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lley, "England in 1819"와 역사에 대한 단상

Intellectual History 2015. 11. 18. 02:11
요 며칠 셸리의 시에서 거의 초월적인 미래의 이미지와 화자의 수동성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유쌤과 드문드문 이야기를 하곤 한다. 매우 기괴하게 보이는 양자의 공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낭만주의 연구자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의 한국사회가 흘러가는 양상을 민감하게 지각해온 이들이라면 그와 같은 정신이 아주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리라. 한편으로는 바닥이 보이지 않은 심연과 같은 절망이, 다른 한편에는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열망이 있다. 무게추가 전자에 실릴수록 후자의 실체감은 희미해져서 종래에는 거의 억지와 같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서구의 정치-문학적 수사를 조금 가까이 들여다본다면, 거의 플라톤적이라고 할 수 있을 어떤 '실체를 갖춘 정신'이 역사를 인도한다는 논리 자체는 생각보다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고대적인 전통에서 비롯되는 "운"(fortuna)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의 능력과 인식으로는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우연 또는 (불가해한) 섭리가 인간사를 좌우한다는 믿음은 정치적 혼란기였던 15-16세기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진지하게 사용되었다. 마키아벨리에게서도 볼 수 있듯, 이러한 운수에게 호의를 얻어내거나 그것을 제압하고 극복하여 스스로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킬 수 있는 덕/역량(virtue)을 강조하는 논변에서조차도 운을 논외로 밀쳐둘 수는 없었다.대조적으로, 자신들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견지할 수 있었던 18세기 영국에서는--우리는 이 시기에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포함해 영국의 번영에 대해 찬탄하는 프랑스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섭리(providence)에 대한 강고한 믿음이 있다. 스미스의 예정조화적 믿음은 이 시공간 특유의 낙관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러한 믿음체계에서 섭리는 인격적 형상으로 묘사되기보다는(물론 상업이 변덕스러운 여성으로 묘사되는 전통이 있지만) 하나의 추상적인 질서에 가깝게 된다.

18세기 말-19세기 초의 극심한 혼란기에 "시대정신"이 사회를 섭리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때로 바닥에 한번쯤 처박기도 하는 주체 혹은 실체로 묘사되는 언어가 다시금 등장한다. 셸리의 시는 그 좋은 사례다. 좀 더 운이 좋았던 헤겔은 절대정신이 자신이 믿어온 바대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진 채로 눈을 감을 수 있었고(물론 그의 죽음 직후에 독일은 다시금 정치적 혼란기로 접어들며 헤겔 학파는 분열된다) 셸리는 반동의 세월이 마침내 끝나리라는 희망섞인 관찰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에 죽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헤겔의 "geist"는 친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같은 시기 영국인들에게도 "the spirit of the age"가 상당히 중요하게 사용된 표현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헤겔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정신이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소망을 초월하는 '객관적인' 실체로서 역사를 이끌어나간다는 사고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셸리의 텍스트에서 훨씬 더 창백하고 추상화된 형태로나마 마찬가지의 사고구조가 엿보인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Ode to the West Wind"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좀 더 명확히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셸리의 "a glorious phantom"의 추상성을 단순히 열등한 형태라고 비웃을 수는 없다. 시민계급으로서 대학에 자리를 잡고 관료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헤겔에 비교할 때, 정치적 급진파로서 갖가지 스캔들에 휘말려 영국을 떠나 고국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대표적으로 "피털루 학살"을 포함해--을 전해 들으면서 정치적 개혁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희망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셸리의 이미지가 보다 초월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정치적 진보/좌파들이 피부로 느끼는 현재의 상황은 헤겔의 독일보다는 셸리의 영국에 좀 더 가까우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수사가 그 자체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적어도 우리 중의 누군가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절망이 오늘날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불어오는 바람에 지치지 않고 귀를 기울이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받지 못했던 이를 떠올리고 그가 주시한 미래에 마찬가지로 눈길을 주는 경험은 우리 자신에게도 소중하다. 그러한 경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시간을 이해하는 언어를 가르쳐준다는 것, 그리고 그 언어가 다시금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Percy Bysshe Shelley, "England in 1819"

An old, mad, blind, despised, and dying King;
Princes, the dregs of their dull race, who flow
Through public scorn,—mud from a muddy spring;
Rulers who neither see nor feel nor know,
But leechlike to their fainting country cling
Till they drop, blind in blood, without a blow.
A people starved and stabbed in th' untilled field;
An army, whom liberticide and prey
Makes as a two-edged sword to all who wield;
Golden and sanguine laws which tempt and slay;
Religion Christless, Godless—a book sealed;
A senate, Time’s worst statute, unrepealed—
Are graves from which a glorious Phantom may
Burst, to illumine our tempestuou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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