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인권과 인권들>에 관하여: 수유너머N 화요토론회 발표문
Reading 2015. 8. 3. 01:12아래는 7월 28일 수유너머N 화요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원고를 약간 손본 글이다. 나는 그날 정정훈 선생의 <인권과 인권들>에 대한 토론자로 초빙되었고, 그때까지 내 시야에 없던 인권이라는 주제를 수박 겉핥기로나마 공부해야 했다. 여러가지로 준비가 미흡한 토론원고였지만--수정판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급하게 써서 문장이 마음에 안 드는 대목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토론 자체는 매우 진지했고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부분적으로는 정정훈 선생이 본인의 입장에서 쉽게 물러서는 토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권의 정의definition 문제 관련하여 정정훈 선생은 본인이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에 기초한 인권론을 견지한다고 답했는데, 나는 여전히 스피노자의 (공동체적) 역량 개념에서 인권이 도출된다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수긍이 가지 않지만, 이는 시간을 두고 이야기해볼 주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날의 토론을 계기로 9월부터 공화주의에 대한 세미나를 같이 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마도 (인권 개념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과 함께) 내 최대의 수확일 것이다.
발표를 시작하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정정훈 선생님의 저술에 대해 발표할 수 있는 자리를 갖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전에 다른 온라인 매체를 통해 『인권과 인권들』에 대해 짧은 서평을 발표한 적이 있고, 1 글에서 이 책이 그 주제와 접근방식 모두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흥미로운 이론적 시도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권과 인권들』이 일곡 유인호 학술상까지 수상한 지금 저의 감상을 되풀이한다면 이는 사족일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저는 이번 발표에서 보다 더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쟁점들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가능한 엄격하게 보려는 노력이야말로 중요한 지적 작업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임을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인권과 인권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인권의 위기와 인권의 역사를 정리하는 1, 2장, 인권 개념의 협소화를 비판하는 정치철학적 논의들과 그에 대한 반론을 소개하는 3, 4장,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를 통한 인권 개념의 재구성을 이야기하는 5, 6장입니다. 전체적인 서사가 전진하는 과정이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지닌다는 것은, 특히 한 권의 책 길이만큼의 서사를 구축할 수 있는 저자들이 드물어진 오늘날의 한국에서, 이 책의 분명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시 한 번 검토하면서, 그리고 인권에 대한 문헌들을 부족하게나마 훑어보면서 저는 이론적인 차원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바로 인권 개념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리는 작업이 가장 형식적인 차원에서조차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권 개념이 마치 “히드라”처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면, 그럴수록 이 개념을 규정하려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몇 번 언급되는 것처럼, 인권 ‘담론’에 대해 다룬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담론’의 차원이라고 해도 그 담론이 어떤 논리적 뼈대 위에서 배태되었으며 어떤 변이형들을 파생시켰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있어야 하는데, 『인권과 인권들』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 용어들로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를 곧바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권과 인권들』이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 위에서 나온 책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러한 정의가 없어도 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논의의 엄밀함을 위해서 개념에 대한 정의는 필수적입니다--특히 이론적인 작업을 시도한 저술이라면 말입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 정의 작업의 결여가 이 책의 근본적인 난점을 초래한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저는 전문적으로 역사가로서의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대상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는 사람이기에 인권의 역사를 다룬 2장이 가장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인권과 인권들』의 2장은 인권 개념의 역사를 1789년부터 1871년까지, 즉 파리 코뮌 봉기까지의 ‘장기 프랑스혁명’에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시기에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는 개념이 널리 주장되고 또 확산되었다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주장은 근대 유럽사상사에 흥미를 가진 독자에게 “인간은 신으로부터 생명권, 재산권, 행복추구권을 포함해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번역 발표자)고 먼저 밝혔던 미국독립선언서나 혁명 이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영국의 노예제 폐지운동을 부당하게 누락하는 게 아닌가 하는 즉각적인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의문지점은 프랑스 혁명=인간의 보편적 권리=인권의 시작이라는 구도의 한 가운데에 있는 보편적 권리이 그 자체로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갖는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스토아주의나 기독교 전통, 중세부터의 자연권 전통처럼 인간과 권리를 결부시키는 논리 자체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특히 법학적 전통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자연권과 자연법이라는 주제만으로도 중세부터 근대까지 서구 지성사를 설명하는 서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인권사가 새뮤얼 모인(Samuel Moyn)은 따라서 보편적 권리라는 개념의 존재 자체만으로는 오늘날의 인권운동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권 개념의 진정한 핵심은 인간의 권리가 국가 및 공동체에 의해서 보장받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유효성을 가진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2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은 여전히 ‘시민됨’을 통해 국가와의 관계를 강조했던 19세기 프랑스가 아니라 1970년대 미국의 국제적 인권운동에서부터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반드시 모인의 입장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인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기원과 단절 모두에서 아주 다양한 서사를 제시할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인권과 인권들』이 지금과 같이 ‘장기 프랑스혁명’과 인권의 역사를 결부시키고자 한다면, 그러한 설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인권 개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이 수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인권과 인권들』이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하기 어려운 듯 합니다. 설령 장기 프랑스혁명을 근대적 인권의 시발점으로 놓는데 동의한다고 해도, 모인의 설명에서 강조되듯, 197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인권담론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음에 대한--당연하지만 한국에서 인권 담론의 성장도 현대 미국으로부터의 영향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을텐데--역사적 설명이 있어야만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역사적인 주제에 좀 더 머무르는 걸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권과 인권들』은 1장에서 오늘날 한국 인권의 위기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시큐리티 통치”, 곧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및 시장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에 대한 철권통치라는 물질적인 변화, 인권 담론의 추상화 및 이데올로기화,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인권 감수성의 쇠퇴입니다. 저는 각각의 이유들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의 정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시큐리티 통치” 부분은 2차 대전 이후의 헤게모니 통치-포드주의 축적체제에서 출발해 1980년대부터의 신자유주의 발흥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97년 IMF 위기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말합니다. “인권 ‘담론’의 위기 부분”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1980년대 맑스주의적 변혁운동, 1990년대 이후 “포스트담론”을 거치며 인권이 보편담론으로서의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가장 취약한 부분일 “공감 혹은 인권감성의 쇠퇴” 부분에서는 18세기 서구 문학장에서 출발해 갑작스럽게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한국 사회의 공감 능력이 쇠퇴했다는 진술로 넘어갑니다. 이처럼 명백하게 이질적인 시공간들을 끌어오는 설명들이 어떠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불투명합니다. 저는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인권의 위기가 나타난다는 주장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 가지 계기에 대한 『인권과 인권들』의 서술이 정정훈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한 종합적인 정세인식을 충분히 보여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는 인권 개념의 위기라는 다소 추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대신 현대 한국사회, 혹은 범위를 좁혀서 현대 한국 담론장에서의 변화를 설명하는 작업을 함께 했다면 독자들에게 더 구체적인 이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예컨대 인권 담론의 위기는 단순히 인권 이론의 복잡화나 인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능력이 쇠퇴했다는 걸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인권 담론을 대체하려는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출현했음 또한 의미합니다. 최근의 사례를 하나만 꼽아보겠습니다. 내전 중인 국가로부터 탈출해 온 난민들을 단호하게 거절한 호주 정부의 냉담함을 언급한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난민들을 마치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정부/공동체에 대한 무임승차자로 간주하면서 한국의 “불법체류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인권운동이 ‘인간은 그가 어떠한 공동체, 사회, 국가에 속해있든 특정한 권리를 가진다’는 명제에 기반 한다면, 이러한 댓글에서 나타나는 태도는 공동체적인 정체성 및 이해관계가 인간의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인식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필수적인 설명들을 뛰어넘어 곧바로 결론으로 도약한다면, 특히나 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긴장관계를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는 200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담론이 번성하고 있음을 직시하게 됩니다. 최근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여부를 둘러싼 구도에서 심지어 EU라는 광역공동체 내부에서조차도 국가적 이해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남을 볼 수 있죠. 저는 매우 거칠게 말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단순히 공감을 폐기한다기보다는 공감이 향하는 대상과 그 공감의 성격을 재편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배타적 민족 혹은 국가주의는 그와 같은 감정구조 재편의 일면으로서 인간에 대한 공감을 국가적 이해관계에 대한 공감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인권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처럼 감정구조 및 정체성의 재구축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으로 『인권과 인권들』의 이론적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두 번째 및 세 번째 부분은 인권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 및 반비판을 다루고 대안적인 주체이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이론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역사적인 설명에서 1970년대 이후 미국의 맥락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이의를 제기했는데, 저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국제법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서, 법과 권리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 그리고 롤스와 노직과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다루지 않고 인권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를 충실하게 전개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3 공동체주의자들이나 비판이론, 포스트담론을 포함한 20세기 후반의 주요한 정치철학적 흐름들은 자유주의적 성격을 공유하거나 그것을 비판하면서 전개되었으며, 3장에서 맑스, 아렌트, 아감벤, 바디우의 논의가 인권비판론으로 호출되는 것 자체가 20세기 후반 번성기를 누린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무관하지 않음은 명백합니다. 『인권과 인권들』을 보고 인권 개념에 대한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인권 개념의 번성과 깊게 결부된 자유주의의 문제, 그리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키워드였던 법과 권리의 문제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누락된 것과 인권 개념에 대한 규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서로 깊게 연관을 맺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요약하자면, 『인권과 인권들』은 인권 담론의 핵심에 대한 설명 없이 (앞서 지적했듯 『인권과 인권들』의 역사적 설명은 인권 개념을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비판에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자유주의적 전통 내에서 이뤄진 20세기의 광범위한 논의들을 소화한 독자라면 이러한 비판을 강도 높게 진행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이 책이 4장에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를 인용하며 인간의 정치적 주체성을 포함하는 비판적 인권 개념을, 5장에서 스피노자를 통해 윤리적 주체론을 제시하고 6장에서 발리바르와 데리다를 가져오며 무한한 정의로서의 인권과 (인권의 실현물로서) 국가/제도와의 관계를 논하는 과정이 인권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과도하게 생략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작업은 한편으로 인권을 (부르주아적) 재산권으로 축소시켜 이해하는 흐름과 다른 한 편으로 인권의 무용함을 성급하게 결론짓는 회의주의 양자를 비판하면서 보편적 정의이자 공화주의를 연상케 하는 공민적 덕으로서 인권을 재정초하려는 저자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다만, 물론 대학의 교실과 대중담론 사이의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고려해야겠지만, 이미 사회권, 연대권과 같은 키워드로 대표되는 2세대, 3세대 인권에 대한 논의가 교과서에도 실린 시점에서 그러한 논의가 생략된 것은 좀 의아합니다. 이러한 논의는 그 자체로 현존하는 가장 주요한 인권담론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그것이 있을 때에만 5장과 같은 주체론이 왜 필요한지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2세대, 3세대 인권과 같이 이미 개인의 권리로부터 출발해 사회와 제도로 나아가는 흐름이 가능하다면, 스피노자를 통해 개인/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구축하는 작업이 전자와 어떤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보편적 정의”로서 인권을 이야기할 때, 저는 이것이 인권이 어떻게 제도적 실현의 지향점이 되는가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보편성이 어떤 논리를 통해 구성되는지에 대한 고찰 또한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인권 개념은 그 자체로 인간과 권리라는 두 항의 결합체이기도 합니다. 이 두 항에는 각각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물음과 권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따라붙는데, 저는 이때 권리라는 형식 자체가 특정한 가치의 형식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즉 국가, 공동체, 자연법과 같이 인간 외부에 있는 지평에의 준수가 아니라 인격에 귀속된 권리, 즉 개인이 소유하는 권리로부터 당위가 출현한다는 사고 말입니다. 4 『인권과 인권들』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주체론을 통해서 비교적 분명하게 다루려고 했다면, 개인, 권리, 법과 같은 주제들에 내포된 형식의 문제는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되긴 하지만 충분히 명확하게 다뤄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불)가능한 권리로서의 인권, 보편적 정의로서의 인권이 언급될 때, 우리는 개개인의 최소한의 방어벽처럼 주어졌던 인권이 어느새 적극적인 당위로, 최종적인 정의의 심급으로, 혹은 모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후의 유토피아”로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양면성이야말로 현대 인권 개념 혹은 현대 정치사상의 역사적으로 독특한 면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그러한 성격에 대해 곧바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으며,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권리를 문자 그대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개별 민족국가 및 특수한 공동체를 넘어선 지점까지도 사고해야 하며, 그때 국가나 제도의 심급 이상의 매개물 역시 떠올려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 연구집단 카이로스 웹진(http://cairos.tistory.com/304) 참조. [본문으로]
- Moyn, Samuel. The Last Utopia: Human Rights in History. Cambridge, Mas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P, 2010. 특히 1장 참조. [본문으로]
- 물론 앞서 언급한 모인은 1970년대 개인의 자연권(individual natural right)이 여전히 국가 및 공동체와의 연관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국제적 인권운동과 다른 계보에 있음을 강조한다(에필로그 및 특히 롤스를 언급하는 214-16 참조). 그러나 인권 ‘담론’ 전반의 번성에 자연권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가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 자연권의 역사에서 본래 권리와 소유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이었음은 리처드 턱(Richard Tuck)의 『자연권의 이론들: 그 기원과 발전』(Natural Rights Theories: their Origin and Development Cambridge: Cambridge UP, 1978) 5쪽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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