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람. <자꾸 생각나> (웹툰)
Reading 2015. 9. 13. 03:38레진 코믹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읽을만한 작품을 하나 더 찾았다. 송아람의 총 25화 길이의 장편 <자꾸 생각나>인데,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을 탄 작품인듯 하다. 원래 단편 <대구의 밤>의 제목에 이끌렸다가 이어서 보기 시작했다--두 작품 모두 레진에 2014년에 연재되었다. 부드럽고 뭉툭하지만 개성적인 그림체와 복잡한 속내를 미묘하게 잘 포착해내는 대화구성 솜씨가 무척 인상적이다. 나 자신이 기본적으로 19세기 영소설 정전을 베이스로 훈련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대화를 정말 잘 짜는 작품을 읽으면 좀 더 깊게 음미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웹툰에 진입한 작가들 중에서 이 정도로 대화를 잘 짜는 인물은 손꼽을 정도다--스타일도, 감성도 상당히 다르지만 <치즈 인 더 트랩>에서 종종 주목할 만한 대화 장면이 나오긴 했는데, <자꾸 생각나>가 좀 더 리얼리스틱한 터치가 강하다. 인물들을 점차 옥죄어 오는 현실의 압박을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으면서 자신이 그러한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적어도 당장은 인정할 수 없는 '부족한' 혹은 '현실적인' 인물들이 나온다(나는 한국 현대소설의 연대기를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에 90년대 소설을 연상시킨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자신이 없다). 누구도 이 세계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부족함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며, 그런 면에서 송아람의 두 작품은 모두 철저히 "인간의 세계"를 그린다(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예를 들어 마사토끼는 송아람과는 정 반대의 포지션에 있다). 송아람은 인물의 표층적으로는 찌질할 수밖에 없는 언행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복수의 원인들을 포착하고 이를 조용히 텍스트의 곳곳에 배치한다; 인간의, 현실의 복잡함 자체를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오로지 한심한 인간들과 짜증나는 상황만을 볼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삶을 쉽게 부인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 이들에게 <자꾸 생각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씁쓸하게 맛볼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곱씹어보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겠다.
아마도 예술가들의 찌질함과 갖가지 욕망의 굴레를 다룬다는 점에서일듯 한데, 레진 편집부는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과 이 작품을 빗댄다. 그러나 내 생각에 <자꾸 생각나>를 홍상수의 영화와 비교한다면 <첩첩산중>이나 <우리 선희>와 같은 보다 최근의 작품이 좀 더 가까울 듯 싶다. 송아람은 자신의 인물들에게 단순히 냉소적이지 않으며, 특히나 주인공 장미래를 그리는 대목에는 분명 응원의 심정이 아주 약간이나마 들어가 있다--홍상수의 근작들이 여성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말이다. 한국의 웹툰 시장이 계속해서 확장기에 들어서면서 단순히 폭력과 성의 표현을 넘어 텍스트에서 표현하는 인간심리의 층위에서 보다 경험많은 독자들을 위한--관습적인 표현으로 "성숙한"mature 독자들--작품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다음에서 연재하는 윤필이 그 드문 사례에 속할 것이다). 한국의 웹툰이 한편으로 영화와 애니메이션, 장르소설의 연출 및 서사기법을 흡수하면서 성장해왔다면, 그에 비할 때 아직 매우 미소한 흐름에 불과하지만 점차적으로 이른바 "본격소설" 혹은 "고급문학"으로 불리어 오던 장르 취향을 받아들인 작품들 또한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대구의 밤>과 <자꾸 생각나>는 소설 텍스트로 바꾸어도 특별히 위화감이 없다; 후자의 남자 주인공 최도일이 미술 전공이 아닌 국문과 출신이며 그가 장미래에게 이야기하는 예술가적 원칙이 '자신의 내면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이며 이때 글쓰기가 내적 표현을 위한 표현양식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미학적 주제에 익숙한 독자들의 눈을 피해가기 어렵다. 웹툰이라는 장르가 시각적인 표현기법으로서만이 아니라 서사와 심리, 미학적 층위에서도 그 폭을 넓혀가면서 다른 예술의 양식들을 소화하고 활용하는 과정은 자체로 무척 흥미롭고 기대되는 일이다. 나는 한 명의 독자이자 연구자로서 이러한 흐름을 환영하며, 이후에도 송아람과 같은 작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또 살아남기를, 그리고 어쩌면 한국의 소설장르가 멈추어 버린 듯하게 남아있는 지점에서 자신의 행보를 이어가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http://www.lezhin.com/comic/miss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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