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G. A.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1부 발제.

Intellectual History 2015. 11. 5. 16:52

세미나 발제(라기보다는 요약 정리에 가깝지만)를 올린다. / 세미나 이후 수정 반영.





공화주의 세미나(수유너머N) 발제

2015115

 

마키아벨리언 모멘트1개별성과 시간(Particularity and Time)

 

이 짧은 글의 목표는 J. G. A. 포칵(Pocock)의 책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The Machiavellian Moment: Florentine Political Thought and the Atlantic Republic Tradition, 2)에서 논의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1개별성과 시간의 주요논의를 세미나를 위해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원서 80, 한국어본 130여 쪽에 달하며 밀도와 추상수준 모두에서 까다로운 포칵의 서두는 부제가 지시하듯 서구 근세에 두 개념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제시하고 이것이 당대의 정치 담론 상의 변화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준다. 두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시간은 세속성(secularity)의 함축을 갖는다. 흔히 기독교적이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시간관은 시간을 절단된 세 단계로 나눈다. 타락 이전, 타락 이후, 종말과 구원이 그것이다. 이중 처음과 마지막이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세계, 보편성과 분리되지 않은 시공간을 가리킨다면, “시간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곳은 타락부터 종말 이전까지의 세계, 다시 말해 우리 인간 존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공간이다. 이 세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때로는 우연성이 침투하기도 한다) 유일하게 시간이 흐르고 또 역사를 갖는다. 2) 또 다른 키워드 개별성은 바로 시간과 역사가 존재하는 현세(temporal)/세속(secular)의 시공간과 결속되어 있다. 우연성과 가변성이 깃들어 있는 세속의 시간에서 우리 각자의 행위,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존재 자체는 구원의 세계에 다시 도래할 보편성으로부터 떨어진 파편들로,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보편과 개별=특수particular의 대립구도로 널리 알려진 헤겔의 용례를 떠올려 비교한다면 이 분리가 조금 더 쉽게 와 닿을 수도 있겠다). 개별자는 기껏해야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으며, “시간과 정황을 초월하는 자명성”(국역본 43; 원서 4)을 가진 보편성으로부터 추락하였기에 그 자체로는 현세의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여 무의미하다(insignificant).

구원된 세계와 현세가 이토록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보편성이 오로지 전자에게만 귀속되어 있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속한 후자의 삶은 무의미의 심연 속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개별성과 시간은 기독교적 시간관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물음에 대한 답변들의 지도그리기이기도 하다. “개별자의 연속에 대한 기독교 사상은 그 개별자를 보편자에 연결시키려는 일련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 그 목적은 개개의 개별자를 영원성에 연결시키면서도 개별자의 연속 그 자체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하는 것이었다. [...] 즉 기독교적 세계관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역사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는 데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것물론 그러한 것을 뛰어넘을 어떤 씨앗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기는 했지만그리고 역사적 설명 양식의 출현은 좀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이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대체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다”(50-51; 8). 포칵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이 바로 정치사회로, 정치사회는 세속의 세계에서 우연성이 독자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세속화가 진전된 세계에서 정치사회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보여주었듯 민족/국민이란 이름으로 그 자체가 보편성의 영역이 되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짚어두자). 근대 이전의 정치철학에서 정치 공동체[political community]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 즉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으나(51; 9). 시간 안에("in time") 존재하는 정치사회의 특수한/개별적인 성격은 점차 강하게 드러나게 되며, 이는 철학 전통의 외부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포칵은 12절부터 2장 끝까지 걸쳐 그러한 사례들의 주요 유형을 다룬다.

12절은 영국의 법률가 존 포테스큐 경(Sir John Fortescue)의 사례를 들어 개별성과 보편성을 연결시키는 논리체계의 한 유형을 소개한다. 포테스큐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법은 그 자체에 보편적이고 자명하며 논증 불가능한 원리로서의 금약(maxims)을 가지고 있으며(53; 10) “이성이란 단지 우리로 하여금 원리로부터 연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것으로서 우리의 지식이란 원리에 기초해 연역된 하위지식들의 총합체이다(54; 11). 그렇다면 도대체 그러한 원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를 보편적 원리로 인도하는 것은 관례 혹은 경험”(usage or experience, 60; 14)이다. “어떤 관습이나 특수한 제도는 시효적’[prescriptive] 요구, 즉 그것이 이미 시간을 통해 확립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요구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요구가 옳다고 인정’[presumption]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그동안 제대로 잘 작동해 왔음을 인정하는 셈이다”(61; 15). 관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이들의 경험적 축적을 통해 형성되고 또 살아남았기에 자기 인증”(self-validating, 65; 18)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과연 이러한 논리가 경험을 통해 획득된 유사-보편성과 이성을 통해 전개된 보편성 사이의 간극을 넘어설 수 있는가? “추상적 보편자로부터는 오직 추상적 보편자만이 연역될 수 있을 뿐이며, 만약 이성이 연역적 논리와 동일하다면 귀납적 과정은 결코 역전될 수 없다”(73;22). 보편자와 개별자의 극복 불가능한 간극에 따른 플라톤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은 포테스큐와 마찬가지로 공통의 경험”(common experience)이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까지 접해보지 못한 우연적 사건이 출현하는 세속의 시공간은 인간을, 특히 통치자를 과거의 축적으로부터 기원한 공통 경험의 한계에 위치시킨다(어떤 면에서는 전례없는 사건이 발생하는 기대지평으로서의 시간을 발견하게 된 것 자체가 중요하다). 법과 관습이 반복되는 일에 대한 보편적판단근거를 제공한다면, 전례가 없는 사건은 그러한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그 순간의 결정권자가 가진 분별(prudence)에 의존한다. “사법상의 권위”(jurisdictio)통치상의 권위”(gubernaculum)의 양극을 가진 스펙트럼이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나타난다(78; 25). 전례 없는 우연과 마주하는 때, 특히 정책결정”(the policy decision, 81; 28)의 순간 전통=법으로부터 자유로운 통치의 영역이 출현하며, 이때 왕이 보유한 통치의 기예란 독특하고 우연적이며 예기치 않은 상황과 싸우는 신비롭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합리한 기술로 간주된다(82; 28)우리는 16세기부터 번성하는 주권 및 국가이성(raison d'etat)에 대한 논의와 나아가 통치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은 어떻게 이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권능의 획득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왕권을 신성화하려는 담론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어졌겠지만, 세상의 이치 즉 신의 섭리는 인간의 시야 안에 주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통치의 근거 없음은 해결될 수 없다.

 

2장은 개별적인 현세와 보편성을 화해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로 종말론적 예언의 체계를 소개하며 출발한다. 관건은 종말에 이르기 전 혹은 그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에 어떤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느냐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현세(“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와 구원=종말(“신의 나라”[civitas Dei]) 사이의 간극을 선언했다면, 종말론적 사고는 예언(prophecy)과 계시라는 도구를 통해 양자를 연결한다. “‘세속적역사가 사실은 예언의 대상이었다는 것, 또한 예언자 혹은 예언의 해석자가 세속적 사건들 속에서 구원의 계획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계획의 일부로 보는 그러한 방식으로 판독’[read]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불법적인 일도 아니었다. [...] 종말론은 이런 식으로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우위를 유지하였다. 역사란 오직 구원의 과정이라는 양식으로서만 인지 가능했다”(90;32-33). 천년왕국론(millenarism)으로 이어지는 계시적 분리주의(apocalyptic separatism, 92;34)는 현재를 역사의 의미가 완성되어 드러나는 시점인 종말 직전에 위치시킴으로써 구원을 [현재의] 사회와 역사 속에결부시킬 수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적 시간관에 입각해 스스로가 영원한 현재”[nunc-stans]에서 신의 대리인임을 주창하던 교황은 이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신학적 갈등은 정치적 혹은 시민적 삶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보에티우스는 이 주제를 다루는 고전적인 방식, 즉 남성적이고 적극적인 태도/역량을 포괄하는 덕(virtus)과 예측불가능한 세상사를 지시하는 운(fortuna, tyche)의 대립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논리를 예시한다. 비르투스/아레테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으로 하여금 시민적 삶의 맥락[civic context] 속에서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힘”, “어떤 인격 혹은 요소를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드는 본질적 성질”, “도시 혹은 어떤 질서 잡힌 세계 속에서 인간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도덕적 선등의 의미를 포괄한다(98; 37). 보에티우스는 감옥에서 완전무결한 덕 그 자체인 신이 어떻게 해서 비르투스를 포르투나의 희생물로 만들 수 있는지”(99; 38)를 묻는다. 정치적 삶의 정황적 불안정”(the circumstantial insecurity)인 운은 결국 섭리와 숙명”(Providence and Fate, 101;39)의 한 부분일 뿐이다. 요컨대 신의 뜻이, 세계의 완전한 역사가 불가해한 지평으로 존재한다면, 운은 그 지평이 인간에게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다. 철학과 믿음은 보에티우스를 세속의 세계에서 자신이 겪는 불운이 결국 신의 영원한 뜻으로 가는 길 안에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관조하는 삶(vita contemplativa)으로 인도한다. 고전적 구도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세계는 융합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적 섭리가 예언을 내세운 종말론의 반발과 마주친 것과 같은 성격의 일이 정치사회의 이해에도 일어난다. “기독교 법 아래 기독교도가 통치하는 왕국과 공화국이라면 어느 정도의 세속적 정의는 이룰 수 있으며, 어떤 종류의 지상국 시민권을 가지기에 충분할 만큼의 공적 층위에서 그러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은총을 통한 인간의 구속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다시 한 번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공적 역사[public history]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시간을 통해 확장된 키비타스의 삶은 단순한 포르투나 이상의 것으로 보였을 게 틀림없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적 무대의 포르투나가 은총[grace]의 사역에 종속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정치적 교제가 자연스럽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교리의 부활이 정치사가 종말론과 재결합하는 결론을 가져오게 된 것은 논리적 귀결이었다”(108;43). 그리하여 현세의 사건에 보편의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로서의 예언이 섭리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시간 속의 어떤 계기들을 통해 어떤 말이나 신호가 발화되고 어떤 행위가 수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다름 아닌 바로 신의 행위였으며 신은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에게 어떤 진리를 계시했다는 것이 받아들여진다(109;43).

역사가 구원과 다시 연결될 때, 이단적 종파들만이 아니라 세속의 공화국 및 왕국들 또한 자신의 존재 및 행위를 구원으로의 여정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제시하여 교황의 교회에 대항하는 고유의 논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그리고 이 논리는 이단 종파들이 군주에 대항할 때에도 활용될 수 있었다). 특히나 천년왕국 전통과 프란체스코 영성파 양자의 계보는 이전의 법과 율법그것이 세속적이든 예언적이든 간에에 속박되지 않고 신의 말씀을 따르는 성인들에 의해 통치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지녔다(113;45-46). 필연적으로 이단의 논리와 세속의 통치자들은 결합한다. “계시[Apocalyptic]는 세속화의 강력한 도구로서, 구속의 과정을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분리하고자 했던 사회적 시간의 차원 속으로 끌어당겼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기존의 세속 과정들의 확장 혹은 변형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었다. [...] 즉 정치적 종말론은 세속 사회의 통치 제도에 반기를 든 천년왕국론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통치자들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무기였다는 것, 그리고 성인과 사회 간의 관계가 이러한 이중적 모호함으로 얽혀있었다는 것이다.”

포칵은 2장을 마무리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을 연결시킬 수 있었던 다섯 가지의 유형을 정리한다. 포테스큐의 논리에서 볼 수 있던 경험, 분별, 아르카나 임페리[arcana imperii]”, 운과 믿음을 포괄하는 섭리를 믿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 절망이 가장 클 때 세계의 섭리에서 믿음을 제외하고 오로지 불합리한 운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관점, 섭리와 예언을 포괄하는 계시적 종말론, 마지막으로 덕과 은총”(117;48). 포칵이 제시하는 사례들을 일종의 선형적인 모델 안에서 배열한다면 다음과 같이 간략화된 전개를 상정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시간에서 개별적인 현세는 보편성으로부터 단절되어 의미를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예언과 계시의 종말론은 현세의 의미를 종말 이후의 보편적/영원한 세계에 접근시킴으로써 한편으로 전자에 의미를 부여하되 동시에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양가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3장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될 피렌체 모델은 현세와 종말 이후의 세계를 분리시키되 독립된 시공간으로서의 현세로부터 고유의 보편성을 창출한다. 이 세 가지 유형 사이의 이행을 통해 세속적인 세계, 정치사회는 영원한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획득한다.

 

3장은 정치적 지식 및 행동의 양식들에 대한 일종의 개념화로서” “시민의 이상”(the ideal of the citizen, 119;49)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즉 인간은 시민적/정치적 삶을 위해 필요한 앎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불변하는 우주적 질서로 인도하는 이성, 전통의 축적으로부터 배태된 경험, 너무나 우연적이고 개별적이라 이성으로도 경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위한 분별과 믿음이라는 세 가지 경로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 질서에 의존할 수도, 전통에 따를 수도, 군주의 분별에도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공적 결정과정을 위한 앎은 어떠한 논리 위에서 출현할 수 있는가? 단테의 경우 계시적 시간의 관점에서 제국을 보편적 구원”(universal salvation, 121;50)의 실현자로 파악한다. 단테의 비전에서 핵심은 그 위계적인 성격이다. “제국의 위계는 우주의 위계를 반영”(122)하고 올바른 원리는 위에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이 안에서 동료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결정과정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단테의 제국옹호론에 대한 역사적 해설은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11장 한국어본 111-15; 원서16-18을 참조하라). 14세기의 많은 이들에게 공화국과 제국과 계시는 한 덩어리”(123;51)였다. 그러나 이미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작동원리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설명이 제시된 공화국에 살고 있는 피렌체인들에게서는 이러한 예언적 언어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15세기 초 살루타티와 브루니의 저술에서 잘 드러나는 관점에 따르면, 피렌체 시는 카이사르의 후예가 아니라 고대 로마 공화국(the Roman republic)의 후예가 되며, 황제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에게 지옥 깊은 장소를 마련해주었던 단테와 정 반대로 브루투스는 공화국의 시민으로, 카이사르는 참주로 그려진다.

포칵은 이러한 단절이 어떤 상이한 시간관을 함축하는지 상술하는데 이 부분이 1부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국적 역사관”(the imperialist vision of history, 125;53)에서 제국은 영원성을 보유하였기에 제국의 역사에 속하는 것이 곧 보편적 의미에 가 닿는 것이었다면, 피렌체 인들의 역사관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관을 끊고 점차 (보편성/영원성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측면을 포함해) 세속화한다. “공화국은 결코 영원한 것[timeless]이 아니었으니, 그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영원한 질서를 일대일로 대응하여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공화국은 자연과 상이하게 조직된 것이었고, 공화국과 시민권을 가장 우선적인 실재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정치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를 구분하고자 했을 것이다”(126;53). “공화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곧 위계적 우주의 영원한 연속성을 개별적 시기들로 잘게 쪼개는 것과 같았다. 즉 공화국이 존재했고 그것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던 역사상의 시기들과, 공화국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현재에 어떤 가치나 권위도 전해주지 못한 그런 시기들로 구분되는 것이다. [...] 사고는 점점 근대적 역사 설명의 문턱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따라서 역사적 지성의 중요한 발견, 각 세대는 영원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것, 각각의 역사 현상은 스스로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권리와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 과거의 연속성은 영원한 위계적 질서의 수많은 특징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공격을 받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를 갖는 일련의 시기들로 쪼개져 버렸는데, 그것은 개별화된 정치형태[political form]의 존재가 그러한 연속성에 부과된 가치 규준이었기 때문이다”(127-29;54-55).

영원한 시간의 연속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현재의 개별적인 시공간 및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독자적인 중요성(significance)을 갖는다고 주장할 때 정치적 삶을 바라보는 입장 또한 바뀐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섭리 앞에서의 관조를 높이 치던 견해는 행동하는 삶에 도전받는다. “후기 피렌체 사상[later Florentine thinking]으로 가면 행동하는 삶, 특히 공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시민으로서의 활동(결국은 정치적 활동)에 삶의 무게를 두는 시민적 삶(vivere civile)을 선호하는 쪽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 시민적 삶의 주창자들은 개인의 참여와 행동을 허용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그러한 행위들에 관여하였고이는 곧 어떤 종류의 폴리스에 시민권을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이후 시민적인 삶이란 말은 넓은 기반의 시민적 헌정을 뜻하는 기술적인[technical] 용어가 되었다”(131; 56-57). 이러한 삶의 태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포칵은 한스 바론의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란 용어를 수용한다. 이 용어는 (철학과 대비되는) 수사학과 맞닿아 있다. 핵심은 개별성의 강조, 인간의 삶을 특정한 행동과 결정에 참여하고 특정한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정치 관계에 참여한다는 측면에서바라보는 것이다(136;59-60). 로렌초 발라의 사례가 보여주듯 수사학자들은 철학이 아닌 문헌학을 앎에 이르는 방법으로 생각했으며 맥락으로부터 떨어진 보편적 세계의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적, 사회적, 역사적 환경이 강조된다(139;61). 사상은 세속적인 시간 안에 기거한다. 그리고 정치적/문헌학적 인문주의 양자에서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시공간으로서 존재하게 된 고대가 대화상대로 출현한다.

시민적 인문주의자들의 시간관/세계관 안에서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연결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한다. “인문주의 철학은 문헌한의 채택으로 이러한 [보편적인 지식의] 대상들이 오직 특정한 시공간 안의 특정한 사람들이 행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이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편자가 어쨌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언행에 대한 창조적 지식 및 연관을 통해 보편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식으로 그것에 대한 사유를종종 플라톤적 테제들을 재론하는 과정에서정당화하고자 했다. [...] 결국 이러저러한 형태의 인문주의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되었고, 보편적인 것은 개별자와의 대화에 영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해 가능하게 되고 경험될 수 있었다”(141-42;63). “개별자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 덕에 대화의 관념, 즉 보편자는 삶과 언어의 관계망에 참여하는 것 안에 내재해 있다는 관념이 출현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최상의 가치는, 심지어 비정치적인 관조의 가치까지도, 오직 대화와 사회적 연대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144;64). 선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연대는 곧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시민적 삶을 최상의 삶으로 칭송하는 근거가 된다. 인간은 정치공동체에의 참여를 통해 특수한 사안들로부터 보편성에 도달하는 행동적 대화”(the active conversation, 146;65)를 실천한다.

32절에서 포칵은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독해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하여 어떻게 앞서 논의되었던 덕(virtus)의 개념이 정치화하는가를 살핀다. 정치학은 자연법 및 이성의 자율성과 함께 시민 및 시민과 공화국의 관계, 그리고 어떤 가치 공동체로서의 공화국(혹은 폴리스)에 대한 사고체계를 논의한 텍스트로도 읽혀졌다(148;66-67). 물론 포칵이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측면이다. 즉 연대에 기초한 정치공동체가 개별적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더 높은 가치를 지닌 보편적인 선, “일반선”(the general good, 150;68)과 연결하는 통로였다면, 정치공동체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길은 개별자들의 선이 보편선에게 독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즉 시민들이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개별적 집단의 일원으로 해당 집단의 선/이해관계를 추구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보편선을 행하는 과정에 참여한다면,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 특히 특정한 집단의 독재를 막는 과제가 (“다수의 폭정을 막는 일만큼이나) 매우 막중해진다. 공동체는 모든 시민과 모든 가치의 완전무결한 협동체”(161;75), 시민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독립성을 갖춘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모두의 참여를 통해서만 모두의 덕이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덕은 이제 정치화한다(162). “폴리스는 통치하는 개인의 영웅적 남성성이 아니라 시민들의 협동 정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167;78).

다시금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인 덕과 그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는 운의 대결이 부각된다. 부패 및 이로 인한 변화의 필연성을 전제로 하는 폴리비우스적 순환론은 결국 현세의 공화국을 운=섭리의 궤적 안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논리를 재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공화국의 기독교도 시민들이 반응할 수 있는 양식은 (포기와 관조의 태도를 제외하고 나면) 두 가지였다. 하나가 완벽하게 균형잡힌 덕의 공화국이 현세가 지속되는 한 영원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운과 형상과 안정성이 합친 덕의 도시(the virtuous city)는 곧 은총의 왕국”(the kingdom of grace)이 되어 종말의 순간을 뛰어넘어 천년왕국 혹은 제3시대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이단적인 믿음이었다. 포칵의 시선은 물론 지금까지 상술한 바로 이 시간관을 뛰어넘는 길을 탐색한 터프하고 세속적인 시민적 정신”(toughly and secularly civic minds, 171;80)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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