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통. <아만자>.

Reading 2015. 7. 5. 00:01

웹툰 연재처: https://webtoon.olleh.com/toon/timesList.kt?webtoonseq=34


김보통의 <아만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스물 일곱 때 나는 입대를 했다. 당연히 장교로 갈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떨어졌다. 이왕 떨어진 김에 좀 더 쉬는 시간을 가졌어도 좋았겠지만 흔들리기 싫었다. 최대한 빠른 날짜에 아무 요구조건도 없는 육군병사로 입대신청을 했다. 장교로 가서 여유있게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박사입학시험도 치지 않고 논문을 썼는데 정말 무적자無籍者가 되어버렸다. 선배가 대학로에 있던 빈 집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서울에 머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학부도, 석사도 쉬지 않고 다니다가 갑자기 군대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하나의 생이 끝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등병의 편지>를 자세히 들어보면 죽음의 자취가 묻어 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입대 전 주까지 사람을 만나고, 세미나를 하고, 수업을 들었다. 실제로 죽음을 통보받아도 그렇게 했을 것처럼 말이다.


친구들이 먼저 군대 갔을 때 나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잘,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내가 없는 세상 역시 특별한 문제 없이 잘 돌아갈 것임을 알았다. 담담히 받아들였지만 맘에 들지는 않았다. 잊혀지는 것,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일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지도교수님이 환송회를 열어주셨다. 맥주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라주셨고, 나는 늘 그렇듯이 제가 술을 못 마셔서...라고 답했다. 우울증 환자인 나도 제자 환송회라고 먹는다, 라고 환갑이 내일 모레인 할머니 선생님이 말했다. 논문 기간 동안 속을 썩인 제자는 군말없이 마셨다. 머리를 빡빡 깎은 사진을 보냈을 때 사랑하던 사람은 의외로 그럴싸해서 아쉽다고 평했다. 환송회 일정을 마치고 차츰차츰 연락을 줄였다. 총선 직전, 세상은 고조되어 있었고 반비례하듯 손전화는 조용해졌다.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선거 결과를 보고 들어갔겠지만--결론적으로 좀 더 비관적인 기분으로 입대했겠지만--정해진 일시를 바꿀 수는 없었다. 열기를 뒤로 하고 의정부로 가는 차를 탔다. 가는 차 안에서 오기로라도 논문을 잡았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스물 일곱과 죽음에 대해서라면 그때의 기억이 우선 떠오른다. 그때의 구체적인 행적을 옮기기는 어렵지 않으나 그때의 착 가라앉은 착잡한 마음을 적기는 어렵다. 세상살이를 접고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것과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아주 많은 단어를 꺼낸다고 해도 마음에 드는 딱 하나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비슷한 곤경에 처하지 않을까 싶다.




김보통의 웹툰은 그 또래의 젋은이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뒤의 이야기다.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다시 더듬을 것이고, 그런 경험이 없는 이라면 미래를 한번쯤 그려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경험에 속한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서사를 만들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끝을 강요하고 또 상기시킨다. 죽음과 죽음으로 완성되는 서사는 분명 인간 일반의 조건이다. 그 조건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김보통은 그러한 고민을 담은 서사=삶을 만든다. 근본적인 주제를 다룰 때 종종 주제 자체가 너무 도식적으로 내밀어져서 서사를 단순한 외피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임을 감안한다면, 김보통의 데뷔작은 확실히 추상적인 주제를 다룰 때 생기는 위험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있다.


<아만자>를 읽으며 오래 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렸다. 두 작품 모두 미니멀하게 세부를 포착하고 그것을 건조하게 그리고 있으나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무라카미의 주인공은, 내 기억이 맞다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거리처럼 영원히 줄어들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세계에 머무른다--그 시대, 포스트모던한 일본사회에 어울리는 이야기다. 3인칭처럼 보이던 것은 결국 독백으로 끝난다. 김보통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뒤이어 자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만나고, '나'이자 '우리'로서 있다. 그는 눈을 뜨고, 누군가가 눈을 감겨준다. 죽음 앞에서 언어는 독백으로 남아있지 않다. 언어는 불분명한 형태로나마 입을 떠나 물질성/객관성을 획득한다. 심지어 환상의 세계에 머무는 순간에조차도 <아만자>의 세계는 현실의 지반 위에 있다. 무라카미가 일종의 초월적인 미학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김보통은 그 현실이 단지 하드하고 드라이한 것만이 아니라 좀 더 여러 겹의 경험들이 맞닿아 쌓여 만들어진 것임을 본다. 2010년 중반의 한국을 부인할 수 없는 고유명으로 갖고 있는 나는 <아만자>를 좀 더 가깝게 느낀다.


마찬가지로 죽음과 닿아 있는 매우 미국--그것도 최근의 미국--적인 영화 <50/50> 같은 작품의 서사와 비교해 볼 때, 나는 <아만자>의 평범하다면 평범한 결말에서 깊이를 가진 무언가가 쌓여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웹툰 기법의 숙달에서 오는 산물이라기보다는 삶을 다루는 감각의 산물이다. <D.P:개의 날> 같은 후속작을 볼 때 김보통은 단지 독특할 뿐만 아니라 독특함을 일반적인 것들과 연결하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아만자>의 미니멀한 스타일과도 함께 맞닿아 있다. 요점을 먼저 말한다면 미니멀한 것에서 어떻게 세계를, 공동체를, 전통을 포착할 수 있느냐가 <아만자>의 핵심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으로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아만자>는--1화, 50화, 100화를 보면 김보통이 연재를 하면서 점차 그림이 잡혀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아주 미세한 지점의 변화까지 포착하는 시선으로 그림기법상의 평이함을 극복하는 고유의 스타일을 만든다(시선의 위치가 고정된 편이기 때문에, 스크롤을 빨리 내리는 독자라면 거의 초보적인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다). '숲'에서의 모험을 그릴 때 김보통의 시야가 풍경을 훨씬 넓게 포착한다면, 대조적으로 현실에서의 투병을 그릴 때 시야는 대체로 훨씬 협소한 실내 공간 안쪽으로 국한되며 신체의 움직임도 줄어든다. 그를 보완하기라도 하듯  <아만자>의 주인공은 그러한 아주 미세한 움직임에서 출발해 자기 자신의 서사를 완성하고 마침내 그 서사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독자들은 미시적인 표현들의 이어짐 끝에 어느 순간 문득 지금까지 지극히 절제된 형태로만 표현되었던 세계의 감각과 맞닿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이는 때때로 이 웹툰이 독자의 정념을 갑자기 폭발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프롤로그와 108화를 비교해서 본다면, 후자의 시간/공간/인물관계의 확장이 두드러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김보통이 죽음과 죽음으로서 완성되는 서사=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바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현대 한국의 시공간 자체에 대해서도 말이다. '리얼리즘'을 조금 넓은 의미로 쓸 수 있다면, 김보통의 작품은 확실히 이 시공간의 어떤 독특한 현실을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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