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베테랑>. 단평.

Reading 2015. 10. 11. 21:05

류승완 감독. <베테랑>. 외유내강 제작, CJ엔터테인먼트 배급, 2015.


<베테랑>을 보았다. 이제 흥행 후반부니 상영직전 현장발권해도 되겠지 싶었다가 매진이라 다른 상영관을 찾아야만 했다. <국제시장>을 제외하고 소위 천만관객 영화들을 거의 보지 않았는데, <베테랑>도 <국제시장>처럼 생각보다 나이 든 관객들의 비중이 컸다. 천만이라는 (비정상적인) 수치의 관객동원이 가능하려면 확실히 중장년 및 노년관객을 끌어오기 위한 전략적인 편집이 뒷받침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좋고 싫음을 떠나 <베테랑>은 클리셰들의 조합물이다. 플롯은 대체로 예측을 벗어나지 않으며 개그신은, <국제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감상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관객들이 부담없이 웃을 수 있도록, 한 마디로 진부하게 짜여졌다. 인물설정은 가장 빈약한 지점이다. 황정민은 '황정민 캐릭터'를 연기하며(한 20년쯤 지나 2010년대에 황정민이 주연한 영화들만 묶어서 패키지를 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시나 <국제시장>에서 황정민과 콤비로 등장했던 오달수도, 유해진도, 심지어 엑스트라에 가까운 마동석까지 포함해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기 보다는 대중적으로 친숙해져 있는 기존의 이미지를 되풀이해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악역 조태오(유아인 분)는 '재벌 악역'의 클리셰적 설정--마약, 성, 폭력, 비열함, 뒷공작--를 집적한 인물에 가까워서 뒤로 가면 갈수록 인물이 아니라 종이인형을 보는 기분이 든다. 물론 유아인은 매력적이지만 그 매력이 인물의 피상성을 온전히 덮을 수는 없다. 재벌과 친구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실제로 저 정도까지 공허한 삶을 사는지는 모르겠지만(물론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로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내가 류승완의 영화를 그다지 많이 챙겨보지는 않았기에(<피도 눈물도 없이>, <다찌마와 리>[단편], <짝패>, <부당거래>, <베테랑>) 그의 감독으로서의 개성에 대해 유의미한 코멘트를 하기는 어렵지만, <짝패>-<부당거래>-<베테랑>의 세 편만 놓고 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개성이 흐릿해진다는 인상을 받는다. <부당거래>를 보면서 감독보다는 오히려 각본의 힘이 더 강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베테랑>은 몇몇 액션 신과 (뼈대의 앙상함을 메워주는) 디테일을 제외하고는 '감독의 영화'라기보다는 산업적 제작물에 가까워보인다. 그래서 실제로 이 영화와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는 작품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다소 다른 지향점을 보여주는 <국제시장>이다. 한 순간도 쉴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자극을 공급하는 전개, 주기적으로 배치되는 유머, 유머의 코드, 동일한 액션신을 각도만 바꿔 다시 보여주는 것, 가족주의적 감상성, "내 식구는 책임지는" 가부장적 윤리에 대한 의존에 이르기까지 즉석에서 목록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그리고 영화를 면밀하게 뜯어본다면 이 목록은 더 길어질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강조하자면, 나는 <베테랑>이 <국제시장>을 모방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03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천만관객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천만관객을 달성한 총 13편의 한국영화 중 2012년 이후 개봉한 영화가 8편이다. 대형 배급사에 의한 상영관 독과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국의 대중영화 편집자들이 한국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는 패턴화된 공략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우리는 편집자들이 달라붙어 가령 몇 분에 한 번 개그신이 나오고 속도감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거의 공식에 맞추어 영화를 조정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어떤 이야기든 볼 만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할리우드의 각본가들처럼 말이다). <베테랑>은 그 공략법을 성공적으로 적응한 케이스다--그리고 우리는 감독이 류승완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특별히 다른 인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졸지 않고 봤다(같이 본 지인은 중간에 잤다). 나는 SK계열사 대표가 화물연대 소속 노동자를 야구배트로 구타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고, 항소심에서 사법부가 그를 집행유예로 풀어준 기사도 읽었다--다음 링크들을 참조하라(https://namu.wiki/w/재벌%202세%20야구방망이%20구타사건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6063.html /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11035.html). 서도철(황정민 분)과 같은 형사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아마 픽션에 가까울 것이며, 부하직원의 부상을 보고 인사청탁압력을 거부하기로 마음먹는 상관은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억지스러운 설정이다. 그러나 그 허구가 더 크게 느껴질수록 그것이 덮지 못하는 현실의 암울함도 더 부인할 수 없게 다가온다. <베테랑>이 지극히 도식적으로 묘사하는 권력과 부패가 오로지 허구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유감스럽지만 지극히 순진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세계는 <베테랑>의 세계보다 더 비관적인 경로로 흘러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베테랑>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현실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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