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쓰기(들): 『대한민국 독서사』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Intellectual History 2019. 1. 12. 18:38


원고지 129매에 달하는 아래의 글은 계간 『학산문학』 102호(2018년 겨울)에 실린 천정환·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및 오혜진 기획, 권보드래 등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에 대한 서평 원고를 옮긴 것이다(함께 첨부한 출판된 판본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 본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나는 단순히 상기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 평하기보다는 두 책 모두가 속해 있는 보다 커다란 맥락, 즉 "한국 문학사 쓰기"의 문제를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나마 다루고자 했다. 온라인의 보다 넓은 범위의 독자에게 공개하는 지금 나의 의도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세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


첫째, 문학사 쓰기 또한 다른 모든 학문적·비평적 글쓰기가 그러하듯 고유한 형식적 질문과 연계된 글쓰기 모델을 가지며, 문학사들 간의 투쟁과 갱신은 그러한 모델들 간의 투쟁이기도 하다. 이때 학문의 형식적 질문이란 대표적으로 글쓰기가 어떠한 대상을 다루는지(저자? 텍스트? 언어와 관념? 출판과 독서의 장?), 그 대상의 속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거대한 시대정신의 대표자? 독립적인 의미의 장? 시공간 속의 실천? 집단적 실체로서의 사회·문화?), 복수의 상이한 대상을 다룰 때 그것들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어떠한 서사적 흐름 내에 기입시키는지 등을 포함한다. 달리 말해 문학사 쓰기 자체를 하나의 학문적 글쓰기 장르로 규정하고 그 장르가 어떠한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지를 메타레벨에서 엄밀하게 질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특정한 문학사 쓰기가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또 불가능하게 하는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다. 나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두 권의 책이 담고 있는 연구가 어떠한 방법론적 맥락 하에 있는지를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드러내고자 했다.


둘째, 앞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천정환의 작업에 상당히 긴 분량을 할애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가 주도한 "문화론적 전회"가 한국문학사 쓰기의 모델을 일종의 '학문의 역사'에서 이해할 때 그 입장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평을 읽은 독자들 중 일부는 내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에 비해) 천정환의 작업에 좀 더 비판적으로 쓴 게 아니냐는 질문을 제기해준 바 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하자면 그의 학문적 기여를 존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것이 좀 더 엄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내게 원래 주어진 지면의 세 배를 넘게 차지하는 길이의 서평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글이 천정환과 문화론적 전회의 방법론적 함의를 지적으로 다루는 글로는 지나치게 개략적인 수준이며, 앞으로 보다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와 같은 외국(문)학 전공자가 한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해보게 되었다. 서평을 쓰기 위해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던 한국문학계의 여러 연구를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사항은 특히 외국문학연구에서 지난 수십 년, 반 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축적된 논의들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나는 『세계문학사의 전개』(지식산업사, 2002)를 포함한 조동일의 저작들이 아직도 세계문학을 가르치는 교과서처럼 사용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랐는데, 2000년대 초반에 출간된 그의 저작들은 적어도 영미문학을 가르치는 용도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내용이다--아무리 호의적으로 잡아도 1980년대 이후로는 그런 식의 문학사는 영문학계에서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처음에는 으레 외국문학전공자들이 그러하듯 한국문학 전공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읽는 것인가, 라고 황당해하던 마음은 곧 바뀌었다. 이 사실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자국에서 어떤 학문적 논의가 전개되고 있는지, 어떤 연구서들이 중요한지를 한국의 문학전공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 혹은 좀 더 중립적으로 말해 외국문학연구자들과 한국문학연구자들의 의사소통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국제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외국문학/문화 연구의 경우 곧바로 해외의 연구경향에 맞는 연구논문을 쓰거나 아니면 아예 해외 학술지에 투고하는 걸 제일로 치는 경향이 연구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중요한 학술연구서를 번역하거나 해외의 논의를 잘 정리하여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소개하는 건 가치없는 '지식소매업' 정도로 폄하되고, 중요한 연구서는 그냥 원어로 읽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가 과연 전체 한국 학술장에 (특히 인문사회분야에)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는지는 진지하게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20세기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분야들 간 방법론적 논의를 활발하게 교환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나는 20세기 후반 미국이 학계를 주도하게 된 것이 그곳에서야말로 '학제간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각각의 외국문학/문화 전공이 해외의 해당 학계에 참여하는 것만을 가치있는 기여로 생각할 때, 이는 정작 한국 내에서는 연구자들 간 지적인 교류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며 결과적으로 한국 내의 학문적 발전속도를 저해한다. 가령 어떤 중요한 영문학 연구서를 번역/소개하는 대신 "알아서 원서로 읽으면 되지"라고 말하고 치워버리는 태도는, 해당 언어를 어디까지나 외국어로서 습득했으며 더불어 그 분야를 전공하지조차 않은 다른 연구자들의 학문적 접근성을 현저히 하락시킨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이질적인 연구자들 간의 지적인 교류를 차단시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오히려 해로운 태도다.


특히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밟고 있는 외국문학 전공 연구자로서, 나는 보다 거대한 해외학술장을 지향하는 게 기본으로 자리잡은 오늘날의 외국문학/문화가 다음의 두 가지를 중요한 학문적 기여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해외의 중요한 연구문헌/동향을 가능한 높은 수준으로 공들여 정리하여 번역·소개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자면 영국 최고의 역사학술지 중 하나인 The Historical Journal의 경우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매우 빡빡한 리뷰 논문이 정기적으로 게재되는데, 이것이 방대한 크기의 역사학계에서 서로의 연구를 일일이 훑어보기 힘든 연구자들 간의 교류와 연결을 촉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건 분명하다. 영어권 내에서도 이렇게 정보를 집합하고 거리를 단축시키는 논문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데, 외국어권 연구자와 한국어권 연구자들 사이의 거리가 그 이상으로 멀다는 점을 고려하면 외국어 문헌 연구를 정리하여 한국어로 소개하는 작업이 보다 의식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음으로, 특히 20세기 이래 한국의 연구에서 외국어권 연구자와 한국 연구자의 지적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연구분야를 확보하는 일이다. 여전히 지나치게 일국적 관점에서 이해되고는 하지만, 현대 한국은 절대로 한국 내에서만의 변화로 설명될 수 없다(이는 여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산물들이 외국 자체의 맥락에서는 어떠한 것들이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변천을 추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 과정은 다시 서로 다른 분야에서 훈련받은 연구자들 간의 지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기존의 한국 연구분야를 강화시킨다는 측면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한국에 돌아오는 순간 해당 외국어학계에서 독창적인 연구를 하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외국문학/문화 연구자들이 자신만의 연구분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모쪼록 상기한 나의 의도가 오해를 낳는 대신 여러 생산적인 논의를 이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서지사항 및 출판된 서평 pdf는 다음과 같다.


이우창,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쓰기(들): 『대한민국 독서사』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학산문학』 102(2018): 292-317.

이우창_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쓰기(들)[서평](2019).pdf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쓰기(들): 『대한민국 독서사』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1)


천정환·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서해문집, 2018년 10월.

오혜진 기획, 권보드래 등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년 8월.


본 서평은 2000년대부터 추구되어 온 한국문학사 다시 쓰기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이하 『독서사』)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이하 『문부문』)을 읽고자 한다. 처음 두 절에서는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문학사의 문화론적 전회를 이끌어온 천정환의 궤적과 『독서사』를 다루고, 세 번째 절에서는 페미니스트적 시각에서 한국문학사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문부문』을 다룬다. 마지막 절에서는 한국의 독자들이 참고해볼 만한 비교대상으로 특히 18세기 소설사에 중점을 둔 영문학에서의 문학사 쓰기를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문학사 쓰기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문학사를 구축하는 것 이상으로 방대한 독서와 이론적 성찰이 요구되며, 한국문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한국문학사 쓰기에 대해 제대로 된 논평을 제공하기란 솔직히 말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논지를 전개하기 전에 이 글이 외부인의 입장에서 매우 제한된 영역만을 그것도 도식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1. 한국현대문학사와 천정환의 문화론적 전회


『근대의 책 읽기: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푸른역사, 2003)부터 본 서평에서 다루는 『독서사』에 이르기까지 천정환은 일관되게 기존의 한국문학사 서술을 비판해왔다. 따라서 천정환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한국문학사가 어떤 식으로 서술되어 왔는지를 간략하게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국문학사 기술 그 자체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이 글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기에,2) 여기서는 2000년대 초반 널리 통용되었던 세 종의 한국(현대)문학사, 즉 최근 작고한 김윤식이 총론을 쓴 『한국현대문학사』(5판, 현대문학사, 2016; 초판은 1989),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4판, 지식산업사, 2002; 초판은 1982-86),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2판, 민음사, 2002; 초판은 1993)만을 다루도록 하자.3) 각각의 고유의 문제의식과 개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공유하는 문학사 쓰기의 기본원칙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첫째, 문학사의 핵심적인 두 축은 (서구 근대를 기준으로 하는) 근대와 민족·민중이다. 한국문학사는 한편으로는 한국문학이 서구 근대문학의 장르 양식에 도달해가는 근대화의 과정을, 다른 한편으로 한국문학이 시대정신의 구현자로서 한반도 민족·민중이 근대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수난과 진전을 표현하고 이끄는 궤적을 다룬다.4) 이때 문학장르의 ‘발전’과 민족문명의 근대화과정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둘째, 문학사는 ‘중요한’ 작가와 작품에 집중한다. 이때 ‘중요함’을 판별하는 기준은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상호연결된 서사, 즉 작가·작품이 근대적 예술양식을 얼마나 성취하고 있느냐와 함께 민족·민중사를 얼마나 체현하는가에 토대를 둔다. 요컨대 문학장르의 차원에서든 민족사의 차원에서든 근대적 발전의 거대서사가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여기에 부합하는 문학텍스트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한국문학사 쓰기는 무척 선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후술하겠지만 자연스럽게도 셋 모두에서 여성문학·독자는 매우 희미하게만 자리한다).5)

천정환은 어떠한 논리에 의거하여 자신의 작업과 고전적인 문학사 쓰기를 구별짓는가? 이를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문을 통해 전개된 그의 방법론적 논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04년의 「새로운 문학연구와 글쓰기를 위한 시론」(『민족문학사연구』 26[2004]: 376-410)은 기존 문학연구의 ‘문학주의’에 대한 반비판과 함께 이후 자신의 연구가 지향할 방향과 방법론을 명확하게 선언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먼저 1990년대부터 다시금 ‘문학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인식 하에, 그는 기존의 문학론이 “대중·통속·상업” 대 “본격·고급·순수”의 이분법적 도식을 고수하며 보다 넓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접근을 거부할 뿐더러 문학의 ‘자율성·숭고성’을 핑계로 문학장을 구성하는 제도·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대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연구프로그램의 요점을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기존 민족문학론의 실패를 넘어서서 문학과 정치를 다시 연결시키고, 미시사·풍속사·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연구와 방법론적 성취를 수용하면서 문학연구를 문화론적 연구로 확장시키며, 영화를 포함한 새로운 대상을 문학연구의 범위로 끌어들이고, 문학의 생산자·매개자·제도·수용자 및 그것들의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문학의 소통과 (재)생산 구조를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천명된 입장은 이후에도 몇 차례 되풀이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두 가지 측면, 즉 신좌파적 문화정치와 문화연구·사회학적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다음의 두 인용문을 보자.


“문화는 탈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그 자율적 매개성을 강하게 갖게 된 정치적 상부구조의 다른 이름이며, 삶과 소통의 양식들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양극화’라 표현되는 경제적 계급분화는 더욱 교과서적으로, 극심하게 관철됨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는 계급의식과 계급대립의 격화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계급과 더불어 세대·젠더·지역 등의 결정소는 문화를 통해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실현한다. [...] 즉 문화는 경제와 정치가 조우하는 장이며, 상부구조가 토대를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치열한 문화적·정치적 전투가 벌어지는 장이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의 장은 그것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자본과 지배의 힘과 이에 대해 이탈·저항하는 힘의 대결로 소란스럽다. 그래서 오늘날 특히 정치는 대중문화의 일종이다”(「‘문화론적 연구’의 현실 인식과 전망」, 『상허학보』 19(2007): 42).


“‘문화론적 연구’란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 문화론의 시각을 도입한 새로운 연구 경향을 범칭한다. 이는 기존의 한국 문학사 연구의 풍토 자체를 갱신하고, 학제적 연구로써 문학연구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이는 멀리는 영미 계통의 문화론(cultural studies)의 영향을 입은 것이며, 동시에 세계 수준의 '문화적 전환'과도 유관한 흐름이다. [...] [이하는 『1960년을 묻다』 서문의 재인용]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로부터 언제나 기껍게 배우고 크게 영향 받았다”(「한국 현대문학과 문화론적 연구의 방법에 대하여」, 『문화어문학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5, 62-63).


첫 번째 인용문은 천정환이 말하는 문화정치가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식의 토대/상부구조 이원론에 기초하되, 토대에서의 정치경제적 갈등이 계급투쟁을 촉발하지 않는 이유를 문화의 장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귀속시킨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대중문화”로, 그곳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하여 정치경제적 갈등·억압·착취가 표출되지 않도록 봉쇄하는 “자본과 지배의 힘과 이에 대해 이탈·저항하는 힘의 대결”로 팽팽한 일종의 역장(力場, forcefield)으로 묘사된다. 해당 논문의 직접적인 후속작으로 쓰인 글에서 인용한 두 번째 단락은 천정환의 작업이 방법론적으로 영미 학술장의 문화연구(“문화론”)·문화연구적 사회과학 및 사회사·문화사 계열로 추정되는 역사학의 영향을 참고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6) 두 사항의 공존에서 우리는 20세기 후반 영미의 진보·좌파 학술장에서 전개된 신좌파·포스트이론적 논의,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된 문화연구·사회사·문화사 연구가 21세기의 첫 20년 간 한국문학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지적인 흐름으로까지 이어지는 구도를 읽어낼 수 있다.7)

상술한 문화정치론 및 (사회과학적) 문화연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분석·서사로 구현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천정환이 실제로 수행한 문화사 연구를 일부나마 살펴보아야 한다. 박사학위논문 『한국 근대 소설 독자와 소설 수용양상에 대한 연구』(서울대학교, 2002)을 개정출간한 『근대의 책 읽기』는 1920-30년대 한반도에서 소설 읽기를 중심으로 “근대 독자 형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재구성한다. 글쓰기·쓰는 사람들이 아닌 읽기·읽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이를 재구성하기 위해 출판시장·제도·장르·독서행위 및 체험 등의 요소를 분석에 도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앞서 설명된 기존의 한국문학연구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임은 분명하다. 여기서는 특히 집단적 주체의 개념에 초점을 두고 싶다. 기존의 문학사론이 시대정신과 같은 어떤 ‘전체’를 상정하고 작가·작품을 그 전체를 표현하고 이끄는 ‘개체’로 놓았다면, 천정환의 작업은 ‘전체를 표현하고 선도하는 개체’를 하나의 작은 구성요소 정도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집단적 주체를 상정하고 이를 재현·재구성하고자 한다.8) 넓은 의미에서 사회과학적인 전제에 입각한 방법론이 도입되는 것은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집단적 주체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사회·문화·대중과 같이 대규모의 집단적 주체 혹은 그 행위양식을 규정하는 ‘과학적’ 개념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집단적 주체의 개념 설정은 당연히 정치적 서사의 구성과도 맞닿아 있다. 2008년 11월 출간된 『대중지성의 시대: 새로운 지식문화사를 위하여』(푸른역사)를 보자. 그해 여름 미국산소고기수입·한미FTA반대 촛불시위에 대규모 인파가 몰리면서 진보진영에서 ‘집단지성’이란 이름으로 (보수정권을 비판하는) 대중에게 높은 정치적·지적 역량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바로 와닿지만, 『대중지성의 시대』는 피터 버크(Peter Burke)의 지식사회사 모델을 참고하면서 특히 20세기 초반 한반도에서의 ‘근대적 대중지성의 형성’을 그려내고자 했다. 즉 집단주체로서의 독서대중은 이제 대중지성, 스스로 앎을 생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행위에 나서는 집단주체로 나타난다. 이후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마음산책, 2014)에서 “대중성의 내포와 대중지성의 상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잡지 문화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는 대목은 그의 독서·문화 연구가 대중지성과 집단주체의 연구이기도 함을 보여준다(17). 우리는 그런 점에서 천정환의 문화론적 전회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과학계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민중’을 학문적으로 개념화하기 위해 시도한 다양한 노력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2. 『대한민국 독서사』: 새로운 주제, 익숙한 서사?


출판시장의 베스트셀러를 중심으로 해방기부터 2000년대까지의 한국 “독서문화사”를 쓰고자 하는 『독서사』는 문화론적 연구프로그램의 연장선에 있다. 책의 서설에서 저자는 우선 “독서문화”를 “책의 선택과 구입, 독서 과정과 독서 후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 이르는 모든 일은, 개인이 속한 당대의 이런저런 문화적 정황에 의해 주어지는 집합적 행위”와 인식이라 규정한 뒤(14)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지식문화와 맺는 관계”를 보고자 한다고 말한다(16-17).9) 이후 본격적으로 방법론을 설명하는 17-28쪽의 서술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베스트셀러 문화를 통해 독서(대중)문화를 살필 때, 이는 정치와 경제의 두 층위로 나뉜다. 정치는 다시 국가와 민중의 행위로 구별되는데, 국가는 한편으로 “관변 독서운동”을 통해 계몽·교양운동을 주도하며 다른 한편으로 검열을 통해 지배권력을 행사한다. 그 맞은편의 민중적 문화에는 다시 운동·저항적 성격과 “지적 격차의 문화” 혹은 “학력과 학벌을 향한 경쟁”의 욕망이 공존한다(19). 경제의 층위에는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대규모 소비로 나타나는 “‘소비자-군중’으로서 대중”과 그걸 조직하는 “출판자본주의”로 구성된 시장의 세계(24), 그리고 종종 자본의 설계를 벗어나는 “통제 불가능한 존재인 ‘대중 현상’”이 공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27). 진보적 문화정치이론에 익숙한 독자라면 지금의 서술을 보다 간결하게 도식화된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자본은 대중(또는 민중·시민사회)를 지배하려는 힘이며, 시민사회는 저항과 욕망의 주체이자 우연성(contingency)을 품은 원천이다.10)

물론 직접 『독서사』의 본문을 읽어보면 이러한 구상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게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처음 네 장은 1945년부터 50년대 말까지를 각각 해방·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기, 4·19혁명의 네 시대로 나누며, 다음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가 각 두 장씩, 60-80년대의 자기계발·처세서가 한 꼭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980년대와 90년대가 각 세 장씩, 마지막으로 IMF이후의 2000년대가 두 장을 차지한다. 각 장은 기본적으로는 해당 시기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대략적으로 소개한 뒤 당대의 베스트셀러·인기도서장르 및 관련된 일화를 설명하고 가끔 독자층과 제도에 대해 소개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사상계』에 대한 설명에서 암시되듯 특히 1960년대까지 군부독재자들과 비판자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이 맞닿아 있었다는 인식이나, 무협지를 포함한 장르문학, 상업적으로 인기를 누렸던 베스트셀러를 다루는 대목 등은 흥미롭지만, 어떤 책들이 많이 읽혔다는 내용을 제외하면 독자층 또는 독서문화에 대한 언급은 실제로는 비중이 낮은 편이다. 실제 텍스트가 어떻게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졌냐는 물론, 그것이 수용매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서술도 거의 없다. 해외 베스트셀러는 계속 언급되지만 실제로 한국 독서문화의 변화가 해외 출판시장·독서문화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도 특히 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번역된 텍스트를 통해 일본·서구문화와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해온 독자에겐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독서사』는 저자들이 밝히듯 『한겨레』에 정기적으로 연재한 내용을 기초로 만들어진 책이며, 공정하게 말하자면 198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문화사는 학계 전반적으로 이제야 한창 연구가 시작되고 있는 영역으로 저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논의가 충분히 축적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닌 대중적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쉽고 재미있게 쓰인 책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독서사』는 분명 자신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다.

본 서평에서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싶은 문제는 『독서사』 전체 서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서사에 있다. 『독서사』는 “한국 현대 독서문화를 “첫째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재구성기, 둘째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성장기, 셋째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의 성숙기, 그리고 현재 2000년대 이후의 전환기”라는 네 단계 도식으로 정리하고 “거시적 인구 변동과 경제성장, 근대화·자유화 같은 요인이 앞의 두 단계를, 그리고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세계화·민주화 같은 요인이 뒤의 두 단계를 규정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될 수 있다. 분단정국 이후 반공과 검열을 무기로 삼은 이승만 정권은 부패했고, 4·19혁명은 이후엔 개발독재·민족주의·산업화의 박정희 군부독재가 득세했으며, 1970년대부터 저항이 나타나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주화 이후 1990년대는 과도기이자 개인주의가 성장하고, IMF 이후 2000년대는 위기의식 하에 성공지상주의와 가족주의가 공존하는 세계가 되었다. 즉 『독서사』는 다수의 독자들에게 이미 너무나도 친숙한 오래된 이야기, 분단-독재-산업화-민주화-IMF의 ‘정치경제적’ 역사를 되풀이한다. 물론 익숙한 거대서사가 나름의 효용을 갖는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내가 의문을 품는 지점은 이것이 실제로 현대 한국 ‘독서문화의 역사’인지, 아니면 기존 거대서사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 독서문화에 적용한, 다시 말해 독서문화의 역사를 기존 거대서사에 종속시킨 결과물인지에 있다. 여기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나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독서사』의 주 서사는 (아마 저자들이 의식하는 바 이상으로) 민족주의·민중주의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른 측면의 내러티브는 에피소드로 남거나 민중주의적 저항의 서사에 보조적인 위치만을 차지한다.11) 가령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차원은 『독서사』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데, 이것이 단지 분량배분의 문제인지 아니면 민중주의적 거대서사에 젠더가 제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인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둘째, 『독서사』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독서문화사 고유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때때로의 일회적인 언급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참고하고 있지는 않다.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어떤 매체를 거쳐 어떻게 해석되었고, 그것이 다시 출판시장 혹은 독서와 결부된 공론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 과정에 어떤 행위자들이 어떻게 참여했는지 등이 다루어지지 않을 때 독서문화가 하나의 자율성을 가진 영역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천정환의 문화론적 연구기획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질의를 던져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방법론의 층위에서 볼 때, ‘문학연구의 사회과학화’로서의 문화론적 전회는 텍스트·문화적 실천을 둘러싼 다양한 물질적·제도적 맥락을 환기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는 텍스트를 담론적·언어적 실천으로 읽어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천정환의 문화론적 연구 프로그램은, 설령 『근대의 책 읽기』처럼 사회집단의 분화를 추적하는 경우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집단적 주체가 공유하는 물질적·제도적 특성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추출하는 작업이다. 이는 문화론적 연구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는 텍스트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층위, 즉 특수한 시공간 속의 특수한 개별적 실천으로서의 텍스트와 언어를 읽고 이해하는 작업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12) 물질적·제도적 특성을 집단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은 언어적 행위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필요한 맥락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보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어도 그러한 연구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언어적 맥락과 텍스트의 의미를 다루지 않는 한 하나의 고유한 연구영역으로서 담론의 역사·지성사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3) 당연하지만 나는 여기서 고전적인 형태의 텍스트주의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며, 단지 텍스트를 담론적으로 맥락화하는 작업이 텍스트를 둘러싼 물질적 조건을 재구성하는 작업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문화론적 기획이 과연 과거의 문학사에서 채택된 거대서사인 민족주의·민중주의적 발전사의 내러티브를 유효하게 비판·재구축하는 데 성공했는가를 물을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 과거의 문학사가 민족적 거대서사와 개별 작가·작품을 곧바로 연결하는 식이었다면, 천정환의 작업은 개별 작가·작품을 집단적 주체로서의 대중독자로 바꾸었을 뿐 실제로는 과거의 거대서사를 그대로 되풀이한다는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머리말에서 선언된 과거 역사기술과의 거리두기는 적어도 『독서사』까지의 작업에서는 아직 충분히 실현된 것 같지는 않다. 과거의 거대서사와 구별되는 새로운 문학사·문화사·지성사를 쓰기 위해서는 고유한 연구영역으로서 담론적·지식적 실천의 역사가 먼저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서사의 문제가 방법론의 문제와 별개가 아님은 분명하다.



3.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어떻게 한국문학사를 페미니스트적으로 재구성할 것인가?


『독서사』에서 “위기 이후의 한국문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위상은 낮아져왔고 그 제도와 이념도 크게 바뀌거나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320). 그 “새로운 문학”을 구성하는 흐름으로 호명되는 것 중 하나가 “독자·작가·비평가 모든 주체 영역에서 [...] 달라지고 있”는 “젠더 구조”다(321). 『문부문』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는 신간 중 하나다. 책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이란 제목에서부터 스스로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파괴의 대상은 “주류 문학사의 남성 중심적 질서가 규정한 ‘문학(성)’[...] 한국문학(사)에서 유일하게 문학적 시민권이 부여된 주체인 이성애자 남성, 그의 관점에 동일시해야만 [...] 겨우 접속할 수 있었던 그 지긋지긋한” 문학이다(16). 본 서평의 맥락에서 보면 1절 서두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문학사, 즉 민족과 근대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간주되는 (남성)작가·작품들의 문학사가 『문부문』이 겨냥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학(사)’을 부수는 ‘문학들’이란 무엇인가?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근대문학, 신여성, 사회주의, 해방, ‘위안부’, 교양, 전쟁, 남성성, 진보, 독재, 민주화 등 그간 학계에서 각기 다른 시기와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돼 온 다양한 연구”다(10). 이처럼 무척 상이하고 하나로 묶이기 힘든 연구들에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성정치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사)에서 관철돼 온 주류 질서를 상대화”한다는 것이다(10). 전통적인 문학사가 ‘문학’이란 이름을 부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다양한 영역들이 이제 자신들을 포함하지 않는 문학(사)연구는 온전한 문학(사)연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부문』과 페미니스트 문학연구는 문화론적 전회와 함께 한국문학사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도전이라 불릴 만하다.

『문부문』은 시대 구분에 따른 3부 구성을 취한다. 1부 다섯 편의 논문은, 비록 이혜령의 글이 실제로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작업들을 바탕으로 하지만, 구한말부터 20세기 중반 해방기까지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대중적인 인기에서나 문학사에서의 영향에서나 주목할 만한 신소설이 모두 여성주인공을 내세웠고 여성의 생애를 서사의 초점으로” 한다는 지적으로 시작하는 권보드래의 글은 신소설에서 여성주인공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육체, 신분, 가정 등의 키워드를 통해 분석한다(21). 심진경의 글은 스캔들·소문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1920-30년대 1세대 여성작가들이 남성작가들의 ‘모델소설’ 쓰기에 의해 어떻게 ‘타락한 여성’의 전형으로 그려지는지, 그리고 2세대 여성작가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어떻게 가정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성을 수행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장영은의 글은 1930-40년대 근대여성지식인의 자기서사 쓰기가 당시의 여성성·성적 규범 사이에서 어떻게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행위였는지를 추적한다. 심진경과 장영은의 글은 1940년대의 여성지식인들이 정치적 격동기를 살아남고 여성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어떠한 서사적 전략을 채택하는지를 살펴보는 류진희의 글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맥락과 성적 규범 사이에서 행위로서의 글쓰기가 어떠한 전략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서로 교차시켜 가며 깊이 읽을 만하다. 이혜령은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 텍스트를 ‘위안부’의 ‘커밍아웃’이라는 관점에서 읽고자 하는데, 이러한 커밍아웃 행위에서 피해자가 가족·민족·우정·국가 등과 맺는 관계가 계속 달라진다는 점은 그것이 지난 수십 년 간 한국사회에서 여성 발화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덕적 담론의 유형이 변해왔음을 함축하기에 흥미롭다.

 네 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2부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를 주 무대로 한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남한은 젠더 교란이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시공간이었다”는 주목할 만한 시대인식에서 출발하는 허윤의 글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남성성을 재현”하는 여성국극단과 그 반대편에서 더 이상 규범적 남성성을 수행하지 못하는 남성들을 그리는 염상섭·손창섭의 소설들을 함께 배치하면서 한국의 남성상 또한 견고하고 단일한 무언가가 아니었음을 드러낸다(158). 마찬가지로 남성성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강지연·조서연의 글과 함께 허윤의 작업은 『문부문』의 “페미니스트 시각”이 결코 ‘여성에 대해 쓰는 여성들의 연구’가 아니라는 (관련 연구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할)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의 대표적인 작가 김승옥과 「무진기행」을 꼼꼼히 읽는 강지윤의 글은 한 명의 작가, 하나의 작품에 초점을 맞춘다는 데서 『문부문』을 통틀어 유일하게 ‘정통적인’ 문학연구에 가까운데―아마 그것이 그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는 대중적인 감상이 종종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일 텐데―소설 속 남성주체의 자기인식이 여성에 대한 인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한계가 어디인지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1960년대 ‘문학소녀’ 개념에 대한 정미지의 분석은 한편으로는 (여성)교양과 문학소녀를 둘러싼 당시의 담론들이 어떻게 여성을 성적 규범에 맞춰 주체화하고자 하는지를 살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규범화된 성역할에서 이탈하려는 여성들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기호이기도 하다”고(223) 주장하면서 젠더 이데올로기와 규범적 언어에 잠재한 “순응 혹은 이탈”의 미묘한 계기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김미정은 1960-70년대 한국 문예공론장에서의 루이제 린저 수용을 재구성하면서 루이제 린저의 텍스트가 한국 공론장의 언어와 규범을 어떻게 요동시켰으며, 요동하는 공론장 바깥에 어떠한 루이제 린저(읽기)가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론장에서 온전히 발화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과 ‘여성(시민)교양’의 문제를 어떻게 환기했는지를 보여준다.

3부 네 편의 글은 (역시 조서연의 글이 1950년대 후반의 영상텍스트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를 무대로 한다.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 이후의 상이군인·참전자에 대한 연극적·영화적 재현에서 남성의 성적(무)능력 및 남성인물과 ‘정상적 남성성’의 간극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 그것을 다시 안정화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분석하는 조서연의 글은 2부 허윤의 글과 함께 ‘정상적 남성’의 신화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성(들)이 한국현대사에서 계속 등장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진경의 글에서 1970년대 문학·대중문화 텍스트에서 성매매/“성노동” 및 이를 수행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재현되고 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여러 양태들은 섹슈얼리티의 배치가 사회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상할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나타난다. 김은하의 글은 민주화와 운동의 쇠락 이후 1990년대 ‘여성후일담’ 문학을 검토하면서 “1990년대 여성작가들은 후일담을 혁명의 대의 속에서 침묵을 요구받았던 젠더 갈등을 노출하면서 여성 정체성에 눈뜨는 페미니스트 성장 서사로 전유”했으며, 이는 “여성이 정신적 망명을 준비하는 분리와 독립의 서사로, 1990년대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314-15). 『문부문』 전체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오혜진의 글은 한편으로 우리 시대 문학비평계의 남성(적 문학)중심주의·여성혐오·안티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문학계를 강타한 페미니즘 논의를 점검하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여러 논쟁들과 맞물려 있는 (그래서 메타레벨에서의 역사적 분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우리 시대의 논쟁을 구성하는) 이 글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지만, 재작년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에 이어 필자가 이미 젠더적 인식에서 문단보다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는 독자들을 따라잡기 위한 한국문학의 분투를 요청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14)

『문부문』을 위와 같이 요약하면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연구자들이 보여주는 다양성에 있다. 이때 다양성은 단지 시대와 소재에서만이 아닌 연구모델과 접근법의 풍부함을 가리킨다. 고전적인 페미니스트 문학연구에서 주로 여성의 재현·억압양상을 검토하고 여성(작가)의 목소리·글쓰기를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여러 분야의 연구사를 보면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특정한 시공간을 처음으로 다루기 시작할 때 이러한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문부문』은 한국의 페미니스트 문학·문화 연구자들이 무척이나 다양한 연구대상을 한층 더 정교해진 연구모델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다양한 남성성들의 산포와 그것들이 (역시나 단일하지 않을) 규범적 남성성들과의 긴장을 다룰 때, 아니면 일견 매우 전통적인 여성다움을 반복하는 듯 보이거나 심지어 억압적이기까지 한 언어가 실제로는 규범과 상황 속에서 가능한 돌파구를 찾아나가는 전략적 실천임을 보여줄 때, (특히 연구자 정체성을 지닌) 독자들은 이것이 얼마나 깊은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고도화된 접근법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문부문』에서 다양한 사례연구를 가볍고 재미있게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내 생각에 이 책을 보다 가치 있게 읽는 방법은 각각의 연구가 채택한 방법론적 전제, 연구 서사, 글쓰기 전략 자체를 때로는 비판적으로까지 꼼꼼히 뜯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보적 연구자로 불리는 사람이 여성주의 연구자들의 비전문성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노출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책이 좋은 해독제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의문 또는 아쉬운 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아쉬운 점은, 일부 논문에서 상정되는 서구 근대문학사에 대한 연구가 너무나 과거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지 예를 꼽아보자면 권보드래의 글에서 18세기 영국 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과 당시의 가정소설(domestic fiction)에 대한 평가로 아르놀트 하우저의 책을 인용하는데, 하우저의 책이 가진 의의와 별개로 그의 영국소설 이해가 현대의 18세기 영소설 전공자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는 않다. 직접 언급되는 참고문헌이 아니라고 해도, 권보드래나 심진경 등의 논의에서 특히 서구 근대소설과 여성성의 관계에 대한 (예컨대 낸시 암스트롱[Nancy Armstrong]의 것처럼 영문학계에서 1980년대 중후반에 제기되었고 내 생각에는 이제는 그다지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다고 보기는 힘든) 과감한 주장이 근대소설 일반에 대한 공리처럼 받아들여지는 대목은 조금 당황스럽다. 다음 절에서 간략하게 다루겠지만, 소설사·문학사에 관해 서구 학술장에서 30여년 혹은 반세기 전에 통용되었던 논의들이 마치 살아있는 화석처럼 무비판적으로 남아있는 상황이 곧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는 나와 같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지만 말이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문부문』의 부제이기도 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를 향한다. 앞서의 요약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책에 수록된 연구들은 기존의 한국문학사가 단지 여성작가에 대한 자리를 충분히 내주지 않아서 문제라는 수준을 넘어 방법의 차원에서부터 새로운 연구들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협소한 것이 되었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15) 간단히 말해 기존의 문학사 쓰기로부터 오늘날에도 유효한 한국문학사를 끌어내기란 개구리가 황소를 삼키려는 시도만큼이나 무리수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부문』은 역사학적 비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적 길이를 갖는 과거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서사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 쓰기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아마도 여성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되리라 상상되는) ‘완전무결한’ ‘페미니즘 문학’”이 아닌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형성하고 향유해 온 공동의 자산”으로서의 한국문학사가 요청된다면(9-10), 『문부문』 또는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 문학연구는 어떤 형태의 문학사 쓰기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나는 이것이 『문부문』이 다음 단계를 위해 열어놓은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대상을 다루는 페미니스트적 문학연구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가 탐색될 수 있을 것이다.



4. 덧붙이는 글: 영문학사 쓰기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새로운 한국문학사 쓰기를 주제로 한 이번 서평은 영문학사 쓰기, 특히 18세기 영국소설사 쓰기의 흐름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에서다. 첫째, 기존에 한국의 독자·연구자에게 소개된 연구들 이후 영국문학사 쓰기에 어떤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물론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를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으나, 참고할 수 있는 모델 중 하나로는 효용이 있을 것이다. 둘째, 본 서평의 곳곳에서 암시되었듯 한국현대문학사 쓰기의 역사는 좋든 싫든 영문학사 쓰기, 특히 ‘근대소설의 발생’ 테제를 중심으로 하는 18세기 영국소설사 쓰기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한국현대문학사 쓰기를 더욱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영문학사 쓰기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18세기 영소설 연구의 시발점이자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저술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언 와트(Ian Watt)의 『소설의 발생』(강유나·고경하 역, 강, 2009; 원저는 The Rise of the Novel: Studies in Defoe, Richardson, and Fielding, 1957)이다. 근대소설(novel)의 핵심을 “형식적 사실주의”(formal realism)으로 규정짓고 이를 경험주의적 인식론 및 중간계급의 경제적 개인의 대두와 같은 (근대적) 개인주의의 발흥과, 그리고 독서공중의 탄생 등과 연결시킨 와트의 논의는 비엔나 학파의 철학과 문학사회학적 논의까지 받아들이며 당시 학문의 최전선에 위치한 무척 정교한 작업이었고, 이후 반세기에 걸쳐 18세기 소설사 연구방향을 와트의 주장에 대한 비판과 수정으로 만들어놓았다.16) 1980년대에 이르러 와트의 테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하나는 대표적으로 마이클 매키언(Michael McKeon)의 저작 『영국소설의 기원들, 1600-1740』(The Origins of the English Novel, 1600-1740, 1987)에서처럼 근대소설과 과거의 여러 서사 장르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연속성을 밝혀내는 작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인 스펜서(Jane Spencer)의 『여성 소설가의 대두: 아프라 벤에서 제인 오스틴까지』(The Rise of the Woman Novelist: From Aphra Behn to Jane Austen, 1986)처럼 18세기 영국문학장에서 여성 소설가·독자층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흐름이었다. 여기에 뒤늦게 영어로 번역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공론장의 구조변동』(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Untersuchungen zu einer Kategorie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1962; 영역은 1989)에서처럼 소설 유통과 공론장 형성의 관계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접근이나, 1960년대 이래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수행해온 문화연구·문화사회학적 연구처럼 출판시장과 매체, 독자층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는 연구경향, 1990년대부터의 문화사적 문학연구까지 더해지면서 18세기 영국소설사 연구는 무척 다양한 측면에서 풍성한 결과를 축적하게 된다.17) 우리는 이제 근대소설이 더 이상 근대의 유일하게 지배적인 서사 장르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반세기 전의 와트처럼, 혹은 30년 전 와트를 기묘하게 뒤틀었던 낸시 암스트롱의 테제처럼 근대소설과 “근대적 개인”(과연 그런 게 존재하기는 했는가?), 기타 수많은 “근대적인” 무언가에 대해 쉽게 단정지어 말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을 거친 이후 2000년대의 18세기 영국문학사·소설사는 어떤 구성을 취하고 있을까? 여기서는 네 권의 텍스트로 한정지어 대략의 큰 구성만 보도록 하자. 먼저 2005년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영국문학사, 1660-1780』(The Cambridge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1660-1780)은 서론 및 결론을 제외하고 크게 5부 29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장은 서로 다른 연구자가 집필한 독립된 형태를 띤다. 1부는 “문학의 생산과 전파: 변화하는 청중과 새로 등장하는 매체”(Literary Production and Dissemination: Changing Audiences and Emerging Media)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출판·판매, 작가들의 사회적 세계,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 소설시장 등에 다루는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예 장르들: 적응과 개혁”(Literary Genres: Adaptation and Reformation)이란 부제를 단 2부는 희곡과 다양한 시 분야에서 이전 왕정복고기의 장르들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지성사와 문화를 다루는 3부는 역사·철학·종교 등 다른 지적인 영역과 문학이 어떻게 관계 맺었는가를, 4부는 사회제도적 변화와 문학의 관계를, 5부는 다시 문예장르의 변화로 돌아오되 고딕소설이나 자서전, 여행기와 같은 새로운 표현형식의 등장에 초점을 맞춘다(비평의 경우 같은 해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문학비평사 4권: 18세기』[The Cambridge History of Literary Criticism vol. 4: The Eighteenth-Century]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생산·유통·매체와 같은 사회적, 제도적, 물질적 측면을 앞에 배치하고 다음으로 문학 내외 여러 장르·형식들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다루는 기본적인 구성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2016년 출간된 『옥스퍼드 18세기 소설 핸드북』(The Oxford Handbook of the Eighteenth-Century Novel)에서는 이에 더하여 크게 네 가지 새로운 면모가 눈에 띈다. 첫째, 책 전체가 1770년을 기점으로 하는 두 파트, 즉 1660-1770년도와 1770-1832년도로 나뉜다. 둘째, 다양한 소설장르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주요 소설가들에 대한 내용이 독립된 장(章)으로 배치되었다. 셋째, 1770년대 이전을 다루는 1부에서 프랑스 소설처럼 유럽대륙의 다른 국가에서 생산된 텍스트가 번역되어 영국소설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넷째, 1770년대 이후를 다루는 2부에서는 소설 간의 위계설정이나 젠더화(‘남성적 소설’과 ‘여성적 소설’의 구별) 등 소설에 대한 담론이 따로 다루어진다. 아마도 최근 영어권 소설사 연구에서 가장 야심찬 기획은 전 세계 영어소설사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2010년부터 현재까지 총 11권이 나왔으며 현재도 출간 진행 중인 『옥스퍼드 영어소설사』(The Oxford History of the Novel in English) 시리즈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그중 18세기와 관련된 1권 『출판의 기원들에서부터 1750년까지의 영어산문소설』(Prose Fiction in English from the Origins of Print to 1750, 2017)과 2권 『잉글랜드와 브리튼의 산문소설, 1750-1820』(English and British Fiction, 1750-1820, 2015)만을 간략히 살펴보자. 크게 출판제도·시장·수용 등의 사회제도적 설명과 장르·형식의 변화와 상호작용, 주요 작가를 독립된 장으로 배치하는 구성은 따르면서도, 1권은 초기 근대의 보다 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중세·르네상스기의 여러 장르와 다른 유럽국가들의 문학이 번역수용되어 끼친 영향을 다루는 내용의 비중이 높다. 보다 짧은 기간을 대상으로 하는 2권은 다양한 소설 전통을 소개함과 동시에 당시의 정치적·문화적 맥락, (영국소설의 수출로 인한) 타국문화와의 상호작용, 새롭게 등장하는 소설형식 등에 초점을 맞춘다.

이상의 예들로부터 대략의 경향을 유추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18세기 영국소설사 쓰기는 상이한 관심사·접근법을 채택하는 여러 연구자들의 분업과 협업으로 수행되며, 그것은 크게 문학생산과 수용을 둘러싼 사회제도·매체의 연구, 여러 문학적 전통·장르·형식들의 연속·변화·상호작용을 추적하고 설명하는 연구, 영향력 있는 주요 저자·저작들에 대한 연구의 세 분야로 구성된다. 둘째, 시공간적인 시야가 확장되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적 전통·장르 간의 연결고리가 보다 긴 호흡에서 조망되고, 좀 더 중요하게는 번역 등을 통한 문학의 국제적인 수용·영향관계에 대한 논의들이 확장되는 추세다. 셋째, 문화적 맥락을 포함해 꼭 문학으로 수렴되지 않는 여러 지적 맥락·글쓰기 전통과 문학 장르 간의 상호작용이나, 문학 자체에 대한 메타적인 담론에 대한 연구도 문학사에 포함된다. 물론 각각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구성·서술되며 그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대략의 구성만으로 문학사 쓰기의 모델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소개가 문학사를 상상하고 쓰는 방식에 약간의 기여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 여러 비판적인 논평을 제공해 주신 김효민, 박정순 님께 감사드린다.

2) 한국현대문학사 기술에 대한 논의로는 유철상, 「현대 소설사 서술방법에 대한 반성과 모색」, 『한국근대문학연구』 21(2010): 33-55; 525-45; 장수익, 「한국 현대문학 연구 60년의 회고와 전망」, 『국어국문학』 161(2012): 91-134; 최병구, 「한국문학사 서술의 경과: 제도와 이념에의 결박과 성찰―현대문학사 서술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 56(2014): 9-40; 황호덕, 「김윤식 비평과 문학사론, 총체성과 가치중립성 사이」, 『현대문학의 연구』 57(2015): 91-130; 김건우, 「역사주의의 귀환: 한국현대문학 연구방법론 小考」, 『한국학 연구』 40(2016): 495-520 등을 참고할 수 있다.

3) 이보다 뒤에 나온 한국문학사 쓰기의 흥미로운 예로는 조남현의 『한국 현대 소설사』(문학과지성사, 2012-16)와 『한국문학잡지사상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를 꼽을 수 있다. 이 저작들은 다른 통사들보다 다양한 범위의 자료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지만, 기본적으로 문학텍스트의 요약을 나열하는 서술방식을 채택하기에 고유의 내러티브나 분석적 사유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4) 민중주의와 발전사의 문제에 대한 간략한 정리로는 나의 「헬조선 담론의 기원: 발전론적 서사와 역사의 주체 연구, 1987-2016」, 『사회와 철학』 32(2016): 107-58, 특히 2절을 보라.

5) 김윤식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문헌 중 일부로는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연구방법입문』(서울대학교출판부, 1997)에서 「방법으로서의 한국근대소설사: 민족어와 인공어의 변증법」(187-216) 및 「근대의 초극론에서 바라본 통일문학사론: 남북한 문학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김윤식, 『내가 살아온 현대문학사』(문학과지성사, 2009) 등을 참고할 수 있다. 권영민은 『한국 현대문학의 이해』(태학사, 2010)를 함께 참고할 수 있다. 조동일의 경우 『세계문학사의 전개: 그 양상의 총체적 서술을 위한 기본 설계』(지식산업사, 2002)와 함께 김건우, 「국학, 국문학, 국사학과 세계사적 보편성: 1970년대 비평의 한 기원」, 『한국현대문학연구』 37(2012); 서영채, 「소설과 문학사, 기원의 담론」, 『민족문학사연구』 53(2013): 255-85 등을 보라.

6) 여기서 20세기 역사학의 (사회)과학화라는 보다 큰 맥락을 상기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피터 버크, 『역사학과 사회이론』, 곽차섭 역, 문학과지성사, 1994; 조지 이거스, 『20세기 사학사』, 임상우·김기봉 역, 푸른역사, 1998; 에릭 더스텔러 외, 『20세기 프랑스 역사가들: 새로운 역사학의 탄생』, 김응종 외 역, 삼천리, 2016 등을 보라. 이를 좀 더 비판적으로 또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저작으로는 폴 벤느,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이상길·김현경 역, 새물결, 2004; 프랑수아 도스, 『조각난 역사: 아날학파의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부』, 김복래 역, 푸른역사, 1999 를 참고하라. 이 주제를 가장 심원한 수준에서 파고드는 뛰어난 분석으로는 J. G. A. Pocock, Barbarism and Religion, Vol. 1: The Enlightenments of Edward Gibbon, 1737-1764, Cambridge: Cambridge UP, 1999 에서 18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기술의 고대 대 근대 논쟁을 소개하는 137-239쪽을 볼 것.

7) 이러한 흐름이 한국사학계에 (보다 소극적인 형태로)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역사학연구소 편, 『한국민중사의 새로운 모색과 역사쓰기』, 선인, 2010;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 역사비평사, 2013 등을 참조하라.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1980년대 후반 신좌파·포스트이론의 수용에서부터 1990-2000년대 ‘수유/너머’ 연구소에 이르는 지적인 궤적을 추적해야겠지만 이는 본 서평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8) 이후 『자살론: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문학동네, 2013)에서 “특정한 시대의 사회문화·정치경제의 상황과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집합적 심성의 구조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대목도 이 연장선에 있다(36).

9) 『독서사』 서설의 내용이 천정환, 「한국 독서사 서술 방법론(1): 독서사의 주체와 베스트셀러 문화를 중심으로」, 『반교어문연구』 43(2016): 13-39 과 상당부분 겹친다는 점에서 이 부분을 그의 서술로 봐도 틀리지는 않겠다.

10) 대중·민중·시민사회를 이러한 세 가지 기능과 결부시키는 논리는 물론 사회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앤서니 엘리엇·브라이언 터너, 『사회론: 구조, 연대, 창조』, 김정환 역, 이학사, 2015 참조.

11) 이 책에서 자기계발-개인주의-성공추구적 독서의 계보가 중요한 서사로 제시되긴 하지만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에서 드러나듯 이러한 ‘속물’의 서사는 실제로는 민중주의 서사에서 파생된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12) 물론 이것이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한국 현대문학사의 해체와 재구성』(푸른역사, 2013)에서 볼 수 있듯 문화론적 전회에 공감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텍스트·언어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13) 마찬가지의 이유로 최근 한국에서 ‘지성사’·‘사상사’ 연구로 호명되는 저작들, 가령 노관범의 『기억의 역전: 전환기 조선 사상사의 새로운 이해』(소명출판, 2016)나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느티나무책방, 2017)은 지식인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라고 할 수는 있어도 언어와 사유, 담론의 연구라는 의미에서의 사상사·지성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나의 간략한 입장은 다음의 글, 특히 3절을 참고하라: 이우창, 「카를 마르크스 혹은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살아가기: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와 역사, 이론, 실천」, 『학산문학』 101(2018 가을): 325-45.


14)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85(2016 봄): 83-105. 이 글에 대한 나의 읽기는 http://begray.tistory.com/362 를 참고하라.

15) 한국문학사에 대한 여성주의적 논의의 예로는 다음의 저술들을 참고하라: 황도경, 「지워진 여성, 반쪽의 문학사 - 근대문학연구에 나타난 '여성'의 부재」, 『한국근대문학연구』 1.1(2000): 10-33; 이경하, 「“여성/문학/사”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5(2002): 231-61; 이상경, 『한국근대여성문학사론』, 소명출판, 2002; 박무영, 「『한국문학통사』와 "한국여성문학사": 여성문학사를 위하여」, 『고전문학연구』 28(2005): 79-115; 정영자, 『한국현대여성문학사』, 세종, 2010; 김양선,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장의 형성: 문학제도와 양식』, 소명출판, 2012; 김양선,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정전 만들기와 번역 -새로운 여성문학 선집 발간을 위한 시론」, 『비교한국학』 21.2(2013): 39-65; 이영아, 「‘여성혐오’의 문학문화사: 젠더적 관점의 한국 근대문학문화사 서술을 위하여」, 『인문과학연구논총』37.4(2016): 13-48.

16) 와트가 1930년대 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체류하는 동안 비엔나 학파의 철학과 씨름했으며 비록 출판본에서는 관련 언급이 삭제되었지만 이것이 『소설의 발생』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Ian Watt, "Serious Reflections on The Rise of the Novel", Novel: A Forum on Fiction 1.3(1968):205-18, 특히 205-06쪽 참조. 나는 근대소설의 탄생과 “근대적 개인”을 연결시키려는 여러 시도가 기본적으로 20세기 초반 비엔나 학파 및 영국의 ‘과학적’ 경험주의 철학에서 유래한 인간관을 충분한 검토 없이 “근대적 개인”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지에 의문이 있다. 그 외에도 하나 지적할 만한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에는 20세기 초중반 신비평의 한 원류 정도로 기억되는 I. A. 리처즈(Richards)가 본래 20세기 초반 케임브리지의 경험주의적 분석철학을 수학한 철학연구자였으며 그의 문학연구는 그러한 ‘과학적’ 철학연구에 기초한 프로그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Stephen Heath, "I. A. Richards, F. R. Leavis and Cambridge English", Cambridge Minds, ed. Richard Mason, Cambridge: Cambridge UP, 1994, 20-33 을 보라. 우리가 ‘전통적’ 문학연구라고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매우 특수한 철학적 흐름에 토대를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해 문학연구자들은 한번쯤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17) 와트의 테제가 비판적으로 수정되는 연구사에 대한 간략한 정리로는 Clifford Siskin, "The Rise of the 'Rise' of the Novel", The Oxford History of the Novel in English Vol. 2: English and British Fiction 1750-1820, ed. Peter Garside and Karen O'Brien, Oxford: Oxford UP, 2015, 615-29; Thomas Keymer, "Introduction", The Oxford History of the Novel in English Vol. 1: Prose Fiction from the Origins of Print to 1750, ed. Thomas Keymer, Oxford: Oxford UP, xvii-xxxi; Nicholas Hudson, "Formal Experimentation and Theories of Fiction", Keymer 329-46 등을 보라. 와트와 하버마스의 수용에 대해선 Brian Cowan, "Making Publics and Making Novels: Post-Habermasian Perspectives", The Oxford Handbook of the Eighteenth-Century Novel, ed. J. A. Downie, Oxford: Oxford UP, 55-70 를 참고. 레이먼드 윌리엄스 및 이후의 매체 연구에 관한 개략적인 안내로는 윤미선, 「19세기 영미 정기간행물 연구: 문헌 연구에서 담론과 매체 연구로」, 『안과밖』 42(2017): 188-212 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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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oddlerrr 2019.02.24 00:19 Modify/Delete Reply

    한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많은 부분 공감하고 또 반성하게 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요약해주신 영미문학사의 최근 흐름은 현재의 저에게 어떠한 이정표가 되어준 것 같은 느낌도 드네요. 감사합니다.

    • BeGray 2019.03.03 21:24 신고 Modify/Delete

      ㅎㅎ 영문학사는 어디까지나 영문학의 조건 하에서 쓰여졌을 뿐이니까 적절하게만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사실 저는 그러한 흐름과도 조금 다른 방향으로 공부하는 입장이거든요 ㅎㅎ). 공부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제가 감사합니다!

  2. skzl 2019.03.23 01:04 Modify/Delete Reply

    직업적인 일 때문에, 혹은 취미로 가끔씩 문학 관련 논문을 찾아볼 때가 많은데요.
    국문학을 깊게 공부한 적은 없지만. 리얼리즘과 관련된 논문이 지나치게 많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천정환 선생님의 글을 보니 '민중'이란 키워드에 집착하는 경향이 좀 있었나보네요.
    1960년대 바르트가 프랑스 지성사회에 던진 화두와 좀 비슷한 듯 한데..
    바르트의 시대도 이제 반세기가 지났네요.

    번역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깊게 공감합니다.
    국학에서는 김용옥 선생님이 노무현 정부 때 제안한 고전번역원이
    이제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듯 하더라구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번역되었고,
    이제 두 번째 번역 작업에 들어간 듯 하던데요.
    고전번역원의 집요하고,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번역작업이
    전학문 분야에서 시도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지인이 프랑스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는데, 레비스트로스가 은퇴 후 국립학술원 같은 곳에서
    백과사전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각분야 최고의 석학이 은퇴 후 말년에 백과사전 만드는 일을 하는데,
    저는 여기가 기초학문의 가장 기초라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으로 봤을 때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련 외국어를 충분히 알아야 하는 게 필수지만,
    학계 전체로 봤을 떄 모국어로 학문을 할 수 없다면. 그 만큼 학문/소비자 층이 줄어들기 때문에
    학문이 근간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국어로 학문을 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기 하니까요.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이 충분히 실력을 갖추지 못해 내부에서 붕괴 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저는 직업적인 문제로 철지난 노스럽 프라이와 이안 와트를 읽고 있는 처지이긴 하지만,
    영문학의 최신 연구는 많이 궁금하긴 하네요.
    제게 반드시 필요한 지식 정보들이 아니라 혼자 깊게 파고들진 못하겠고.
    실시간으로 번역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요
    공부가 직업이 아니라, 늘 최신 정보에 따라 붙어 다니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또 10년 정도 지나, 번역된 철지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괜히 좀 울적해지네요.

    여하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나는 게 많아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 BeGray 2019.04.26 16:44 신고 Modify/Delete

      답변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ㅠㅠ;

      말씀하신 모국어에로의 수용은 저도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제 다 됐다'고 섣불리 선언하는 대신 아직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확인하고 메꿔가는 게 특히 학계의 의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것저것 좀 더 많이 소개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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