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 <진리와 방법>. 서론 읽고 인용 및 방법에 대한 단상.

Reading 2015. 8. 14. 03:46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전2권. 이길우 등역. 개정판. 문학동네, 2012. Trans. of _Wahrheit und Methode: 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_ by Hans-Georg Gadamer, 1960. [국역본은 1990년 제6판 번역]


서론에서 인용.


"이 연구의 관심사는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을 도처에서 찾아내어 그 고유한 정당성에 관해 물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학은 과학 외적인 경험 방식들, 즉 철학의 경험, 예술의 경험 그리고 역사 자체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과학의 방법적 수단으로는 검증될 수 없는 진리가 개현되는 경험 방식들이다."(10)


"철학의 역사적 전승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해를 일종의 탁월한 경험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 경험은 철학사 연구에서 특징적인 역사적 방법이 가상schein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게 해준다. 철학 사상의 거장들이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려 할 경우 동시대의 의식이 거부할 수도, 능가할 수도 없는 어떤 진리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기본 경험에 속한다."


"우리는 저 위대한 사상가들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다른 길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11)


"이것은 예술의 경험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이른바 예술학이 수행하는 학문적 연구는 자신이 예술의 경험을 대신하거나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예술작품에서 경험한다는 사실은 모든 이성적 논고에 맞서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형성한다. 이렇게 철학의 경험과 더불어 예술의 경험은 과학적 의식을 향해 자신의 한계를 시인하라고 하는 가장 강력한 경고가 된다."


"그러나 이 연구는 예술의 진리를 변호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우리의 해석학적 경험 전체에 상응하는 인식 및 진리의 개념을 전개하려고 한다."


"정신과학의 그 모든 형태에서 우리의 역사적 전승은 사실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 그 자신의 진리에서 말을 한다. [...] 역사적 전승은 언제나 진리를 매개하며, 중요한 것은 이 진리에 관여하는 것이다."(11-12)


"만일 우리가 역사적 변천의 그러한 과대평가에 직면하여 자연의 영원불변한 질서를 근거로 내세우고자 인간의 자연성에 호소하여 자연법 사상을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지나친 자극의 결과이며, 내가 보기에 대단히 잘못된 추론이다. 역사적 전슬과 자연적 생활질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세계의 통일성을 형성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경험하고, 역사적 전승을 경험하며, 우리의 실존 및 세계의 자연적 소여를 경험하는가 하는 것은 진정한 해석학적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 안에 있는 것처럼 이 세계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13)


"정신과학에서 추구되는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진리에 명백히 구속력을 가지는 전승으로부터 벗어나 반성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성찰은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방식을 위해 가능한 한 역사적 자기 명료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철학적 사유가 전개되는 개념의 세계는 오히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언어가 우리를 규정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항상 우리를 이미 사로잡고 있다. 따라서 이 사로잡혀 있음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사유의 철저성에 속한다. 역사의식의 성립 이후 모든 책임있는 철학적 사유가 반드시 동반하는 의식, 그리고 개개인이 자신의 공동세계와의 대화 과정에서 습득하는 언어 및 사유 관습을 우리 모두가 함께 속한 역사적 전통의 광장으로 끌어들이는 의식,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비판적 의식이다."(14)


: 변덕스러운 마음에 펼쳐 읽다가 마음에 들어와 옮긴다. 가다머는 여기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고유한 진리의 경험이 있고 이것이 "이해"를 통해서만 접근가능함을 주장한 뒤, 이러한 이해과정의 토대로 공동체 혹은 세계가 제공한 역사적 전승을 제시한다. 곧 앞서의 고유한 진리경험은 역사적으로 매개된 주체로서의 자아가 갖는 특수성에 대한 앎을 기초로 해서만이 이해될 수 있다.


 물론 가다머의 스승이기도 했던 하이데거를 위시로 한 현상학-해석학 계보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정작 그 전통과 거리를 두고 있는 나로선 세 가지 다른 전통을 떠올린다. 우선적으로 찰스 테일러는 직접적으로 가다머 및 하이데서의 해석학 전통을 참고한다. <헤겔>부터 <자아의 원천들>까지 자연과학적 방법에 대항하여 서구 정신사의 해석에서 나름의 철학적 해석학을 수립하는 것은 테일러의 일관된 목표였고, 하이데거는 헤겔 및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지적 자양분에 속한다. 위의 인용에서 언어 및 정체성의 형성에서 공동체의 본질적 성격을 강조하는 대목은 테일러의 공동체주의적 서술이라고 해도 크게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내가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지적 전통은 흥미롭게도 독일 역사주의 전통이다. 나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를 조금 접했을 뿐이지만, 공동체 및 역사적 의식의 연계,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자연법과 대치시키는 대목에서 민족/국가이성과 세계시민주의/자연법을 대치시키는 마이네케의 익숙한 도식과 유사한 무언가를 보지 않기는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하이데거와 마이네케가 나치에 대한 대립되는 행보에도 불구하고 독일 민족의 고유성에 대한 고찰에서 유사한 흥미를 갖고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index를 참고하면 <진리와 방법>은 역사주의에 대해 꽤 빈번히--종종 비판적으로--언급하는데, 그 상세한 내용은 직접 읽으면서 점검할 일이다.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비판이론이 역사와 맺는 관계는, 그것이 역사적 경험의 매개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에 대해 가열차게 비판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흥미롭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하이데거적 현상학은 우리가 속한 역사의 근본적인 범주들 또한 그 자체로 매개된 것임을 망각했기에 순진하다는 비판을 받는다(아도르노의 비판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는 차치해두자). 모든 것이 매개되어 있음을, 따라서 모든 것이 비판적으로 반성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아도르노에게 가다머의 해석학은 어떻게 인식되었을 것인가? 유사한 맥락에서 하버마스가 가다머에게 강력하게 비판을 가했지만, 아도르노 역시 초기 강연 <철학의 시의성>에서 노년의 라디오 강연 <왜 철학인가?>에 이르기까지 개별적인 사실/현상들의 연관관계/성좌에서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 "해석"하는 작업을 고유의 진리탐구방식으로 고수했음을 감안한다면 하버마스의 입장을 곧바로 아도르노의 것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울 듯 하다.


 자연과학과의 충돌 속에서 고유의 방법적 토대를 정초하려는 시도는 우리의 사고에 근본적인 주춧돌을 놓는다. 그러나 한국의 인문과학 중 이러한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곳은 오늘날 매우 드물다. 아직 우리의 "정신과학"은 타자와 만나지 않았기에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를, 전문적인 사고를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수업을 열게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순수하게 학문의 역사와 방법론이라는 주제로만 한 학기 수업을 열어보고 싶다. 지금 나 자신을 위한 지적 수업이 그때의 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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