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와 한국적 모델에 대한 단상

Comment 2020. 4. 4. 21:24

책 홍보기간 동안에는 다른 포스팅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사실 그럴 시간도 별로 없다ㅠㅠ), '코로나 사태' 한 가운데에 있는만큼 그에 대한 관찰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몇 가지 생각하고 있는 단상 중 며칠 전 어느 자리에서 대화로 나누었던 걸 짧게 적는다.


1.


이른바 '한국식 대응모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한국 언론들이 재인용하는) 여러 해외 언론에서는 한국모델을 '대량의 신속한 검사 + 확진자 동선 추적 및 공개 + 시민들의 "사회적" 거리두기 참여' 정도로 요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여기에 함의된 요점은 많은 경우 '중국식 권위주의 독재 모델이 아니라고 해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도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정도일텐데, 이 문제는 언젠가 다른 기회에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그 반대편에서는, 물론 훨씬 소수파의 목소리긴 하지만, '어차피 개인정보 멋대로 공개하는 거 한국이나 중국이나 별반 차이 없는거 아닌가'하는 냉소적인 평가도 있다. 이런 반응들이 모두 진실의 일부를 가리키고 있는 거겠지만, 나는 그러한 평가들에서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지점도 생각해보고 싶다--바로 '일상공간의 유지'라는 측면이다.


지금까지 COVID-19 사태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진 대응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을 것 같다.


A. 중국모델. 현재 사태가 심각하게 전개된 유럽 여러 나라/도시에서 어느 정도 채택하고 있는 '전면적 봉쇄' 방법.

B. 한국모델.

C. '집단면역' 모델. 스웨덴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지역감염을 이미 상정하고 적극적인 차단조치를 취하지 않되 중환자가 발생할 경우 개별대응.


일상공간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A와 C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우한이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서 볼 수 있듯, 전면봉쇄는 일상적 사회공간을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감염경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바이러스 자체가 소멸하는 시점까지 해당 상태를 유지하는--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버티는'--걸 목표로 한다. 집단면역모델은 일상을 가능한 평상시에 가깝게 유지한다. A 모델은 중국처럼 국가의 압도적인 무력행사로 해당 상태를 유지할 수 있거나, 이탈리아처럼 정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다수가 납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강력한 정치적/심리적 불만을 초래한다는 문제가 있다. C 모델은 감염자 및 사망자 수가 일정 이하로 유지되고 사람들의 정부신뢰가 지속되는 한에는 문제가 없지만, 몇몇 시뮬레이션에서 예측하듯 피해 정도가 사회의 물리적/심리적 한도를 넘어서게 될 때 아주 많은 타격을 입게 된다는, 다시 말해 불확실한 리스크에 전면적으로 노출된다는 약점이 있다.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B 모델의 핵심은 구획의 분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격적인 검사'와 확진자 동선추적&공개의 진정한 의의는 사회 내에서 경계선을, 즉 바이러스위험지대와 안전지대(라고 가정되는 영역) 사이의 분할선을 긋고, 후자, 다시 말해 일상이 유지될 수 있는 범위를 선명하게 표시하는 데 있다. 1) 대량검사와 동선추적을 통해 사회 내에 바이러스가 유통되는 영역을 식별하고 2) 확진자 동선공개를 통해 바이러스 유통가능성이 있는 경계선을 표시하며 3) 나머지 영역은 '대체적으로 안전하니 일상적인 생활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유지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게 B 모델의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이때 마스크는 3의 영역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핸 추가적인 장치의 역할을 수행한다). A 모델 혹은 그에 준하는 상태에 진입하려던 미국 및 유럽국가에서 빈번하게 관찰되는 생필품 사재기/매진 행위는 일상적 사회공간을 최대한 보존&공표하는 B 모델 하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필품 축적에 돌입하는 이유가 통상의 상업/사회적 삶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비롯한다면, B 모델은 경계선 안쪽에서는 통상의 삶이 (비록 상당한 타격을 입은 채라 하더라도) 유지된다는 판단이 있기에 그러한 행위양식이 출현할 요인이 거의 없다. A 모델이 장기화될 시에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대규모의 국가적 조치의 필요가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것도 B 모델의 차이점이다.


요컨대, 검사와 같은 의료적-행정적 조치와 개인의 기본권 제약이라는 측면만으로는 국가들의 상이한 대응방식 간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일상적 사회의 유지라는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유의미한 것은 아니겠지만, 코로나 사태가 어떤 변화를 초래했고 또 그에 대한 각국의 대응이 다시금 어떤 변화들을 가져올 것인지 희미하게나마 예측하기 위해서는 국가 대 개인, 권위주의 대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에 얽매여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 둘 보다 더 큰 수를 셀 필요가 있다.



2.


한국과 중국은 강력하고 효율적인 국가행정권력의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때때로 '동아시아적' 모델로 한데 묶이곤 한다. 두 국가의 중앙집권적 행정권력이 가진 유례없는 통치능력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나는 단순히 추상적인 정부형태나 개인의 권리에 기반해 가능한 많은 걸 설명하려는 정치이론모델은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낡고 도태된 사고방식이고 덧붙이고 싶다), 그것만으로는 양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유의미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


가장 명시적인 차이는 한국은, 적어도 현재의 한국 정권에서 시민사회의 집단적인 여론은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중국에서 여론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조작과 통제의 대상으로서 중요하다--예컨대 정부가 얼마나 모든 걸 잘 해왔고 중국인들은 피해자들이며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중국 바깥에 있다는 걸 주입하기 위해 들어가는 엄청난 노력을 보라). 두 나라 모두 국가의 목표를 위해 개개인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제약될 수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집단적 여론이 어느 정도 자율적인 요소로서 정부의 결정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의 여부, 그리고 통치집단이 그러한 여론을 두려워할 대상으로서 존중하느냐의 여부를 묻는다면 두 나라만큼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예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한국의 정권은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포퓰리스트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정권의 가장 중요한 기준점 중 하나는 지지율이다(물론 정권이 이러한 전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우 강력한 지지자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강한 행정력과 그러한 행정력을 의심하고 견제하는 강한 여론의 공존이야말로 지난 20년간 한국 정치모델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가 최소한 군사독재 시절부터 시작되어 민주당 계열 정권에서도 꾸준히 유지·발전되어 온 면모라면, 후자는 김대중 정권 이래 민원실, 행정의 '서비스'화, 그리고 (전국적인 인터넷망 구축 및 대규모 온라인 커뮤니티 형성에 힘입어 태어난) 집단적 악플·온라인마녀사냥 문화와 같은 상이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구성되었다. 한국의 국내행정력은 쉽게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지만, 그처럼 언제든지 시민 개개인의 삶을 장악할 수 있을만큼 강한 행정력이 온라인 제보와 대규모 악플을 통해 언제든 (종종 비효율을 낳을지라도) 스스로의 결정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도 역시 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집단적이고 공격적으로 작동하는 여론은 경우에 따라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을 파탄에 몰아넣거나 정당하고 합리적인 정책마저 비틀어버리는 일들이 있긴 하지만, 그 존재를 통해 국가행정이 보다 쉽게 개선되는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개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은 (심지어 같은 개인 간에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집단적인 권력으로서의 인민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면모이자, 민주주의를 그저 개인의 권리에 대한 논의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물론 상기한 사항들이 타당하다고 해서 한국적 모델의 일반적 우수성을 마음 편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강한 여론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소수자와 개인들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분위기에서 강한 여론은 언제든 강한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으며, 그때 국가권력은 모든 사회구성원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포기하고 여론의 폭력을 그저 방관하기 쉽다. 더불어 모두가 기꺼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정체화하는 사회는 종종 전체적으로 볼 때 비효율적인 경로를 채택하기도 쉽다.


코로나 사태라는 맥락을 좀 더 강조한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의 위기상황이 어느 정도의 시간적 길이를 가질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지 명확한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내 생각에 재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이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태가 어느 정도의 시간적 길이를 가질지, 그 기간 동안 한국 정부가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예측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고려가 없는 한 현재의 재정투자가 충분한지 부족한지에 대한 판단은 모래 위의 성 짓기와 다를 바가 없을 공산이 크다). 만약 여름에 거짓말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잦아든다면 충분한 정부투자에 기초해 현재의 대응방식을 두 달 간만 연장하면 될 일이겠지만, 반대로 백신의 개발이 예정보다 늦어지고-더위가 바이러스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완치자의 재감염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높을 경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총력전 체제처럼 국가에 의한 식량배급제의 실시까지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물질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태가 장기화될 때 어떤 형태가 가장 효율적인 대응방식이 될 것인가? 요컨대, 우리의 정치적/정책적 고민이 '시간'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모든 문제들을 선제적으로 고찰하고 응답하기 좋은 환경에 있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이 질문들을 회피할 수 없는 순간이 점점 더 가까워져 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하는 3월 22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포스팅]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한국의 독특한 지점 중 하나는, 특히 신천지와 일부 개신교회를 경로로 대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하면서 국가-방역-교회 간 역학관계가 급속히 재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수십 만명의 신도들로 구성된 종파의 전체 인명부를 통채로 입수하고 종교단체에 집단예배 자제를 강력하게 권고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다수의 시민들이 지지하는 상황은 적어도 초기 근대 이후 기독교와 국가의 역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아니다. 심지어 평소에 정권에 비판적인 경향이 강한 네이버 기사 댓글에서도 집단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에 대한 비판여론이 압도적인 편이다: 어느 베스트댓글의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지"라는 표현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국과 서구의 다른--특히 이번 코로나 감염에서 취약한 면모를 보인--민주주의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 중에는 군사독재 시절부터 이어져내려온 막강한 행정력 외에도 교회와 같은 사적 집단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도 포함된다.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에서 그것이 '실현불가능한' 과제였다면, 한국은 '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안 했던' 과제였던 것이다. "전광훈 교회 ‘다닥다닥’ 모여 매일 예배…부침개 나눠 먹기도"(KBS)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6&aid=0010807227 "중단 권고에도 현장 예배 '강행'...이 시각 연세중앙교회"(YTN)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2&aid=0001418052 [속보]'중단' 권고에도…전광훈 목사 교회 등 현장예배 강행(아시아경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77&aid=0004647103 물론 이런 '한국적' 전통이 언제나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만약 앞으로 보수-우파의 발언권이 유의미하게 늘어나게 될 경우, 과연 종교단체, 특히 개신교 교회에 대한 국가통제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좋든싫든 보수우파의 영향력이 커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나는 보수지지층들이 다음과 같은 불안요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보수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한국 개신교회, 특히 극단적인 보수 스탠스를 취하는 교회들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웃어넘기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종교적 광신enthusiasm은 서구 초기 근대의 정치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으며, 그 시기의 탁월한 사상가들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은 널리 공유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싶다. 리버럴·진보·합리주의 정치의 너무나도 매끄러운 언어 속에서 세계는 이미 세속화된 장소이며 교회는 점점 사라져가는, 따라서 가끔 귀찮을 때도 있지만 결국 무시해도 좋을 골동품으로나 존재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래의 세속화 연구에서 누차 강조되었듯, 세계는 결코 전면적으로 세속화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교회는 한국만이 아니라 한국보다 더 '발전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집단이며, 통제되지 않는 교회만큼 공포스러운 대상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다. 특히나 '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며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생각하는 이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심연은 당신들의 발 밑에서 입을 벌릴 것이다. 한국의 코로나 사태/대응을 바라보며 확인할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과 마스크 수출입 문제도, 가슴 벅찬 국가적 자부심의 확인도 아니다. 국가와 종교의 '한국적인' 관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불/가능하게 하는지, 그게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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