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감독. <위로공단>
Reading 2015. 8. 18. 02:48임흥순 감독. <위로공단>(_Factory Complex_). 반달 제작, 2014.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작]
오랜만에 극장에서 직접 영화를 볼 기회가 왔고, <위로공단>을 보았다. 광복절을 전후해서 <암살>에 대한 코멘트들을 SNS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암살>을 보지 않았고 아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볼 일이 없기에 두 영화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면, 오늘날 한국이 어떤 사회였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고 숙고하는 데 더 중요한 텍스트로 단연코 <위로공단>을 추천하고 싶다는 것이다. 임흥순의 영화가 더 재미있고, 시간이 잘 가고, 화려하고, 무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의 작품에는 지워질 수 없는 피와 눈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위로공단>은 한국 현대의 여성노동자 및 여성노동운동을 다룬다. 1970년대 동일방직, 평화시장, 1980년대 대우어패럴(구로동맹파업)부터 시작해서 기륭전자(현 렉스에이앤지), 삼성반도체, 한진중공업, 이랜드 홈에버, 120 다산콜센터, 항공승무원, 이주노동자, 캄보디아 노동절 시위 폭력진압 사태에 이르기까지 노동문제에 아주 약간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스쳐지나듯이라도 들어보았을 사건들이 22명의 당사자 인터뷰를 통해 담담히 시간순으로 나열된다. 인터뷰를 보는 이들은 그 과정에서 한국 '근대화과정'의 거의 모든 순간에 여성노동자들이 있었음을, 우리의 찬란한 근대세계가 그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져고 또 지금도 그러함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그 이면에는 여성노동에 대한 착취가, 착취를 유지시키는 가혹한 규율이, 인간을 자원이자 이익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권력이, 동시에 그에 맞선 저항과 분노의 운동이 있어왔다는 사실 역시도. <위로공단>은 성공한 자본가들의, 남성들의 역사에 덮인 또 다른 역사로 우리의 근대를 재구성하며, 이러한 시선은 <국제시장>과 같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서사의 편협함을 일깨운다.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인터뷰이들은 하나 같이 구속경력을 달고 있다. 한진중공업 사태 때 크레인에 올라갔던 김진숙 전 위원장에게 씌워진 갖가지 소송들은 또 얼마일까. 한국에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삶--어쩌면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의 부조리함은 특별히 복잡한 편집과 설득과정 없이도 너무나 쉽게 드러난다. 사실이 스스로의 참됨을 입증하기 위해 특별한 기예가 필요할 일은 없다. 단지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위로공단>은 바로 이 작업을 수행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길게 이야기하는 사람일 김진숙 전 위원장은 갖가지 일들을 해보았던 과거를 추억하면서,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노동자가 된 것도, 대학을 갈 수 없었던 것도, 크레인에 올랐던 것도, 그 이후도. 그러나 그의 나직한 토로 이면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실재한다. 똥물이, 경찰력이, 용역이, 소송이, 판검사들이 제 아무리 그 목소리를 잠재우고 싶어한다 할지라도 지워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근대 예술의 임무 중 하나가 고통의 경험과 그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을 기억하는 일에, 그렇게 세계의 비참과 모순을, 그 유동성을 기록하는 데 있다면, <위로공단>은 그 임무에 접근해 있다. 리얼리즘의 쇠퇴를 한탄하는 이가 있다면 이 영화를 보라.
<위로공단>의 '공단'이 노동-착취-저항의 기록이라면, '위로'는 그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위안이기도 하다. 차분하게 진행되지만 분노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하는 인터뷰들 사이에 임흥순은 언어가 배제된 정적인 이미지들을 배치한다. 눈을 가린 소녀들이, 젊은 여성들이, 할머니들은 아무 말 없이 자연을, 숲 속을, 근교의 산책로를 함께 걸어간다. 그 이미지들은 한편으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우리의 감정을 다독거리면서도 동시에 그 감정이 순간의 폭발로 잊혀지지 않도록 선(線)적인 지속력을 갖게 한다. 이미지는 감정에 말을 걸고 또 그 감정을 보존한다. 착취와 투쟁의 기록이 그 자체로 한국사를 구성하는--오늘날 국가주의 우파들이 어떻게든 지워버리고 싶어하는--굵은 서사라면, 어디론가 함께 걸어가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그 서사에 내재된 날 것의 정념을 명주실로 휘감아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는 듯 하다. 그것이 실제로 위안으로 다가갈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다큐멘터리 장르가 미적인 이미지와 결합할 때 어떤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의 질문 역시도 나는 아직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투명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불쑥 내밀어진 미적인 위안이 이 영화의 성격에 독특함을 부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위로공단>은 김민기의 <야근>으로 시작해서 <희망가>로 끝난다. 크레딧과 함께 <희망가>가 나올 때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고, 그 순간 이후로 다시는 이 노래를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들을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앞에서라면, 희망을 쉽사리 이야기할 수 없다며 입을 다문 세상 쪽이야말로 나이브할 것이다. 비참은 비참으로 끝나지 않는다. <위로공단>이 담아낸 기록의 가치를 함부로 낮추는 걸로 오해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영화는 분명히 기록 이상의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오로지 예술만이 말할 수 있는 진실, 응고된 사실을 초월하는 진실이 있다는 미학의 오래된 신념을 입증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말을 잃고, 그 다음 어떤 말을, 행위를 해야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 만사가 춘몽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부귀와 영화를 누릴지라도 봄동산 위에 꿈과 같고
백년 장수를 할지라도 아침에 안개로다.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 만사를 잃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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