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와 초기 계몽: 2월 27일 일기

Intellectual History 2019. 3. 3. 21:47
1.

2월은 충분히 효율적이지 못했다. 사적인 일들, 공적인 일들이 계속 떨어져내려왔고 그 다수가 현재진행형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바라는 이상에 비추어 보면 적지 않게 비효율적이고 또 시간을 허투루 썼다(물론 나는 그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게 살아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임을 알 만큼은 스스로를 안다). 그나마 매주 두 차례의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지적인 진전이 더 적었을 것이다. 두 세미나 모두 논문주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도움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내 주제를 더 들어가야 하는데 충분히 매진하지 못하고 있는 게 가장 불만스럽다.

포콕의 _Barbarism and Religion_을 읽는 세미나는 이제 드디어 5권에 진입했다(지금까지 16회차를 했다!). 앞으로 남은 8주 가량의 부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읽은 네 권 만으로도 B&R은 내가 지금까지 접한 지성사, 아니 전체 인문분야 연구서 중에서 압도적으로 위대한 책으로 어떠한 유보없이 꼽힐 수 있다. 상당히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고 스타일도, 글 구성도 까다로운 책이지만, 초일급의 연구자가 90대까지 쉬지 않고 진력한 연구성과를 1년도 못되는 시간 동안 읽고 흡수할 수 있다는 건 솔직히 무척 감사한 일이다(1957년 포콕의 첫 저작을 드문드문 읽고 있는데, 그는 반 세기 전부터 이미 초일급의 연구자였다). 과장 같지만 과장이 아닌 이야기를 하자면, 18세기 계몽기의 사상을 다루는 연구자는 B&R을 접한 연구자와 그렇지 않은 연구자로 나뉜다고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끝까지 독서를 버텨내고 내용을 이해하면 그때부터 연구의 시야/자료의 독법 자체가 달라진다.

18세기 유럽 전공자들의 모임은 정말로 유익하고 매번 지적 자극을 준다. 서로 다른 시공간,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매주 이미 상당히 농축된 자료해석과 코멘트를 접하다보면 내 사고의 레퍼토리 자체가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더불어 (각 발표자의 순서는 대략 7-8주에 한 번 꼴이지만) 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자료들을 찾고 읽으며 생각하면서 처음의 구상에서 계속 어떤 식으로든 더 나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했던 세미나들은 혼자서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자리거나(그런 점에서 세미나라기보다는 '수업'에 가까워지는 ㅠㅠ), 아니면 서로 간의 예의/위계의 문제든 열성과 자기기준의 문제든 별다른 지적 자극이 생기지 않는 일회성의 모임들이 다수였다면, 처음으로 지적으로 생산적인 고민들이 계속해서 오갈 수 있는 자리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그런 마음이다.

2.

지금은 다음 주제로 17세기 말-18세기 초 잉글랜드의 계시 대 자연신학을, 구체적으로 로크의 <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을 읽고 이야기할까 생각 중이다. 로크를 (주로 <통치론>에 주목해) 근대 자본주의 소유권 / 자유주의 / 근대 개인주의 등등...의 위대한 시조로 놓는 시대착오적인 통념에 여전히 붙들려 있다면, 1690년대 로크가 보여준 하나하나가 막대한 파급력을 지닌 작업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인간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 관용(toleration) 서한들, <교육론>(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1693), 그리고 <기독교의 합리성>은 그 모두가 다음 세기에 영국 안팎에서 널리 읽혔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18세기의 이른바 "계몽된"(enlightened)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중요한 구상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 계몽된 세계는 다른 무엇보다도 종교적 갈등이, 혹은 시민들 간의 환원불가능한 차이가 극한적인 투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의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식·앎(knowledge)은 필수불가결한 매체인 언어(words)와 함께 그 토대에서부터 다시 검토되었다. <인간지성론>은 무엇보다도 지식이 더 이상 '무의미하고 혼란스러운' 교리투쟁을 낳지 않도록 그 한계를 섬세하게 설정하는 작업이었다(3권이 "언어에 관하여"[of Words], 4권이 "지식과 의견에 관하여"[of Knowledge and Opinion]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이 책을 읽을 때 후반부를 읽지 않는 것은 책 자체를 읽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서로 다른 종파의 사제들, 그리고 스스로가 신과 직접 교통한다고 믿는 열광자(enthusiast)들의 머릿속에서 뻗어나온 각양각색의 형이상학, 그리고 그로부터 발원하는 신학정치적 논변들의 정초를 봉쇄하고 기껏해야 각 개인들의 사변적 의견 정도로나 인정받도록 축소하는 것. 유의미한 앎, 우리가 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의 근거를 일상의 경험, 상식, 이성으로 국한시키려는 노력은 이러한 진술이 봉쇄하고자 하는 적수가 무엇이었는가를 고려할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근대 경험론'이란 태그는 <인간지성론>을 매우 제한적으로만 설명할 뿐이며, 로크의 기획이 형이상학적 투쟁을 봉쇄하고 진정한 지식과 지식으로부터 발원되는 권위를 사제들과 (사제들의 전진기지로 간주되었던) 대학의 '스콜라철학자들'로부터 관용적이고 '문명화된' 신사들의 세계로 이행시키는 데 있었음을 보지 못하게 한다.

관용과 시민교양(civility)을 핵심으로 삼는 '계몽된' 세계를 도래시키는 것이 로크의 목표였다면, 로크는 단순히 그러한 세계가 바람직하다는 선언에서 그치는 저자가 아니었다. 그는 훨씬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언어적 행위자였고, 그래서 그러한 세계를 만들고 살아갈 사람들이 어떠해야 하는지, 또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교육론>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처음의 키케로적·스파르타적 자기훈육이 무척 인상적인--로크를 평범한 '근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동일시했던 독자들은 여기에서부터 놀랄 것이다--이 책의 진의는 중반부 이후 어느 정도 자라난 소년을 어떠한 신사로, 이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길러낼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로크는 어떤 책, 어떤 분야를 읽히고 읽히지 말아야 하는지를 세심하게 논의하면서 교회·대학에서 독점하고 있는 지식과는 다른 목표·형식을 가진 신사들의 지식 모델을 제시하며, 나아가 어떠한 대화습관이 옳고 그른지를 세세하게 나열한다. 시민교양은 문명인의 척도고 관용은 그것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태도다. 불필요하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들은 물론이요, 대학의 '현학적인' 지식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경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대화상대자가, 좋은 신사가 될 수 없도록 한다.

3.

로크의 사회가 신사들의 대화를 통해 작동한다면, 그 대화는 관용과 세련된 부드러움을 미덕으로 삼는 신사다운 태도에 입각하여 일상의 경험·상식·도덕·합리성을 구현하는 신사들의 앎으로 이루어진다. 하버마스가 "부르주아 공론장"이라 부른 것, 혹은 보다 널리 "시민사회"(civil society)라 불리는 것은 실제 17-18세기 영국의 지성사에서는 교회·대학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지식장을 창출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밀접히 닿아있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신사, 좀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의 핵을 이루는 "남성 시민"의 규범적 모델을 새롭게 쓰는 행위를 요구한다. 새로운 "남자다움"(manliness)을 제안하는 행위는 다시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작동하는 사회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의 규범적 모델을 재구축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어 번역이 결코 그 본 어감을 담아내지 못하는) "정중한"(polite) 남성 신사들의 세계가 열리면서, 남성들은 과거 남성성이 전시되던 보다 남성중심적인 공간들에--전장, 주점, 기타 공적인 장소들--비해 여성이 비교적 수월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대표적으로 가정의 응접실--에서 자신의 새로운 남성적 탁월함을 입증해야 했다. 여성을 모욕하거나 위협하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게 새로운 남성적 덕성이라면, 그러한 남성들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여성들은 어떠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화가 신사들의 지식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생성하는 장소라면, 그러한 대화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지식은 도대체 무엇이여야만 하며 그것은 남성들의 지식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지식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은, 성별에 따라 구별되는가? 18세기 영국의 지침서·소설에서 우리는 21세기까지도 여전히 논쟁이 될 주제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심지어 성·젠더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종종 오해하고 있지만, 2010년대에서도 그러하듯 남성성, 남성다움은 결코 하나의 단일한 모델로 수렴되지 않으며, 그것은 각 시대에 여러 다른 쟁점들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었다. 18세기 영국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규정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어느 한 쪽이 빠르게 변화할 때 다른 하나도 마찬가지로 뒤바뀔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시공간이다. 이 주제는 이제 공부를 막 시작한 참이고 앞으로 (무엇보다 학위논문을 위해) 계속 공부하면서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테니 몇 가지 간단한 사항만을 이야기해두자.

-로크를 포함한 잉글랜드 초기 계몽주의(early Enlightenment)에서 장기간의 종교투쟁 이후 기독교와 교회의 위상을 재설정하려는 시도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여기에는 다시 '진정한' 지식·학문의 성격과 소재를 재규정하려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지식의 성격과 그 권위를 재규정하는 작업은 종교의 지배에 대항하여 시민교양과 관용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대화와 그 대화가 진행되는 일상적인 공간을 시민사회의 핵으로 두는 문화정치적 기획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는 지식, 인간본성과 정치체·사회의 관계, 바람직한 시민 모델/덕성 등을 포함해 사회의 제반 요소를 재설정하는 작업을 포함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남성성의 모델이 시민교양·정중함·세련됨(refined) 등등의 의미론을 통해 재구축되었고, 이는 바람직한 여성모델을 규정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에는 단지 여성의 품행에 관한 것만 아니라 여성의 지식·교육 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들이 들어있었다. 혁명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A Vindication of Rights of Woman, 1792)는 여성의 앎과 시민됨을 둘러싼 논쟁의 출발점이 아니라 최소 수십 년 넘게 진행되어온 논쟁에서 나온 입장 중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즉 18세기 영국의 젠더를 둘러싼 논의는 "계몽된 시대"(enlightened Age), 오늘날 우리의 언어로 (잉글랜드의) '계몽주의'적 기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4.

심지어 18세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오해이지만,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에서 '계몽 대 기독교'란 도식은 잘 들어맞지 않으며, 성직자·관료·대학교수 등 이른바 '제도권' 중도파(moderati)들이 주도한 스코틀랜드나 국교회 내에서조차 광범위한 스펙트럼이 공존했던 잉글랜드에서는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사제의 지배(priestcraft), 종교적 미신(superstition), 열광/광신(enthusiasm)에 대한 비판과 세속적인 시민통치(civil government)를 위한 열망이 컸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공유하는 저자들 중 완전한 불신앙(unbelief)이나 무신론(atheism)을 표명한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의 비중이 훨씬 컸으며, 1790년대 혁명기 급진파들의 경우에서조차도 다양한 종파의 비국교도(dissenter/nonconformist)가 더욱 두드러진다. 가령 우리는 영국 공론장/시민사회와 계몽의 중요한 행위자로 간주되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 지의 두 필자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과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각각 나름의 기독교 옹호론을 썼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영국의 계몽과 종교논쟁을 이해해야 할 때는 기독교 '적폐' 대 계몽주의 개혁의 이분법보다는 오히려 계몽의 기획에 동의하는 저자들이 교회와 신학 내부의 복잡한 언어적 투쟁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게 훨씬 유용하다.

그러한 투쟁 중 하나가 흔히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 대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이신론(deism) 구도로 이해되는, 참된 기독교와 계시의 관계를 둘러싼 입장들의 논전이다.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려는 참이므로 자세한 걸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이 논쟁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지(최소한 루터로부터 시작되는 이 문제는 내 추정에는 다시 대학 대 시민사회/신사 라는 지식의 구도랑 닿아있다), 도덕의 원천과 그 효력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 등의 여러 복잡한 주제들이 닿아있다. (스스로가 이신론자가 아니라고 확실하게 주장한) 로크의 <합리성>은 당대에 옹호자와 비판자 양측에서 반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인용되는 중요한 텍스트였다. 내가 여기서 무엇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는 가 봐야알겠지만, 지금은 여기에서 초기 계몽주의로부터의 지적 맥락에 새뮤얼 리처드슨을 놓으려는 나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출발할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만 하려한다.


Trackbacks 0 : Comments 7
  1. 연노 2019.03.16 18:07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입니다. 학문을 통해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했으면 해요

  2. 익명 2019.04.22 06:09 Modify/Delete Reply

    18세기 유럽 사상사에 관해 굉장히 많은 것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로크와 루소의 정치철학을 단순한 인간해방의 담론으로 이해하는 철학과 학부생의 편협한 이해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BeGray 2019.04.26 16:40 신고 Modify/Delete

      18세기 유럽 사상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국에서 유통되는 논의들이 얼마나 과거의 것들인지를 절감하게 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ㅠㅠ; 그래도 정확히 이 글을 쓴 이유 중 하나에 부합하는 코멘트를 읽게 되어 무척 기쁘고 반갑습니다 ㅎㅎ

  3. 익명 2019.04.30 10:33 Modify/Delete Reply

    요즘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을 읽으면서 든 의문이 있어서, 질문 하나를 올리고자 하는데 괜찮으실런지요.

    18세기 사상사에 관한 광범위한 오해 중의 하나가, 로크를 천부인권설을 비롯한 인권 개념과 인간의 존엄•개인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가치의 아버지로 놓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그것이 제가 주인장님의 주장을 오독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은). 그리고 실제로는 로크의 인권 사상이 18세기 이후로는 거의 망각되어 있다가, 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것도요.

    하지만 브뤼메르 18일을 읽다 보면, 1848년 혁명의 결과로 성립된 헌법 조문이 어느 정도는 인권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존엄을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로 놓는 뉘앙스로 말하는 문장을 찾아볼 수도 있고요. 어쨌든간에, 인권 개념이란 것 자체가 18세기 이후로는 완전하게 망각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 듯 합니다.

    만약에 이런 개념들이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논의되었을 뿐이라면, 그 시절의 시민들은 어떤 가치를 믿었던 건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집니다. 제국주의였을까요? 그래서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와 같은 개념들은, 단지 베트남전 시기에 히피들이 세계평화를 외치던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걸까요? 아니면 단지 주인장님이 말하고자 하신 것은, 인권과 같은 개념들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단지 로크를 그 근본으로 놓는 것만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전통이란 것인가요?

    질문이 좀 두서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이렇게 묻습니다.

    • BeGray 2019.05.05 20:08 신고 Modify/Delete

      사실 19세기 자연권의 역사는 몇 가지 통설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으로 갱신될 지점이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제가 18세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습니다. + 저의 이야기는 로크의 인권사상이 18세기 이후로 망각되어 있었다...기보다는, 1680년의 로크가 자연법/자연권에서부터 출발해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한 정부혁명론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1690년대 이후의 로크에게서는 물론이고, 1680년에 쓰여졌고 1688년 경에 출간된 그 <통치론>에서조차도 오늘날에 통용되는 바와 같은 인권론을 말하고자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질문하게 될 지점은 (그의 지적 탁월함과 별개로, 객관적으로 충실한 관찰자로서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종종 의심스러운) 마르크스가 1848년 현법에서 읽어낸 '인간의 권리'가 과연 20세기 중반 이후에 이야기되는 "인권"과 같냐는 것입니다. 18세기 중후반부터 세기말-혁명기까지 줄기차게 언급되는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라는 것이 즉각적으로 20세기 인권 개념과 동일시 되기 어려운 것처럼, 비슷하거나 심지어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도 실제로 그것들이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주의깊은 검토가 필요하니까요. 일단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인지는 불분명하지만) Wikisource에서 나오는 1848 프랑스 헌법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인권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시민(citizen)의 권리,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시민의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https://en.wikisource.org/wiki/French_Constitution_of_1848). 물론 여기서의 영어번역이 불완전할 가능성을 당연히 고려해야겠지만, 20세기 인권적 의미에서의 존엄성(dignity)이란 용어도 사용되고 있지 않고요. 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마르크스가 지적한 내용이 과연 20세기 인권선언 이래의 인권적 가치가 19세기 프랑스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좀 회의적이 됩니다. 당연하지만 개인의 자유 자체는 꽤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왔는데, 그때의 개인이, 그리고 "자유"개념 자체가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고 쓰여졌는지도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질문에 답변하기는 좀 더 어려운데요, 역시 나라마다 또 시기마다 좀 다르겠지만, 대체로는 국가/공화국을 건전하게 하는 도덕, 애국심, 가족, 기독교적 덕성 등등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강력한 정치적·도덕적 언어였던 것 같습니다(사실 저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인권"보다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와 같은 개념"들은, 일단 그게 2차 대전 이후와 같은 형태로 존재했는지부터 의심스럽긴 하지만, 있다고 해도 훨씬 마이너한 집단 내에서 통용된 게 아닐까 싶네요. 그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해도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도덕적 언어들은 이미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

      두 답변 모두에서 저의 요점은 지금 우리가, 좀 더 정확하게는 2000년대 이후의 여러 한국사람들이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의미의 인권 개념은 그 이전 대부분의 시공간에서 결코 자명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의 미래도 그러한 자명함을 담보하고 있지 않고요.

      제가 익명 님께서 질문하신 바에 적절한 답을 드렸기를 바랍니다 :)

    • 익명 2019.05.05 21:32 Modify/Delete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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