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1부 1편 1장.

Intellectual History 2015. 10. 7. 01:11

아담 스미스Adam Smith<도덕감정론>_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_

1part 행동의 합당함에 관하여Of the Propriety of Action

1section 합당함의 감각에 관하여Of the Sense of Propriety

1chapter 공감에 관하여Of Sympathy 의 일부를 옮긴다. [가끔 여유가 나면 한 문단씩 옮기겠다]

(Liberty Fund에 수록된 판본[http://oll.libertyfund.org/titles/smith-the-theory-of-moral-sentiments-and-on-the-origins-of-languages-stewart-ed]을 직접 번역저본으로 삼되 경우에 따라 Ryan Patrick Hanley가 편집한 펭귄 2009년도 판을 참고)

 

 

"사람이 제 아무리 이기적이라고들 할지라도 인간 본성에는 분명히 어떤 원리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이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남의 행복을 스스로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설령 그로부터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할지언정 단지 그 광경을 보는 것으로도 기쁨을 느끼도록 말이다. 연민 혹은 동정이 이러한 원리에 속하며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보거나 혹은 매우 선명하게 떠올리게 될 때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우리가 종종 타인의 슬픔을 접하고 그로부터 슬픔을 느끼곤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여 이를 입증하기 위해 별다른 예를 들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 본성에 깃든 모든 본래적인 정념이 그러하듯 덕 있고 인정 많은, 그들은 누구보다 탁월하게 예민한 감성으로 그 감정을 느끼겠지만, 그러한 이들에게만 깃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흉악한 악당, 어떠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사회의 법을 위반하는 이조차도 이러한 감정을 결여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이 느끼는 바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길이 없기에, 우리에겐 우리 자신이 마찬가지의 상황에서 어떻게 느낄지를 생각해보는 경우 말고는 다른 이들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떠올릴 방법이 없다. 설령 형제가 고문대 위에 올라가 있을지라도 우리 자신이 편안한 상태에 놓여있다면 우리는 형제가 겪는 고통의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를 감각한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형제가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한 개념을 단지 상상력을 통해서만 형성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경우에도 상상력은 만약 우리가 그의 처지에 있다면 어떤 상태일까를 재현하는 것으로서만 도움이 된다. 우리의 상상력이 복제하는 대상은 우리 자신의 감각에 남은 인상이지 형제가 느끼는 바가 아니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그가 처한 상황에 놓고, 마찬가지의 고문을 견뎌내는 상황을 떠올린다. 우리는 말하자면 그의 몸에 들어가 조금이나마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그가 느끼는 바에 대한 관념을 생각하고 심지어는, 비록 아주 똑같을 수는 없고 그 정도도 약하겠지만, 그가 느끼는 바를 느끼기까지 한다. 그렇게 그의 고통을 우리가 뼈저리게 느낄 때, 우리가 그 고통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그것은 마침내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는 그가 느끼는 바를 생각하며 몸서리치고 떨게 된다. 어떠한 종류든 고통과 고난에 겪는 것은 매우 크나큰 비감을 유발하므로,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떠올리거나 상상하면 우리는 같은 종류의 감정을 그 관념의 생생함 및 흐릿함에 비례하여 일부나마 느끼게 된다.

 

이러한 원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동류의식의 근원이라는 사실, 고통 받는 이에 대한 상상으로 서로의 처지를 바꿔봄에 따라 우리가 그가 느끼는 바를 떠올리거나 그것에 영향 받기도 한다는 사실은 설령 그 자체로 충분히 자명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해도 수없이 많은 명백한 관찰을 통해 증명될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팔다리를 겨냥해 일격이 조준되고 또 가해지기 직전인 상황을 볼 때 우리는 본성적으로[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의 팔다리를 움츠리거나 뒤로 뺀다. 일격이 가해졌을 때 우리는 그 일격을 다소나마 체감하고 마치 우리 자신이 피해자인양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느슨한 밧줄 위 무용수를 바라보는 군중은 무용수의 동작을 보며 마치 스스로가 무용수와 같은 상황일 때 그리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본성적으로 몸을 비틀고 꼬며 스스로의 몸의 균형을 잡는다. 섬세한 섬유[신경]와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는 거리에서 걸인들의 몸에 나 있는 상처 및 궤양을 볼 때 자신의 몸 같은 부위에도 가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고 불평한다. 비참한 이들의 불행을 접하며 떠올리는 공포는 그들의 몸에 있는 같은 부위에 [평범한 신경을 갖춘] 다른 이들보다도 더 심하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는 만약 자신이 실제로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불쌍한 사람일 경우에, 그리고 자신의 몸 해당 부위가 실제로 그 상처나 궤양과 같이 끔찍한 상태에 놓여있을 경우에 그들 자신이 어떤 고통을 느낄지 떠올리는 데서 그러한 공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의 영향만으로도 그들의 허약한 몸에 그들이 호소하듯 가렵고 불편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는 충분하다. 가장 원기 왕성한 사람도 눈병에 걸린 눈을 보면서 자신의 눈이 매우 예민하게 통증을 느끼는 걸 관찰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에 의해서다. 가장 튼튼한 사람의 눈이라 할지라도 가장 약한 이의 다른 신체부위보다 예민한 법이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을 만들어내는 상황만이 우리의 동류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직접적으로 겪는 사람의 내면에서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정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를] 신경 쓰는 모든 관찰자의 가슴 속에서는 그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유사한 감정이 샘솟는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비극 또는 로맨스의 주인공들이 구출될 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그들의 곤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비탄만큼이나 진실되며, 우리가 그들의 행복에 느끼는 동류의식은 그들의 불행에 느끼는 바보다 덜 참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 충직한 벗에게 주인공들이 품는 감사의 마음에 빠져들며, 자신을 해치고, 버리고, 기만하는 불성실한 배신자를 향한 주인공들의 원망에 기꺼이 동참한다. 사람의 마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정념에서, 주변인의 감정은 항상 자신이 직접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떠했을까를 떠올려 상상한 고통 받는 이의 감정에 상응한다.

 

연민과 동정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동류의식을 뜻하는 말이다. 공감은 본래 그 뜻은 [연민, 동정과] 마찬가지였을 터이나 지금은 모든 종류의 정념에 대한 동류의식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고 별 문제 없이 말할 수 있겠다.

 

어떤 경우에 공감은 단순히 타인의 특정한 감정을 인식하는 데서 솟아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 정념은 즉각적으로, 직접 일을 겪는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이 그것을 자극하는지 알기 전에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주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표정과 몸짓에 강하게 표현된 비탄과 기쁨은 곧바로 관찰자에게 유사한 종류의 고통스런 혹은 쾌활한 감정을 어느 정도 불러일으킨다. 미소 짓는 얼굴은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생기를 전하며, 반면 마찬가지로 수심에 찬 표정은 우울감을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이 모든 감정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정들은 그 표현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오히려 우리가 그 에게 도대체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쳤는가를 알기 전에는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혐오 혹은 반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성난 이의 분노에 찬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적보다는 그 자신에 대해 적개심을 품도록 만든다. 무엇이 분노를 일으켰는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처지에 이입하거나 그가 처한 상황에서 느낄법한 정념과 같은 것을 떠올리는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역으로 우리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 또 그들이 이토록 분노한 적수 앞에서 어떤 폭력에 노출되어있는지를 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노의 대상이 된 이들이 느낄 공포와 원망에 쉽게 공감하며 위험에 처한 그들의 입장에 서서 성난 이에 대항하도록 즉각적으로 이끌린다."

 

"How selfish soever man may be supposed, there are evidently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which interest him in the fortune of others, and render their happiness necessary to him, though he derives nothing from it except the pleasure of seeing it. Of this kind is pity or compassion, the emotion which we feel for the misery of others, when we either see it, or are made to conceive it in a very lively manner. That we often derive sorrow from the sorrow of others, is a matter of fact too obvious to require any instances to prove it; for this sentiment, like all the other original passions of human nature, is by no means confined to the virtuous and humane, though they perhaps may feel it with the most exquisite sensibility. The greatest ruffian, the most hardened violator of the laws of society, is not altogether without it.

 

As we have no immediate experience of what other men feel, we can form no idea of the manner in which they are affected, but by conceiving what we ourselves should feel in the like situation. Though our brother is upon the rack, as long as we ourselves are at our ease, our senses will never inform us of what he suffers. They never did, and never can, carry us beyond our own person, and it is by the imagination only that we can form any conception of what are his sensations. Neither can that faculty help us to this any other way, than by representing to us what would be our own, if we were in his case. It is the impressions of our own senses only, not those of his, which our imaginations copy. By the imagination we place ourselves in his situation, we conceive ourselves enduring all the same torments, we enter as it were into his body, and become in some measure the same person with him, and thence form some idea of his sensations, and even feel something which, though weaker in degree, is not altogether unlike them. His agonies, when they are thus brought home to ourselves, when we have thus adopted and made them our own, begin at last to affect us, and we then tremble and shudder at the thought of what he feels. For as to be in pain or distress of any kind excites the most excessive sorrow, so to conceive or to imagines that we are in it, excites some degree of the same emotion, in proportion to the vivacity or dulness of the conception.

 

That this is the source of our fellow-feeling for the misery of others, that it is by changing places in fancy with the sufferer, that we come either to conceive or to be affected by what he feels, may be demonstrated by many obvious observations, if it should not be thought sufficiently evident of itself. When we see a stroke aimed, and just ready to fall upon the leg or arm of another person, we naturally shrink and draw back our own leg or our own arm; and when it does fall, we feel it in some measure, and are hurt by it as well as the sufferer. The mob, when they are gazing at a dancer on the slack rope, naturally writhe and twist and balance their own bodies as they see him do, and as they feel that they themselves must do if in his situation. Persons of delicate fibres and a weak constitution of body complain, that in looking on the sores and ulcers which are exposed by beggars in the streets, they are apt to feel an itching or uneasy sensation in the corresponding part of their own bodies. The horror which they conceive at the misery of those wretches affects that particular part in themselves more than any other; because that horror arises from conceiving what they themselves would suffer, if they really were the wretches whom they are looking upon, and if that particular part in themselves was actually affected in the same miserable manner. The very force of this conception is sufficient, in their feeble frames, to produce that itching or uneasy sensation complained of. Men of the most robust make, observe that in looking upon sore eyes they often feel a very sensible soreness in their own, which proceeds from the same reason; that organ being in the strongest man more delicate than any other part of the body is in the weakest.

 

Neither is it those circumstances only, which create pain or sorrow, that call forth our fellow-feeling. Whatever is the passion which arises from any object in the person principally concerned, an analogous emotion springs up, at the thought of his situation, in the breast of every attentive spectator. Our joy for the deliverance of those heroes of tragedy or romance who interest us, is as sincere as our grief for their distress, and our fellow-feeling with their misery is not more real than that with their happiness. We enter into their gratitude towards those faithful friends who did not desert them in their difficulties; and we heartily go along with their resentment against those perfidious traitors who injured, abandoned, or deceived them. In every passion of which the mind of man is susceptible, the emotions of the bystander always correspond to what, by bringing the case home to himself, he imagines should be the sentiments of the sufferer.

 

Pity and compassion are words appropriated to signify our fellow-feeling with the sorrow of others. Sympathy, though its meaning was, perhaps, originally the same, may now, however, without much impropriety, be made use of to denote our fellow-feeling with any passion whatever.

 

Upon some occasions sympathy may seem to arise merely from the view of a certain emotion in another person. The passions, upon some occasions, may seem to be transfused from one man to another, instantaneously, and antecedent to any knowledge of what excited them in the person principally concerned. Grief and joy, for example, strongly expressed in the look and gestures of any person, at once affect the spectator with some degree of a like painful or agreeable emotion. A smiling face is, to everybody that sees it, a cheerful object; as a sorrowful countenance, on the other hand, is a melancholy one.

 

This, however, does not hold universally, or with regard to every passion. There are some passions of which the expressions excite no sort of sympathy, but, before we are acquainted with what gave occasion to them, serve rather to disgust and provoke us against them. The furious behaviour of an angry man is more likely to exasperate us against himself than against his enemies. As we are unacquainted with his provocation, we cannot bring his case home to ourselves, nor conceive any thing like the passions which it excites. But we plainly see what is the situation of those with whom he is angry, and to what violence they may be exposed from so enraged an adversary. We readily, therefore, sympathize with their fear or resentment, and are immediately disposed to take part against the man from whom they appear to be in danger."

 

 



첫 문단을 읽고 마음에 남아 조금씩 번역하기 시작했다. 역시 영어처럼 매우 다른 구조의 언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은 많은 고민을 요구한다. 당장 propriety에 가장 가깝게 대응하는 한국어가 무엇인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요조숙녀'로 옮기곤 하는 "proper lady"에서처럼 proper-propriety는 단순히 올바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습 및 규범을 잘 숙지하고 여기에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OED를 참고한다면, 물론 proper는 이전 시기부터 이러한 의미로 활용되어 왔지만, propriety가 공손함, 예의바름, 올바른 예절 등에 부합하는 태도로 본격적으로 쓰이는 것은 <도덕감정론>이 출간된 18세기 후반이다. 영국은 18세기에 걸쳐 상업사회commercial society로 이행하면서 사교성sociability, 예의범절manner과 같은 덕목을 갖춘 사람을 모범적 인간으로 간주하게 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proper-propriety와 같은 단어군은 당대의 분위기를 대표하는 언어적 표현에 속한다. 나는 "적절함"이란 어휘를 대응물로 골랐지만("예의바름"은 너무 약하고 "올바름"은 너무 강하다), 이 표현의 한국어 용례가 18세기 후반 영국사회의 propriety에 걸맞는다고 확신을 가질 순 없다.

 

병기한 원문과 대조해 보신 분은 바로 알겠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직역보다는 의역을 택했다. 그 점이 가장 잘 드러난 지점은 아마 번역문의 두 번째 문장, 영어로는 though 로 시작하는 보조절일 것이다. 해당 절을 직역한다면 "그걸[타인의 행복] 보는 기쁨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도가 되는데, 내 번역은 "기쁨을 느낀다"는 사항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 사실 전체 문맥으로 보면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직역을 선호하는 역자라면 의문을 느낄만 하다. 나는 샤프츠베리Shaftesbury로부터 이어져온 18세기 도덕감정론의 전제 하나를 강조하고 싶었다. 샤프츠베리부터 스미스에 이르기까지 도덕감정론의 계보에서 중요한 전제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감정sentiment을 통해 선에 합치될 수 있으며 선에 합치되는 걸 통해 쾌pleasure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당연하지만 테일러가 지적하듯 여기서 단 한 발자국만 가면 "내가 쾌를 느끼는 행위가 곧 올바른 행위"라는 윤리적 주관주의가 기다린다). 스미스는 공감을 통해 인간이 사회적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논리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고 쾌를 느낄 수 있다는 진술이 나온다. 영어로 읽으면 자연스럽게 짚고 넘어가게 되지만 처음에 한국어로 직역하고자 했을 때 이러한 함축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이라면 각주를 다는 방법도 있겠으나...나는 전체적인 의미 전달이 깨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의역을 통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러한 전제를 옮기고 싶었다.

 

비슷한 경우가 첫 문단 마지막 두 문장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the most exquisite sensibility"를 갖고 나쁜 사람이 "the most hardened" 하다는 대조다. 18세기 감성의 문화에 전제된 인간학에서 사람은 감성을 통해 세계를 지각한다. 훌륭한 감성의 소유자는 타인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열등한 감성을 가진 사람은 그걸 잘 못 느끼고 이런 식이다. 이때 감각을 두뇌로 전달하는 감성은 신경계에 대한 의학적 지식과 연결되어 부드럽거나soft 단단하다는hardened 표현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감성=연결망이 부드러우면 감각을 잘 전달하고, 마치 나무나 바위처럼 단단한 신경계=감성의 보유자는 세계 혹은 타인을 지각하는 데 둔감하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hardened violator"는 매우 둔감한 감성의 보유자로 죄의식이나 가책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사를 충분히 옮기자면 "hardened"에 깃든 단단함, 딱딱함의 느낌을 전달해야겠지만, 내 번역은 의미전달 쪽에 좀 더 집중했다(만약 학술번역으로 나온다면, 사실 sensibility가 등장한 시점에서 상세한 역자 주가 하나 붙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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