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너. <토대> / 울만. <서양중세정치사상사>

Intellectual History 2015. 10. 16. 03:28
W. 울만. <서양중세정치사상사>. 박은구, 이희만 역. 숭실대학교 출판부, 2000. Trans. of _Medieval Political Thought_, 3rd. ed. by Walter Ullmann, 1975[_A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Middle Ages_와 같은 책이다]

퀜틴 스키너.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2: 종교개혁의 시대>. 박동천 역. 한국문화사, 2012. Trans. of _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2: The Age of Reformation_ by Quentin Skinner, 1978.

발터 울만(독일 출생이지만 영국에 살면서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쳤으므로 월터라고 읽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의 책과 스키너의 <토대> 2권을 읽었다. 스키너는 수유 세미나에서 (<토대> 1권부터) 계속 읽어왔던 걸 오늘에서야 마지막 8장 및 9장을 보았고, 울만의 책은 어제 빌려서 오늘(15일) 점심 때쯤 결론을 읽었다. 둘 다, 특히 스키너의 책은,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에 따로 공들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남기는 것은 간단한 소감 정도에 가깝다.

스키너의 <토대>는 주로 14세기부터 16세기 후반부까지의 유럽,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에 초점을 두고 정치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 수사의 변천을 추적한다. 저자의 실로 교과서처럼 명확한 서술방식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수많은 인물들의 사상사적 맥락을 해설하는 야심찬 저술이다보니 정작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만 미혹되기 쉬워서, 미궁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실타래를 꽉 붙들 필요가 있다. 한국에 지금까지 스키너가 주로 소개된 방식, 즉 사상사의 방법론에 관해 모범적인 저술을 구축한다는 의의를 제외한다면 <토대>를 이해하는 커다란 서사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스키너 자신이 서론 및 결론에서 직접적으로 제시하듯 16세기 말에 근대적인 의미에서 "국가"state의 개념 및 이러한 의미를 담은 용례가 출현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해명하는 것이다. 이때 근대적인 의미에서 국가란 통치자의 인격과 동일시되지 않는, '세속적인 정치사회를 통치하는 전능하고 몰인격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추상화된 개념을 뜻한다. 16세기 초 마키아벨리로부터 배태된 "국가이성"(ragione di stato / raison d'etat / reason of state), 즉 통치자 개인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전체 정치체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사고단위를 가리키는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스키너가 이야기하는 근대 국가의 개념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된 저술 중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두 개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물론 스키너 본인도 읽고 참고했을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의 고전적인 저술 <국가이성의 이념>(국역제는 <국가권력의 이념사>)이며, 다른 하나는 스키너의 <토대>가 출간되는 시점과 거의 겹쳐서 진행된 푸코의 강의록, 즉 <안전, 영토, 인구>다(푸코가 스키너와 포칵을 만약에 읽었다면 그의 연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스키너를 읽은 뒤에 푸코를 다시 본다면 (특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및 <안전, 영토, 인구>) 아주 많은 것들이 달리 읽힐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70년대 후반 작업을 둘러싸고 나오는 코멘트가 거의 일반화된 이론적 측면임을 감안할 때, 스키너나 마이네케를 염두에 두고 그의 이론적 작업을 보다 역사화된 서술로 끌어당겨 읽는 일이 무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국가 개념의 출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의 송곳과 같은 것으로, 공화주의 및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 전통의 발굴이다. 정치철학자 필립 페팃과 서로 주고 받은 영향이나, 그 자신이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와 같은 텍스트에서 표방한 내용에서 볼 수 있듯 스키너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현대 서구 사회의 주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이사야 벌린 이래의) 소극적 자유주의 전통을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조를 제출하는 것이다. 공화주의 전통(최근에는 "신 로마적"neo roman 전통이라 부르고 있지만)이 바로 그것으로, 스키너는 J. G. A. 포칵 등과 함께 근세 정치사상사에서 공화주의를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토대> 1권은 실제로 이탈리아의 공화주의, 정치적 자유 및 덕성의 개념을 추적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2권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어떻게 인민주권 및 저항권과 같은 개념을 포함해 (이후 17세기 영국혁명에 사용될) 헌정주의적 정치 논리가 출현하는지를 조망한다. 스키너의 <토대>와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는 자유주의적 역사 해석 하에 묻혀있던 공화주의 및 헌정주의의 언어를 발굴하고 그것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다시금 위치시킨다.

셋째, 고전적인 정치철학 저술 및 저자에 국한된 사상사 대신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치 담론이 법학, 신학, 수사학과 같이 오늘날에는 이질적이라고 생각되곤 하는 분야들에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쉽게 말해 스키너는 근대를 중세와의 불연속적인 단절이 아닌 중세의 다양한 사상적 전통들로부터의 연속성 하에서 파악하며, 독립적인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출현하기 위해서 상이한 전통들로부터 수사와 논리를 동원해야 했음을 보여준다. 홉스와 로크로부터 근대 정치사상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그러니까 정확히 한 달 반 전까지의 나처럼--특히 2권 2부를 보면서 강력한 지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홉스와 로크의 주요한 논변들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자연상태나 사회계약, 자연권 및 자연법과 같은 개념들이 이전에 스콜라주의자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자들과 같은 교황옹호론자들에 의해 먼저 구축되었으며 (물론 이러한 언어는 14세기 교회의 대분열 이래 만들어져온 것이다) 인민의 저항권 또한 스콜라주의 및 토마스주의로부터 원형이 주조되어 16세기의 루터주의, 칼뱅주의, 위그노를 거쳐 17세기에 거의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마이클 왈저가 <성인들의 혁명>_The Revolution of the Saints_(1965)에서 시민혁명이론을 16세기 칼뱅주의자들을 포함한 종교개혁가들에게 소급시켰다면, 스키너는 이를 다시 스콜라주의와 토마스주의 및 공의회주의까지 연결시킴으로서 왈저의 테제를 갱신한다(2권 3부 9장에서 스키너는 직접적으로 왈저의 테제를 비판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왜 갑작스레 울만의 고전적인 저술을 읽기로 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스키너와의 접촉이 지금까지 매우 희미하게만 인지하고 있던 근세early modern 시기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로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는 동시에 (앞서 언급한 세 번째 항목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중세의 정치사상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 물론 스키너는 자신의 주장이 중세에 지고 있는 빚을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의 연속성 위에서만 비로소 새로움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저술을 읽으면서 그것이 기초하는 과거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울만의 텍스트는 아직 예컨대 <케임브리지 중세 정치사상사>_The Cambridge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c450-c1450_(1991)의 참고문헌bibliography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읽히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국어로 된 체계적인 중세정치사상사 저술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무척 귀중한 책이다(2000년에 나온 책이 절판이라니, 중세정치사상사의 인지도를 생각해보면 놀랄 일은 아니지만 안타깝다). 한국어 번역은 고유명사를 대체로 영어식으로 옮긴 것 및 때때로 보이는 맞춤법 오류, 어색한 문장이 걸릴 때가 있으나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별다른 무리가 없다.

울만의 텍스트는 과연 중세 전공자들이 보여주는 긴 시야를 자랑이라도 하듯 대략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천 년이 넘는 기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첫 장에서 레오 1세를 비롯한 초기 교황으로부터 출발해 마지막 장의 중심인물인 14세기의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스콜라주의 및 사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법학)로 나아가는 흐름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황권 및 신정주의적 정치가 속권, 그중에서도 인민주권 및 헌정주의로 이끌려가는 서사가 잠재되어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실제로 울만의 서사는 크게 세 가지 축을 전제하고 출발한다. 성경에 기초해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끌어내는 교권전통,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등을 거쳐 명확해지는 로마법 전통, 프랑크 왕국 및 주변 군주국에서 이어져내려온 봉건적 전통(페리 앤더슨의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이 로마의 유산과 게르만적 전통이라는 두 가지 경향의 산물로 유럽을 설명하는 것과 비교해보라).

서로마와 동로마가 갈라지면서 로마 교황청이 독자적인 주체가 되기 위해 북서 유럽의 봉건영주들을 포교하고 자신의 지지층으로 끌어들였다면, 역으로 북서 유럽의 영주 및 왕들은 교권과의 연합을 통해 봉건적/인민주권적 의무를 요구하는 피통치자들의 요구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카롤링거 왕조의 성립). 곧 신이 있고, (베드로로부터 교권을 위임받은) 교황이 있고, 다시금 교황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왕/영주가 있고,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곳에 피통치자가 있음으로서 속권과 교권은 서로를 활용하며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속권은 특히나 주교서임권 문제를 두고 교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이 되고 싶어했고, 이는 신정주의적 정치이론이 지배하는 세계 내에서도 영혼의 공동체를 관장하는 교권과 세속의 공동체를 관장하는 속권 사이 갈등의 계기로 이어진다(이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밝혀지듯, 교권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꺼내든 문서 상당수가 위조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성직자 정치론과 신정군주론 양자 모두 하향식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는 논리였다면,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굴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등장은 정치사회가 신의 뜻을 실현하는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민적인' 삶의 세계이며 시민/인민의 복지야말로 통치자의 의무라는 '상향식' 정치체제 이론을 출현시킨다. 십자군 운동과 같이 대중의 참여에 의지해야 했던 것, 속어 문헌의 등장 및 전파,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굴과 자연법 개념에의 의존 등은 인민주권의 목소리가 커지게 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대분열로 인해 교황권의 최종적인 정당성이 교황을 선출하는 공의회에 놓여 있다는 논지, 즉 공의회주의가 나오게 되며, 이는 아직 15세기 초반에는 본격적으로 싹을 틔울 때는 아니었으나 점차 명확한 헌정주의적 논리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울만은, 서두에서 언급했듯, 신정주의적 질서에서 헌정주의적 질서로 가는 역사적 서사의 와중에 중세의 정치사상에서 나온 개념들이 근대 정치사상과 얼마나 근본적인 유사성을 지녔는지를 지적한다. 예컨대 우리는 교황권이 전대 교황에게서 후대 교황에게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황 각자가 베드로의 권한을 위임받은 데서 만들어진, 개별 교황의 인격과 무관한 직책이라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교황의 정당성 및 권위는 신 및 베드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피통치자들에게 어떠한 책임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는 절대국가적, 주권 이데올로기의 원형이 이미 중세 초기에 만들어져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구도는 한편으로 스키너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세부사항에서부터 스키너의 주장을 뒤흔들어버릴 수 있다. 그것을 세부적으로 따져보는 일을 지금 할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 울만의 주장과 스키너의 주장이 충돌할 때를 생각해본다면 그것 역시 매우 흥미로울 듯 싶다. 어쨌든 울만의 텍스트는 중세를 바라보는 시각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종종 참고해야만 할 순간이 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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