상적으로만 느껴질 수 있다(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중서가 아닌 어느 정도 철학적 논증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한 진지한 교과서·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어판의 만듦새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자. 이 방대한 책을 대체로 크게 걸리는 지점 없이 읽을 수 있는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는 깊은 감사와 찬탄의 마음을 표해야 한다. 그러나 아쉬운 지점이 몇 가지는 지적할 수 있다. 가끔씩 나타나는 번역 실수, 가령 2권 266쪽에서 “읽었는데”(reading)를 “주도했는데”(leading)으로 잘못 옮긴 대목, 같은 권 269쪽에서 “프랑스어 번역을 시도했다”(a French translation be made from that version, 원저 297쪽)나 3권 255쪽 첫 문단 마지막에서 “감출 필요는 없다”[need not conceal, 원저 553쪽]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로 옮긴 대목 등은 교열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슈니윈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초기 근대 서구 정치사상사·지성사 분야의 용어들에 역자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색하고 잘못된 역어들에 있다. 피에르 샤롱을 설명하는 1권 137쪽에서 아마도 라틴어의 고전적 덕성인 "honestum"을 영어로 옮겼을 "honesty"를 그대로 “정직함”으로 옮긴 선택이나, 립시우스의 (아마도 “의연함” 정도가 더 어울릴) "Constantia"를 영어의 "Constancy"를 직역하여 “일관성”으로 옮긴 건 조금 어색한 정도지만(2권 18쪽), 루소의 “자기편애”(amour propre)를 “독점적 사랑”으로 번역한 건 명백한 오역이다(3권 97쪽). 스토아학파의 “현자”(sage, 원저 187쪽)를 훨씬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역어인 “성자”로 옮긴 것도 아쉬운 부분이며(2권 51쪽)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을 “도덕법칙 폐기론”으로 옮긴 건 동의하기 힘들다(2권 66쪽)―특히 영국혁명기 개신교 전통에서 반율법주의는 신과의 교통을 통해 기존의 율법을 비판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마키아벨리적 언어의 전통처럼 통상적인 철학 전공자들이 다루지 않는 부분은 부적절한 역어가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해링턴의 “인민”(the people, 원저 290쪽)은 분명 귀족과 구별되는 표현이지만  “일반인”, “일반 사람들”로 번역될 수 없고(2권 255쪽; 더불어 인간의 “관조”[contemplation]와 “행동”[action]이라는 고대 시민론의 개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다음 쪽의 인용문 번역도 재번역이 필요하다), “자연귀족”(natural aristocracy, 원저 292쪽)도 지금과 같이 “자연적 상류층”으로 옮겨질 게 아니라 왕, 귀족, 평민 혹은 일인, 소수, 다수로 정치체의 구성원을 분류하는 당시의 언어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2권 258쪽). “부패”(corrupt)는 당대에 종종 기독교적 뉘앙스를 품긴 하지만 현재 역어로 선택된 “타락”과는 구별되어야 하며(2권 263쪽) 2권 267-68쪽에서 "the Commonwealthmen", "Commonwealth thought"을 “[영국] 공화주의(자)”가 아닌 “국가 중심 이론(의 지지자)”로 옮긴 대목은 완전히 틀렸다. 지면 상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포함해 이러한 오역이 상당히 많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율의 발명』이 도덕철학사 책이라고 해도 애초에 저자 본인이 좁은 의미의 철학사만 연구한 게 아니니만큼 철학전공자들에게만 검수를 받을 게 아니라 (한국에 드물지만 존재하는) 정치사상사·지성사 전공자들에게 검수를 받았다면 훨씬 좋은 번역이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이 크다. 2쇄 혹은 2판이 나온다면, 이 책은 분명 그럴 가치가 있는데, 상기한 대목을 포함해 주의 깊은 개선작업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가장 큰 문제는 번역보다는 다른 측면에 있다. 원저가 페이지당 44줄이 들어가는 상당히 빡빡한 책인 건 사실이지만, 총 640여 쪽에 달하는 책이 (총 26쪽의 옮긴이의 말 및 해제를 포함해) 하드커버 세 권 1,230쪽으로 늘어난 건 당혹스럽다. 물론 줄간격 및 한 줄에 들어가는 글자 수 모두에서 나름의 현실적인 고려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연구자들만 주의 깊게 읽을 참고문헌 목록(한국어판은 3권 277-340쪽으로 64쪽을 차지, 원저는 총 39쪽 분량)에서도 굳이 이러한 편집방침이 고수되어 양을 늘려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 심각한 건 이렇게 분량이 늘어났으면서도 원저에 무척이나 상세하게 구성되어 있는 찾아보기(index)가 대폭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명색인, 주제별색인, 성경인용색인을 포함해 원저 기준 총 32쪽에 달하는 색인이 한국어판에서는 불과 4쪽의 훨씬 축소된 형태로만 수록되었다. 이건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 번역총서에 독자들이 기대할 진지한 학술서 번역출판의 기준에 명백히 미달한다. 내가 보유한 판본이 초판 1쇄임을 감안해야겠지만 종종 눈에 띄는 편집실수는 말할 것도 없다. 나남출판사의 학술서 시리즈는 몰취미한 표지디자인으로 농담거리가 되곤 하는데, 『자율의 발명』 한국어판에서 그건 별다른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다. 출판사가 역자와 독자들, 학술공동체에 좀 더 진지한 태도를 취하기를 희망한다.



3. 우디 그린버그, 『바이마르의 세기: 독일 망명자들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14)


『바이마르의 세기: 독일 망명자들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이하 『바이마르의 세기』)는 개인적으로 2018년에 한국어로 번역출간된 책 중 가장 흥미를 끈 저작이다. 2년 여 전 원저를 처음 읽었을 때 직접 번역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대체로 막히는 부분 없이 잘 읽히는 한국어로 출간된 것을 크게 환영한다. 이 책은 20세기 서양사 및 인접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은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가 있다.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전간기 독일과 냉전 초기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정책과 대학의 관계, 지식인·사상적 실천과 현실정치의 관계,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깊게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은) 민주주의 문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있는 냉전체제 및 그 사상의 문제, 그리고 극우 개신교단체 등에서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시대착오적 반공주의 언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등에 일말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린버그의 저술에서 아주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이마르의 세기』는 무척 상이한 지적 배경에서 출발한 다섯 명의 지식인·사상가, 즉 프로테스탄트 카를 J. 프리드리히, 사회주의자 에른스트 프렝켈, 카톨릭 보수주의자 발데마르 구리안, 자유주의자/전투적 민주주의자 카를 뢰벤슈타인, 국제법 사상가 한스 모겐소 등이 어떻게 유사한 삶의 궤적을 밟아나갔는지를 추적하면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현대 서구 민주주의 체제 형성의 중요한 모멘트를 재구성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함께 성립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와 극단적 인플레이션, 나치즘의 대두로만 기억된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혼란과 위기에 빠진 민주공화국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려는 다양한 사상적 시도가 있었음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처럼 '민주주의의 (상대적) 우월성'이 주어진 상식으로 자리 잡기는커녕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 자체가 극히 소수였던 시간, 동시에 자유주의 이념이 결코 충분한 다수표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 없는 공간을 상상해보자. 종교·개인·가족·공동체·노동·국제관계 등을 포함한 수많은 주제들이 민주공화국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그 자체로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보수적인 종교인들은 민주공화국을 가족·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세속화와 자유주의의 산물로 보았으며,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노동계급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 타도해야 할 기만적인 지배도구로 바라보았다. 이 책이 주목하는 다섯 명의 사상가는 이러한 당시의 지배적인 정조와 달리 민주공화국이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논리를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민족주의, 나치즘,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토대로서 말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이후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본격적으로 확산될 때까지 살아남아 그 이념을 구성하는 뼈대가 되었으며, 그중 어떤 것들은 지금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서도 당연한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역사가 보여주었듯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위한 사상적 실천은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다섯 모두 나치화되어가는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상이라는 것이 한갓 실체없는 관념적 말놀이에 불과하다는 속물적 단견과 달리, 체계화된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영향력을 행사할 적절한 시대적 조건을 마주하는 순간 마치 수 세기 동안 말라붙어 있던 씨앗이 싹을 틔워 번식하듯 세계에 작용한다. 이제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간, 그리고 소련의 공산주의와 전지구적 체제경쟁에 들어갈 1940-50년대의 미국은 바로 그러한 조건을 제공했다. 다섯 명의 독일인 망명자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왜 나치즘·공산주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지, 세계 민주주의의 대표자인 미국이 왜 나치제국과 소련제국을 대상으로 전세계적 투쟁에 나서야 하는지 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면서 냉전과 함께 만들어진 새로운 전지구적 통치질서의 중요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미국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걸 넘어 제2차세계대전 종료 후 자신들의 모국이었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탈나치화” 뿐만 아니라 해방 후 남한(프렝켈), 냉전기 라틴아메리카(뢰벤슈타인) 등 미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각지의 통치에 유의미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기 형성된 이들의 사상이 이처럼 초기 냉전기 세계체제의 운영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책 제목이 가리키듯 “바이마르의 세기”이기도 하다.


또 하나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이 다섯 명의 사상가들이 모두 현대의 새로운 국가통치모델, 즉 국가 통치엘리트(관료·학자·언론인·정치인·기업인 등), 대학과 연구소, (록펠러 재단처럼) 막대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자선단체 간의 결합체가 형성하고 작동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국가권력-전문지식/교육-민간자원의 결합체에서, 대학과 연구소는 통치엘리트들을 교육하고 또 (소련학Sovietology처럼) 이들이 활용할 전문지식을 생산·제시하며, 민간단체들은 지식인들과 통치엘리트들이 방대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한다. 이를 고도로 발전된 전문지식장을 중심으로 국가통치를 현대화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해보자―오늘날 한국은 미국을 모방하면서 이 과정을 기계적으로 흉내내고 있으나 이것이 어떠한 모델에 기초하는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관료·지식인·언론인은 놀라울 정도로 소수인 것처럼 보인다. 오랜 관방학(cameralism)의 전통을 지닌, 그리고 1920년대에 이미 막스 베버의 동생 알프레트 베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인조슈타(InSoSta, 사회과학 및 국가학연구소Instituts für Sozial- und Staatswissenschafte / Institute for Social and State Sciences)를 통해 수천 명의 관료후보자들을 양성하고 있던 독일은 여기서 단연 선두주자였다. 냉전을 맞이하여 전세계를 통치할 막대한 지적·인적 역량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나치 억압의 결과로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망명지식인들을 한꺼번에 선사받는 측량할 수 없는 행운을 누리게 된 미국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의 구축이 진행되었다. 독일인 망명자들은 국가와의 협력에 소극적이었던 기존 미국 명문대의 운영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전문지식-국가통치 복합체의 형성에 참여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 주요 대학에 깊은 흔적을 남겨놓은 “냉전 대학”(Cold War University)은 바로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다.15) 다섯 명의 저작은 냉전 대학의 수업커리큘럼을 통해 수많은 미국인 엘리트들의 교과서로 활용, 담론과 지식장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젊은 역사 연구자들, 역사연구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바이마르의 세기』는 여러 이유에서 유익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책 자체의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그린버그는 전간기 독일과 냉전기 미국의 지적·제도적 풍토를 그려볼 수 있는 비교적 최근의 영어권·독일어권 연구 목록을 주석을 통해 풍성하게 제공한다. (사상가와 현실의 변화를 다소 지나치게 매끈하게 그려낸다는 의문은 있으나) 지성사와 정치/제도 연구가 결합하여 매력적인 연구서사를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장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의 역사가, 물론 과거도 마찬가지지만, 일국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깨우쳐준다는 데 있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슬프게도 여전히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한국의 역사는 여전히 지나치게 일국적인 시각에서 이해된다. 단순히 무역이나 외교, 전쟁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주요한 언어와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 또한 한 사회 내에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인식은 특히 해방과 냉전기 연구에 있어 더욱 필요하다. 가령 우리는 20세기 한반도의 여러 중요한 변화에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정확히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된 언어였는지, 그 언어가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하는 연구는 아직도 소수의 관심사로만 남아있다(너무나 쉽게 간과되지만, 서구가 하나가 아니듯 기독교 선교단체도 하나가 아니다!). 2000년대 이래 '세속화'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면서 종교의 역사적 역할에 관한 연구도 매우 확장되었으나 한국의 정치사상 연구자들은 여전히 ‘세속화된 근대’를 너무나 자명한 기준으로 여긴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편견을 깨줄 것이다.16)


덜 전문적인, 그러나 사상과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유익하다. 『바이마르의 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혹은 비판하는)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여러 언어들이 매우 독특한 조건과 그 필요에 기인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오늘날의 우리가 독일인 망명자들의 경로를 되밟을 필요는 없겠지만, 자유주의·민주주의 위기론이 다시금 곳곳에서 대두하고 있는 시점에 그 주요한 출발점 중 하나를 검토해보는 건 지적으로 무척 유용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좀 더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현대국가에서 대학 및 전문지식생산자들과 통치기구가 맺는 관계다. 한국의 대학은 한편으로 이공계나 각종 사회조사/정책에서 볼 수 있듯 국가통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오면서도 동시에 80년대 체제비판적 전통에서처럼 국가권력에 의식적인 거리를 두는, 그리고 2000년대부터는 시장의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요구에 맞춰가는 상반된 흐름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나는 이러한 흐름 중 무엇 하나가 더 우월하거나 더 사악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시장주의에 너무나 쉽게 굴복해버린 이들이든, 반대로 지나치게 낭만적인 '근대학문'의 이상이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든, 그 어느 흐름의 지지자도 자본과 인력이 집적된 체계화된 전문지식생산과정과 근대국가 사이의 관계 및 그 역사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불만스럽다. 우리가 1940-50년대 미국의 냉전대학을 한국 대학을 위한 이상적인 모델로 간주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전히 고등교육과정을 그저 등록금과 취업, 입시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교육정책을 이끄는 지금의 한국에 『바이마르의 세기』는 시스템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1)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간과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그 중요성에서나―책 본문 전체와 비슷한 분량의 인명 색인을 달아놓은(!)―역자의 성실함에서나 비할 바 없는 역서인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안두환 역, 글항아리, 2018년 10월; 원저는 Michael Howard, War and the Liberal Conscience, London: Hurst&Company, 2008. [초판은 1978년 Maurice Temple Smith, Ltd. 에서 출간])을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별도의 공간에서라도 이 책을 다룰 것을 약속하면서, 지금은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접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2) 원저는 Franco Venturi, Utopia and Reform in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


3) 이 흐름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대표적인 저술로는 에른스트 카시러, 『계몽주의 철학』, 박완규 역, 민음사, 1995 및 전자에 깊은 영향을 받은 피터 게이, 『계몽주의의 기원』, 주명철 역, 민음사, 1998 을 참조. 후자는 두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중 두 번째 권인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Vol. 2: The Science of Freedom (1969)은 한국어 번역이 아직 없다.


4) 게이의 책 1권의 부제를 벤투리 책의 역자는 “근대 이단의 대두”로 옮겼으나(19), 보통 “이단”은 같은 종교 내에서 정통적인 종파가 비정통적인 종파를 지칭하는 "heresy"의 역어로 활용되며, 초기 근대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을 부를 때는 비(非) 기독교도라는 의미에서 “이교도”(pagan)라는 말을 썼음을 감안할 때 나의 어감에는 “근대 이교 정신의 대두”가 보다 적합해 보인다.


5) 후자의 대표적인 연구로 Roy Porter & Mikuláš Teich eds., The Enlightenment in National Contex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참조.


6) 자연법 전통이 계몽기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을 다룬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는 Istvan Hont, Jealousy of Trade: International Competition and the Nation-State in Historical Perspective, Cambridge(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를 보라. 계몽주의와 종교 논쟁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들을 소개하는 좋은 논문으로 Simon Grote, "Review Essay: Religion and Enlightenment",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75.1(2014): 137-60 을 참조.


7) 오늘날 계몽주의 연구에 입문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로는 다음의 저작들을 보라: John Robertson, The Enlightenment: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Anthony Pagden, The Enlightenment: and Why it Still Matt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Dan Edelstein, The Enlightenment: A Genealog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0.


8) 원저는 J. B. Schneewind, The Invention of Autonomy: A History of Modern Moral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9)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The Machiavellian Moment, 한국어판은 곽차섭 역, 전2권, 나남, 2011)는 1975년,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한국어판은 박동천 역, 1권은 한길사, 2004, 2권은 한국문화사, 2012)는 1978년,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어판이 존재하지 않는 턱의 『자연권 이론: 기원과 발전』(Natural Rights Theories: Their Origin and Development)은 1979년에 출간되었다.


10) 가령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A Short History of Ethics, 2nd. ed. 김민철 역, 철학과 현실사, 2004[1997])은 17-18세기 도덕철학에 대한 설명에서 부정확하고 시대착오적인 서술이 너무나도 많으며, 찰스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형성』(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Modern Identities, 권기돈·하주영 역, 새물결, 2015[1989])은 언어적·역사적 방법에 대한 긴 서문을 포함하여 유용한 통찰을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나 저자가 참고하는 주요 연구들이 다소 낡은 것들이 많아 결과적으로 비역사적인 통념이 반영된 부분이 적지 않다―이는 테일러의 보다 방대하고 야심찬 저작 『세속화 시대』(A Secular Age, 2007)의 번역출간으로만 갈음될 수 있을 성싶다.


11) 『자율의 발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전체 저자 및 해당 대목(장.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부(14명): 토마스 아퀴나스(2.2), 둔스 스코투스(2.3), 마르틴 루터(2.4-5), 장 칼뱅(2.6), 니콜로 마키아벨리(3.1-2), 미셸 드 몽테뉴(3.4-6), 피에르 샤롱(3.7), 프란치스코 수아레스(4.1-3), 휴고 그로티우스(4.4-8), 토머스 홉스(5), 리처드 컴벌랜드(6), 사무엘 푸펜도르프(7), 존 로크(8.1-8),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8.9-11).

2부(12명): 기욤 뒤 베르&유스투스 립시우스(9.1), 처베리의 허버트(9.2-3), 르네 데카르트(9.4-6), 벤저민 위치코트(10.1), 존 스미스(10.2), 헨리 모어(10.3,5), 랠프 커드워스(10.4-5), 베네딕트 스피노자(11.1-3), 니콜라스 말브랑슈(11.4-7),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2.1-3,5), 장 바르베이락(12.4-5).

3부(23명): 피에르 가상디(13.1-2), 블레즈 파스칼(13.3), 피에르 니콜(13.4), 피에르 벨(13.5), 제임스 해링턴(14.2-3), 제3대 샤프츠베리 백작 (14.4-7), 새뮤얼 클라크(15.1-5), 버나드 맨더빌(15.6-7), 게르숌 카마이클(16.1), 프랜시스 허치슨(16.2-4), 조셉 버틀러(16.5-8), 데이비드 흄(17), 리처드 프라이스(18.2-4), 아담 스미스(18.5-6), 토머스 리드(18.7-10), 존 게이&데이비드 하틀리(19.1), 존 브라운&윌리엄 페일리(19.2), 클로드 엘베시우스&돌바크 남작(19.3), 제러미 벤담(19.4), 사드 후작(19.5).

4부 및 에필로그(7명): 크리스티안 볼프(20.1-4), 크리스티안 크루지우스(20.5-7), 볼테르(21.1), 쥘리앵 오프루아 드 라메트리(21.2), 드니 디드로(21.3), 장자크 루소(21.4-7), 이마누엘 칸트(22, 23, 24.4).


12) 역자는 책의 중심개념인 “self-governance"를 ”자기규율“로 옮기는데, 이 선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기존 한국어 학술어에서 ”규율“에 부여된 (특히 푸코 이래의) 의미를 고려하면 ”자기통치“가 좀 더 적절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13) 다만 칸트에 대한 슈니윈드의 맥락주의적 독해는 어디까지나 거시적인 철학적 논쟁에 입각해서 그려진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가령 칸트가 속한 시공간에서의 논쟁에 훨씬 더 집중한 맥락주의적 철학사의 좋은 예인 프레더릭 바이저의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의 독일 철학』(이신철 역, 도서출판b, 2018)과 슈니윈드의 저작을 비교해 읽어보면 맥락주의적 독해가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실천되는 게 아님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4) 원저는 Udi Greenberg, The Weimar Century: German Émigrés and the Ideological Foundations of the Cold War,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이 부분의 초고는 <https://begray.tistory.com/484>를 통해 공개된 바가 있다.


15) 냉전 대학에 대한 흥미로운 스케치의 하나로는 Jeremi Suri, Henry Kissinger and the American Century, Cambridge(MA):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의 3장을 보라.






16) 현재 미국 지성사 연구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새뮤얼 모인(Samuel Moyn)의 20세기 인권사 연구, 가령 Christian Human Rights(2015) 및 완전히 새로 번역되어야 할 The Last Utopia(2010) 등을 포함해 상기한 경향을 반영한 최근 냉전기 지성사 연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빠르게 번역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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